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海道罪人李箕 李光秀等 鄭汝立同謀叛逆承服 行刑于軍器寺前 隨後絞于堂古介. 황해도의 죄인 이기, 이광수 등이 정여립과 반역을 공모한 사실을 승복하여 군기시 앞에서 행형하고 뒤에 당고개(堂古介)에서 교수(絞首)하였다. - 선조실록 23권, 선조 22년(1589) 10월 15일 기축
安岳水軍黃彦綸 方義臣等 往來鄭汝立家 同謀叛逆事 承服伏誅. 안악(安岳)의 수군(水軍) 황언륜과 방의신 등이 정여립의 집에 왕래하며 반역을 공모한 사실을 승복하여 복주(伏誅)되었다. -선조실록 23권, 선조 22년 10월 17일 신묘
上御宣政殿 親問鄭玉男等.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임어하여 정옥남 등을 친국(親鞫)하였다. - 선조실록 23권, 선조 22년 10월 19일 계사
左參贊鄭琢差謝恩使 加崇政 黃允吉 金誠一差日本通信上 副使 許筬差書狀官. 좌참찬 정탁(鄭琢)을 사은사로 차출하여 숭정대부 품계를 가하고, 황윤길·김성일을 일본 통신(通信)의 상사(上使)·부사(副使)로, 허성(許筬)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출하였다. - 선조실록 23권, 선조 22년 11월 18일 임술
전(前) 지평(持平) 최영경(崔永慶)을 하옥하였다. 정여립의 난이 일어난 초기에 적의 무리가 길삼봉(吉三峯)이 상장(上將), 정팔룡(鄭八龍)·정여립이 차장(次將)이라고 천명하였었다. 그래서 국청(鞫廳)이 드디어 길삼봉의 행방을 심문하여 용의자가 많이 체포되었으나 다들 신원(身元)이 증명되어 석방되었다. 그때 적(敵)의 무리 이기(李箕)·이광수(李光秀) 등이 말하기를, “전주(全州) 정여립의 집에 가면 삼봉(三峯)이란 자가 있는데, 나이는 60세쯤 되었고 낯빛은 검으며 몸은 비대하다." 하였고, 혹자는 말하기를, ”삼봉은 나이는 30세쯤 되었고 키는 크며 얼굴은 파리하다."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삼봉은 나이는 50세쯤 되었고 수염이 길어 배에까지 드리워졌으며 낯빛은 검고 키는 크며 말할 때마다 기침을 한다." 하였다. 그 뒤 적의 무리 김세겸(金世謙)이 말하기를, ”길삼봉은 상장이 아니고 졸병이다. 진주(晋州)에 사는데 나이는 30세쯤 되었고 하루에 3백 리를 달린다." 하고, 또 한 역적은 말하기를, “삼봉은 본디 나주(羅州)의 양반 집안이다."하고, 또 박문장(朴文章) 이란 자가 있어 말하기를, ”삼봉은 길 씨가 아니라 최삼봉(崔三峯)인데 진주의 사노(私奴)이다."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1년 전에 한 선비가 전주의 만장동(滿場洞)을 지나갔다. 거기에 활쏘기 모임이 있었는데, 최영경(崔永慶)이 수석에 앉고 정여립이 차석에 앉았었다." 하였다. 그리하여 뜬소문이 떠들썩하게 일어났는데, 여러 역적들의 공초 중 최영경의 형모(形貌)와 근사한 것들을 모아 엮어 ‘길삼봉은 필시 최영경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호남 사람 양천경(梁千頃) 등이 지적한 것으로 최영경을 해치려는 음모였다. - 선조수정실록 24권, 선조 23년(1590) 6월 1일 신미
이순신을 무려 7품(品) 16계(階)나 가자(加資)시켜 종 6품 병절교위(秉節校尉)에서 정 3품 당상관(堂上官)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제수(除授) 한 데에는 정여립의 모반사건과 그 주모자로 밝혀진 길삼봉(吉三峯)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또 하나의 결정적 이유는 이순신이 언문(諺文)이 아니라 한문(漢文)을 제대로 읽고 쓸 줄 알면서 수군(水軍)의 경험이 있는 정말 흔치 않은 무과 급제자였기 때문이었다. 이순신이 오늘날 보직해임(補職解任)에 해당되는 첫 백의종군(白衣從軍)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던 녹둔도(鹿屯島)는 두만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있는, 병선(兵船)이 배치된 조산포(造山浦)에서 20리 떨어진 조산만호(造山萬戶) 관할(管轄)의 섬이었다. 한문 독해와 병선(兵船) 운용 경험은 전수방략(戰守方略)이라는 총통군(銃筒軍) 중심의 새로운 전투교범(戰鬪敎範)을 읽고 이해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기에 이순신의 파격(破格) 발탁(拔擢)이 이루어진 연유였다. 당시의 화약무기(火藥武器)는 오늘날로 따지면 핵탄두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이었다.
