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역맥파인더 Jan 15. 2024

House of Fugger - 거북선의 진실 4

장영실과 정화함대의 진실

備邊司啓曰 日本 倭人 平長親所持來銃筒 至爲精巧 所劑火藥 亦猛烈. 不可不賞. 請從其願 以授堂上何如 答曰 如啓. 비변사가 아뢰기를 일본(日本) 왜인(倭人) 평장친(平長親)이 가지고 온 총통(銃筒)이 지극히 정교하고 제조한 화약도 또한 맹렬합니다. 상을 내리지 않을 수 없으니, 바라건대 그의 원대로 당상의 직을 제수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1555) 5월 21일 갑인

一. 雖學百枝 勇士如雲 非火藥 決不可當此. 焰硝一事 曾爲留意 幸而傳習倭法 而唐焰硝海水煮成之法 則至今無人傳習. 今宜各別下令 果能傳習其海水煮成法者 則有職人陞堂上 其下除授高職事. 온갖 기술을 배운 용사(勇士)들이 구름처럼 모였다고 하더라도 화약(火藥)이 없으면 결코 대응할 수가 없다. 염초(焰硝) 문제는 일찍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다행히 왜법(倭法)을 배우기는 했다. 그러나 중국의 기술인 바닷물을 구워서 염초(焰硝)를 만드는 법은 지금까지 배운 사람이 없으니, 지금 각별하게 명을 내려 바닷물을 구워 염초 만드는 법을 배운 자가 있으면, 직(職)이 있는 자는 당상관으로 승진시키고 그 이하는 높은 직을 제수토록 하라. -선조실록 42권, 선조 26년(1593) 9월 8일 기미 5번째 기사

傳于備邊司曰 卿等旣令擧事 此國家莫大之擧 而了無措置之策. 卿等處事 何如是耶 非火藥 不能制此賊. 今宜下送砲手數百 火藥數千斤 火箭 震天雷稱是 送于都元帥處 召募四方勇力之士. 비변사에 전교하였다. 경들이 이미 거사하려고 하나 이는 국가의 막대한 중사인데도 전혀 조처하는 계책이 없으니 경들의 처사가 어찌하여 이러한가? 화약(火藥)이 아니면 이 흉적을 제어할 수 없다. 이제 포수(砲手) 수백 명을 내려보내야 하니, 화약 수천 근(斤)과 화전(火箭)·진천뢰(震天雷)를 이에 맞게 하여 도원수가 있는 데로 내려보내라. 그리고 사방의 용력이 있는 장사를 모집하게 하라. - 선조실록 46권, 선조 26년(1593) 12월 18일 정묘


유럽의 서쪽 끝 변방에 8백여 년 동안이나 무슬림들에게 짓밟혔 있던 스페인이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大帝國))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화약 무기 덕분이었다. 화승총(火繩銃)인 아쿼버스(Arquebus)를 쏘는 총병(銃兵)들을 주력으로 하여 장창병(piker)들과 중장갑(重裝甲)을 하지 않은 경기병(輕騎兵)들 이렇게 세 병과(兵科)로 구성된 1000명을 하나의 방진(方陣)으로 세 개의 방진이 코로넬(Colonel)에 의해 지휘되는 테르시오(Tercio)라 불리는 편성으로 군사적 패권(霸權) 을 장악한 스페인이었다. 귀선(龜船)인 카라벨(Caravel)에 화포(火砲)를 더 많이 설치하고 더 많은 화물을 싣기 위해 선미부(船尾部)를 이층(二層)으로 한층 더 높게 그리고 더 넓게 설계한 카락(Carrack)도 개발했다. 이탈리아인 같지 않게 생긴 오히려 150년 뒤에 태어난 네덜란드 화가 램브란트와 닮은 얼굴의 콜럼버스(Columbus)가 기함(旗艦)으로 삼아 1492년 카리브해에 상륙할 때 사용했던 산타 마리아호가 1000톤 급의 대표적인 카락(Carrack)이었다. 카(Ka, Cha, Ca, Ta)는 차(茶)를 민족마다 다르게 하는 발음이었고 락(rack)은 차(茶)들을 배로 실어 나를 때 많은 양을 손상 없이 싣기 위해 차(茶)들을 얹을 수 있는 막대들을 가로질러 만든 시렁을 의미했다. 카라벨(Caravel)이란 이름도 귀선(龜船)의 설계도가 조선에서 왔기에 조선의 옛 이름인 가라(加羅, 伽羅, 迦羅 ) 에다가  ~와 같이, ~과 마찬가지로 라는 뜻의 라틴어 vel을 합성해 가야와 같이, 가야와 마찬가지로 (만든 배) 란 뜻이었다.


