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초 프랑스 궁전(宮殿)에서 시작된 가발(假髮)의 유행은 17세기 후반 무렵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처럼 유행의 시작이 상류층이었던 까닭은 당시 젊은 왕이었던 루이 13세가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가발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남성들에게는 긴 머리 가발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는데, 17세기 초반에 유행했던 러프(Ruff)의 유행이 점차 사그라지면서 자연스레 남성들의 머리 스타일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루이 14세 시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길고 풍성한 가발이 착용되었다. 이러한 헤어스타일은 루이 14세가 선호하던 심플하고 모던한 디자인의 군복(軍服)과 잘 어울린다는 점에서 고안된 형태이다. 당시의 가발은 곱슬 거리는 머리카락이 어깨와 앞가슴 길이까지 늘어 떨어지는 모양으로 가발 자체의 크기와 무게가 상당하였기 때문에 가발을 착용하면서 일상생활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즉, 생계를 위해 육체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던 귀족들만이 착용할 수 있었던 상류층만의 가발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모양과 상황에 따라 페리위그(periwig), 풀버텀 위그(pull-bottomed wig), 퍼루크(peruke) 등으로 구분하여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가발을 착용했다. - 홍대신문(2017.2.28)
영국의 상원(上院) 의장과 하원(下院) 의장, 재판소 재판관(裁判官)들은 나폴레옹 시대와 함께 사라진 치렁치렁한 웨이브 가발(假髮)을 지금도 쓰고 있다. 그런 가발을 유럽인들이 뒤집어쓰기 시작한 건 그러나 정설처럼 되어 있는 1620년대 프랑스의 루이 13세(재위 1610-1643)부터가 아니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 - 1603)부터였다. 가발을 뒤집어쓴 이유도 모두 가발을 쓰면 누가 대머리인지 알 수 없어지기에 루이 13세가 대머리라는 것을 감춰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유럽인들과 너무도 확연히 다른, 심한 곱슬머리 머리카락을 가진 당시 복건성(福建省)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유럽인들 사이에서 감춰주기 위해서였다. 그 사람들의 대표(代表)가 푸거가(家) 사람들이었다. 흑인의 곱슬머리 머리카락을 갖고 있어 삭발(削髮)을 해야만 했던, 푸거가(家)의 사람들이 대표로 나선 그들을 유럽인들 속에서 거부감 없이 스며들게 하기 위해 함께 삭발을 하던 것에서 더 나아가 함께 가발을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흑인의 심한 곱슬머리 유전(遺傳)이 변발(辮髮)과 삭발(削髮), 상투의 근원이라는 논거는 변발과 상투 편에서 다루었다.)
1346년 프랑스 칼레 남쪽 크레시에서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의 전투에서 처음으로 흑색화약을 이용한 화포(火砲)가 사용된 이래 그로 인한 흑사병으로 전(全) 유럽이 1353년까지 극심한 후유증을 치른 다음 복건성(福建省)을 떠나 유럽에 들어와 있던 푸거가(家)의 창시자 한스 푸거가 아우크스부르크에 나타난 건 1367년이었다. 한스 푸거로 대표되는 복건성 출신 마린 로드 상방(商幇)의 상인(商人)들이 유라시아 대륙의 끝인 서유럽에 식민(植民)된 건 일본 찻잎(茶葉)을 바다를 통해 지구 반대편 서유럽까지 수출하려는 계획을 가진 호유용(胡惟庸)이 주원장(朱元璋)을 내세워 장강(長江) 이남의 패권을 거머쥔 이후부터였다.
