신안선과 카라벨 거북선의 관계
命試倭船. 命代言柳思訥 將本國兵船 與平道全所造倭船 較其疾徐于漢江. 思訥復命曰 順流而下 則兵船不及倭船三十步或四十步 逆流則幾百步矣. 명하여 왜선(倭船)을 시험하게 하였다. 대언(승지) 유사눌(柳思訥)에게 명하여 본국의 병선(兵船)과 평도전(平道全)이 만든 왜선을 한강에서 그 빠르고 느림을 비교하여 보게 하였더니 유사눌이 복명하였다.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 병선이 왜선보다 뒤지기를 30보(步) 혹은 40보나 하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몇 백 보나 뒤졌습니다. -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1413) 1월 14일 갑오
上曰姑從之 世子喜形於色 上過臨津渡 觀龜船 倭船相戰之狀 임금이 잠시 동안만 따르라 하니, 세자가 안색이 기쁜 빛을 띠었다. 임금이 임진도(臨津渡)를 지나다가 귀선(龜船)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 -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1413) 2월 5일 갑인
其六, 龜船之法, 衝突衆敵, 而敵不能害, 可謂決勝之良策. 更令堅巧造作, 以備戰勝之具. 愼時知兵曹. 上覽之, 下兵曹. 여섯째는, 귀선(龜船)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 탁신(卓愼)이 이때에 병조(兵曹)를 맡았는데 임금이 보고 병조에 내렸다. -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1415) 7월 16일 신해
1592년 2월 8일. 맑았으나, 또 큰 바람이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했다. 이날 귀선( 龜船)의 돛으로 쓸 베 29 필을 받았다.
1592년 3월 5일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군관들은 활을 쏘았다. 서울에 갔던 진무가 저녁에 돌아왔는데 좌의정 유성룡이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란 책을 보내왔다. 그것을 보니, 수륙전에서의 화공(火攻) 등에 관한 것을 일일이 설명하고 있는데 참으로 만고에 기이한 책이다.
1592년 3월 27일. 귀선(龜船)에서 포(砲)를 쏘는 것을 시험했다.
1592년 4월 11일. 이제야 (귀선에 쓸) 베로 만든 돛이 만들어졌다.
1592년 4월 12일. 식후에 배를 타고 귀선(龜船)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쏘았다. - 이순신 장군의 임진일기 중에서
거북선이라고 불리는 귀선(龜船)이 처음으로 기록된 태종실록 그리고 그 이후 179년이 지나 처음으로 다시 기록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임진일기(壬辰日記)를 곰곰이 톺아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1. 명나라 영락제의 직접 명령으로 세자 양녕이 자금성(紫禁城)을 다녀온 후 태종의 세자에 대한 경계가 삼엄해지는 정세(情勢) 속에서 당시 좌대언(좌승지) 탁신(卓愼)은 국방력 강화를 위한 6가지 대책을 주상(奏上) 하면서 귀선의 장점을 열거하며 다시 건조해야 한다고 태종에게 건의했다는 사실이다. 이 기사(紀事)에서 알 수 있는 것은 2년 전 이숙번(李叔蕃) 같은 중신(重臣)들이 세자를 경계(警戒)하는 태종에게 자신들은 세자를 지지한다는 의견을 은연중 드러내는 기사와 함께 기록된 귀선(龜船)이 탁신이 대책을 상주(上奏) 하던 그때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귀선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조선(造船) 되지 않았다.
2. 귀선(龜船)은 돛(범, sail)도 이용하는 범선(帆船)이었다는 사실이다. 귀선용(龜船用)으로 29 필(疋)의 베를 받아와 돛(sail)을 만들었다는 통제공(統制公)의 기록은 귀선(龜船)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당시 기준으로 베 1 필(疋)이 8치(37.4cm)의 폭과 40자(16m)의 길이였고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2척의 귀선(龜船)이 그리고 각 귀선에는 두 개의 돛대(mast)에 사각 돛이 있었다는 자료를 종합하면 귀선은 판옥선의 크기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판옥선(板屋船)의 크기에 대한 기록은 길이가 32.16m 너비가 8.74m 높이가 5.56m로 되어 있다.