배이름에 이런 뜻을 지닌 카락(Carrack) 두척과 카라벨(Caravel) 세척으로 이루어진 선단(船團)으로 시작된 스페인의 정복사업은 휘황찬란한 역사를 만들어냈다. 1519년 겨우 600명의 아쿼버스 총병(銃兵)만을 데리고 코르테스(Cortes)에 의해 개척된 신스페인 부왕령((副王領, viceroyalty: 멕시코)의 사카테카스(Zacatecas)와 1532년 168명 만을 이끌고 파나마를 떠난 피사로(Pizarro)가 점령한 페루 부왕령(副王領)의 포토시(Potosi)에서 1545년과 1546년 연속 개발된 은광들에서 은(銀)이 쏟아지면서 스페인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 모두가 화약 무기로 이룬 성과였다. 인구 2천만 명의 아즈텍(Azteca) 제국을 그리고  인구 1천만 명의 잉카제국을 모두 괴멸(壞滅)시킨 건 화약에서 나온 이산화황 가스였다. Schwarzer Tod (흑사병)였다.


만년설(萬年雪)을 뒤집어쓴 알프스 산맥으로 둘러싸여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땅에서 유럽 제일의 왕가로 우뚝 선 합스부르크가(家)의 굴기(倔起)는 푸거가(House of Fugger)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 프리드리히 3세와 막시밀리안 1세 같은 합스부르크家(House of Habsbrug)를 일으켜 세운 인물들과 안드레아 푸거(Andreas Fugger), 제이캅 푸거(Jacob Fugger) 같은 푸거가(家) 사람들의 대(代)를 이어간 관계는 두 가문의 영광을 가져온 역사상 가장 찬란한 제휴(提携 partnership)였다. 카를로스 1세(Carlos1=카를 5세) 때까지도 빛나기만 하던 두 가문의 협력이 삐걱거린 건 그 찬란한 영광을 가져다준 화약 때문이었다. 명나라 영락제의 쿠데타(1402년에 끝난 4년간의 정난의 변(靖難之變)을 지원해 성공시킨 마린 로드 상방(商幇)의 유럽 지부(支部)가 푸거가(家)였기에 이후 푸거가는 정화(鄭和) 함대(艦隊)를 통해 그들이 간절히 원했던 차(茶)와 화약(火藥), 무기 등 모든 것을 충분히 지원받았다.