1362년 10월 일본 찻잎(茶葉)을 놓고 마린 로드 상방(商幇)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공민왕의 고려(高麗)를 주저앉히고자 주원장이 홍건적(紅巾賊)의 두건을 쓰고 청부(請負) 침략한 후 1363년 봄에 가까스로 귀환하자 이 어수선한 틈을 타 장강 중류를 장악한 진우량(陳友諒)이 그해 여름, 주원장을 공격해 벌어진 전투가 포양호(鄱陽湖) 전투였다. 중세(中世) 세계 최대의 수전(水戰)이라 평가되는 파양호(鄱陽湖) 전투에서 고려로의 용병(傭兵) 출전(出戰)으로 약해진 군세(軍勢)에도 불구하고 주원장에게 완벽한 승리를 가져다준 건 이 전투를 통해 역사 전면에 등장한 호유용(胡惟庸)이었다. 최신형 귀선(龜船)에 화약을 사용하는 대포를 설치, 함포 사격이란 초유의 전술로 완전한 승리를 주원장에게 안겨준 공으로 호유용은 명나라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재상(宰相)이 되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이 유럽으로의 식민(植民) 정책이었다. 서유럽에 무역 전초기지(前哨基地)를 구축하기 위해 선발대로 나선 그들의 손엔 당연히 모든 반대와 저항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화약과 총포(銃砲)가 들려져 있었다.
화약과 총포를 귀선(龜船)에 실어 유럽 식민정책과 차(茶) 무역정책을 지휘하던 호유용이 1380년 일본 찻잎(茶葉)을 무역한 이유로 반역죄에 몰려 주원장에 의해 처형된 후 중국에서 유럽으로의 화약 공급은 중단되었다. 이후 화약의 보급이 재개되어 유럽을 또다시 화약무기의 선전장으로 만들 수 있게 한 건 후일 정난지변(靖難之變)이라 일컬어진 명나라 연왕(燕王) 주체(朱棣)의 쿠데타였다. 1370년에 실시된 개중법(開中法)으로 실크로드 진상방(晉商幇)과 연합해 강력한 해금(海禁) 정책을 시작한 주원장의 뜻을 받들어 마린로드 상방(商幇)을 계속 억눌렀던 건문제(建文帝)를 주원장의 다섯째 아들인 주체(朱棣)가 마린로드 상방(商幇)의 지원을 받아 일본 막부군(幕府軍)을 비밀리에 참전시켜 제거해 버린 것이 1399년부터 1402년까지 4년에 걸쳐 일어난 정난(靖難)의 변이었다.
조선의 태종(太宗)이 제공한 화약(火藥)과 총통(銃筒)으로 무장한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가 이끄는 일본군의 도움으로 패배 직전에서 기습적으로 경사성(京師城:남경성)을 함락시켜 명나라 3대 황제로 즉위한 주체(朱棣)는 그 댓가로 일본에게는 감합무역(勘合貿易)을 하도록 해주었고 마린로드 상방(商幇)에게는 그들이 요청한 대양(大洋) 항해를 가능하게 해주는 귀선(龜船)의 설계도, 천문학과 시계 같은 기반(基盤) 과학기술, 그리고 흑색화약과 총포를 정화(鄭和) 함대를 통해 본격적으로 유럽에 보내주었다. 그게 1405년부터였다. 이후 1433년까지 정화 함대(艦隊)를 통해 유럽으로 들어온 차(茶)와 흑색화약은 메디치(Medici) 가문(家門)과 포르투갈, 부르고뉴(Burgundy) 공국(公國)을 통해 유럽에 보급되었다. 원나라 영종(英宗) 때부터 대량 수출된 일본 찻잎(茶葉)의 유럽 대리인으로 재력과 권력을 움켜쥔 대표적 가문이 바로 영국의 플랜테저넷 왕가와 메디치가였다.