3. 귀선(龜船)은 충선(衝船)이었고 함선(艦船)이었다는 사실이다. 함선은 전선(戰船)이지만 화포 (火砲) 즉 대포를 싣고 다니다 발사하는 전선이었다. 화포에 쓰이는 화약(火藥)과 그 폭발(爆發)에 의한 충격(衝擊)을 견디는 특수한 배였다는 사실이다. 바다에서 진형(陣形)을 이루며 아적(我敵)이 서로 대치(對峙)해 형성하게 되는 전선(戰線)을 돌파(突破)해 적의 진형(陣形)을 허물어뜨리고 대장선(大將船)으로 돌격하여 적의 명령(命令) 전달 체계와 진법(陣法) 구사(驅使) 기회를 박살 내는 것이 귀선(龜船)의 역할이었다. 그런 역할을 위해 귀선은 충파(衝破)를 위한 충각(衝角, Ram)을 선수에 장착했고 귀선의 전후(前後)와 좌우(左右)에서 강력한 함포(艦砲)를 운용했다. 특히나 좌우현(左右舷) 함포들은 장군전(將軍箭)을 쏘는 지자총통(地字銃筒)들과 차대전(次大箭)을 쏘는 현자(玄字) 총통들이 사용되었다. 장군전과 차대전은 충각(ram)과 함께 적의 전선(戰船) 선체(船體)에 구멍을 내어 격침(擊沈)시키기 위한 발사체였다. 충각(ram)을 앞에 달고 격침용(擊沈用) 화포만 발사하는 귀선(龜船)을 임진왜란에 투입된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한 연유였다.
1583년 선조(宣祖) 16년에 27살의 나이로 훈련원(訓鍊院) 별시(別試) 무과에 병과(丙科) 28위(位)로 급제(及第)하여 훈련원 봉사(奉事)로 관직을 시작한 이가 있었다. 그 후 북방 전선에 투입되어 6년간의 군무(軍務)를 수행하던 중 정여립(鄭汝立) 모반(謀叛) 사건이 적발된 얼마 후 돌연 사직하고 낙향(落鄕)을 한 그는 나대용(羅大用)이었다. 나대용(羅大用)이 1589년 섣달, 북방 함경도에서 야인여진(野人女眞)을 방어하는 군무(軍務)에서 벗어나 고향 나주(羅州)로 간 것은 귀선(龜船)을 건조해 화포(火砲)로 무장시키라는 선조(宣祖)의 유시(諭示:비밀 명령) 때문이었다. 나주(羅州)에서 대기 중인 나대용에게 선조(宣祖)가 보내온 건 태종(太宗) 3년부터 시작해 계유정난(癸酉靖難)의 피바람으로 끝난 변법(變法) 기간 동안 완성되어 창덕궁(昌德宮) 후원(後苑) 비밀 동굴에 전수방략(戰守方略))과 함께 줄곧 보관되어 온 귀선(龜船)의 설계도였다. 귀선(龜船)은 원래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의 외손자이기도 했던 고려(高麗) 충선왕(忠宣王)이 세운 부국강병책의 핵심이었던 선박의 이름이었다. 바다를 통한 무역 진흥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고 그 경제력으로 강병을 육성해 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겠다는 충선왕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도록 개발 중인 전투 무역선의 가명(假名)이었다. 그 때문에 충선왕 자신도 비운의 삶을 살아야 했고 이후 고려 왕조까지 망하게 만든 그 배의 설계도가 그걸 알 리 없는 나대용에게 전달된 거였다. 귀선을 개발하기에 나주는 명실상부한 곳이었다. 전 왕조인 고려조(高麗朝) 때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벌였던 탐라(耽羅) 전쟁과 일본의 찻잎(茶葉)을 뺏기 위한 원(元)의 일본 원정에서 그 우수성을 인정받은 고려 함선을 조선(造船)한 곳이 나주였다. 화약 무기를 본격적으로 전투에 사용했던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의 일본 원정(遠征, campaign)에서 입증된 고려 함선의 우수성은 남만(南蠻) 무역로(貿易路)를 주관(主管)했던 백제(百濟) 조선(造船) 에서부터 시작되는 역사였다. 나대용이 역사에 다시 나타난 건 정 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순신 수사(水使)가 지휘하는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서 감조전선(監造戰船) 출납군병(出納軍柄) 군관(軍官)으로서였다. 감조전선이란 전선(戰船)을 조선(造船)하는 것을 감독하는 것이고 병(柄)은 화포(火砲)를 세는 단위이기에 결국 출납군병은 화포를 지급하고 회수(回收)하는 화포 관리업무였다. 나대용은 귀선(龜船)을 2척이나 새로 건조해 가지고 있던 전라좌수영의 전함 건조와 화포(火砲) 관리를 맡은 군관이었다.