실크로드 진상방(晉商幇)과 개중법(開中法)으로 결탁해 일본 찻잎(茶葉)이 세계시장에 나오지 못하도록 그토록 탄압했던 명(明) 나라가 쿠데타로 영락제(永樂帝)가 즉위한  다음 해인 1403년부터 1523년 영파(寧波)의 난으로 중지될 때까지 감합무역(勘合貿易)이라는 이름으로 일본과의 교역을 본격화했던 연유였다. 감합무역이란 별칭(別稱)으로 화약의 원료인 유황(硫黃)과 함께 일본 찻잎(茶葉)을 수입해 세계로 수출될 수 있도록 지원한 건 1401년 정난의 변 마지막 결정적 시기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반란군의 역전(逆轉)을 도운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의 활약을 영락제가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푸거가(家)가 처음부터 성공가도(街道)만을 순조롭게 질주(疾走)할 수 있었던 것은 화약과 총통(銃筒), 일본 찻잎(茶葉)은 물론 조선에서 연구, 개발한 대양(大洋) 항해에 필요한 천문학(天文學)과 귀선(龜船) 같은 선체(船體) 설계(設計)등 관련 과학기술들까지도 정화(鄭和) 함대(艦隊)를 통해 지원받았기 때문이었다. 조선실록의 기록과는 달리 영락제가 죽기 전해인 1423년까지만 조선에서 활동했던 일명 장영실(蔣英實)이 만든 혼천의(渾天儀) 같은 각종 천체(天體) 관측(觀測) 기구들과 여러 시계(時計)들은 모두 대양(大洋) 항해(航海)와 관련된 필수적인 과학기술들이었고 따라서 이들은 1422년에 끝난 정화(鄭和) 함대(艦隊)의 하서양(下西洋)을 통해 고스란히 푸거가의 손에 전달되었다. 이렇듯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조선과 일본을 통해 마린 로드 상방(商幇)을 지원한 것은 영락제의 쿠데타 원죄(原罪)때문이었다. 아버지 태조와의 맹약(盟約)을 내세운 실크로드 진상방(晉商幇)의 핏발 선 감시를 따돌리면서 자신이 마린로드 상방(商幇)과 맺은 밀약(密約)을 지키기 위한, 하서양(下西洋)이라 불리는 정화(鄭和) 함대(艦隊)의 운항(運航)을 계속하려는 영락제의 고육지책(苦肉之策) 때문이었다.


달력(Calendar)마저도 천자국(天子國)만이 연구해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며 조선의 천문학 연구를 금지시켰던 명(明) 나라가 장영실(蔣英實)은 명으로 초청까지 해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천문 관측 기구들을 모두 내보이며 견학까지 시키며 적극적으로 공부하게 한 연유였다. 영락제가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자금성(紫禁城)을 건설하고 북경을 북방유목민족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장성(長城)을 따로 이중으로 쌓고 게다가 삼려오출(三黎五出)로 평생을 북쪽 변방의 천막에서 군대를 이끌며 살아야 했던 건 진상방(晉商幇)의 사주(使嗾)에 의한 자객(刺客)들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친가, 외가, 처가를 뜻하는 삼족(三族)이 멸족당해도 못(池)이 파지는 전제군주시대에 방효유(方孝孺)는 영락제의 이 비밀을 알고 있었기에 십 족(十族)이 멸족되었고 이 비밀이 적힌 서적을 찾기 위해 영락대전(永樂大典)의 편찬(編纂)을 핑계 삼아 모든 서적들의 검열(檢閱)이 이루어진 연유였다. 복건성의 한(韓)씨가 푸거가(家)가 되어 유럽에서 거둔 휘황(輝煌)한 성공에는 수많은 중국인들의 피와 조선 태종, 세종대의 과학기술 발전이 받침으로 쓰이고 있었다. 마린로드 상방(商幇)이 영락제를 지원한 건 그가 다른 형제들과 달리 토인(土人)에 가까운 까만 피부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영락제도 그것 때문에 많은 차별을 받아야 했고 그것이 부당하다고 늘 생각했다. 부당(不當)한 건 언제나 탈(頉)이 난다. 경영 효율화를 위해 이뤄진다는 오늘날의 아웃소싱(outsourcing)의 창시자는 바로 영락제였다. 조선의 태종은 영락제 아웃 소싱의 귀중한 파트너였다.


