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가 죽은 진주성 전투의 진실
時賊勢日熾 天朝深憂之. 兵部尙書石星 密遣沈惟敬 假稱京營添住遊擊 托以探賊. 實欲挺入賊營 與賊相見 賊講和. 惟敬簡其騶從 疾馳渡江 言語張皇. 이때에 왜적(倭賊)의 기세가 날로 성해지자 명나라가 깊이 걱정하였다.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이 비밀히 심유경(沈惟敬)을 파견하였는데, 경영 첨주 유격(京營添住遊擊)이라고 가칭하고서 적정(賊情)을 탐지한다고 핑계하였다. 그러나 실지는 왜적의 군영(軍營)으로 들어가 왜적과 상견하여 왜적을 꾀어 강화(講和)하려고 한 것이다. 유경이 그 추종(騶從)을 간편하게 하고서 빨리 달려 강을 건너왔는데 언어가 장황하였다. -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1592) 6월 29일 정사
備邊司啓曰 沈遊擊被拿而去云. 於我國 不無勤勞之人 且曾以天使來到. 過此國門之時 漠然不爲接待 則情理未安 何以處之 議啓 言于備邊司事傳敎矣. 비변사가 아뢰기를 상께서 심 유격(沈遊擊)이 나포되어 간다고 하는데, 그는 우리나라에 대하여 근로(勤勞)가 없지 않은 사람이고 또한 일찍이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사람이다. 그가 국문(國門)을 지날 때에 모르는 체하고 접대하지 않으면 정리(情理)로 보아서도 미안한 일이니 어떻게 조처해야 할지 의계(議啓)할 것을 비변사에 이르라고 전교하셨습니다.
則拿去沈遊擊, 乃是都督之令…尤知出於都督之令而無疑…入來後, 使接待都監堂上如金命元, 往見慰勞, 觀勢議處無妨. 심 유격을 나포해 가는 것은 바로 도독의 명령이라 합니다…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면 더욱 도독의 명령에서 나온 것임을 의심할 바 없습니다… 당도한 후 접대 도감 당상인 김명원(金命元)과 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찾아가서 위로하도록 하고 그때의 상황을 보아 의논하여 조처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 선조실록 90권, 선조 30년(1597) 7월 5일 갑오
上仍幸沈遊擊下處, 行接見禮. 상이 이어 심 유격(沈遊擊)의 사처에 찾아가 접견례를 행하였다.- 선조실록 90권, 선조 30년(1597) 7월 26일 을묘
프란치스코 수사들(friars)을 통해 펠리페 2세의 명령을 받는 오사카 상인 출신 고니시 유키나와(小西行長)는 1군 병력 18,700명을, 후사가 끊긴 포르투갈이 살리카법에 의해 스페인의 왕인 펠리페 2세에게 합병되어 동군연합국이 된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세상이 예수회에 의해 주도되는 줄 알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일본의 오랜 꿈을 조선에 펴고자 파견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2군 병력 2만 2천 명을, 예수회 명령을 따로 받는 구로다 칸베에(黑田官兵衛)의 장자인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3군 병력 1만 1천 명을 각각 이끌고 부산포에 상륙한 후 상주, 경주, 청주로 향한 것이 1592년 음력 4월 14일이었다. 정여립 역모사건으로 경상도 서부지역과 전라도 그리고 황해도에 구축했던 일본 차(茶) 무역조직이 와해되는 바람에 1군이 섬진강, 2군이 낙동강, 3군이 영산강 포구로 상륙하려던 당초의 계획은 어그러져 있었다.