일본에서 생산되는 찻잎(茶葉)의 무역권을 두고 실크로드 상방과 마린로드 상방이 경쟁한 역사는 유구했다. 일본 찻잎을 수입해 차(茶)로 가공해서 서역으로 가져가 파는 일은 그야말로 엄청난 이윤을 가져다주는 황금을 낳는 거위였다. 일본에서 생산된 찻잎을 중국으로 운반하는 일은 일본이 섬나라였기에 바다를 건너야 하는 일이었고 중간에 백제와 가야와 신라와 고려를 거쳐야 하는 일이었다, 실크 로드를 장악한 법상종단은 일본과 고려가 있는 이 무역로를 가지고 싶어 했고 오랜 세월 이 바닷길을 만들고 관리해 온 마린 로드 천태종단은 뺏기지 않으려 했다. 그 일본 찻잎을 놓고 벌어진 싸움이 원나라의 일본 원정이었다. 일본에서 나오는 모든 찻잎(茶葉)들을 독점하기 위해 벌였던 쿠빌라이의 일본 원정에 두 번 모두 참전해야 했던 김방경(金方慶)은 그에 앞서 그 해상 무역로를 선점하고 있던 삼별초의 난을 진압해야 했다. 제주도까지 들어가 항쟁하는 삼별초군을 진압하기 위해 먼바다를 건너야 했던 고려군에게 바다 파도(波濤)를 헤치며 제주까지 나아가게 해 준 배는 전라도배가 유일했다고 고려사는 기록했다. 160척(隻)의 그 배들을 조선한 곳이 나주였다. 김방경을 기록한 고려사 열전에는 진도(珍島)에서 벌어진 삼별초와의 전투에 몽충(蒙衝)이라는 전선(戰船)에 대한 기록도 있었다. 울돌목(명량)의 함정에 빠진 김방경의 대장선(大將船)을 삼별초의 군인들이 포위해 공격하자 장군 양동무(楊東茂)가 몽충(蒙衝)으로 포위망을 돌파해 위기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고려사 열전(列傳) 권(卷) 第十七 제신(諸臣) 김방경에서의 기록이었다. 그 기록에서 묘사된 몽충(蒙衝)의 활약은 몽충이 판옥선과 조선(造船) 방법이 흡사한, 그래서 원형이랄 수 있는 배(船)였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명나라 왕기(王圻)가 자신의 아들 사의(思義)와 함께 지은 유서(類書, 백과사전)인 삼재도회(三才圖會)에는 몽충(蒙衝)의 도록(圖錄)이 실려 있었다. 뭉골병과 화약무기로도 결국 마린 로드 상권을 뺏을 수 없었던 실크 로드 상방은 일본에서 들어오는 찻잎으로 만든 모든 차는 거래 금지시켰고 일본 찻잎을 거래하는 모든 상인들을 죽여 원나라 말기의 동아시아 역사를 피로 물들였다.
조선 시대 때 건조(建造)된 배와 일본 원정을 위해 건조된 고려선(高麗船)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일본까지 항해할 수 있는 능파성(凌波性)에 있었다. 망망대해에서의 항해는 섬들 사이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완전히 달랐다. 엄청난 높이와 크기의 파도(波濤)를 견디며 그를 뚫고 가는 기초 설계가 없다면 항해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칠천량(漆川梁)에서의 원균의 참사는 원양항해가 불가능한 판옥선 함대를 이끌고 원양(遠洋)의 파도를 막아주는 섬 하나 없는 부산 앞바다까지 그것도 돛 아닌 노(櫓)로 갔다는 데 있었다. 원양 항해를 위한 능파성(凌波性) 제고(提高)라는 이 문제는 1975년 전남 신안 증도 앞바다에서 건져 올리기 시작한, 1323년에 침몰한 것으로 결론 난 신안보물선이라 명명된 무역선에서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선박 설계로 극복하게 되었다. 우리가 배 밑바닥이 평저형(平底型)이 아니라 첨저형(尖底型)이라는 데에만 주목했던 이 배는 그러나 선수(이물, 船首)가 ^ 자 모양으로 뾰족하고 선미(고물, 船尾)가 대장실(大將室)과 군관실(軍官室) 그리고 방향타(方向舵 Rudder)가 나란히 설치될 정도로 공간이 보장된 귀선(龜船)과 같은 п 모양을 하고 있었다. 카라벨(caravel)의 선체(船體)와 똑같은 모양이었다. 돛대가 두 개인 카라벨 라티나는 신안선(新安船)의 복사품이었다.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해금(海禁) 정책을 펴면서 사라졌던 거북의 등과 같은 모양의 선체(船體)를 가진 신안선은 1413년 귀선(龜船)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나타났고 1415년 조선에서 사라진 귀선(龜船)은 이후 포르투갈에서 카라벨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이 일어난 후 선조(宣祖)의 비밀명령으로 낙향한 나대용에게 건네진 건 174년 전 조선에서 사라져 Caravel을 만들게 했던 그 귀선(龜船)의 설계도였다.