화약 무기의 절대성을 유럽 전역에 홍보(弘報)하고자 오스만 튀르크를 지원(支援)해 비잔틴(Byzantine)이라 불리던 동로마제국을 우르반 대포로 멸망시킨 1453년은 유럽의 앙샹 레짐(구체제)을 무너뜨리려는 푸거가(家) 사업의 한 분기점(分岐點)이었다. 조선과 일본이 연결되어 있는 중국 동해를 인도양과 흑해, 지중해로 연결시켜 대륙세계를 모두 바다와 통하게 하려는 마린 로드 상방(商幇)의 세계화 전략은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로스 해협에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성벽(城壁)으로 가로막고 서있던 콘스탄티노플을 우르반의 대포로 무너뜨린 거였다. 그림 한 장으로라도 얼굴을 남기지 않은 우르반(Urban)을 헝가리인으로 만들어 콘스탄티노플로 보낸 건 헝가리에서 구리 광산을 개발하던 푸거였다. 이렇게 잘 진행되던 유럽에서의 세계화 작업이 뒤틀리기 시작한 건 1449년 토목보(土木堡)의 변(變)이 일어나고서부터였다. 실크로드 진상방(晉商幇)이 또다시 북방 유목 민족을 용병(傭兵)으로 움직인 이후부터였다. 몽고 오이라트족장 에센을 사주해 명나라를 침략하는 것도 모자라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 이후 처음으로 황제가 사로잡혀 버리는 사태가 일어났다. 유방은 월지를 쫓아내기 위해 흉노의 묵돌선우와 짜고 한 일이었지만 이번 토목보는 그런 것도 없이 화약무기를 맹신(盲信)한 판단착오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부출어토(賦出於土) 역출어정(役出於丁)이라며 부역(賦役)을 현물(現物)로만 납부하게 되돌렸던 명 태조의 완강(頑強)했던 현물(現物) 정책은 그러나 가족과 떨어져 지방관으로 향리(鄕里)에 파견된 관리들의  녹봉(祿俸) 지급 문제가 불거지면서 와해(瓦解)되기 시작했다. 남경이 수도(首都)였던 시절엔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으나 수도(首都)를 북경으로 천도(遷都)한 이후부터는 지방관들의 녹봉(祿俸) 문제가 현안(懸案)이 되었다. 촌(村)에서 현물인 쌀로 받은 녹봉(祿俸)을 가족들이 있는 북경까지 운반하는 것도 문제인데 그사이 쌀의 가격이 등락(騰落)하여 사실상 감봉(減俸)된 지방관들이 속출했다. 지방관(地方官)으로 봉직(奉職)하는 관리들이 오히려 현물보다 비단이나 금(金), 은(銀)으로 녹봉을 받기를 원했다. 결국 금(金)이나 은(銀)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조세(租稅)의 금납화(金納化)가 장강 이남에서 금화은(金花銀)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 정책을 시작한 것이 몽고 에센의 포로가 된 명(明 ) 6대 황제 정통제(正統帝)였다. 실크로드 진상방(晉商幇)이 좌시(坐視)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금(金)과 은(銀)으로 거래하는 것이 허용되면 고가(高價)의 대량(大量) 거래가 성행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누구나 다 선박(船舶)을 통한 대량의 차(茶) 거래를 선택할 것이 뻔했다. 결국 마린 로드 상방의 순탄한 전성시대는 파란(波瀾)을 겪어야  했다.


중국 마린 로드 상방의 지원이 없어지자 푸거가의 초점은 합스부르크 제국과 교황청으로 모아지게 되었다. 초점(焦點)이 맞춰졌다는 것은 그만큼 더 높은 수익률(收益率)을 올리려 쥐어짰다는 걸 의미했다. 화약과 화약 무기를 합스부르크가(House of Habsburg)에 전폭 지원한 푸거(Fugger)는 그를 통해 합스부르크 제국이 뚜렷한 군사적 성공을 거둘 때마다 전 유럽에 그것을 홍보했다. 뽕나무와 누에가 자라는 유럽 비단 생산의 중심, 시실리 영유권(領有權)을 두고 유럽 최강 중장갑(重裝甲) 기마군단과 스위스 장창병(長槍兵 piker)으로 이뤄진 프랑스군과 맞붙게 된 스페인의 코르도바 장군은 체리뇰라(Cerignola) 전투에서 화약 무기인 아쿼버스(Arquebus)를 쏘는 총병(銃兵)으로 거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게 1502년이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화약과 무기를 더욱 많이 푸거에게서 샀다. 차용증만 쓰면 그 귀한 화약을 구할 수 있었다. 스페인 제국이 성공하면 할수록 Fugger 가(家)의 재산만 늘어난다고 후일 펠리페 2세가 되는 젊은 황태자가 생각할 정도로 푸거에 대한 의존은 심화되었고 모든 유럽 나라들은 앞다투어 화약과 총(銃)을 사기 위해 푸거 앞으로 줄을 섰다. 초대 교부시대부터 금지되어 온 이자수취를 허용하고 면죄부를 판매하는 등의 교황청 실수 뒤에는 언제나 푸거가 있었다.


