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페 2세가 임진전쟁을 일으킨 이유
恒福曰 爲今之計 莫如差出統制使及水使 使之畫策防守耳. 上曰 此言是矣. 又曰 賊數極多 當初漂風之說 亦是虛言. 必不抵當而自退 閑山形勢極好 把截亦便 棄之不守 計甚誤矣. 元均嘗以爲難進絶影前洋 今果至此. 予已前言 彼賊六年相持 豈爲一張封典乎? 大槪賊船 比前極大云 然耶? 應南曰 然. 上曰 大砲 火箭 亦載來乎? 命元曰 此則不知 金軾言 倭賊薄上我船 將士不能措手而敗沒 云. 光績曰 我軍只放七柄砲火云 良可痛心. 上曰 平秀吉每言 先破舟師 然後可取陸軍云. 今果然矣.
(병조판서) 이항복이 아뢰기를, 지금의 계책으로는 통제사와 수사(水使)를 차출하여 계책을 세워 방수하게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하고, 또 이르기를, 적의 수가 매우 많았으니 당초에 풍파에 쓸려 죽었다는 설은 헛소리였다. 그들을 감당하지 못하더라도 한산으로 후퇴했더라면 형세가 극히 좋고 막아 지키기에도 편리하였을 것인데 이런 요새를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니 매우 잘못된 계책이다. 원균이 일찍이 절영도(絶影島) 앞바다에는 나가기 어렵다고 하더니 이제 과연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전에도 말했거니와 저 왜적들이 6년간을 버티고 있는 것이 어찌 한 장의 봉전(封典)을 받기 위해서였겠는가. 대체로 적의 배가 전보다 대단히 크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우의정) 김응남이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포와 화전(火箭)도 배에 싣고 왔는가? 하니, (형조판서) 김명원이 아뢰기를, 이는 알 수 없고 (선전관宣傳官) 김식(金軾)의 말에 의하면 왜적이 우리 배에 접근하여 올라오자 우리 장사들은 손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패몰되었다고 합니다. 하고, (좌승지) 정광적은 아뢰기를, 아군은 칠병포(七柄砲)만을 쏘았다고 하니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수길(平秀吉)이 항상 말하기를 ‘먼저 주사를 격파한 다음에야 육군을 노획할 수 있다. 고 했다 하더니 이제 과연 그렇게 되었다. - 선조실록 90권, 선조 30년 7월 22일 신해 3번째 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명나라 해적 왕직(王直)이 1555년 을묘왜변을 일으켜 강진 병영성에서 약탈(掠奪)한 조선의 화약(火藥)을 포르투갈 상인에게 넘기고 이를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인수함으로써 그는 1556년, 화약 제공을 통제 수단으로 사용해 아버지 카를 5세를 쥐락펴락해 온 푸거가(House of Fugger)에게 채무불이행을 선언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아버지 카를 5세가 쩔쩔 매던 재정 위기를 타개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과 왕직에 대한 부담을 털어내고자 포르투갈에게는 1520년부터 소원해 오던 마카오 개항이 이루어지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은괴가 가득 담긴 상자를 마다하는 명나라 관리는 없었다. 마카오를 합법적인 무역항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 포루투칼 상인들은 해적인 왕직과 더 이상 거래하지 않았다. 일본과의 거래는 안정된 지 오래인 포루투칼이었다. 결국 왕직은 1558년 명나라 관원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 채무불이행으로 합스부르크가(家)는 푸거가(家)의 신뢰를 잃어버렸고 이 신뢰의 상실은 합스부르크가(家)가 1차 세계대전 패배로 유럽 역사에서 사라질 때까지 두고두고 합스부르크가(家) 의 지배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저주로 이어졌다. 가톨릭적 금욕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유명했던 펠리페 2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생전 단 한 번도 찬란한 승리의 역사를 가져보지 못했다. 한 발짝도 남지 않은 승리의 문턱 앞에서 번번이 고꾸라져야 했던 건 그 찬란(燦爛)한 승리의 패배자로 기록될 상대에 대한 푸거가(家)와 마린로드 상방의 결정적인 지원 때문이었다. 펠리페 2세가 마지막 남은 자신의 모든 힘을 기울여 푸거가(家)로 대표되는 마린 로드 상방과 대결한, 화약 확보를 위한 건곤일척의 승부가 조선에서의 7년간의 전쟁이었으나 그 전쟁은 자신의 죽음과 함께 결국 성공하지 못한 채 끝났다. 화약의 안정적 확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무조건적 군대 철수로 끝난 임진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펠리페 2세의 후손들로 이어진 스페인 합스부르크 제국은 카를 5세가 남겨준 스페인과 플랑드르,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모두 프랑스와 영국 등에 상실하고 가문마저 후사가 없어 절멸되었다.
