檢校參贊門下府事崔茂宣卒. 茂宣, 永州人, 廣興倉使東洵之子。 性巧慧多方略, 喜談兵法。 仕前朝, 官至知門下府事。 嘗曰: "制倭寇莫若火藥, 國人未有知者。" 茂宣每見商客自江南來者, 便問火藥之法。 有一商以粗知對, 請置其家, 給養衣食, 累旬諮問, 頗得要領。 言於都堂欲試之, 皆不信, 至有欺詆。 茂宣積以歲月, 獻計不已, 卒以誠意感之, 乃許立局, 以茂宣爲提調官, 乃得修鍊火藥。 其具有大將軍、二將軍、三將軍、六花石砲、火砲、信砲、火㷁、火箭、鐵翎箭、皮翎箭、蒺藜砲、鐵彈子、穿山五龍箭、流火、走火、觸天火等名。 旣成, 觀者莫不驚嘆。 又訪求戰艦之制, 言於都堂, 監督備造。 及庚申秋, 倭寇三百餘艘至全羅道 鎭浦, 朝議崔公火藥, 今可試矣。 乃命爲副元帥, 與都元帥沈德符、上元帥羅世, 乘船齎火具, 直至鎭浦。 寇不意有火藥, 聚船相維, 欲盡力拒戰, 茂宣發火具盡燒其船。 寇旣失船, 遂登岸刼掠全羅以至慶尙, 還聚于雲峰。 上時爲兵馬都元帥, 與諸將殲盡無遺。 自爾倭寇漸息, 乞降者相繼, 濱海之民, 復業如舊。 雖由上德應天之所致, 茂宣之功, 亦不小矣。 至國初, 以年老未見用, 上念其功, 授檢校參贊, 及卒, 上嗟悼, 賻以厚。 歲辛巳, 追贈議政府右政丞、永城府院君。 子海山。 茂宣臨卒, 以一卷書屬其夫人曰: "待兒長, 以此與之。" 夫人藏之甚密, 及海山年十五稍識字, 出而與之, 乃火藥修鍊之法。 海山學其法見用, 今爲軍器少監.
검교 참찬문하부사 최무선이 졸하였다. 무선의 본관은 영주요, 광흥창사 최동순의 아들이다. 천성이 기술에 밝고 방략이 많으며, 병법을 말하기 좋아하였다. 고려조에 벼슬이 문하 부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말하기를, 왜구를 제어함에는 화약(火藥) 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다. 무선은 항상 강남(江南)에서 오는 상인이 있으면 곧 만나 보고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다. 어떤 상인 한 사람이 대강 안다고 대답하므로, 자기 집에 데려다가 의복과 음식을 주고 수십 일 동안 물어서 대강 요령을 얻은 뒤, 도당에 말하여 시험해 보자고 하였으나, 모두 믿지 않고 무선을 속이는 자라 하고 험담까지 하였다. 여러 해를 두고 헌의하여 마침내 성의가 감동되어, 화약국(火藥局)을 설치하고 무선을 제조(提調)로 삼아 마침내 화약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그 화포는 대장군포·이장군포·삼장군포·육화석포·화포·신포·화통·화전·철령전·피령전·질려포·철탄자·천산오룡전·유화·주화·촉천화 등의 이름이 있었다. 기계가 이루어지매,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또 전함(戰艦)의 제도를 연구하여 도당(都堂)에 말해서 모두 만들어 내었다. 경신년 가을에 왜선 3백여 척이 전라도 진포에 침입했을 때 조정에서 최무선의 화약을 시험해 보고자 하여, 부원수에 임명하고 도원수(都元帥) 심덕부(沈德符)·상원수(上元帥) 나세(羅世)와 함께 배를 타고 화구(火具)를 싣고 바로 진포에 이르렀다. 왜구가 화약(火藥)이 있는 줄을 뜻하지 못하고 배를 한 곳에 집결시켜 힘을 다하여 싸우려고 하였으므로, 무선이 화포를 발사하여 그 배를 다 태워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는 육지에 올라와서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노략질하고 도로 운봉(雲峯)에 모였는데, 이때 태조가 병마 도원수(兵馬都元帥)로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왜구를 빠짐없이 섬멸하였다. 이로부터 왜구가 점점 덜해지고 항복하는 자가 서로 잇달아 나타나서, 바닷가의 백성들이 생업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것은 태조(太祖)의 덕이 하늘에 응한 까닭이나, 무선의 공이 역시 작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개국 후에 늙어서 쓰이지는 못했으나, 임금이 그 공을 생각하여 검교 참찬(檢校參贊)을 제수하였다. 죽음에 미쳐 임금이 슬퍼하여 후하게 부의(賻儀)하였으며, 신사년에 의정부 우정승·영성 부원군(永城府院君)으로 추증(追贈)하였다. 아들이 있으니 최해산(崔海山)이다. 무선이 임종할 때에 책 한 권을 그 부인에게 주고 부탁하기를, 아이가 장성하거든 이 책을 주라 하였다. 부인이 잘 감추어 두었다가 해산의 나이 15세에 약간 글자를 알게 되어 내어 주니, 곧 화약을 만드는 법이었다. 해산이 그 법을 배워서 조정에 쓰이게 되어, 지금 군기 소감(軍器少監)으로 있다. -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 (1395) 4월 19일 임오
擢文中庸爲司憲監察 崔海山軍器注簿. 參贊權近上書曰 故諫議大夫文益漸 初入江南 覓木緜種子數枚齎來 送於晋陽村舍 始織木緜進上. 是故木緜之興 始於晋陽. 由此廣布一國 凡民上下 皆得以衣之 是皆益漸之所賜也. 大有功德於民 而不食其報早逝. 其子中庸遭父喪 廬墓三年 仍遭母喪 又廬於墓三年終制 仍隱於晋陽 勤謹孝廉. 可用之士也. 故知門下府事崔茂宣 始劑火藥 能制海寇 實有功於國家. 其子海山 亦宜敍用.