길이가 28.4m, 너비가 6.6m, 깊이가 3.6m의 신안선(新安船)은 단면이 뾰족한 V자 형태의 전형적 첨저형(尖底型) 선박으로 깊은 바다의 파도를 가르며 운항하는 데 적합하도록 설계된 배다. 첨저형 선박은 복건성(福建省) 일대에서 주로 건조되던 방식으로, 당시 우리나라의 평저형(平底型) 선박과는 확실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이는 중국에서 제조된 배라는 확실한 단서다. 신안선(新安船)의 삼판 축조방식은 삼판 아랫면에 반턱을 따고 아래 삼판의 윗면에 겹쳐서 부착하는 클링커 방식으로, 삼판은 한 겹으로 되어 있다. 7개의 격벽과 8개의 화물창고가 설치된 구조로 추정된다. - 중국학 위키백과
우리가 거북이의 모습이어서 거북선이라고 머리에 세뇌시킨 귀선(龜船)은 그러나 거북이 모양 때문에 귀선이라 명명된 것이 아니었다. 귀(龜) 자는 거북귀가 아니라 등골뼈 귀자였다. 귀선(龜船)은 용골(龍骨, Keel)이라 부르는 등골뼈(龜, 脊椎)를 선체(船體)의 최하부의 중심선에 종강력재(縱强力材)로 놓아 선체를 구성하는 기초로 하고 늑골(肋骨, frame)이라 부르는, 선체의 좌우 선측(船側)을 구성하는 뼈대들을 용골(龜, 脊椎)에 직각으로 배치하여 선체 횡강도(橫强度)를 담당하게 한 후 늑골들을 따라 내부에는 수밀격벽판을 외부에는 외판을 붙여가며 조선(造船)했기에 귀선(龜船)이라 한 것이었다. 용골 없이 만드는 전통에서 벗어나 용골(龍骨)을 중심으로 만들었음을 강조하는 이름이었다. 귀선(龜船)을 만들어 내는 조선법(造船法)은 일본 규슈와 고려 나주, 중국 영파(寧波)와 천주(泉州) 등을 연결했던 차(茶) 무역선, 바로 신안선(新安船)의 조선법(造船法)이었다. 능파성(凌波性)이 뛰어나 바다에서 빠른 속도를 내는 것이 가능한 배였다. 이처럼 용골과 늑골들을 이용해 조선(造船)하는 귀선(龜船)은 용골이 있어 선수(船首)에 강력한 충각(衝角, ram)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늑골들로 조선(造船) 되어 상대적으로 충격에 약한 선측(船側), 즉 좌현(左舷)과 우현(右舷)에는 각각 6문(門)의 총통을 배치해 다가오는 적선(敵船)들을 장군전(將軍箭)과 차대전(次大箭)으로 구멍을 내어 격침(擊沈) 시킴으로써 충격 자체를 방지하거나 약화시켜 그 단점을 보완토록 했다. 문제는 복원력(復原力, stability)이었다. 좌우현에 각각 6문씩 배치된 총통의 사격은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는 충격을 전달했고 그때마다 귀선(龜船)은 롤링(rolling)이라 부르는 충격에 심각하게 전복(顚覆)될 위험에 처했었다. 나대용이 찾아낸 해결책은 선체 바닥을 좀 더 평저(平底)로 만들기 위해 용골을 매우 두꺼운 선재(船材)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용골이 두꺼워지자 선수(船首)도 나타났다. 능파성(凌波性) 감소에 따른 속도의 저하를 감수하고서 좌우현(左右舷)의 총통 사격에 따른 복원력(復原力) 문제를 해결한 것이었다. 지금도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던 것을 자랑하기 위해 지명(地名)이 여전히 통영(統營)인 곳엘 가면 통영 특유(特有)의 선수(船首) 모양을 가진 통구미라는 배를 볼 수 있는데 이 통구미의 선수(船首) 부분을 자세히 보면 두터운 용골을 사용한 것 때문에 역시 두터워진 선수(船首) 부분을 볼 수 있다. 통구미 위에 거북선 군장(軍裝)을 꾸리면 가장 거북선을 닮은 배라고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이야기를 통영사람들은 오늘도 전하고 있다.