전라도와 안악(安岳), 재령(載寧) 같은 옛 패수(浿水) 지역의 황해도가 연결된 정여립 모반사건은 바닷길 통제에 대한 선조(宣祖)의 경계(警戒)를 첨예(尖銳)하게 하는 것이었다. 1587년 대마도주(對馬島主) 소(宗義調)의 가신(家臣) 다치바나(橘康廣) 일행이 일본국 사신의 이름으로 부산포(釜山浦)로 들어와 전달한 풍신수길(豐臣秀吉)의 통신사(通信使) 파견요청이 2년씩이나 선조(宣祖)와 조정(朝廷)에 의해 아무런 결정 없이 뭉개지다 정여립의 모반사건 이후 파견이 결정되어 정사(正使)와 부사(副使)가 선발된 것도 그토록 찾아도 잡히지 않는 길삼봉(吉三峯) 때문이었다. 길삼봉(吉三峯)으로 몰려 옥사(獄死)했던 전(前) 사헌부 지평(持平) 최영경이 길삼봉이 아니라는 건 선조(宣祖)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옛 포상팔국(浦上八國) 지역에서의 내응(內應)이 있어야만 완성되는 해상 밀무역로(密貿易路)였다. 누군가는 경상우도(慶尙右道)에서 정여립 모반사건의 지역 책임자로 잡혀야 했다. 선조(宣祖)는 정여립 모반사건이 바닷길로 일본과 서로 연결되어 북경까지 다다르는 밀무역로와 관련 있다고 판단했다. 북방에서 성실히 군무(軍務)에 열중하고 있는 나주(羅州) 출신 나대용(羅大用)을 사직(辭職)시키고 비밀리에 낙향시켜 귀선(龜船)을 개발하게 한 것도 그래서였다. 전통적으로 왜적(倭敵)의 배는 빨랐고 조선(朝鮮) 배는 느렸다. 그들을 잡으려면 함포(艦砲) 사격이 가능하면서 빠른 배가 필요했다. 용골(龍骨 Keel)로 배를 만들어 본 경험은 옛날 고려 나주 사람들이 유일했다. 나주가 있는 영산강(榮山江)은 지금과는 달리 지중해(地中海) 같은 내해(內海)라 불리던, 바다를 직접 접하고 있던 대항(大港)이었다.