Plantagenet은 말 그대로 차(茶)를 의미하는 Plant를 다루는 Agent라는 뜻이고 Medici는 지금의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처음 시작된 약국(Pharmacy)에서 약(Medicine)으로 팔렸던 차(茶)를 다뤘기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차(茶)를 아랍인들은 시이(شاي)라고 발음하고 페르시아인들은 차이(چای chay)라고 발음한다. 페르시아어(어)로 만들다(make)는 샤다니 کردن(kardan)라고 발음한다. 바그다드에서 처음 시작된 약국(藥局)을 뜻하는 Pharmacy는 차(茶:cy)를 만드는(샤:phar) 곳이란 말이었다. 포르투갈에서 차(cha)라고 발음하는 차(茶)를 영국과 이탈리아에서는 티(tea, ti)라고 발음하는 사실은 영국과 이탈리아가 포르투갈보다 먼저 차(茶)를 복건성(福建省) 상인들에게서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 9.27–1464. 8.1)가 실질적인 메디치 가문의 창시자로 평가되는 연유였고 포르투갈에서 주앙(John) 1세가 아비스(Avis) 왕조를 개창(開創)할 수 있었던 연유였고 플랜테저넷에서 분파한 영국 랭커스터 공작의 딸인 필리파(Philippa of Lancaster) 왕비와 포르투갈 주앙 1세 사이에서 태어난 엔리케(Henrique de Avis) 왕자가 항해왕(航海王)이 될 수 있었던 연유였고 그의 동복(同腹) 여동생 이자벨 공주가 부르고뉴 공국의 필리프 선량공(Philip the good)의 세 번째 왕비가 된 연유였고 그들의 아들인 샤를 용담공(Charles the Bold)이 화약 혼합 제조에 따른 매독(梅毒 syphilis) 같은 증상의 괴질(怪疾)에 걸려 그토록 고통받다 비참하게 쓰러진 연유였다. 영국과 포르투갈, 부르고뉴 공국의 왕실 간 교류는 15세기 초부터 매우 긴밀했다.
흑사병 대유행 이후 오랫동안 사용되지 못했던 흑색화약을 이용한 대포가 집중 운용되어 그 효과를 만천하에 다시 과시한 건 오를레앙 포위 전에서 영국을 물리치고 프랑스를 승리로 이끈 쟌다르크가 나타난 1429년이었다. 강선(腔線)이 없어 명중도가 낮았던 대포들을 표적지(標的地)에 집중 사격케 함으로써 화망(火網)을 구성하는 방법으로 그 효용성을 극대화시킨 잔다르크 덕분에 화약과 총포(銃砲)의 위용은 되살아났다. 1453년 천년 제국 비잔틴의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허물고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우르반 대포(大砲)는 그 이후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상황에 빠진 유럽에서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절대반지가 되었고 오스만 튀르크가 마린 로드 상방의 용병(傭兵) 임을 만방에 과시한 증표(證票)가 되었다.
차(茶)와 비단, 향신료의 알프스 이북 유럽 유통권(流通權)을 놓고 베네치아 공화국과 밀라노 공국 사이에 벌어진 롬바르디아 전쟁(1423년~1454년) 그리고 반도(半島) 자체가 무역로(貿易路)인 이탈리아 지배를 놓고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家)가 경쟁한 1494년부터 1559년까지 계속된 대이탈리아 전쟁, 1524년에 일어난 독일 농민 반란, 1527년부터 1552년까지 5차례 벌어진 오스트리아와 튀르크 전쟁, 1568년부터 시작된 네덜란드 독립전쟁, 1571년 레판토 해전등 끊임없이 벌어진 전쟁들은 화약(火藥)과 화약 무기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패권을 노리는 유럽 왕가(王家)와 제후(諸侯)들에게 각인시킨 세월이었다.
이 전쟁들은 화약을 수입해 판매한 푸거가(House of Fugger)를 돈방석에 앉게 했다. 1503년 4월 28일, 이탈리아 남부 체리뇰라(Cerignola) 마을에서 비단(緋緞) 생산국인 나폴리 왕국의 지배권을 두고 벌어진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전투에서 화승총(火繩銃)인 아쿼부스(Arquebus)로 무장한 총병(銃兵)과 창병(槍兵)이 주축이 된 스페인군이 중갑기병(重甲騎兵)과 스위스 창병(槍兵)을 주축으로 한 프랑스에 압승함으로써 화약 무기의 전략적 우위(優位)는 확고해졌다. 푸거가 제공하는 화약은 폭발력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초고가(超高價)의 상품이었기에 아무나 가질 수 없었고 따라서 푸거에게 외상으로 화약을 제공받을 수 있는 세력만이 유럽에서 패권을 가질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년 11월 17일부터 1603년 3월 24일)가 사용하기 시작한 그 우스꽝스러운 가발(假髮)을 유럽의 모든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붙이게 된 시작은 푸거가(家)로부터 받은 대출(貸出) 원리금(元利金)을 상환(償還) 하지 않고 채무불이행(債務不履行)한 펠리페 2세의 스페인이 푸거가(家)가 전폭적으로 지원(支援)한 화약으로 무장한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에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참혹한 패배를 당한 1588년의 무적함대(Armada Inencible) 사건이었다. 결국 이 참패(慘敗)는 펠리페 2세가 중국으로부터 화약의 가장 중요한 원료인 초석(硝石:Saltpeter:질산나트륨)을 직접 가져오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 계기였고 명나라의 초석 수출을 강제하기 위해 조선(朝鮮)을 지렛대로 이용하려 한 임진전쟁(壬辰戰爭)을 일으키게 되는 방아쇠(Trigger)가 되었다.
