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괴상했던 일본군 기동(機動)의 이유
賊至尙州 遣通事景應舜 持書契請和 且以一赤幟爲信. 上遣李德馨 問其入寇之由 德馨至龍仁 賊已踰嶺 故不至而還. 적이 상주에 이르자 통사(通事) 경응순(景應舜)을 보내어 서계(書契)를 가지고 와 화친을 청하고 하나의 붉은 깃발로 표신을 삼았다. 상이 이덕형을 보내어 침범한 까닭을 묻고자 하였는데 덕형이 용인(龍仁)에 이르렀을 때 적이 벌써 재를 넘은 까닭에 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4월 17일 병오
일조편법(一條鞭法)으로 스페인의 은괴 가치를 한껏 올려주었던 장거정이 갑자기 병으로 쓰러져 실각한 건 이베리아 연합이 탄생한 다음 해인 1581년이었다. 1572년 융경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어린 만력제가 즉위한 이후 실질적인 명나라의 황제는 섭정대신이었던 장거정이었다. 장거정이 병석에 들고 1582년 죽자 아무런 문제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스페인의 화약 확보에 다시 암운이 들었다. 장거정이 죽은 1582년 친정을 시작한 명 황제 만력제는 화약의 가장 중요한 원료인 초석(硝石) 거래에 대한 검열과 단속을 명했고 탈정(奪情)과 탄핵(彈劾) 상소가 빗발친 장거정의 봉호와 시호를 박탈했다. 그 후에도 죽은 장거정에 대해 사후 사형까지 내려 가산을 모두 몰수했다. 장거정의 장남 장경수(張敬修)는 끝내 자살했고 장거정의 가족은 모두 변경으로 추방되었다. 만력제가 후일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자신의 개인재산을 써가며 군대를 파병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대를 조선에 묶어두고 끝내 명나라로의 침략 기도를 꺾어버린 것은 이미 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원숭이이고 뒤에 진짜 침략 원흉이 따로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결국 초석을 얻기 위한 마지막 선택으로 펠리페 2세는 명나라와의 간접 전쟁을 결정했고 그 일은 1560년부터 포르투갈이 총과 화약으로 지원해 온 일본 오다 노부나가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는 포르투갈의 지원이 끊긴 1578년부터 자신만의 꿈을 꾸고 있었다.
왕안석의 신법으로 송나라의 막대한 상업 자금이 유입되어 시즈오카에서 차(茶) 생산이 대대적으로 부흥되면서 일본의 모든 역사는 다시금 시즈오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일본 역사에서 일본의 중심이 규슈에서 야마토로 다시 아스카와 나라로 이동해 간 것도 시즈오카의 찻잎을 발해 같은 북방지역의 새로운 시장으로 수출하는 문제 때문이었는데 비와호(琵琶湖)를 끼고 있어 츠루가(敦賀) 같은 북방 항구로도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교토가 결국 일본의 중심이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국에서 차나무가 사라진 후 차(茶)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시즈오카의 찻잎을 공급하는 길은 크게 두 갈래였는데 하나는 고대로부터 확립된 세토(瀨戶) 내해를 통해 한반도를 거쳐 수출하는 길과 발해로의 수출을 위해 그때부터 본격 개발된 동해(東海)를 통한 북방 대륙으로의 수출길이었다. 당말(唐末) 오대십국(五代十國) 기간 동안 실크로드 상방에 의해 막혀있던 시즈오카 찻잎 수출길은 송나라의 왕안석 신법으로 시즈오카가 다시금 적극 개발되면서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세토내해를 통해 하카타(博多:지금의 후쿠오카)로 연결되는 기존 무역로가 아닌 비와호를 통해 교토와 연결되는, 지금의 후쿠이현(福井)의 츠루가(敦賀)항이 하카타와 이어지는 항로가 새로 개척되면서 츠루가는 송일(宋日) 무역(貿易)의 중심항으로 부상했다. 이렇게 시즈오카에서 생산되는 찻잎으로 호쿠리쿠 지방(北陸地方)의 츠루가항이 각광받은 것은 수송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해상 운송을 내륙 운송보다 선호했던 송나라 상인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와미 은광을 경유하는 항로를 운용할 수 있어서였다. 