1323년 남파의 변(南坡之變)이 일어나 해상(海上) 무역을 강력하게 추진하던 원나라 황제 영종(英宗)이 실크로드 진상방(晉商幇)의 사주(使嗾)로 암살되고 그의 무역선(貿易船)은 신안 앞바다에 수장(水葬)되었다. 그리스 갤리(galley) 선(船)과 똑같이 용골(龍骨)을 배 바닥의 중심축(中心軸)으로 조선(造船)해 첨예(尖銳)한 선수(船首)를 가져 능파성(凌波性)이 제고(提高)되고 선미(船尾)는 고려선과 똑같이 장방형(長方形)으로 높게 만들어 장기(長期) 항해에 필요한 여러 시설(施設)과 방향타(方向舵)를 들이고 동시에 복원력(復原力)을 높인 신안선(新安船)은 처음부터 대양(大洋) 항해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선박(船舶)이었다. 신안선은 실크로드 진상방(晉商幇)의 줄기찬 반대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일본의 찻잎(茶葉)을 해상(海上) 무역로(Marine route)의 주요 상품으로 교역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귀선(龜船)의 원형(原型)이었다. 신안선(新安船)은 폭풍우에 밀려 항로(航路)를 벗어나 침몰한 것이 아니었다. 신안선은 하문(厦門 xiamen)에서 시작해 대만(臺灣) - 유구(琉球) - 살마(薩靡, 가고시마) - 평호도(平戶島) - 완도 가리포(加里浦) - 진도(珍島) - 나주(羅州) - 신안 증도(曾島) - 황해 대청도(大靑島) - 중국 천진(天津) - 경항(京杭) 대운하 - 절동(浙東) 운하 - 명주(영파)- 라두(螺頭) 채널(Luotou Channel) - 불도(佛渡) 채널(Fodu Channel) - 온주(溫州) - 복주(福州) - 하문(厦門 xiamen) 순서로 구성된 순환(循環) 항로(航路)를 항해하던 중 테러를 당해 수장(水葬)당한 한중일(韓中日) 정기 무역선이었다. 카라벨(Caravel)과 똑같은 선체(船體) 구조를 가진 신안선은 푸젠 성(福建省)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선박이었다. 고려의 충선왕이 북경 만권당에서 개발해 낸 그 귀선이었다.
신안선(新安船)은 일본에 가서 찻잎(茶葉)을 담아 오기 위해 속이 빈 청자(靑瓷)와 백자(白瓷) 같은 용천요(龍泉窯)에서 생산한 도자기(陶瓷器)들을 온주(溫州)에서 실은 후 하문(廈門)으로 향했다. 용천요의 빈 도자기들을 실을 때 그중 일부에는 황하 하류 지역에 지천으로 널린 질산나트륨 염초(焰硝)가 잔뜩 담겨 있었다. 하문(廈門)에서 일본으로부터 주문받은 물품들을 남만무역(南蠻貿易)을 통해 구입(購入)해 싣고 특히나 인도네시아와 광동에서 나는 자단목(紫檀木)을 구입해 실었다. 최상급 흑색화약(火藥)을 만들 때 쓰는 숯은 자단목(紫檀木)을 불완전 연소시켜 만든 숯이 최고였다. Iron Wood라고 불릴 정도로 재질이 단단한 자단목(紫檀木)은 부딪힐 때 깡깡 소리가 날 정도로 금속에 가까워 무게 역시 무거웠다. 일본에서 찻잎(茶葉)을 사들이며 지불 수단으로 사용할 중국 동전(銅錢)들도 화물처럼 적재(積載)한 신안선은 하문(廈門)을 떠나 유구(琉球)를 거쳐 일본 박다(博多 Hakata)에 도착하면 일본 측(側) 주문(注文)으로 구입(購入)한 물품들과 동전(銅錢), 자단목을 염초와 함께 하역(荷役)했다. 텅 비게 된 화물칸에는 새 시즈오카 찻잎을 잔뜩 실은 청자(靑瓷)와 백자(白磁)들과 함께 자단목 숯과 일본산 유황을 중국산 질산나트륨 염초(焰硝)와 배합해 만든 최상급 흑색화약이 담긴 자기들도 실렸다. 그야말로 보물선이 된 신안선은 기항지(寄港地)인 고려 나주(羅州)를 거쳐 원나라 수도인 대도(大都)로 향했다. 대도의 황제군에게 화약은 보급되었고 황제의 권력은 그 화약으로 불 뿜는 총구로 유지되었다.