문중용(文中庸)을 뽑아서 사헌 감찰을 삼고, 최해산(崔海山)으로 군기 주부(軍器注簿)를 삼았다. 참찬(參贊) 권근이 상서하기를, 고(故) 간의대부 문익점이 처음 강남(江南)에 들어가서 목면 종자(木緜種子) 두어 개를 얻어 싸 가지고 와서 진양(晉陽) 촌 집에 보내어, 비로소 목면을 짜서 진상하였으니, 이 때문에 목면의 일어남이 진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온 나라에 널리 퍼지게 되어, 모든 백성들이 상하(上下)가 모두 이를 입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익점이 준 것입니다. 백성에게 크게 공덕이 있는데도 응보(應報)를 받지 못하고 일찍 죽었고, 아들 중용이 아비의 상(喪)을 당하여 3년을 시묘하고, 이어 어미의 상을 당하여 또 3년을 시묘하고, 상을 마친 뒤에 그대로 진양에 숨었으니, 근근(勤謹)하고 효렴(孝廉)하여 쓸 만한 선비입니다. 고(故)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최무선(崔茂宣)은 처음으로 화약(火藥)을 제조하여 능히 해구(海寇)를 제어하였으니, 실로 국가에 공(功)이 있습니다. 그 아들 해산(海山)도 또한 마땅히 서용(敍用)하여야 합니다. 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 태종실록 1권, 태종 1년(1401) 윤 3월 1일 경인
화약(火藥)이 세상의 모든 걸 바꿔 놓을 것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화약(火藥)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죽일 거라는 걸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화약이 세상의 모든 걸 불태워 뿌리부터 송두리째 다 바꿀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것을 들고 세상에 나갔다. 화약이 사람들을 죽이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불태워 없앨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한사코 그것을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했다. 화약이 세상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땅 끝까지 나아갔다. 화약이란 걸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터뜨리는 순간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농부도 죽었고 병사도 죽었고 그토록 원하던 부자도 권력자도 죽었다. 가운데가 동그랗게 뚫리고 한쪽 끝이 막힌 총통(總統)이라 불린 청동(靑銅) 막대기에 숯과 황(硫黃)과 염초(焰硝)를 섞은 흑색 가루를 넣고 밀폐시킨 후 점화하면 그것은 무시무시한 폭음과 하얀 연기를 내며 그 안에 담긴 무엇이든 날려 보냈다. 경질 목재(Iron Wood)라고 불리는 자단목(紫檀木) 같은 나무들을 가마에 구워 만든 숯은 불을 놓으면 강력한 불꽃을 내며 탔다. 화약을 만들 때 넣는 숯가루는 자단목으로 만든 숯의 그것이 가장 좋았다. 자단목(紫檀木)이 그렇게 고가(高價)였던 까닭이었고 세계 최초의 카라벨(Caravel) 형 원양(遠洋) 무역선인 신안선이 차(茶)와 함께 주요 품목으로 다루었던 이유였고 야곱 푸거(Jacob Fugger)가 15세기말에 브라질산 유창목(癒瘡木)을 독점 수입했던 연유였다. 탄소(C) 그 자체인 숯가루가 타면서 황(Sulfur)도 탔다. 산소가 제공되지 않는 밀폐된 공간에서도 엄청난 속도로 계속 탈 수 있게 염초에 들어있는 산소가 세 개나 있는 질산(NO3)은 산소를 제공했다.