이런 역사들 때문에 시즈오카를 포함해 이를 둘러싼 지역들 즉 지금의 아이치현과 기후현, 야마나시현과 나가노현을 영지로 삼았던 스루가(시즈오카), 미카와(아이치), 오와리(아이치), 미노(기후), 가이(야마나시), 시나노(나가노) 국들이 센고쿠(戰國) 시대의 주역으로 이름을 새길 수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다나카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 등은 모두 이 지역들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시즈오카를 영지로 갖고 있던 스루가국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가 센코쿠 시대에 제일 먼저 "천하에 가장 가까운 남자"로 불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수회 그리고 포르투갈 상인들과 연결된 명나라 제일의 해적왕 왕직(王直)이 이마가와에게 조총과 화약을 지원해 지역 패권을 쥐게 한 건 찻잎 때문이었고 이마가와가 그 찻잎 수출로(輸出路)가 지나가는 지금의 아이치현과 기후현, 교토까지 장악하려고 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인접한 도토미를 진즉 합병한 이마가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영주로 있는 미카와와 오다 노부나가가 영주로 있는 오와리를 합병하고 교토로 나가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건 자신을 후원하던 왕직이 처형당한 다음 해였다. 1560년 2백 정의 조총대를 앞세운 4만 5천 명의 군대로 손쉽게 교토까지 나아갈 거라는 예상과 달리 억수같이 퍼붓는 비로 화승총인 조총이 소용없어지는 때를 이용한 2천 오다군 결사대의 전통적 접병전으로 조총대로 이뤄진 이마가와 본진은 전멸해 버렸다. 일본에 조총이 들어올 때부터 조총에 주목한 오다 노부나가는 이제 새로운 패자로 이마가와를 대신해 예수회 수도사와 포르투갈 상인들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왕직을 팔아넘겨 예수회와 포르투갈 상인들이 합법적으로 마카오에 정주하며 일본과 무역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던 오다였다. 엄청난 자금이 소요되는 3000 정의 뎃뽀(でっぽう, 鐵砲)로 무장한 부대를 운영해 오다 노부나가가 전국시대를 평정할 수 있었던 연유였다.
1543년 왕직과 함께 온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이스팅가 총을 구매한 종자도(種子島) 영주 도키타카(時堯)는 그 총을 국산화해 뎃뽀(철포) 보급의 역사를 남겼지만 화약은 만들 수 없었다. 이스팅가총은 흔들림이 많은 배 위에서 사격할 수 있도록 아르케부스(Arquebus)의 무게와 구경을 줄이고 거추장스러운 개머리판도 없애 권총 손잡이만 한 부분만 남겨놓고 방아쇠는 압력이 낮은 순발식 격발 기구로 되어 있어 다루기에 편리한 총이었다. 그러나 당시 전 세계에서 추진제로 작용하는 화약을 제대로 만들어내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과 조선뿐이었다. 중국 항주와 양주에서 비밀리에 사들인 초석(硝石)을 이스팅가총과 함께 일본에 가져가 중국 초석에 일본의 황과 숯을 혼합해 화약으로 만든 마카오의 포르투갈 상인들은 이 화약의 일부를 이스팅가총과 함께 이와미 은광에서 생산한 조긴(丁銀)을 받고 일본에 팔았다. 대부분의 화약은 이와미의 조긴(丁銀)과 함께 마카오로 다시 가져갔는데 그 이유는 보유한 화약 모두를 포토시의 은괴(銀塊)로 대금을 지급하는 마닐라 갈레온의 스페인 상인들에게 팔기 위함이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의 손으로 들어간 이와미(石見)의 조긴(丁銀)과 포토시의 은괴는 마카오에서 중국 차(茶)와 그것을 담을 자기(磁器), 그리고 초석을 사는데 다시 쓰였다. 이러한 상품 순환이 마카오와 나가사키 항로를 주축으로 한 남만무역을 활성화한 요인이었다. 남만무역(南蠻貿易)의 주력 상품은 향신료와 생사(生絲)가 아니었다. 초석과 화약이었다.