부족한 화약을 점령한 조선의 무기고에서 보충한다는 복안을 가지고 고니시 유키나와(小西行長)는 조령(鳥嶺)과 연결된 상주로 직행하는 중로(中路)로 들어섰고 가토는 죽령과 연결된 경주를 장악하는 동로(東路)로, 추풍령을 장악하려는 구로다는 김천을 지나 옥천으로 가는 서로(西路)를 맡는 변동이 생겼다. 영토를 점령해 통치하려는 목적의 전쟁이 아니었다. 화약을 만들 초석을 명나라로부터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통상조약 체결이 목표였던 펠리페 2세의 전쟁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조정에 나가 대신들과 회의도 하지 않아 대신들조차 황제의 얼굴을 모른다는, 재위 6년도 안돼 남미에서만 나는 독으로 암살당한 융경제의 아들로 젖내도 빠지지 못한 채 황제가 된, 면종복배(面從腹背)하는 부패한 신하들로 사방이 둘러싸인 만력제(萬曆帝: 神宗)였다. 부산포에 상륙시킨 일본군만 16만 명이었다. 조선의 왕이 누구인지 조선에 뭐가 있는지 파악할 필요도 시간조차도 없었던 펠리페 2세였다. 1560년대 그가 검토(檢討)해야 할 전쟁성(戰爭省)의 보고 문서는 매년 두 상자 정도였지만 임진전쟁이 시작된 1590년대엔 그 양이 15배나 폭증해 있었다.
처음부터 잘못 고른 곳에서 잘못 고른 사람들과 치른 절망적 전쟁이었다. 아메리카 대륙과 필리핀에서 그리고 중국과 ㅡ일본에서 이미 충분히 겪어 본 사람들이라 생각했던 펠리페 2세였다. 그러나 그들은 달랐다. 같은데 완전히 다른 조선인들이었다. 한양까지만 함락시키면 틀림없이 강화조약을 맺고 통상이 이루어질 거라 호언장담하며 두둑한 은괴를 챙겨갔던 명나라 대신들이었다. 1592년 4월 13일(5.23) 다대포에 상륙해서 14일 부산진성 15일 동래성 25일(6.3) 상주성 27일(6.6) 조령을 넘어 28일 충주성 5월 2일(6.11) 남대문으로 한양 입성한 1군과 4월 18일(5.28) 부산포에 상륙해서 19일 지금의 언양읍(彦陽邑)인 언주(彦州)를 거쳐 21일(5.31) 경주성 22일(6.1) 영천성 27일 조령 28일(6.7) 충주성 5월 2일(6.11) 동대문으로 한양 입성한 2군, 4월 19일(5.29) 부산포를 거쳐 20일 김해에 상륙해 창원, 거창, 김천을 거쳐 28일(6.7) 추풍령을 넘고 옥천, 청주, 진천, 용인을 거쳐 5월 7일(6.16) 노량진을 통해 한양 입성한 3군의 진격 속도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것이었다.
보급 및 병참(兵站) 같은 건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조선의 도성인 한양을 함락시켜 조선의 임금을 사로잡고 그로써 더 이상의 화약(火藥) 소모 없이 조선 전역을 장악하고 조선이 비축한 화약까지 확보한다는 초기 목표는 한양 함락 말고는 이뤄진 게 없었다. 보유한 총병(銃兵)과 화약을 1,2,3군에 모두 몰아주고 활과 창검으로만 무장한 나머지 군대에게 평양성을 공격하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친 속도로 달려온 1, 2, 3군에게 다시 북진의 명령이 떨어졌다. 6월 1일(7.9) 개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얼마 남지 않은 화약 보유량으로 1군과 3군은 함께 평양으로 진격하기로 하고 2군은 몇 년 전 니탕개와 전투를 치러 화약을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은 함경도의 6진(鎭)을 향해 나눠 진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그 어느 곳에서도 화약을 남겨놓지 않았다. 가토가 조선의 동북쪽 끝까지 간 것은 결코 호랑이 사냥 때문이 아니었다.