화약을 내려놓고 신선한 차(茶)만을 수많은 자기(瓷器)에 잔뜩 실은 신안선은 천진(天津)을 통해 중국 내륙으로 들어가 차(茶)들을 하역하면서 경항(京杭) 대운하(大運河)를 따라 항주(杭州) 앞바다로 나온 후 다시 소흥(紹興)의 조아강(曹娥江 Caoe jiang)으로 들어가 절동운하(浙東運河)를 통해 명주(영파)까지 내려갔다. 명주(영파)에서 주산군도(舟山群島) 앞바다로 나와 라두(螺頭 Loutou) 채널(channel)과 불도(佛渡 Fodu) 채널(channel), 남일(南日 Nanri) 채널을 차례로 통과해 남쪽에 있는 하문(廈門)으로 향했다. 신안선의 성공적인 항해는 그것을 가능하게 지원(支援)했던 원나라 황제 영종(英宗)을 암살당하게 했고 영종이 암살당하자 신안선(新安船)은 항상 정비(整備) 받던 그 바다에 수장(水葬)되었다. 신안선(新安船)을 처음 만든 사람들은 푸젠성(福建省)의 차상인(茶商人 Merchant)들이었고 그 신안선(新安船)을 수리(修理)했던 사람들은 고려 나주(羅州) 사람들이었다. 신안선을 기억하고 있다가 정지(鄭地) 장군이 함포(艦砲)를 싣고 대마도까지 항해해 왜구 토벌을 할 수 있도록 귀선(龜船)을 복원(復元)해 낸 사람들은 다름 아닌 나주(羅州)의 조선(造船) 기술자들이었다.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은 조선 왕실이 파묻은 정지(鄭地) 장군을 역사 위로 올린 죄로 선조(宣祖)에 의해 장살(杖殺)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의병(義兵) 출정식에 정지 장군이 생전에 입었던 갑옷까지 입고 나타나 연설까지 했었다. 김덕령은 귀선(龜船)이 누구에 의해 무엇 때문에 사라진 줄 모르고 한 일이었다.
1371년 개중법(開中法)으로 실크로드 진상방(晉商幇)과 결탁하기 전까지 주원장(周元璋)은 해금(海禁)이라고 불리는 해상무역 금지조치를 하지 않았다. 금지(禁止)는커녕 자신이 천하를 통일하는 결정적 계기를 파양호(鄱陽湖)에서 있었던 수전(水戰) 승리에서 찾았을 만큼 제해권(制海權)에 높은 가치를 두고 있었다. 회수(淮水) 이북의 홍건적(紅巾賊) 소두목 정도였던 그를 명(明) 제국의 황제로 만든 건 1356년 소호(巢湖)의 장군 요녕안(廖永安)과 유통해(俞通海)가 천척(千隻)의 배를 이끌고 항복해 와 이를 이용해 장강(長杠)을 도하(渡河)해 강남(江南) 경제권의 중요한 요지였던 응천부(應天府:지금의 남경)를 장악(掌握) 한 것 그리고 1360년 장강의 제해권(制海權)을 놓고 벌인 파양호(鄱陽湖) 대전(大戰)에서의 승리였다. 장강(長江)의 중상류 제해권을 가진 진우량(陳友諒)과 장강 하류의 제해권을 가진 주원장의 파양호 대전은 처음에는 누구나가 다 높이가 십여 장(30m)이나 되고 3겹으로 만들어져 말 달리는 마구간(馬棚)까지 있던 거대한 누선(樓船)을 수백 척 가진 60만 병력의 진우량이 쉽게 이길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주원장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 승리는 파양호 대전 직전에 이선장(李宣長)이 추천해 주원장 측에 합류한 호유용(胡惟庸)이 가져온 복선(福船) 때문이었다. 진우량의 누선(樓船)이 전통적인 조선법(造船法)으로 만든, 선수(船首)와 선미(船尾)가 모두 네모난 판옥선 모양의 거대한 몽충선(몽둥선, 艨艟船)이었던데 반해 호유용(胡惟庸)이 가져온 복선(福船)은 선수(이물, 船首)가 이등변삼각형 꼭지 모양으로 뾰족하고 선미(고물, 船尾)가 장방형의 п 모양을 하고 있는 귀선(龜船)이었다. 당연히 복선(福船)은 귀선(龜船) 답게 빠른 속도로 항해하며 화약으로 발사되는 함포(艦砲) 사격으로 느린 누선(樓船) 들을 격침(擊沈)시키며 결정적 승리를 이룩했다.