1526년 발견된 이와미 은광(石見銀山)에서 생산된 조긴(丁銀)이 전 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했었다는 기록은 이렇듯 화약 때문이었다. 납(鉛)이 많이 함유된 저급한 이와미의 은광석을 중국에서도 받아들일 정도의 정은(丁銀:은과 납의 비율이 8:2인 銀)으로 바꾼 건 1503년 조선에서 개발된 연은(鉛銀) 분리법인 회취법이었다. 회취법(灰吹法)으로 생산량이 대폭 늘어난 단천광산의 은(銀)으로 마린로드 상방의 국제 무역 체제에 일본 찻잎을 매개로 조선을 연결시키려던 연산군은 그 때문에 실각했고 조선에서는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이 혁명적 은(銀) 생산법은 1533년 끝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회취법으로 이와미 광산이 각광받게 되자 은광이 있는 시마네는 물론 야마구치와 하카타까지 영지로 다스리고 있던 오랜 전통의 명문, 백제부여계 후손인 오우치 가문이 몰락하는 원인이 되었다. 1555년 2만 명의 오우치 군을 4천 명의 모리군이 물리침으로써 수백 년 동안 영주로 군림하던 전통의 오우치 가문을 몰락시키고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가 주코쿠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미 은광을 확보해야만 했던 포르투갈의 뎃뽀와 화약 지원 덕분이었다. 이렇게 예수회의 총과 화약으로 일약 무명(無名)의 집안에서 다이묘가 된 모리가(家)가 역시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 오다 노부나가와 맞붙게 된 것은 포르투갈에서 왕위계승분쟁이 발생해 혼란이 벌어져 일본에의 지원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포르투갈의 지원이 없어진 상황에서 이와미 은광을 경영하는 모리가(家)의 풍부한 재정은 오다 노부나가에게는 반드시 뺏어야 할 목표가 되었다.
1578년 포르투갈 국왕 세바스티앙이 아프리카 모로코 원정중 전사하면서 시작된 아비스 왕가의 후계 분쟁은 살리카법에 의해 결국 세바스티앙의 증조부 미구엘 1세의 외손자인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의 왕을 겸하는 것으로 1580년 최종 정리되었다. 이 2년이 채 못 되는 혼란 동안 일본에 대한 포르투갈의 지원은 끊겼고 오다 노부나가는 이 기회를 이용해 독립하기로 결심했다. 이와미 은광은 그래서 오다 노부나가가 가장 시급히 차지해야 할 곳이었다. 1578년 겨울, 심복인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에게 군대를 주어 이와미 은광이 있는 지금의 시마네현 오다로 은밀히 쳐들어가게 했다. 마쓰다이라 모토야스 (松平元康)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로 개명한 미카와(지금의 아이치현)의 영주가 예수회와 포르투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오다 옆에 서있었다. 1580년 포르투갈을 합병한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예수회를 통해 오다 노부나가에게 조선 침략을 통한 명나라와의 전쟁 준비를 종용했고 오다 노부나가는 거부했다. 이와미 은광만 장악하면 포르투갈의 지원 없이도 충분히 자력으로 일본을 운영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던 오다였다. 1582년 이와미 은광을 뺏기 위해 주코쿠의 모리군을 공격하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에게서 온 지원군 요청 급보에 오다 노부나가는 기나이(지금의 오사카) 방면군에게 지원을 명령했다. 기나이 방면군을 지휘하던 장수가 ‘적은 혼노지(本能寺)에 있다’로 유명한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였다. 백명의 조총기마대만을 이끌고 지금의 시마네현을 향해 출정한 기나이 방면군을 뒤쫓아 교토의 혼노지(本能寺)에 들어간 오다는 주코쿠(中国)로 가지 않고 오다를 노리고 교토로 회군한 아케치군에 의해 죽음을 강요당했다. 