푸거 가문이 유럽에 나타난 것은 한스 푸거가 아우구스부르(Augusbrug) 시청에 나타나 전입 신고를 한 1367년이었다. 프랜시스 코폴라의 대부(God Father)라는 영화에서 뉴욕의 이민관이 시실리에서 건너온 어린 주인공의 성(surname)을 잘 못 알아듣게 되자 출발지를 적은 가슴의 표(tag)를 보고 고향 이름인 콜레오네라고 그냥 적어버리듯 아우구스부르 시청의 전입 심사관 또한 오랜 전통에 따라 그의 고향을 묻고는 오랜 관행대로 들리는 대로 적었다. 적힌 그의 이름은 HansFucker였다. 그가 대답한 건 복건성(福建省)에서 온 한(韓)씨였다. 지금 중국인들은 푸젠(Fujian)이라고 발음하지만 영국인들은 푸켄(Fukien)이라고 적는다. 우리말로 복건이니 푸켄이 더 맞을 성싶다. 그렇게 독일 그라벤(Graben) 출신 농민으로 신분 세탁된 복건성에서 온 한 씨는 그러나 푸켄(福建) 출신답게 놀라운 상재(商才)를 보이며 승승장구한다.


중국에서 어렵게 들어온 비단과 차(茶)를 토대로 기본적인 사업 자금을 확보한 후 신성로마제국의 자유도시(自由都市) 아우구스부르의 직물 유통업계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Hans Fugger는 곧 내로라하는 집안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 수은(水銀)과 다른 금속이 합금되는 아말감(Amalgam) 원리를 알고 잘했던 푸켄 사람은 구리판 위에 수은을 충분히 발라준 다음 미세금(微細金)이 들어있어 당시 유럽인들이 추출(抽出)을 포기하던 금광석을 물속에서 으깨 가루로 만든 후 그 가루를 물과 함께 수은이 발라진 구리판 위에 흘려보냈다. 그러면 수은이 발라진 구리판 위에는 금과 합금된 아말감이 남았고 그것들을 긁어모은 후 용광로에 넣고 가열하여 동(Cu)- 수은(Hg) - 은(Ag) - 금(Au) 순서로 기체화되는 성질을 이용해 한스 푸거는 금을 만들어냈다. 한스(Hans)는 금 제련사(製鍊師)인 두 아들을 두었는데 안드레와 야곱이었다. 큰아들 안드레는 Gold worker로 축적한 자본을 가지고 직물업에 뛰어들어 남들이 취급하지 못했던 양탄자(Asian Rug)를 사고팔아 대상인(Merchant)이 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복건성에서 온 한스의 둘째 아들은 이름이 야곱 푸거였는데 그의 장인은 아우구스부르의 자체 화폐인 은화(銀貨)를 주조(鑄造)하는 조폐소(造幣所)를 운영했다. 나인 하프 위크에서 미키 루니와 농염한 연기를 펼치던 킴 배이싱어(Basinger)와 같은 성씨를 쓰는 장인 프란츠 베징거(Basinger)를 통해 그는 자연스럽게 금융업(金融業)에 진출했다. 그의 막내아들은 후일 금융업은 물론 화약 무기사업에 뛰어들어 황제들을 능가하는 부를 이룩한 야곱 푸거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을 위해 Hans(한 씨)의 둘째 아들은 the Elder 라 했고 Hans의 손자는 the Younger 또는 the Rich라 불렀다. Jacob Fugger the Younger(the Rich)는 어려서 베네치아로 가서 자산(資産) 항목에 들어가는 부채(Liability)의 개념을 깨닫는 복식부기(複式簿記)를 배웠고 마르코 폴로의 역사가 살아있는 그곳에서 칭기즈칸의 오르톡(Ortoq) 시스템을 연구했다. 화약 무기의 폭발적인 확산을 확신한 그는 대포를 만드는 청동(靑銅)의 원료가 되는 유럽의 구리 광산을 독점했고 화약(火藥)과 차(茶)를 사 오기 위한 중국과의 교역에 필요한 은(銀)을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유럽의 수은 광산을 독점했다. 카를 5세가 푸거가의 수장(首長)이 금융업이나 상업이 아닌 광산업자가 되었다고 놀랄 정도로 제이콥 푸거(Jacob Fugger the rich)는 전쟁 산업 준비에 골몰했다.