가정제(嘉靖帝)가 명나라의 황제가 된 1521년부터 해금(海禁) 정책은 다시 삼엄(森嚴)해지기 시작했고 화약의 공급량은 따라서 대폭 줄어들었다. 푸거가(家)가 공급하는 화약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계속 올랐고 따라서 1503년 체리뇰라 전투 이후 화약에 기반한 화포로 패권을 장악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Karl:Charle) 5세의 푸거가(家)에 대한 빚은 빛처럼 빠르게 늘었다. 결국 그의 아들 펠리페 2세가 즉위하며 취한 채무불이행 선언은 푸거가(家)가 더 이상 자신들의 화약을 스페인에게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그 이후 뉴 스페인(멕시코와 페루)에서 만들어진 금은(金銀) 보석들을 싣고 스페인으로 향하는 수송선(輸送船)들이 푸거가의 화약 지원을 받는 영국 사략선(私掠船: Privateer: 민간 소유이지만 교전국의 정부로부터 적선을 공격하고 나포(拿捕)할 권리를 인정받은 배)들로부터 집중적으로 약탈(掠奪)당했고 화약이 부족한 스페인은 호송선단(護送船團: Convoy)이라는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대항하는, 초유의 역사가 전개된 이유였다.
화약이 늘 부족했던 스페인의 펠리페 2세로서는 모든 수송선을 총포(銃砲)로 강력하게 무장시킬 수 없었고 따라서 예전처럼 한 척(隻)씩 별개로 출항하게 되면 그 배는 사략선(Corsair)들의 손쉬운 약탈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해 수송선들을 모아 선단(船團)을 편성(編成), 함께 출항(出航)시킴으로써 화약 부족에 따른 방어력 부족을 메꾸려 했고 이를 수송 선단이라고 불렀다. 후일 이마저도 여의치 않게 되자 선단(船團)의 각 배들이 가지고 있는 화약과 총포를 선단에서 가장 크고 빠른 몇 척(隻)에 집중시켜 총포들을 집중 운용하는 무장선으로 사용해 선단을 호위(護衛)하는 전술을 개발했다. 줄지어 항해하는 수송 선단의 양쪽에서 이들을 호위하며 항해하는 이 방법은 함께 장거리 항해한다(voyage)는 뜻에서 호송(護送: Convoy) 선단이라 불렀다.(카리브해 사략은 Privateer, 북태평양에서의 사략은 Corsair라고 구분해 불렀다)
그러나 푸거가(家)로부터 폭발력 좋은 화약을 충분히 보급받는 영국의 사략선들은 스페인 호위 무장선들의 아르케부스(Arquebus) 총탄(銃彈)이 닿지 못하는 먼 거리에서 화포 사격을 하거나 포격전(砲擊戰)을 통해 스페인 호위함(護衛艦)들의 보유 화약을 고갈(枯渴)시키는 방법으로 엄청난 양의 스페인 금은보화들을 약탈해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바쳤다. 그녀에 의해 인가된 특허장(特許狀: Charter)을 가진 해적 아닌 해적들로 육성된 호킨스((John Hawkins, 1532 ~ 1595.11.12)와 드레이크(Sir Francis Drake, 1540~1596.1.27.)라는 정유재란 이전 거의 동시에 죽은 사략선장(私掠船長)들의 이름이 역사에 회자(膾炙)된 연유였다. 화약 소모량이 많은 대포보다는 화약 소모량이 적은 아르케부스(총) 위주로 무장한 스페인의 무장선(武裝船)은 그래서 화포(火砲)로 무장한 영국의 사략선을 당해낼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재위 1558-1603) 은 흑인 유전질에 기인한 곱슬머리 때문에 도드라지게 식별(識別)되는 푸거가(家) 사람들을 위시한 복건(福建) 상인들이 영국인들의 눈에 띄지 않고 영국 궁정(宮廷)을 편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자신부터 꼬불꼬불하고 치렁치렁한 가발을 자신의 머리에 붙여 푸거가(家) 사람들을 영국인들로부터 은폐(隱蔽)시켜 주었다. 가정제(嘉靖帝)가 명나라의 황제가 된 1521년부터 해금(海禁) 정책이 다시금 강력하게 시행되자 자신들의 활동이 노출되는 것을 가장 경계했던 복건 상인들이었다. 유럽 사람들이 모르게 활동하고 싶어 하던 이런 복건 상인들의 속마음을 알아채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가발착용이었다. 이제 푸거가(家)로부터 화약을 지원받기 위해 가발은 반드시 착용해야 하는 궁정(宮廷) 필수품이 되었다.