복선(福船)이라는 이름은 복건성(福建省)에서 건조(建造)한 배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복건성(福建省)의 장주(漳州) 앞바다에는 하문도(廈門島) 그리고 금문도(金門島)와 소금문도, 대담도(大膽島)와 이, 삼담도(三膽島)등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데 그중 가장 특이한 섬은 쌍어도(雙魚島 Shuang Yu Dao)였다. 중국인들은 쌍서도(雙嶼島)라고 쓰고 똑같이 Shuang Yu Dao라고 발음한다. 쌍서항(雙嶼港)의 다른 이름은 쌍치항(雙峙港)이고 발음은 Shuang Zhi 다. 쌍어도(雙魚島)는 복건성(복건성) 하문도(廈門島) 옆에 있고 쌍치항(雙峙港)은 주산도(舟山島)의 육횡도(六橫島)에 있다. 길삼봉(吉三峯)을 중국인들은 Ji San Feng이라 발음한다. 길삼봉의 길삼(吉三)은 쌍치항의 쌍치(雙峙)를 거꾸로 읽은 발음이다.
당시 황하는 지금처럼 발해만(渤海灣)으로 흐르지 않았다. 1289년 원나라를 끝내 멸망케 한 황하의 유역변경(流域變更)이 일어났다. 황하(黃河)가 춘추전국시대 위(魏) 양혜왕(梁惠王)이 뚫은 홍구(鴻溝)를 따라 남류(南流)해 영하(潁河 Yinghe)를 타고 회수(淮水)로 들어가 홍택호(洪澤湖)를 지나 회안(淮安)과 빈해(濱海)를 거쳐 바다로 들어가는 엄청난 유역변경이었다. 회안(淮安)과 빈해현(濱海縣)에 하얀 흙, 질산나트륨이 쌓이기 시작했다. 회안(淮安)에서 퍼담아진 황하 하구의 하얀 흙들은 배(船)로 한구(汗溝)와 절동운하(浙東運河)를 통해 영파(寧波)까지 적은 비용으로 운반(運搬)되었다. 명나라 조정(朝廷)에서 강력한 거래 통제를 가하는 황(黃)은 일본에서는 지천에 널린 흙 같은 거였다. 게다가 1506년 일어났던 중종반정의 결정적 원인이 된 최신식 은추출법(銀抽出法)인 회취법(灰吹法)이 조선에서 기술 유출되어 무상으로 일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납(鉛) 함량이 많았던 일본의 은광석(銀鑛石)에서 뽑아내는 은(銀)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대되어 있었다. 명나라 황제 정통제(正統帝)를 몽골 오이라트의 포로(捕虜)가 되게 하여 황제 자리에서 끌어내린 토목보의 변(1449)이 일어난 건 정통 원년(1435)부터 실시한 은(銀)이나 비단(緋緞)으로 세금(稅金)을 납부하게 한 금화은(金花銀) 제도 때문이었는데 이런 조세(租稅)의 은납화(銀納化)로 인해 명나라 또한 은(銀)의 유통이 크게 늘어나 은(銀) 수요(需要)는 그야말로 확대일로(擴大一路)에 있었다.
1555년 을묘왜변이라 불리는 사변으로 강진의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에서 비축(備蓄)하고 있던 막대한 화약(火藥)을 약탈해 간 것은 왜구가 아니었다. 화약(火藥)을 노리고 70척의 귀선(龜船)을 타고 고토(Goto 五島)에서 건너온 아쿼버스(Arquebus)로 무장한 6천 명의 군대는 왕직(汪直)이 이끄는 명나라 해적단이었다. 명나라와 일본을 오가며 해적질을 했다는 왕직의 일본 쪽 본거지는 고토(五島 Goto)였고 그래서 그는 오봉(五峯)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그의 명나라 쪽 본거지는 지금 주산도(舟山島)의 육횡도(六橫島)로 알려진 쌍서도(雙嶼島 Shuang Yu dao)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진짜 슈앙유다오(雙魚島)는 주산도(舟山島)에 있는 섬이 아니었다. 절민제독(浙闽提督) 주환(朱紈)이 오봉(五峯, 왕직)의 전임자였던 허동(許棟)과 이광두(李光頭)를 토벌한 곳은 지금 주산도(舟山島)의 육횡도(六橫島)로 알려진 쌍서도(雙嶼島 Shuang Yu Dao)이지만 진짜 ShuangYudao는 복건성(福建省) 하문도(廈門島) 옆에 있는 쌍어도(雙魚島 Shuang Yu dao)였다. 그리고 그들의 주력 밀무역(密貿易) 상품은 화약(火藥)이었다.