펠리페 2세의 불평대로 합스부르크의 성공은 푸거가의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부로 귀결되었다. 결국 카를 5세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로 이뤄진 신성로마제국내 합스부르크 왕국을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물려주고 카를로스 1세로 다스리던 스페인과 신대륙 아메리카로 이뤄진 제국을 아들 펠리페 2세에게 각각 물려주며 이후 수도원에 들어가 칩거(蟄居)해버렸다. 야곱 푸거 the rich 에게서 온 상환독촉장이 결국 제국(帝國)을 분할하게 하고 퇴위(退位)하게 한 것이었다. “소신(小臣)이 없었다면 폐하(陛下)께서는 황제관을 쓰지 못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빌려드린 돈에 이자까지 계산해 지체 없이 상환토록 명하소서.” 1523년에 23살의 카를 5세 앞으로 82세의 야곱 푸거 2세가 보낸 상환독촉장이었다. 결국 상환금이 들어오지 않은 걸 확인하고 푸거제국의 창시자 야곱 푸거 2세는 1525년 죽었다. 화약과 오래 같이 한 결과로 후사(後嗣)가 없었던 그는 푸거제국의 형체 없는 왕관을 둘째 형 조지(George)의 아들 안톤에게 물려줬다. 빚을 갚지 않는 자에게 교훈을 주라는 그의 유언을 받아 오스트리아의 빈(Wien)으로 오스만 튀르크의 군대가 물밀듯 쳐들어 온 건 1529년이었다. 오스만 튀르크는 실크로드 상방(商幇)이 북방 유목(遊牧) 민족들을 자신들의 용병(傭兵)으로 관리한 것처럼 푸거가의 지원군(支援軍)으로 오래전부터 육성되어 온 나라였다. 1402년 티무르(Temur)가 오스만의 바예지드(Bayezid) 1세를 앙카라 전투를 통해 포로로 잡은 연유였다.


푸거의 화약지원으로 그 세력이 커진 프로테스탄트들을 인정해 주는 아우구스부르 화약서(和約書)에 도장을 찍기가 싫었던 카를 5세는, 푸거의 압력에 밀려 겁먹고 돈 갚은 채무자가 되기 싫었던 카를로스 1세는 대신할 동생 페르디난트 1세를 내세워 그의 이름으로 화약서(和約書)에 도장을 찍게 했고 아들인 펠리페 2세를 시켜 채무불이행((債務不履行 default)을 선언하게 했다. 그리고 1556년 1월 16일 수도원으로 잠적했다. 채무 불이행(債務不履行)은 지금까지 푸거가 공급해 온 모든 물자가 끊긴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전쟁 상태에 있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영국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스페인군에게 화약이 보급되지 않는다는 걸 의미했다. 어차피 유럽에서 소요되는 모든 화약은 모두 푸거에게서 사 와야 하는 전략물자였다.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든 스페인이든 네덜란드든 그들의 총구에 그리고 대포에 들어가는 화약은 모두 푸거에게서 나왔다. 디폴트(default)를 선언하기 전 대포와 아쿼버스는 이미 자체 생산이 가능하다는 보고를 받은 펠리페 2세였다. 문제는 화약인데… 멀리 중국에서 왕직(汪直)이 고맙게도 그 귀한 화약(火藥)을 20톤 넘게 포르투갈 친구들을 통해 보내 주었다.