화약(Black Powder)이 절대 반지가 되면서 푸거(Fugger)의 위상도 절대적이 되어 갔다. 영국 신사(紳士)들의 특장(特裝)인 톱 햇(top hat) 또는 플러그 햇(plug hat)이라는 불리는 고깔모자와 맥(脈)을 같이 하는 위로 높이 솟아오른 모자가 전통이 된 것도 유럽인들과 완연히 다른 특이한 머리카락 때문에 항상 모자를 써서 가려야만 했던 푸거가(家) 사람들 때문이었다. 챙을 브림(Brim)이라 하고 원통형 부분을 크라운(Crown)이라 부르는 후일 볼러(Bowler)나 더비 햇(Durby Hat)으로 변형되는 톱 햇의 원조(元祖)는 흑인들 머리처럼 풍선같이 부풀어 오르는 푸거가(家) 사람들의 특이한 머리카락을 감출 수 있도록 영국에서 고안(考案)된 카포테인(Capotain)이라는 모자(帽子)였고 이 카포테인 모자 역시 가발(假髮)처럼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 때부터 쓰기 시작했다.
폭발력이 제대로 나오는 화약을 공급해 주는 중국 복건성(福建省) 출신 푸거가(家) 사람들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모자(帽子)와 가발(假髮)을 만들어 내고 이를 복장 규정(服裝規程) 또는 드레스 코드(dress code)로 정착시켜 번영을 이룩한 영국 튜더(Tudor) 왕가의 엘리자베스 1세의 성공은 결국 프랑스를 자극(刺戟)했다. 유럽 패권은 자신들의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하던 프랑스인들은 엘리자베스 1세의 성공을 분석했고 곧 따라 했다. 앙리 4세와 마리아 데 메디치 사이에서 태어난 부르봉 왕가의 2대 왕 루이 13세는 헨리 7세의 튜더 왕가 핏줄로 영국 왕위를 이어가야 한다는 엘리자베스 1세의 고집으로 야기된 영국의 혼란을 틈타 카포테인(Capotain) 모자(帽子)와 가발 착용을 에티켓(Etiquette)이라는 이름으로 정착시켰다. 에티켓이 붙이다란 뜻의 estiquer에서 유래된 연유는 가발을 진짜 머리카락에 붙였기 때문이었다.
루이 13세 때 창설된 총사대(銃士隊)에서 드러나듯 아르케부스(Arquebus)를 개량한 머스킷(Musket)과 카포테인(Capotain) 모자(帽子)는 루이 13세가 화약 확보에 얼마나 골몰(汨沒)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였다. 16세기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 의해 시작되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가 되기 전까지 유행했던 중국의 변발(辮髮)처럼 특이한 유럽만의 독특한 두발 문화였던 가발과 카포테인 모자는 드레스 코드(Dress Code)와 에티켓(Etiquette)이라는 이름으로 유럽인들에게 강제되었고 이들은 명백히 화약과 푸거가(家) 때문에 생긴 강요된 전통이었다.