일본에서 은(銀)을 값싸게 사서 명나라로 들여와 회안(淮安)에서 그냥 퍼담는 황하 하류의 하얀 흙(질산나트륨)을 주산도(舟山島)의 쌍서항(육횡도)으로 운반케 한 후 그곳에서 자취법(煮取法)으로 염초(焰硝)를 구워내는데 일본 은(銀)의 일부를 사용했다. 남은 은(銀)으로는 일본인이 좋아하는 비단과 차(茶)와 염초(焰硝)를 담을 자기(瓷器)들을 구입(購入)했다. 그렇게 구워낸 염초(焰硝)와 비단, 자기(瓷器)를 다시 일본으로 가져가 일본에서는 값이 싼 황(黃, sulfur)을 비단으로 사고 남은 비단과 일부 자기(瓷器)들은 좋은 가격으로 일본 은(銀)을 받고 팔았다. 그렇게 확보한 황(黃)을 일본 평호도(平戶島)와 오도(五島)에서 염초(焰硝)와 숯(炭)과 함께 비율대로 섞어 흑색화약을 제조했다. 완성된 화약과 차(茶)를 자기(瓷器)에 담아 벌어들인 은(銀)과 함께 다시 하문(廈門) 쌍어도(雙魚島)로 돌아왔다. 쌍어도에 들어와 있는 포르투갈 인들은 이 자기(瓷器)에 담긴 화약과 차(茶)를 엄청난 고가(高價)에도 아랑곳 않고 은(銀)으로 값을 치르고 모두 가져갔다. 일본 학자 등전풍팔(藤田豐八)이 16세기의 상해(上海)라고 불러야 할 곳은 절강성 주산도(舟山島)의 쌍서도(Shuang Yu Dao 雙嶼島)가 아니라 복건성 장주(漳州) 하문도(廈門島)의 쌍어도(Shuang Yu Dao 雙魚島)였다.
선조(宣祖)와 정철(鄭澈)이 그토록 찾던 길삼봉(吉三峯)은 바로 하문(廈門)의 쌍어도(雙魚島)에 명(明) 황제(皇帝) 몰래 들어와 있던 포르투갈 상인이었고 그들은 1580년 스페인 황제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을 강제 합병해 동군(同君) 연합 국가를 만들어 버림으로써 스페인 상인이 되어 있었다. 삼봉이란 자는 낯빛은 검으며 몸은 비대하다는 묘사와 키는 크며 얼굴은 파리하다는 진술, 수염이 길어 배에까지 드리워졌으며 낯빛은 검고 키는 크며 말할 때마다 기침을 한다는 용모파기(容貌疤記)는 모두 포르투갈 인들과 스페인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부가 복건성 쌍서(雙嶼, Shuang Yu Dao)에서 왔음을 일부는 일본 오도(五島)에서 왔음을 밝혔다. 쌍서(雙嶼)는 쌍치(雙峙)라는 다른 이름이 있었고 오도(五島 goto)는 오봉(五峯)이란 그들끼리의 이칭(異稱)이 있었다.