황이 타면서 나온 기체는 이산화황(SO2)이었고 계속 제공된 산소(O)로 인한 연소(combustion)로 고온 고압이 되어 팽창할 대로 팽창된 이산화황은 그 팽창력으로 막아놓은 모든 걸 총구 밖으로 밀어냈다. 폭발력이라 불린 그 기체는 수천 년 동안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모든 성벽들을 무너뜨리게 될 거대한 돌덩어리들을 쏘아댔다. 화약으로 무언가를 발사하는 것을 대포(大砲)라 부르게 된 연유였다. 그러나 총구 밖으로 대포알과 함께 나온 이산화황은 처음 그 기체를 접한 면역력 없는 사람들을 쓰러지게 했다. 이산화황(Sulfur dioxide)은 무색의 자극적인 냄새가 나는 독성이 강한 가스로 사람의 호흡기에 폐렴이나 기관지염 등을 유발하는데 특히 인체의 점막과 작용해 황산을 형성, 염증을 일으켜 세균의 2차 감염을 일으켰다. 지금 프랑스 칼레시 남쪽 크레시에서 언덕 위에 진을 친 영국군에 맞서 언덕 밑에서 바람을 맞으며 전투를 한 프랑스 군 6만 명 중에서 사상자가 3만 명이 나온 연유였다. 특히 두꺼운 갑옷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빈틈없이 무장(武裝)한 귀족 기사들은 호흡 곤란으로 쓰러졌고 영국군 농부 보병대는 쓰러진 기사들의 갑옷 틈새로 단검을 찔러 그들을 죽였다. 이 전투 하나에서 전체 프랑스 귀족의 삼분의 일이 희생되었다. 크레시(Crecy) 전투에서 영국군 사상자 수는 150- 250명이었다. 그들의 시체를 들락거렸던 쥐들로 흑사병은 창궐로 나아갔다. 화약무기인 화포(火砲)는 신무기였고 따라서 화약은 초고가였다. 에드워드 3세는 이탈리아의 금융업자인 바르디(Bardi)가(家)와 페루치(Peruzzi)가(家)로부터 돈을 빌려 이 화포를 운용했고 결국 디폴트(채무불이행)를 통해 두 집안을 파산시켰다. 흑해로부터 이탈리아를 거쳐 들어온 이 화약은 결국 그 교역로를 따라 흑사병을 퍼뜨렸다. 유럽 모직물 산업의 중심이었던 플랑드르(플랜더스)를 차지하려는 영국과 프랑스의 탐욕은 결국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에 이르는 사람들이 3년 안에 죽는 전대미문의 대참사를 불러왔다.
베르톨드 슈바르츠(Berthold Schwarz)는 유럽에서 흑색화약(Black Powder)과 대포(Cannon)를 발명했다는 전설적 기록에만 나오는 인물이다. 14세기경의 독일인이며 프란체스코(Francesco) 수도회에 속한 수도승이었다는 사실 외엔 출생과 사망을 포함해 그 어떤 개인적 기록도 남아 있는 게 없는 인물이다. 게다가 그가 발명했다는 흑색화약에 있어서도 염초나 숯, 황같은 구성 물질의 조성이나 혼합 비율의 결정 그리고 대포의 사양(仕樣)에 관해 그가 관여했다는 기록도 전무하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칼레 남쪽 크레시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갈문왕(葛文王)인 에드워드 3세와 토인(土人)인 에드워드 흑태자(Edward the Black Prince)가 지휘하는 영국군이 흑색화약을 사용하는 화포 2문으로 프랑스군을 포격했다는 기록이 정사에 엄연하다는 것이고 영어로 Plague라고 하는 흑사병(黑死病)을 독일어로는 Pest 또는 Schwarzer Tod라고 한다는 것이다. 흑사병을 Bubonic plague라고도 하는 영어는 사람의 림프절(임파선)에 세균 감염에 의한 염증이 발생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흑사병(黑死病)을 강조하는 것인데 이는 화약 폭발 시 뿜어져 나오는 이산화황이 인체의 점막과 작용해 황산을 형성, 염증을 일으켜 세균의 2차 감염(感染)이 일어남을 특징하는 것이었다. 독일인들이 흑사병을 흑색화약을 발명했다는 Berthold Schwarz의 성(surname)과 함께 사망, 죽음이라는 Tod를 결합해 Schwarzer Tod 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흑사병이 흑색화약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흑색 화약이 구매자인 이탈리아 상인 앞에서 터뜨려져 성능을 확인받아 인계되었던 흑해의 아조프에서부터 시작된 이산화황 가스에 의한 흑사병은 도버 해협이 보이는 크레시에서의 화포 사격으로 결국 창궐(猖獗)로 이어졌다. 1346년에 시작해 1353년에 끝난 Schwarzer Tod로 7년 동안 1억 명 가까이가 죽었다. Schwarz는 유럽의 화약 발명자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조작된 역사였다. 흑색 화약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막강한 기마군단들로 무장한 적국(敵國)들의 포위를 뚫으려는 송나라의 몸부림 속에서 발명된 화학 물질이었다. 화약의 파괴력을 확인한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질서든 어떤 체제든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란 걸 알았다. 무너지기를 원치 않았던 사람들은 화약을 철저히 봉인(封印)했었다. 그 봉인을 뜯고 화약을 세상에 드러낸 사람들은 당시 세상을 지배하던 질서를 무너뜨리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었다. 자기 땅에서 쫓겨난 푸거(Fugger) 같은 사람들이었다.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은 태조 때 이미 정 4품 군기소감(軍器少監)이었다. 태종 때 종 6품 군기주부(軍器主簿)는 생색낼 일이 아니다. 군기소감이었던 최해산이 권근의 상소로 간신히 군기주부로 복권된 데에는 사연이 없을 수가 없었다. 최무선과 그 아들 최해산은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진 화약으로 빚어진 민족사의 비극을 한 몸에 떠안은 사람들이었다. 임진왜란은 미뤄져 온 그 비극에 대한 문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