화약 26,829 근(斤=0.6kg)을 비축하고 있던 전라병영성을 약탈한 1555년 을묘왜변의 결과였다. 푸거는 마린로드 상방에게 채무불이행을 보고했다. 합스부르크가(家)가 더 이상 마린로드 상방의 오르톡(Ortoq=Partnership)이 아님을 보고한 것이었다. 1557년 중국 광동(廣東) 마카오에 포르투갈 상인들의 거주와 무역을 허락하는 조칙(詔勅)이 해금(海禁)을 그리도 고집했던 가정제(嘉靖帝)로부터 내려졌다. 1511년부터 시작된 포르투갈 상인들의 염원(念願)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포르투갈 상인들은 이 기적이 사라질까 두려워 이제까지와는 달리 왕직(汪直)을 멀리 했다. 당연지사였다. 마카오 섬에서 명 황제로부터 허가받아 정주(定住)하면서 무역을 할 수 있게 된 포르투갈 상인들이 더 이상 해적 왕직(汪直)에게 주문(注文)을 넣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일거리가 사라진 그에게 새로 절강순안감찰어사(浙江巡按監察御史)가 되어 부임한 호종헌(胡宗憲)이 자수를 권했다. 그리하면 포르투갈 인들처럼 허가장을 가지고 무역하게 해 주겠다는 호종헌(胡宗憲)의 초무(招撫)에 일본에서 건너와 자수한 게 1558년이고 항주(杭州)에서 목이 잘린 게 1559년이었다. 오봉(五峰)이라 불려 길삼봉(吉三峯)의 한 축을 맡았던 왕직(汪直)은 그래서 그렇게 죽었다. 병부좌시랑겸도찰원좌첨도어사(兵部左侍郞兼都察院左僉都御史), 총독직절복등처군무(總督直浙福等處軍務)로 승진한 호종헌도 주환(朱紈)처럼 자살했다. 왕직(汪直)과 연결되어 왕직과 함께 성장했던 스루가국(駿河国)의 시즈오카 찻잎(茶葉) 관리자도 왕직이 사라졌으니 바뀌어야 했다. 왕직(汪直)이 죽고 더 이상 보급되지 않는 화약(火藥)은 뎃뽀(鐵砲)로 군사적 패권(霸權)을 잡았던 스루가국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를 불안하게 했다.