혼노지의 변으로 이름 붙여진 사건이 일어난 건 1582년 6월 21일이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혼노지(本能寺)에서 제거한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는 이제 자신이 스페인, 포르투갈 동군연합의 지원을 받는 일본의 쇼군이 될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사주한 펠리페 2세는 일본에 파견되어 있는 예수회 수도사들로부터 다른 보고를 받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오랜 세월 마린로드 상방과 밀착한 엔랴쿠지(延曆寺) 천태종 세력을 일소하고 또 승려가 결혼과 육식을 해도 무방한, 실크로드 상방(商幇)과 연결된 혼간지(本願寺) 정토진종(浄土真宗, 一向宗) 세력도 억눌러 일본의 평민들에게 높은 신망을 받고 있었다. 그런 오다 노부나가를 시해한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가 쇼군으로 나설 경우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이들이 절대로 수긍할 리 없으며 이는 일본을 조선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벌린 오다 제거가 오히려 내전을 격화시킬 수 있다는 보고였다. 오다 노부나가를 제거한 이유는 그가 조선전쟁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모리군(軍)과 대치하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는 영리했고 예수회 수사 세스페데스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했다. 원래 포르투갈의 지원을 함께 받는 수하(手下)였기에 추격당할 염려도 하지 않고 모리군(軍)과 휴전한 하시바 군(軍)은 교토로 회군하면서 모리가(家)가 준비해 준 식사를 하며 쉬지 않고 빠른 속도로 교토(京都)로 진군해 무방비의 반란군 아케치군(軍)을 접수하고 아케치를 처형했다. 하시바의 인기와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천한 신분이었던 하시바는 도요토미로 개명했어도 쇼군(將軍)은 될 수 없었다. 1585년 도요토미라는 바꾼 성(姓)으로 관백(觀白)이 된 그는 1592년 스페인 포르투갈 동군연합국의 펠리페 2세의 지원으로 명나라를 쳐들어 가기 위해 먼저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화약이 너무 부족해서 그 화약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일으킨 전쟁이 임진전쟁이었다. 화약 제조에 가장 중요한 초석을 마음껏 확보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기에 펠리페 2세는 일본군을 화약이 많이 소모되는 대포(cannon)로 무장시켜 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불랑기(石火矢 이시비야) 같은 당시로서는 최신 대포까지 실전에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화약무기 사용에 관한 한 정통해 있었다. 규슈(九州) 구마모토와 가고시마를 다스리던 사쓰마번(薩摩蕃)의 시마즈(島津) 가문이 오이타현의 분고번(豊後蕃)을 공격하자 분고(豊後)의 슈고다이묘(守護大名) 오토모 소린(大友義鎮)은 포르투갈에서 입수한 불랑기포(佛郞機砲)를 사용해 시마즈 형제들의 공격을 물리친 게 1576년이었다. 그런 일본의 문제도 스페인과 똑같이 화약을 제조할 초석(硝石)이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화약 소모량이 대포에 비해 현저히 적은 조총으로만 일본군을 무장시켰고 그도 충분한 화약을 보급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수군(水軍) 또한 함포가 아닌 조총으로 무장했다. 조선이 중국과 함께 최고의 화약을 만들어 내고 중요 병영성(兵營城)에 보관한다는 것을 을묘왜변과 많은 정탐으로 알고 있었기에 일본군은 중요 병영성(兵營城)이 있는 경주(慶州邑城), 상주(尙州城), 청주(淸州城)를 신속히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3개로 나누어 진격시켰고 이후 충주성(忠州城)에 함께 모여 조선의 왕도(王都)를 점령해 화약을 최대한 빨리 확보하는 것에 모든 전력(戰力)을 기울였다. 임진왜란 초기 왜군의 믿을 수 없이 빨랐던 진군 속도는 그래서였고 각 만 명 정도의 군대로 편성된 3개군을 경주와 청주, 상주를 향해 매진(邁進)시킨 연유였다.