1556년의 채무불이행(Default) 선언 이후 누에바 에스파냐((Nueva Espana) 부왕령(副王領)의 사카테카스(Zacatecas)와 페루 부왕령(副王領)의 포토시(Potosi) 광산에서 만든 금은보물(金銀寶物)을 스페인으로 수송하기 위해 카리브해와 대서양을 항해하는 스페인 선박에 대한 약탈(掠奪)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횟수가 잦아졌고 그 피해도 심각해져 갔다. 지금의 볼리비아 포토시(Potosi)에서 캐내고 제련된 후 파나마의 놈브레 데 디오스(Nombre de Dios)까지 해상과 육상으로 보내진 금은보화를 싣고 쿠바의 하바나를 거쳐 세비야(Seville)로 항해하는 수송선을 목표로 달려드는 영국의 사략선(私掠船:Privateer)들은 스페인의 선박보다 작아서 빨랐고 화약과 화포가 많아서 강했다. 부족한 화약으로 인해 함포(艦砲)를 충분히 사용할 수 없었던 스페인 수송선들과는 달리 푸거가(家)로부터 충분한 화약을 지원받았던, 존 호킨스(John Hawkins)와 드레이크(Francis Drake)가 이끄는 영국의 사략선들은 청동(靑銅) 대포에 비해 제작비가 삼분의 일밖에 안 되는 무쇠(銑鐵) 대포를 한 척(隻)당 수십 문(門)씩 보유해 화망(火網) 포격을 퍼부으며 공격해 왔다. 부족한 화약을 집중시켜 단 몇 척이라도 함포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수송선들을 둥근 접시모양으로 뭉쳐 항해하도록 하는 선단(Plate Fleet) 항해를 실시하고 선단(船團 Fleet)의 사방을 함포로 무장한 전투함들로 호위(護衛 convoy)하는, 호위선단이라는 방법까지 고안해 방어에 나선 스페인이었지만 질 좋은 화약을 훨씬 더 많이 보유한 영국의 사략선들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결국 해적질을 근절시키기 위해서는 중국과 직접 교역해 화약을 확보해야 한다고 결심을 굳힌 펠리페 2세는 1521년 마젤란에 의해 이미 개척된 태평양 항로를 활성화하도록 지시했다. 그를 위한 모든 대안들이 비밀리에 실행에 옮겨졌다.
스페인 해군 제독(提督) 페드로 멘데즈(Pedro Menéndez de Avilés)에 의해 개발된 스페인 갈레온(Spanish Galleon)은 마닐라 갈레온(Manila Galleon) 형(型)으로 태평양 항로에 투입하기 위해 만든 배로 배수량이 1천 톤에 달하는 거대한 선박(船舶)이었다. 조선 수군의 주력함인 전선이라 불린 판옥선(板屋船)이 220톤 규모였고 거북선이 최대 280톤의 배수량이었으니 그 배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명나라와 무역 관계를 열어 초석(硝石)을 수입해 그토록 원하던 화약을 필요한 만큼 만들어 모든 대포에 화약을 장약해 푸거가(家)의 지원으로 날뛰는 영국 해적들을 쓸어버리기 위해서라도 명나라가 필요로 하는 은을 많이 가져와야 했다. 지금의 멕시코 서남부 태평양 연안의 아카풀코(Acapulco) 항에서 매년 3월 말에 출항해 지금의 필리핀 마닐라시 남쪽에 있는 카비테(Cavite)항으로 5월 말에 도착하는 마닐라 갈레온에는 중국의 화약과 차(茶)를 사기 위해 포토시에서 만들어 온 엄청난 양의 은괴(銀塊 Ingot)가 실려있었다. 갈레온의 배수량이 2천 톤에까지 이르게 된 연유였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왕이 그들의 식민지 경략(經略)을 위해 성직자를 자유롭게 임명해 파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로욜라(Loyola)가 만든 예수회(Society of Jesus)가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1540년 수도회(修道會 Order)로 인가되자 엄청난 숫자의 예수회 수도사가 아메리카와 동아시아로 몰려들었다. 1549년 지금의 일본 가고시마 지역인 사쓰마번(薩摩藩)에 상륙해 가톨릭을 전파하면서 일본을 스페인 체제에 편입시켜 임진전쟁에 깊숙이 개입한 프란시스코 하비에르(Francisco Javier)와 1565년 마닐라에서 아카풀코로 귀환하는 항로를 일본 후쿠시마 앞바다에서 찾아낸 안드레 우르다네타(Andres de Urdaneta)는 대표적인 예수회 소속 수도사였다.