가이의 호랑이라 불리며 일본 최고의 기마군단(騎馬軍團)을 이끌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 그의 매부(妹夫)인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는 찻잎(茶葉)을 생산하는 스루가국(駿河国:시즈오카)은 물론 찻잎(茶葉)을 수출하는 무역로상에 있는 도토미(遠江), 미카와(三河), 오와리(尾張) 일부까지를 모두 영지(領地)로 두어 한때 천하에 가장 가까운 남자로 불렸었다. 더 이상 채워지지 않고 줄어들기만 하는 화약의 재고(在庫)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그를 성마르게 했고 결국 화약(火藥)을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지금이 쇼군(征夷大將軍)으로 올라설 전쟁을 벌일 적기(適期)라는 판단을 하게 했다. 교토로 가기 위해 거쳐야만 했던 나고야(名古屋)의 오와리(아이치현)에서 그곳의 영주였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기습을 받게 되어 그는 목이 잘렸다. 오케하자마 전투(桶狹間戰鬪)라고 불리는 시즈오카 차밭의 관리자가 바뀌는 1560년의 싸움이 일어나던 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이마가와 군이 자랑하는 뎃뽀엔 불이 댕기지 않았다. 화승총(火繩銃)인 뎃뽀에 불이 댕기지 않으면 총병(銃兵)은 게이샤(藝者)에 불과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그 점을 알았고 그 점을 노려 기습한 후 총(銃) 없는 전통의 전투를 벌였다. 결국 1555년 을묘왜란이라 기록된 왕직 군에 의한 을묘침략과 화약(火藥) 탈취사변은 1556년 아우구스부르 종교화약과 채무불이행 선언 1557년 마카오섬의 포르투갈인 정주허용 1558년 왕직의 자수와 참형 1560년 이마가와의 몰락과 오다 노부나가의 등장이라는 서로를 인과(因果)로 한 사건들을 연속(連續) 한 후 마침내 그 끝인 임진전쟁(壬辰戰爭)으로 달려갔다. 스페인 펠리페 2세의 화약(火藥) 확보를 위한 처절한 발악은 결국 조선에 임진(壬辰) 화약전쟁(火藥戰爭)을 터뜨리고 말았다. 16세기를 끝내는 그 시점에 푸거가는 이미 펠리페 2세의 합스부르크가 와 절연(絕緣)한 채 아우구스부르에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옮겨가 있었다. 동인도 회사의 역사가 시작된 연유였고 네덜란드의 고이(거지)들이 80년 세월을 유럽 제일의 황가(皇家)와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연유였다. 스스로 송(宋) 휘왕(徽王)이라 했던 왕직(汪直)의 후원(後援)으로 일본의 패권을 잡았던 이마가와와는 달리 자신의 행운으로 자신의 칼로 일어선 오다 노부나가는 그러나 센고쿠 최강의 기마군단을 보유한 다나카 신겐(武田信玄)때문에 끝내 펠리페 2세의 스페인과 연결되었다. 직전신장(織田信長)도 기마군단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화약과 총이 필요했다. 센코쿠(戰國) 시대를 끝내는 통일을 목전에 둔 직전신장(織田信長)은 그러나 명나라로부터 염초(焰硝) 교역(交易) 허가를 받아내기 위해 조선을 침략하라는 스페인 포르투갈 동군연합국의 황제, 펠리페 2세의 명령을 거부해 혼노지(本能寺)에서 불탔다.


1580년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을 합병해 포르투갈과 이미 깊숙한 경제적 연결로 맺어진 일본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 이미 세계는 충분히 그리고 깊숙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연결은 서로 다르게 이어져 있었다. 싸움은 피할 길이 없게 되어 있었다.

찾아온 젊은 황제 카를 5세를 안내하는 제이캅 푸거 2세. 개와 푸거의 헤어 스타일에 주목해야 솔즈베리가와 17C 유럽인들의 가발 미스테리를 풀 수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장영실이 제작한 혼천의. 정교한 동력장치를 이용해 천체의 운행을 재현하면서 그와 동시에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이다.  해시계인 앙부일구. 출처:아산장영실과학박물관
일본에서 복원된 산타 마리아호. 카라벨의 선미에 한층을 더 올린 모양 때문에 카락이라 불렸다. 출처:나무위키. 하루에 두번만 발사가 가능했다는 우르반 대포.   출처:위키미디어
실크로드상방의 무력이었던 티무르가 포로가 된 마린로드상방과 푸거의 무력, 오스만의 왕을 보고 있다. 고향 안휘성 황산에 2000년에 세워진 왕직의 동상. 출처:위키미디어
일본 제일의 차산지인 시즈오카와 아이치현의 전국시대 지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출처:위키미디어
야곱 푸거의 형 George Fugger의 모습. 전형적인 Afro-Hair를 보여준다. 17C 유럽인들의 가발.착용은 푸거가의 곱슬을 감춰주기 위해서였다. 출처:위키미디어 안휘성


































이전 03화 흑사병의 원인 - 거북선의 진실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