차무역(茶貿易)을 독점하려는 실크로드 진상방(晉商幇)의 탐욕으로 일본과의 해상 무역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던 당시의 국제질서 속에서 한 푼이라도 벌어먹고 살려는 사람들의 생존욕은 그만큼 강렬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지켜줄, 비밀을 유지해 줄 암호가 필요했다. 쌍치(雙峙)의 중국 발음은 Shuang Zhi였고 그걸 San Ji로 들어 한자로 옮긴 조선인들은 그걸 다시 역으로 바꾸고 오봉(五峯)의 봉자(峯字)를 합쳐 길삼봉(吉三峯)이라는 암어(暗語)를 만들어 냈다. 허동(許棟)과 이광두(李光頭)가 건설한 일본과 중국 그리고 포르투갈을 연결하는 무역로의 중심, 쌍서도(雙嶼島)를 박살 내 명나라의 충신으로 칭송받던 주환(朱紈)은 그의 토벌(討伐)로 또다시 생업을 잃고 굶주림의 질곡에 빠지게 된 수십만 백성들의 원성으로 결국 자살까지 몰리게 되었다. 덫에 걸려 독직(瀆職)의 누명을 벗을 길 없게 된 주환(朱紈)은 자살하기 전 이렇게 읊조리며 자살했다고 명사(明史)는 기록하고 있다. 吾贫且病 又负气 不任对簿. 纵天子不欲死我 闽浙人必杀我. 吾死 自决之 不须人也. 나는 가난하고 병들고 또 기운도 꺾여 장부(簿)에 따른 책임을 질 수가 없다. 설령 천자가 나를 죽이려 하지 않더라도 복건과 절강 사람들이 반드시 나를 죽이려 할 것이다. 내가 죽고 자결하는 데 사람은 필요 없다.
실크로드 진상방(晉商幇)과 결탁한 명(明) 황실의 해금(海禁) 정책으로 절강성과 복건성의 연안 백성들 수십만 명이 내륙으로 강제 이주 당했고 그들의 선박들을 비롯한 수천 년 터전은 불태워졌다. 그런 명 황실의 졸개로 사대(事大)를 국시(國是)로 내건 조선 또한 해금(海禁) 정책을 펴야 했고 수 천년을 이어온 일본과의 그리고 세계와의 해상무역 또한 중지해야 했다. 명나라에서는 허동과 이광두를 죽이고 주환(朱紈)이 죽었고 왕직(汪直)을 죽이고 호종헌(胡宗憲)이 죽었으나 조선에서는 정여립(鄭汝立)과 이발(李潑), 최영경(崔永慶)을 비롯한 천명의 선비들만 죽었다. 그리고 후일 책임져야 할 선조(宣祖)는 살고 충무공 이순신(李舜臣)만 죽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죽고 6일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남미에서만 나는 독에 의해 독살되었다. 그리고 석 달 후 노량에서 이순신은 포르투갈에서 온 킬러에 의해 저격 암살되었다. 모든 건 화약이 불러온 일이었다. 모든 건 펠리페 2세의 과욕 때문이었다. 모든 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탐욕 때문이었다. 모든 건 고려의 르네상스를 파괴한 조선 왕실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宣祖)는 천수(天壽)를 누렸다. 끝까지 그 모든 걸 하느님처럼 주관한 푸거에 대해서 함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왜곡된 시간이 흘러 자기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인 영조가 조선의 왕이었던 시절, 영남 균세사 박문수가 아뢰기를, “신이 전선과 귀선의 제도를 상세히 보았더니, 전선은 매양 개조할 때마다 그 선체가 점차 길어져 운용하기가 매우 어렵고, 귀선에 있어서는 당초 체제는 몽충과 같이 위에 두꺼운 판자를 덮어 화살과 돌을 피했습니다.…” 하였다. ; 嶺南均稅使朴文秀奏曰 臣詳見戰船龜船之制 戰船 則每於改造時 其體漸長 決難運用 至於龜船 則當初體制 如艨衝 上覆厚板 以避矢石. - 영조실록 권제 73, 영조 27년 2월 21일 기축
전선(戰船)은 판옥선(板屋船)이었고 귀선(龜船)은 후일 유럽인들의 대항해(大航海) 시대를 열게 해 준 카라벨(caravel)이었다. 귀선(龜船)은 신안선(新安船)과 카라벨(caravel)과 똑같은 선체 구조를 가지면서 몽충(艨衝)처럼 두꺼운 판자를 덮어 방어력을 높인, 바다 파도를 가르며 쾌속(快速)하는 돌격선(突擊船)이었다. 귀선은 판옥선이 아니었고 두꺼운 판자가 덮어진 2층 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