1592년 음력 4월 14일(5.24) 부산에 상륙한 고니시 유키나가 군에 의해 정발이 방어하는 부산진성이 함락된 이래 19일 만인 음력 5월 2일에 한양이 함락되었다 일본군이 그토록 빠른 진격 속도를 보인 것은 군기시에 보관된 화약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강화성으로 옮겨 보관하게 된 군기시의 화약은 북방의 여진과 남방의 왜구를 진압하기 위한 비축분이어서 총 2만 7천 근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음력 4월 30일에 선조가 의주를 향해 떠난 후 일본군이 제천정(濟川亭:지금의 한남동) 앞 한강을 도하하기 직전인 음력 5월 1일, 경복궁이 모조리 불탔다. 경복궁이 불탄 건 장예원에 보관되어 있는 노비 문서를 태우기 위해 조선의 노비들이 장예원에 놓은 불 때문이 아니었다. 군기시에 보관되어 있던 2만 근에 가까운 비축 화약을 터뜨려서였다. 일본군이 병참(兵站)을 무시한 채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진군해 오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선조와 비변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제시한 정명향도(征明嚮導:명나라를 정벌하는데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어라)의 뜻을 대마도주(對馬島主)인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가도입명(假道入明:명나라에 조공 바칠 수 있게 길을 빌려달라)으로 변조해 조선에 외교문서를 접수시킨 것이 1589년 8월이었고 이 때문에 사변(事變)으로 커진 것이 그 해 10월에 벌어진 정여립 역모사건이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확한 의도와 전쟁 준비상태를 확인하고자 보내진 것이 1590년 4월의 조선 통신사였다. 정사 황윤길의 보고는 일본에 의한 침략은 일어날 것이다라고 해석되었고 부사 김성일의 보고는 단기전은 모르겠으나 조선 전역을 점령할 만한 장기전을 수행할 군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로 분석되었다. 선조는 충주에서 사둔 (査屯)인 신립이 이끄는 조선 정예 기마군단이 패한 후 조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왜군이 한양에 당도하기 이틀 전에 평양을 향해 몽진을 떠났다. 일본군이 화약과 자신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선조는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
선조가 화약뿐 아니라 명나라와의 강화협상에 써먹기 위해 자신을 사로잡으려 미친 듯이 진군하는 일본군을 피해 한양 도성을 버리고 평양으로 향한 것이 음력 4월 30일이었다. 왕이 충분히 멀리 떠났다고 판단되는 시점에 지금의 서울시청 자리에 있던 군기시에 보관되어 있던 화약에 불이 놓였다. 군기시에 전시 비축 물자로 반드시 보유해야 할 화약양은 정해진 것이 2만 7천 근(1 斤=0.6 kg, 약 16톤)이었다. 전라도 좌수영으로 보내진 화약량이 상당하고 진주성으로 보내진 화약량까지 감안하면 2만 근은 안 되는 양이겠으나 한꺼번에 터졌을 그 폭발력이 어디까지 뻗쳤을지는 가늠하고도 남음이 있다. 군기시의 보유 화약을 일본군에게 넘겨주지 않으려 폭발 처리함으로써 주변에 있던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등 모든 궁궐은 쑥대밭이 되었다. 이 폭발이 평양성에서 재연되지 않은 것은 선조가 떠난 평양성 수비군에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은 화약을 한양에서처럼 터뜨리지 않고 터뜨리는 것보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풍월루의 연못에 집어넣는 작업을 선택한 것은 도순찰사(都巡察使) 이조판서 이원익이었다. 결국 일본군의 진입 직전에 평양성 북문을 아슬아슬하게 떠날 수 있었던 건 이원익의 애국애족에 감명한 천지신명의 도움 때문이었다. 오늘날 겨레의 유산으로 남아있는 고구려 때부터의 평양성곽과 성내의 여러 건물 유적은 나라와 겨레를 그 무엇보다 높고 크게 생각한 이원익과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명령을 따랐던 군사들의 충정을 보여준다. 그런 그였기에 유성룡도 감히 나서지 못한 선조의 분노에 맞서 죽음의 위기에 놓인 이순신을 정탁과 함께 구명할 수 있었고 그렇게 구해낸 이순신은 12척의 판옥선으로 조선을 패전에서 구해냈다.
전쟁 발발 전 경상도와 황해도, 평안도와 함경도의 각 병영들에 보관되어 있던 화약을 진주성과 전라도로 이전, 통합 보관하도록 조치한 것도 비변사와 선조였다. 조선의 화약이 각 병영에 분산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쟁 전에 이미 파악한 일본군이 부산과 울산, 김해에 따로 상륙한 후 세 갈래로 청주성과 경주성, 상주성, 그리고 충주성을 향해 미친 듯이 진격한 것은 그 성들에 보관되어 있는 화약을 탈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곳에 최소 5 천근씩은 있어야 했던 화약들은 이미 옮겨진 뒤였다. 고니시 유키나와가 이끄는 1군이 부산에 상륙해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상주로 진격하고 울산으로 상륙한 2군 가토 기요마사가 경주로, 그리고 김해로 상륙한 3군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가 청주로 진격한 건 그래서였다. 경상도라는 이름이 경주와 상주에서 나왔고 충청도가 충주와 청주에서 나왔듯 이들 지역은 조선의 국방상 요충지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화약 확보에 허탕 친 그들이 충주에 모여 한양으로 북상하는데 매진한 것 또한 군기시에 보관되어 있는 화약 확보 때문이었다. 한양에서 화약 탈취에 거듭 실패한 일본군이 1군은 평양성이 있는 평양으로 2군은 6진이 있는 함경도로 나뉘어 진격해 나간 것도 그곳 병영에 보관되어 있을 화약을 탈취하기 위해서였다. 임진왜란 발발 초기 일본의 진격 형태와 경로가 특이했던 연유였다.