1592년 6월 14일(7.22) 평양성을 차지한 일본군은 더 이상 도망간 선조를 뒤쫓아 진군할 수 없었다. 화약(火藥)이 없었다. 평양성까지 함락되면 시작된다던 강화(講和) 협상이 완료될 때까지 평양성을 방어하는데 만도 모자란 화약이었다. 파죽지세로 평양까지 올라온 일본군이 왜 선조가 있는 의주로 진격하지 않고 평양성에서 꼼짝 않고 7개월이나 머물렀는지에 대한 답은 화약(火藥) 부족에 있었다. 게다가 1,3군은 대부분이 조총병(鳥銃兵)으로 구성된 군대였다. 병력수가 3군에 비해 만 명 정도가 많았던 2군은 그 만 명의 창검군(槍劍軍) 덕분에 그나마 전투력을 유지하며 후퇴할 수 있었다. 구로다가 이끄는 3군은 남은 화약의 대부분을 1군에 넘기고 평양성을 떠나 화약을 구하기 위해 남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황해도로 떠났다. 오도 가도 못하고 평양성에 갇혀버린 소서행장의 일본군에게 명나라 병부상서(병조판서) 석성(石星)이 비밀리에 급파한 심유경(沈惟敬)이 나타난 건 그때였다. 평양성 함락 후 15일 만에 나타난 그런 심유경의 정체에 대해 선조실록은 조선 사관(史官)의 신랄(辛辣)한 야유(揶揄)를 남기고 있었다.
고려의 제일검이었던 척준경 장군처럼 조선의 제일검이었던 지금의 전남 화순(和順) 지역인 동복(同福) 현감 황진 장군이 대포와 총이 주도하던 임진왜란에 검(劍)으로 그 이름을 당당히 전사(戰史)에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일본군의 화약 부족 때문이었다. 침략한 날로부터 60일이 지나면서부터 전역(戰域) 곳곳에서 일본군이 조선의 의병 부대들에게 패배한 연유였다. 모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셋째 아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만오천 명으로 구성된 6군이 화약을 확보하기 위한 전주성 공격에 금산성에서 진군시킨 군대는 고작 이천 명이었다. 역시 화약이 부족해서였다. 화약 확보를 위해 1592년 7월 8일(8.14) 같은 날 이루어진 일본군의 호남을 향한 땅과 바다에서의 전투(이치전투와 한산도 대첩)는 모두 조선의 승리로 끝났다. 팔도 도원수(八道都元帥)로 조선군을 이끌었던 권율 장군이 전라도 광주목사로 참여해 승전으로 이끈 이치전투(梨峙戰鬪)를 임진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데 있어 행주대첩보다 더 결정적인 싸움으로 평가했다는 것은 사위인 이항복이 남긴 백사집(白沙集)의 기록이다.
단성소(丹城縣監辭職疏)로 칼 같은 조선 선비의 기개를 역사에 새긴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평생을 소지하던 경의검(敬義劍)을 물려준 수제자가 래암(來菴) 정인홍이었다. 유럽인들이 게릴라(guerrilla)로 빨치산(partisan)으로 부르는 그 비정규군(非正規軍)을 의병(義兵)이라고 처음 부른 이가 정인홍(鄭仁弘)이었다. 빈약한 무장(武裝)의 창의군(昌義軍)이 조총으로 무장한 압도적 숫자의 일본군들을 격퇴한 것은 당시 일본군의 화약 부족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화약이 떨어진 일본군은 곳곳에서 패하기 시작했다. 7월 8일(8.14)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들어가는 고개인 이치와 경상도에서 바다로 호남에 들어가는 길목인 한산도에서의 패전을 시작으로 7월 28일(9.3)엔 경북 영천성(永川城)이 임진왜란 최초의 공성전(攻城戰) 승리를 통해 수복되었다. 8월 2일(9.7)엔 청주성이 수복되었다. 영천성과 청주성이 조선군에 연이어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접수되자 결국 1군과 2군을 제외한 화약이 거의 없는 3 군부터 7군까지의 일본군 지휘관들이 총대장인 6군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주관으로 모여 후일 경성군의(京城軍議)라 불려진 대책회의를 열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경주와 대구 사이에 있는 영천성(永川城)의 함락은 죽령을 통해 부산포로 퇴각하는데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청주성의 함락은 추풍령을 통해 안전하게 부산포로 퇴각할 수 없을 수 있다는 신호였다. 최소한의 방어용 화약을 신속하게 보급해 주든지 아니면 강화 회담을 통해 안전한 부산포로의 신속한 철수를 보장받아 달라는 요구가 만들어졌다.