적도 이북에서부터 북위 30° 에 이르는 지역에서 부는 무역풍을 이용해 매년 늦어도 4월 초에 아카풀코를 떠나 6월 초에는 마닐라에 당도하는 마젤란 항로(Magellan‘s Route)에 더해 마닐라를 늦어도 7월 초에 떠나 대만(臺灣)을 거쳐 북위 38도선에 위치한 후쿠시마 앞바다까지 9월 초까지 북상해 북위 30° 이북에서부터 북위 60° 에 이르는 지역에서 부는 편서풍을 이용, 샌프란시스코 북쪽에 있는 멘도치노(Mendocino) 곶에 도착하는 우르다네타 항로(Urdaneta’s Route)의 확립은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는 재도약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 습기(濕氣) 차단이 가장 중요한 화약과 차(茶)는 도자기에 담겨 갈레온으로 아카풀코에 도착하면 등에 보물(寶物)을 짊어진 노새들을 줄줄이 연결한 노새 수송대로 대서양 연안의 베라 크루스까지 운송되었다. 노새 기차(the mule train)로 불려진 이 방법으로 베라 크루스로 옮겨진 차(茶)와 화약은 세비야를 출발해 쿠바의 하바나를 거쳐 온 스페인 보물선단에 적재되어 스페인으로 들어갔다. 1566년부터 시작된 포토시의 은괴와 중국의 차(茶)와 화약을 거래하는 마닐라 갈레온의 대성공은 1567년에 가정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명나라 융경제에게 무역 개방을 허락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펠리페 2세의 대성공은 푸거가(家)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펠리페 2세가 마닐라 갈레온을 통해 들여오는 화약을 믿고 플랑드르 지역에 더욱 강압적인 통치를 고집하자 이에 반발한 네덜란드 프로테스탄트들과 스페인의 화약을 고갈시키고 또한 비축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고심하던 푸거가(家)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1568년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발발했다.
마닐라 갈레온의 대성공은 또한 오스만 튀르크로부터 지중해 제해권을 되찾고 싶은 베네치아 공화국을 자극했다. 동지중해의 전략적 요충지인 키프로스섬을 오스만 튀르크에게 빼앗기고 투르크가 아드리아해로 진출하는 것을 한사코 막아야 했던 베네치아 공화국은 펠리페 2세의 원조를 얻어내기 위하여 교황에게 접근했다. 비오 5세 교황은 베네치아의 탄원을 받아들여 기독교 세계를 이교도들로부터 지킨다는 십자군 정신으로 펠리페 2세에게 오스만 튀르크와의 전쟁에 참전할 것을 요구했다. 총병(銃兵: Arquebus)을 주축으로 등선백병전(登船白兵戰)의 전법을 사용하는 오스만 튀르크 해군을 꺾으려면 화약이 많이 소모되는 대포를 써야 했기에 몇 번씩이나 참전 요구를 묵살하는 펠리페 2세에게 비오 5세는 마닐라 갈레온이 저지른 토르데시야스(Tordesillas) 조약 위반을 엄중히 지적했다. 정확히는 1494년에 체결된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아닌 1524년에 체결된 사라고사(Zaragosa) 조약 위반이었다. 사라고사 조약에 따르면 필리핀은 포르투갈 관할이었다. 결국 펠리페 2세는 오스만 튀르크와의 전쟁에 참전하여 레판토 해전을 치르게 되었고 역사적인 승전을 기록했다. 오스만 튀르크가 푸거가(家)의 진짜 주인인 마린 로드 상방의 용병(傭兵)이란 걸 알 길 없는 펠리페 2세는 이제 푸거가(家)가 아닌 마린로드 상방(商幇)의 적이 되었다.
레판토(Lepanto) 해전으로 스페인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화약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1567년부터 시행된 명나라 융경제의 개항과 무역 자유화가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해서 파관(海瑞罷官)으로 유명한 해서(海瑞)와 일조편법(一條鞭法)의 장거정 같은 개항과 조세의 금납화를 주장하는 관료들을 보호하면서 스페인으로의 초석 유출을 틀어막을 수 있는 묘안이 마린로드 상방은 필요했다. 레판토 해전이 벌어진 다음 해인 1572년, 융경제가 재위 6년 만에 갑자기 사망하고 3남 주익균이 9살의 나이로 즉위했다. 어린 만력제를 대신해 장거정이 섭정이 되어 모든 정무를 처리했다. 개항과 일조편법은 유지되었으나 초석(硝石) 수출만은 다시 전면 금지되었다. 카를 5세로부터 채무 변제의 갈음으로 알마덴 수은 광산을 넘겨받아 1530년부터 운영하고 있던 푸거가(家)는 1556년부터 해오던 포토시로의 수은 공급을 중단했다. 수은 아말감법으로 생산하던 포토시의 은 생산량은 1572년 폐광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급감했고 펠리페 2세에겐 금수 품목이 되어 천정부지로 가격이 오른 초석을 사 올 은괴가 부족했다.