평양성을 방어하던 조선군이 남은 화약을 풍월루의 연못에 쏟아부어 못쓰게 한 후 퇴각하는 바람에 계획대로 조선의 화약을 탈취해 확보하지 못한 고니시의 1군은 평양성에서 단 한 발자국도 떠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유성룡이 하늘의 도움이라고 묘사했던,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일본군의 무의미한 평양성 체류가 발생했던 연유는 화약 부족 때문이었다. 가지고 온 화약은 이미 다 떨어졌고 미친 듯이 진격한 대가로 길어진 병참선에 화약은 보급되지 못했다. 조선에서 군사활동이 가장 많았기에 화약 보유량도 제일 많을 것으로 예상된 함경도 최북단의 6진에서도 화약은 없었다. 종성까지 진군한 가토의 2군은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음력 6월 14일에 끝난 평양성 전투로 일본군에게는 화약을 확보해야 한다는 절박한 명령이 주어졌다.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제3군이 평양을 떠나 황해도 연안(延安)으로 남하한 건 해주에 있는 황해감영(黃海監營)에 있을지도 모를 화약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경상감영(慶尙監營)이 있는 상주, 충청감영(忠淸監營)이 있는 충주, 평안감영(平安監營)이 있는 평양에다 청주성과 경주성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화약은 없었다. 결국 전라도였다. 화약은 전라도에만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과 권율과 황진 장군의 이치 전투가 음력 7월 8일(양 8.14) 같은 날 남해 거제도와 전주성 외곽 지금의 금산군 진산면에서 벌어진 것은 그래서였다.
화약이 비축되어 있는 전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한양에서 남하한 일본군 제6 군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1만 명의 일본군을 순찰사(巡察使) 이광이 임시로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임명한 권율 장군의 화포 운용과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 장군의 접병전으로 이치에서 패퇴시킨 전투가 이치전투(梨峙戰鬪)였다. 강진의 전라병영성에 비축된 화약을 노리고 나선 일본 연합 함대를 대장선은 침몰시키고 최고지휘관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겐 부상을 입히고 아타케부네 37척 중 35척을, 세키부네 23척 중 20척을, 고바야부네 13척 중 5척을 모두 침몰시켜 부산을 제외한 남해안 전역의 제해권을 틀어쥔 전투가 한산도 대첩이었다. 임진년 3대 대첩 중 두 개의 대첩이 같은 날 이뤄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제 화약을 확보할 수 있는 마지막 목표인 남원성을 향해 몰려갈 수밖에 없었던 일본군을 가로막은 건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있는 진주성이었다. 1592년 음력 10월 4일부터 10일(양 11. 7~11. 13)까지 일본군 3만 명이 동원되어 3천8백 명의 조선군이 지키고 있던 진주성을 함락시키려다 패퇴한 전투가 진주성 대첩이었다.
김시민이 이순신처럼 선조가 특별히 진주성에 제수(除授)한 무과급제 출신 무관(武官)이라는 점을 일본은 모르고 있었다. 이순신처럼 니탕개의 난 진압에 참전해 화포(총통)의 효용성을 알게 된 그가 병조판서가 된 옛 상관 정언신을 만나게 된 자리에서 화포의 확대 운용을 건의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모를 벗어던지며 사직을 했던 사실도 일본은 몰랐다. 낙향해 있던 김시민을 오품 이하의 관원을 임명할 때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동의가 있어야 임명할 수 있다는 대간의 서경권을 누르고 종육품 진주목 판관으로 제수해 진주성으로 보낸 게 선조라는 사실을 일본은 알 리가 없었다. 그때가 1591년 임진전쟁이 발발하기 십 개월 전이었다. 선조에게서 받은 전수방략으로 화포 수성법을 숙지한, 화약까지 직접 제조할 줄 알았던 김시민이 화약을 산처럼 쌓아 보관하고 있는 강진과 나주로 가는 길목인 진주성에 임진년 11월에 그곳의 방어를 책임진 진주목사로 버티고 있음을 일본군은 몰랐다. 몰랐다는 건 이해받을 수 있는 패전의 이유였으나 용서받을 수는 없었다. 김시민은 종전 후 선조가 직접 선정한 선무공신으로 이순신과 단 둘만 받은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다. 임진년의 이 기묘하고도 터무니없는 일본군의 남북과 동서로의 어지러운 갈지자 기동은 화약 확보에 목을 맨 일본군의 사정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일본군은 처음부터 화약이 부족(不足)했다. 스페인 포르투갈 동군연합의 반식민지 같은 비정상적 상황만 아니었다면 일본은 절대로 조선을 침략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조선통신사 부사로서 학봉 김성일이 어전에서 한 보고가 결코 날조(捏造)된 것으로만 볼 수 없는 연유다.