8월 20일(9.25)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휘하의 5군 병력이 지키는 경주성에 경상좌병사 박진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의 공격이 가해졌다. 이제 부산포로 가는 퇴각로가 본격적으로 공격당하고 있었다. 심유경(沈惟敬)이 고니시 유키나와의 초청으로 평양성으로 들어간 건 경주성이 작렬탄(炸裂彈)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총통으로 쏘아대는 조선군에 함락되기 직전인 1592년 9월 1일(10.5)이었다. 후일 시기의 차이는 있어도 나라와 황제를 기만(欺瞞)한 죄(罪)로 목이 잘리는 참형(斬刑)을 똑같이 당하게 되는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강화회담의 대표로 나섰다 목이 잘리지 않은 건 유성룡뿐이었다. 노량해전이 벌어지던 날(1598년 음. 11월 19일) 끝내 유성룡은 참형과 같은 파직(罷職)을 당했다. 삼사라 불리던 사간원과 사헌부, 홍문관 셋 모두에서 파직이 아니라 삭탈관작(削奪官爵)하라는 상소가 빗발치고 있었다. 만력제(신종)의 명령으로 압송되던 심유경(沈惟敬)을 선조가 직접 만나러 가는 위험부담을 무릅쓴 연유가 있었다. 유성룡의 목이 심유경과 소서행장과는 달리 잘리지 않은 연유는 여러 계산을 동시에 했던 선조에게 있었다. 서양의 대제국이 용병을 시켜 조선에서 동양의 대제국과 맞붙은 세계대전 앞에서 선조는 조선을 지키기 위해 모든 가능성에 대비해야만 했다.
소서행장을 내세운 필리페 2세의 목표는 단 한 가지였다. 은괴(銀塊)로 화약 제조의 결정적 원료인 초석(硝石)을 양껏 구입할 수 있는 명나라와의 통상 수교였다. 그러나 심유경(沈惟敬)을 내세운 마린 로드 상방의 목표는 1573년부터 시행된 일조편법(一條鞭法)의 사수(死守)였다. 일조편법은 모든 조세를 토지의 질과 양에 따라 평균 세액을 결정해 부과하는 토지세와 인두세 두 개로만 고정시키고 현물이 아닌 은(銀)으로 납입하게 하는 제도였다. 따라서 일조편법은 실질적인 은본위제를 중국에 확립시켜 은괴(銀塊)를 결제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이런 은괴의 사용은 할인이 가능한 고액의 대량거래를 활성화시켰다. 고액의 대량거래는 은괴가 아니면 결제할 수 없었고 큰 배들로 한 번에 운반하지 않으면 수지를 맞출 수 없었다. 차(茶)를 바다를 통해 무역하는 것은 마린 로드 상방의 오랜 꿈이었다. 토지세와 인두세의 이중 부담을 지게 된 농민들은 결국 농지에서 떠나야 했고 따라서 도시화가 촉진되었다. 값싼 노동력의 끊임없는 유입은 항구의 번성을 담보해 주었고 이는 결국 바다를 통해 차(茶)를 무역한다는 송(宋)나라 이래로부터의 마린로드 상방의 꿈을 실현시켜 주었다. 이제 가까스로 시작된 번영이 이십 년도 안되어 조선에서 벌어진 전쟁 때문에 망쳐질 수도 있었다.