포르투갈 국왕 주앙 3세의 여동생인 이사벨 공주가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카를 5세)와 혼인한 것은 1524년 사라고사 조약이 체결된 중요한 이유였다.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펠리페 2세는 따라서 포르투갈의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만이 왕위를 이을 수 있다는 살리카법 때문이었다. 푸거가(家)가 수은 공급을 중단하고 사략선(私掠船)들의 준동이 더욱 악랄해져 1575년과 1576년 연속해서 채무불이행을 선언해야 했던 펠리페 2세는 벼랑 끝으로 몰려 있었다. 그런 그에게 화약 확보를 위해 마카오와 나가사키를 경략하고 있는 포르투갈을 합병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1579년 3월 영국의 사략선장 드레이크가 해도(海圖: Chart) 없이는 무사히 빠져나올 수 없는 마젤란 해협을 통과해 태평양으로 진입한 후 지금의 칠레 연안을 따라 북상해 포토시에서 생산된 은괴를 싣고 파나마의 놈부르 데 디오스(Nombre de Dios)를 향해 항해하던 갈레온들을 약탈하는 사건이 처음 일어난 것이었다.
선원들이 배에 설치된 대포(cannon)때문에 똥방아쇠(Cacafuego)라는 별명으로 부르던 갈레온 Nuestra Señora de la Concepción 이 영국의 악질적인 사략선장 드레이크에 의해 나포(拿捕)되어 1년 동안 포토시에서 만든 26톤의 은화(silver real)와 금이 각각 약탈된 사건이었다. 이때부터 카리브해의 사략선을 프리바티어(privateer)라 했고 태평양의 사략선을 코르제어(corsair)라고 구분해 불렀다. 1580년 펠리페 2세는 아비스(Aviz) 왕가의 후사(後嗣)가 끊어진 것을 기회로 반대하는 포르투갈의 신민들을 억누르고 구슬려 끝내 이베리아 연합(Unión Ibérica)이라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동군연합(同君聯合)을 만들어 냈다. 이제 화약을 제조하는데 가장 필요한 초석과 유황을 확보할 수 있는 마카오와 나가사키가 포르투갈이 아닌 펠리페 2세의 경략지가 되었다. 화약이 없어 그 많은 캐논(canon)과 아르케부스(arquebus)가 있음에도 대서양뿐만 아니라 태평양에서까지 보물들을 약탈당했던 치욕을 갚을 수 있는 날이 왔다고 펠리페 2세는 이를 악물었다.
1588년 10년 동안 그 비싼 화약을 집중시켜 네덜란드 독립전쟁에서 독립군들을 어느 정도 누르는 데 성공하자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 독립군들을 지원하는 영국을 정벌할 계획을 세우고 대규모 호송선단을 조직했다. 스페인 왕립 해군(Spanish Royal Navy) 소속 22척의 전함과 개조한 상선 108척으로 구성된, 아르마다(Armada)로 불린 이 함대는 영국 해협을 지나 플랑드르 연안에 정박한 후 네덜란드 독립군들을 진압하고 있는 스페인 테르시오(tercios)의 파르마(Parma) 공작군(公爵軍)을 싣고 북해를 지나 영국 남동 지방에 그들을 상륙시키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197척에 달하는 영국 함대의 공격을 받고 그레벨링건 전투(Battle of Gravelines)를 치르며 테르시오로 유명한 파르마군(軍)을 승선시키는 데 실패했다. 영국 함대를 피해 영국 섬을 북쪽으로 돌아 귀항하는 중에 폭풍을 만나 화약을 잔뜩 실은 전함들을 포함, 24척 이상이 난파하고 함대의 일부가 큰 손상을 입게 되었다. 결국 1588년의 영국 원정은 그동안 모든 재정을 기울여 확보한 화약만 날린 채 스페인의 패배로 끝이 나버렸다. 이제 명나라에서 직접 초석을 확보하는 것 말고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펠리페 2세였다. 명나라를 교전 상대국으로 하는 전쟁은 절대로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명 황제가 스페인과의 초석 무역을 허가하도록 공작을 펼 수 있게 명나라 조정에 매수해 놓은 대신들이 암약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하기 위해 벌이는 전쟁이어야만 했다. 1592년 5월 23일(음 4.13) 일본군의 침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이 1593년 3월 14일(음 2.12) 행주산성 전투를 끝으로 1597년 8월 27일(음 7.15)에 칠천량 해전으로 정유재란이 일어나기까지 4년이 넘는 기나긴 강화회담으로 휴전 상태에 들어가는 기이한 전쟁의 모습을 보인 연유였다. 스페인을 위한 전쟁에 조선과 일본, 중국인들이 조선 땅에서 피 흘린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