이런 거추장스러운 가발을 뒤집어쓰는 우스꽝스러운 풍속이 영국에서 끝나게 된 건 화약의 원료가 되는 초석(硝石)이 인도에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17세기말이었다. 푸거가(家)에 의한 중국산 초석(saltpeter)의 독점이 깨져버린 이후였다. 1756년부터 1763년까지 벌어진 7년 전쟁에서 프랑스의 군대와 상인들을 유럽 대륙과 북아메리카, 그리고 인도에서 완전히 축출한 영국이 독점한 인도에서 동인도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를 통해 대량으로 발견한 건 흑색화약을 만들어 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초석(硝石)이었다. 영국 동인도회사에 의해 인도에서 발견되어 캐내지기 시작한 초석은 중국에서 들여오던 질산나트륨 초석(saltpeter)이 아니었다. 질산칼륨 초석(niter)이었다. 인도에서 확보된 질산칼륨 초석(niter)은 홍해를 거쳐 수에즈에 내려졌고 육상(陸上)으로 알렉산드리아로 보내져 그곳에서 지중해를 통해 영국에 당도했다. 물론 그 소유권은 영국 정부가 아닌 동인도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에 있었다.
1798년 프랑스 대혁명 기간 호라치오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연합함대의 철통 같은 감시를 따돌리고 나폴레옹이 툴롱항에서 뜬금없이 이집트로 원정을 떠난 이유가 영국이 확보한 인도산 초석(niter) 때문이었다는 것은 드러나지 않은 역사였다. 영국이 인도에서 캐내는 초석(硝石)을 확보하기 위해 프랑스혁명 정부는 혁명이 와중(渦中)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4만 명의 군인들과 1만 명의 선원들로 꾸려진 원정대(Expedition)를 포병대(砲兵隊)에 정통한 나폴레옹에게 지휘하게 하여 이집트로 파견했다. 당연히 이 원정대에는 베르톨레(Claude Louis Berthollet) 같은 화학자(化學者)들이 주축이 된 과학자 집단이 포함되어 있었고 베르톨레는 이 원정(遠征)에서 확보된 인도산 초석을 분석해 질산칼륨이라는 물질에 대해 확고한 이해(理解)를 가졌다. 이후 프랑스 전역에 진즉부터 설치되어 있던 수많은 초석 제조 공장(똥공장)에서는 포병용(砲兵用) 화약을 만들어 내는데 모자람이 없는 초석(硝石:질산칼륨)을 자체 생산해 프랑스 포병대에 납품했고 베르톨레는 그 공으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Légion d'Honneur Grand-Croix)을 받았다. 화약을 자체 생산할 수 있게 된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가발을 쓸 이유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고 가발은 유럽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유럽에서 사라져 버린 가발 풍속이 유독 영국에서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 그것을 통해 영국의 굴기(屈起)를 시작한 당시 영국인들의 결정을 오늘의 영국인들이 제대로 알고 있고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영국의 재판관(裁判官)이 그토록 치렁치렁한 가발(假髮)을 원래 머리에 붙이는 것은 과거 재판소(裁判所)가 야외(野外)에 천장 높이 지어져 매우 추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당시 나이가 지긋했던 대머리 법관들이 법정(法庭)의 추위를 피하고자 가발을 쓰기 시작했다고 하는 건 화약(火藥)과 화포(火砲)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화약을 확보하기 위해 그 어떤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의 영국인들을 모욕하는 일이다.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같은 음악가들에게 발견되는 짧은 머리에 단정한 원통 모양의 부분 가발이 붙여져 있는 모습이 베토벤에게서부터 찾아볼 수 없는 건 그가 나폴레옹과 동시대를 살았기 때문이었다. 가발 따위를 에티켓이라는 이름으로 더 이상 붙이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맞아 가발을 쓰지 않은 베토벤은 에로이카(Eroica) 심포니를 작곡해 그것을 축하했다. 푸거가(家)의 초석(硝石) 독점이 완전히 끝장난 시대는 그렇게 열렸다. 16세기말에서 17세기말까지 지속되었던 우스꽝스러운 유럽인들의 가발은 화약을 얻어내기 위한 그들의 고육지책이었고 그들의 그런 수고는 결국 세계사적 패권을 그들에게 가져다주었다. 고통 없는 이득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말은 그래서… 옳다. 푸거가의 손에서 떠난 화약(火藥) 독점은 그러나 여전히 동인도회사라는 다른 이름으로 나선 마린로드 상방의 손아귀에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