호유용과 이선장의 설득으로 해양 무역을 지원하던 주원장이 1371년 개중법(開中法) 시행으로 순식간에 실크 로드 상방과 손잡아 해금법(海禁法)으로 돌아선 것은 고려가 북원(北元)과 결탁하는 것을 사전에 막지 못해 생긴 일이었음을 병부상서 석성(石星)은 마린로드 상방 내의 조선 파병 반대론자들에게 역설했다. 이제 일본의 침략을 받은 조선을 군사적으로 도와 이로써 국가재정의 부유함을 보여 황제에게 일조편법의 효용성을 과시하고 동시에 공민왕의 고려가 범했던 잘못을 조선이 다시 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지금의 이 번영을 유지하는데 결정적이라는 것이었다. 만약 이번 위기를 관리하지 못한다면 또다시 널빤지 한 장도 바다로 나가지 못하는(片板不许下海) 반동(反動)이 일어날 거라는 석성의 경고였다. 구원군 파병과 더불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冊封)해 명나라에 조공(朝貢)을 바칠 자격을 갖추게 한 후 영파(寧波)항을 통해 일본과의 감합무역(勘合貿易)을 재개하자는 일명 봉공안(封貢案)이 추진되었다. 마린로드 상방(商幇)의 고향인 저장성(浙江省) 항주(杭州) 출신의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 송응창(宋應昌)이 입안(立案)한 계획이었다. 그런 송응창이 조선에 부임한 것은 당연했다.
요동 부총병(副摠兵) 조승훈이 삼천명의 기마군만을 이끌고 항왜원조군(抗倭援朝軍)으로 조선에 들어온 건 1592년 6월이었다. 일본군을 얕잡아 보던 그는 8월 23일(9.28) 평양성내에서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단지 부하 몇십 기만 이끌고 간신히 중국으로 돌아갔다. 명나라 조정은 이후 진사(進士) 출신의 정 3품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 송응창(宋應昌)을 경략비왜군무(經略備倭軍務)에 임명해 항왜원조군(抗倭援朝軍) 총사령관으로 조선에 파견했다. 경략(經略) 송응창이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지휘하는 43,000명 병사들을 휘하(麾下)에 두고 조선에 들어온 건 1592년 12월 25일(1.27)이었다. 방해어왜총병관(防海禦倭摠兵官) 이여송이 부총병 양원(楊元)이 지휘하는 불랑기포로 무장한 포병대의 활약으로 1593년 1월 9일(2.9) 평양성을 탈환한 후 이동하는데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포병대 없이 자신의 기마군만으로 후퇴하는 일본군을 급하게 추격하다 벽제관(碧蹄館)에서 간신히 살아 나오는 충격적인 패전이 일어났다. 1593년 1월 27일(2.27) 벽제관에서 부하들의 죽음으로 겨우 연 퇴로(退路)로 살아온 이여송은 개성을 넘어 평양까지 되돌아갔다. 벽제관 碧蹄館) 전투는 임진전쟁 중 화약무기의 사용이 거의 없었던 유일한 재래식 전투였다. 일본군에게는 화약이 더 이상 없었다. 한양 탈환 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명나라군을 기다리며 행주에 진을 친 2,800명의 조선군이 만난 건 명군(明軍)을 격퇴해 기세가 오른 3만 명의 일본군이었다. 1593년 2월 12일(3.14) 벌어진 전투에서 승자총통으로 무장한 화차와 석탄(石彈)들을 날리는 천자총통, 비격진천뢰를 쏘는 완구(碗口)등의 화약 무기로 3만의 일본군을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이 무찌른 연후에야 가까스로 다시 개성까지 남하한 명나라군이었다. 일본군에게는 이제 강화회담만이 살 길이었다. 모를 리 없는 송응창이었다.