뾰족한 선수로 뛰어난 능파성을 가지게 된 귀선이 빠른 것은 당연했다. 거기에다 복원력까지 뛰어나 엄청난 화포 사격을 견디어 파괴력까지 뛰어난 귀선이었다. 선조에게 귀선의 활약상을 보고하는 이순신 장군의 글자에 힘이 넘친다.
突擊將臣矣軍官 李彦良 倭大船一隻 銃筒放中 撞破焚滅 (돌격장 신의군관 이언량 왜 대선 1척을 총통으로 쏘아 깨뜨리고 불살랐다) -玉浦破倭兵狀
龜船突擊將臣矣軍官 李彦良 奮不顧身 終始力戰 (귀선돌격장 신의군관 이언량 분연히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역전했다) -唐浦破倭兵狀
左突擊龜船將保人 李彦良 海次接戰 忘身先赴 以致勝捷 極爲加嘉爲白齊 (좌돌격귀선장 보인 이언량 바다에서 접전할 때마다 몸을 잊고 먼저 돌진하여 승첩을 거두었으니 참으로 칭찬할 만한 일이다) -見乃梁破倭兵狀
龜船突擊將臣軍官 李彦良 先登直進 同先鋒大船四隻 爲先撞破焚滅 (귀선돌격장신군관 이언량 먼저 나서 곧바로 돌진하여 왜의 선봉 대선 4척을 우선 깨뜨려서 불살랐다.) -釜山破倭兵狀
종 6품 선무랑(宣務郎)으로 참하관(參下官)이 되어 정읍(井邑) 현감(縣監)으로 근무하던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불과 1년 전에 정 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당상관(堂上官)이 되어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부임한 것은 전적으로 선조(宣祖)의 결단이었다. 류성룡이 추천했니 이산해와 정언신이 추천했니 하는 것은 곁가지이고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관원들만을 의미하는 대간(臺諫)들이 경국대전에 의해서 보장받는 관리 임면(任免)에 대한 동의권을 의미하는 서경권(署經權)과 역시 경국대전 규정에 따른 개월법(箇月法)을 중심으로 한 순자법(循資法)이 지엄한 속에서 종 6품(品) 하계(階)에서 정 3품(品) 상계(階)인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했다는 것은 16계(階)를 뛰어넘는 상상 불허의 특진을 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참하관(參下官)에서 참상관(參上官)과 당하관(堂下官)을 건너뛰고 바로 당상관(堂上官)이 된 것이었다. 빗발치는 항의와 반대를 무릅쓰고 선조(宣祖)가 이 임명을 강행하여 제수(除授)라는 국왕의 비상권(非常權)을 쓴 것은 무언가 선조(宣祖)가 어떤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미리 알고 있었지 않냐는 의심을 갖게 한다. 선조(宣祖)가 내세운 숨겨진 강행 이유는 정여립(鄭汝立) 모반(謀叛) 사건이었다.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이 올린 비밀장계에는 구월산 승려 의암(義巖)이 고변자(告變者)로 기록되어 있었고 안악군수 이축(李軸)이 확인한 정여립의 제자 조구(趙球)의 자백이 있었다. 결국 전라도와 황해도가 연결된 모반은 놀랍게도 화약(火藥)의 밀무역(密貿易)으로 밝혀졌다. 차(茶)의 밀무역까지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선조(宣祖)는 크게 당황했었다. 그래도 조선이 유라시아는 물론 아메리카까지 동원된 세계대전의 전쟁터가 되리라고 까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선조(宣祖)였다. 동래성(東萊城)이 함락된 지 13일 만에 충주까지 치달은 왜군들이 사둔(査屯)인 신립(申砬)이 이끄는 조선 기마군단(騎馬軍團)마저 괴멸(壞滅)시켰다는 보고를 받는 순간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선조는 깨달았다. 군기시(軍器寺)에서 명나라를 속여가며 비밀리에 쟁여 놓은 화약(火藥)을 전라좌수영과 진주성(晉州城)으로 내려 보낸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나대용에게 귀선의 설계도가 전해질 때 함께 창덕궁 후원 비밀 동굴에서 인출된 전수방략(戰守方略)은 유성룡의 감수를 거쳐 이순신에게 전해졌었다. 선조의 명령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