전투를 계속해 일본을 패전시킨 후 종전회담을 하자는 조선의 임금과 조정의 요구는 명나라의 왜군(倭軍)에 대한 모든 전략(略)을 짜고 물자를 준비(備)하고 전쟁을 경영(經)하는 역할(務)을 맡고 있는 경략(經略備) 송응창에 의해 묵살되었다. 당시 명나라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란들을 진압하는 데만도 엄청난 재정과 군사를 투입하느라 곤욕을 치르던 명나라의 호부(戶部)와 병부(兵部)는 조선에서 더 이상의 돈과 병력이 손실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593년 4월 초에 한양에서의 심유경과 고니시간의 4개 조 휴전 합의로 일본군이 안전하게 한양에서 부산포로 떠난 게 1593년 4월 18일(5.18)이었다. 송응창은 퇴각하는 일본군에게 조선의 의병들이 공격을 가해 강화회담에 의도치 않은 혼란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1593년 정월에 이미 조선 전역의 의병(義兵) 현황을 파악해 장악하도록 조선 조정에 명령했었다. 그때 파악되어 보고된 전국 의병의 숫자가 22,600명이었다. 당시 조선군의 4분지 1에 해당하는 병력이었다. 그러나 송응창이 우려했던 퇴각하는 일본군을 조선의 의병이 요격(邀擊)하는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명나라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당시 의병(義兵)의 밀집지였던 남해안에 역병(疫病)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쇼군(征夷大將軍)도 아닌 관백(關伯)에 불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冊封)해 명나라에 조공(朝貢)을 행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 후 저장성(浙江省) 영파(寧波)에 시박사(市舶司)를 설치, 영파를 일본과의 감합무역항(勘合貿易港)으로 개항한다는 봉공안(封貢案)을 조선과 일본을 모두 안정시키는 계책(計策)으로 황제의 재가를 얻기 위해 절강성 항주 출신인 송응창은 조선에서의 뚜렷한 업적이 필요했다. 십만이 넘는 일본군을 부산포까지 철수시킨 것은 그래서였다. 그러나 영파항을 개항해 감합무역을 재개한다 해도 일본으로서는 안전한 항로(航路)를 확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경유항(經由港)들을 확보하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다. 일본과 명나라 영파항을 오고 가는 안전한 항로 문제는 스페인의 펠레페 2세로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사안이었다. 명과의 교역이 합법화만 되면 목적을 달성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일본으로서는 감합무역선(勘合貿易船)들에 대한 해난구조(海難救助)를 위해서라도 부산과 흑산도를 잇는 남해안은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 분단론과 4도 할양론은 남해안 연안 확보에 대한 반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들고 나온 위장책이었다. 이미 한양에서 부산으로 철군할 때 송응창으로부터 분명히 양해받은 사안이라고 생각한 일본이었다. 진주성의 비극이 잉태되고 있었다.
1593년 5월 부산포로 철군한 일본군은 감합무역에 대비한 조선 내 경유지(經由地) 건설 작업에 돌입했다. 일본의 주력 무역품은 전통적으로 시즈오카의 찻잎(茶葉)이었다. 규슈의 하카타에서 이키섬과 쓰시마섬을 징검다리 삼아 보름이면 닿을 수 있는 부산포와 합포(蛤浦)를 중심으로 방어 요새들이 건설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12(열두 개) 성새(城塞) 건설 명령이었다. 김해 북쪽에서 가해지는 공격에 대비해 양산과 구포, 김해에 왜성이 축조되어 부산포를 보호하는 낙동강 서안(西岸) 방어의 축이 되었다. 부산진성을 부수고 축조된 부산포 왜성과 동래 왜성, 기장(機張) 죽성리(竹城里) 왜성(倭城)과 울산 서생포(西生浦) 왜성이 축조되어 낙동강 동안(東岸) 방어의 축이 되었다. 또한 가덕도에도 성을 축조했는데 눌차왜성(訥次倭城) 또는 가덕도왜성(加德島倭城)이라 불렸다. 고려 원종 때 여몽 군의 일본 침공 전진기지였던 회원현(會原縣) 합포(蛤浦) 방어를 위한 웅포왜성과 안골포왜성, 명동왜성과 지마왜성등 네개의 왜성이 건설되어 12개의 요새가 완성되었다. 감합무역이 재개될 때 시즈오카에서 나오는 일본 찻잎(茶葉) 물동량을 독점하려는 절강((浙江) 상인들의 욕망이 가림막 하나 없이 적나라하게 표출되고 있었다. 이런 시세(時勢)를 모를 리 없는 일본은 부산포와 합포 방어선에 치명적인 위협인 진주성(晉州城)에 들어앉은 조선군을 제거하기 위해 출정했다. 송응창의 강력한 명령으로 진주성 공격을 위해 진군하는 9만의 일본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진주성 코앞까지 진격해 갔다. 1593년 6월 21일부터 29일(7.19-7.27)까지 계속된 전투 후 진주성(晉州城)은 함락되었고 군인 6천 명과 민간인 24.000명은 모두 도륙(屠戮)되었다.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 충청 병사 황진(黃進), 조방장 정명세(鄭名世), 경기 조방장 홍계남(洪季男), 경상 우병사 최경회(崔慶會), 복수의장(復讐義將) 고종후(高從厚)등은 진주성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조선 장수들이었다. 그때 행주 대첩의 전공(戰功)으로 도원수에 오른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권율(權慄)이 전라 병사와 각항(各項)의 장령(將領) 등에게 전령(傳令)하여 군사를 이동하지 말라는 명나라 경략 송응창의 명령을 전했다. 경상우병사 최경회와 충청병사 황진, 사천현감 장윤, 김해부사 이종인, 거제현령 김준민, 창의사(倡義使) 김천일, 복수의병장 고종후, 적개의병장 이 잠, 복수의병장 오유, 의병장 민여운, 강희보, 강희열, 황대중 등만이 송응창의 명령을 거부하고 진주성 방어전에 참여했다. 논개로 더 유명한 1593년의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일본인에게는 모쿠소로 신화화한 진주 목사 김시민 장군에 대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복수심에서 이뤄진 전투가 아니었다. 일본과 명나라의 무역이 재개될 때 경유지로서 조선이 얻게 될 경제적 이득을 빼앗고 자기들이 차지하기 위한 그것도 마땅히 조선이 행사해야 할 방어권조차 불공정하게 박탈한 채 치른 일방적인 전투였다. 아니 학살이었다.
송응창의 명령을 어기고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영웅들의 희생으로 송응창이 조선에서 일본과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파악한 실크 로드 상방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과도관(科道官)이라 불리는 감찰어사들이 경략(經略) 송응창을 맹렬히 탄핵하기 시작했다. 일본과 결탁한 마린로드의 절강성 상방이 흑산도까지 장악할 경우 뱃머리를 북으로 돌려 실크로드 상방이 지배하는 상권(商圈)까지 위협하게 될 거라는 건 상식이었다. 진주성에서 삼만 명의 조선인들이 도륙당하는 걸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조선 조정도 움직였다. 사신으로 북경에 간 김수는 눈물을 흘리며 진주성에 대한 송응창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고발했다. 이제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청부를 받은 일본의 전쟁 목적이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내세운 일본인들의 진짜 전쟁 목적이 드러나고 있었다. 송응창을 넘어 그가 입안하고 추진한 봉공안(封貢案)이 공격당하기 시작한 연유였다. 일본에서 생산한 찻잎을 세계시장에 교역되도록 허락하는 것은 결국 북방 오랑캐들의 대대적인 침략을 불러올 거라는 과도관들의 지적은 옳은 것이었다. 일본의 값싸고 질 좋은 찻잎들이 시장에 나오면 사천성과 운남성의 차생산은 경쟁력을 상실할 것이고 이는 산서성과 섬서성의 진상방들의 기반을 허무는 일이니 그들이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실크로드 진상방(晉商幇))의 자금 지원만 있다면 북방의 유목민족은 언제든 장성을 넘을 준비가 되어 있는 족속들이었다.
원통한 진주성 전투를 끝으로 임진년(壬辰年)과 계사년(癸巳年)에 걸쳐 만 1년 동안의 병란(兵亂)은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화회담을 위해 휴전에 들어갔다. 책봉(冊封)은 가능하나 공(朝貢)은 절대 불가하다는 과도관(科道官)들의 건의가 힘을 얻어가자 봉공이 이루어질 것이라 내내 상전에게 보고해 왔던 심유경과 소서행장(小西行長)이 함께 쓸 수 있는 대안은 조작밖에는 달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