선조가 정여립 모반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조선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고 확실한 판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십 년 동안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던 종계변무((宗系辨誣) 사건 때문이었다.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고 그가 고려의 마지막 네 왕(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을 시해했다고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 대명회전(大明會典)의 내용을 바꾸기 위해 들인 노력과 정성으로 선조가 얻은 것은 명나라 황실과 조선 왕실 간의 더러운 밀약들이었다. 주원장과 이성계 그리고 주태와 이방원간의 서로 각기 맺은 더러운 밀약들을 상세하지는 않으나 대강은 파악하는 성과를 선조는 종계변무 노력으로 이룰 수 있었다. 그 속에서 선조는 자신이 명나라의 원조와 참전을 이끌어 내는 확실한 인계철선임을 알아챘다. 만약 자신이 전쟁 중에 죽거나 사로 잡힌다면 명나라는 조선이 어떻게 되든 절대로 상관(相關)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 밀약들은 명과 조선이라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약속들이 아니었다. 주태의 후손들로 이어진 명 황실과 이방원의 후손들로 이어진 조선 왕실 사이의 집안과 집안 사이의 약속이었다. 종계변무가 조선 역사에 드러난 건 이방원이 왕이 된 1402년부터였다. 주태가 역모에 성공해 황제가 된 후 1403년 사은사 이빈(李彬)과 민무휼(閔無恤) 에게 정정해 달라는 주본(奏本)을 제출케 하고 다음 해 돌아온 이빈이 조선 왕의 말에 따라 변경하라는 영락제(성조)의 지시를 전하자 이 사건은 정정된 것으로 끝이 났었다. 조선국은 즉 고려로서 그 李仁人(任) 및 아들인 이성계 지금 이름 旦이라는 자는 홍무 6년으로부터 홍무 28년까지 전후로 왕 씨의 네 왕을 시해하였다(大明會典권 105, 禮部 63, 朝貢 1, 朝鮮國)는 기록이 인쇄된 대명회전이 중종 13년(1518년) 조선에 전달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후 중종은 급변했고 조광조의 개혁은 1520년 기묘사화란 이름으로 그와 김식, 기준, 김정, 한충의 목숨을 뺏고 끝나야 했다. 중종이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귀에 경악한 건 계유정난의 불가피함을 정면으로 비판한 연산군을 몰아낸 세력이 또다시 뭉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명나라의 제도와 행정 법규를 기록한 법전인 대명회전은 1509년에 편찬되었고 그 두 번째가 1587년에 편찬된 명나라 조정이 발행하는 백과사전이었다, 1576년에 두 번째 편집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에 즉위 십 년이 된 선조는 종계변무에 집착했다. 선조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들에게 경연으로 경전들을 배운 유학자였다. 당시 황제였던 만력제의 이름을 따서 만력회전(萬曆會典)이라는 이름이 붙은 두 번째 대명회전은 그래서 장거정을 부관참시한 이후 조정에는 아예 나타나지도 않고 국정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만력제의 이목을 끌었다. 두 번째 편집에서는 이인임및 아들인 이성계 지금 이름 단이라는 자가 왕 씨의 네 왕을 시해하였다 는 기록에서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것을 반드시 정정하겠다는 조선의 필사적인 아우성이 의아했던 것이다. 시해범이 아니라고 정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아니다는 것에 목숨을 거는 조선이 궁금했던 거였다. 결국 그 사건에 대한 관심으로 만력제는 자신의 선조, 영락제와 조선 태종간의 더러운 거래들을 확인했다. 명 태조와 정몽주의 밀약도 확인했다. 그 배신도. 이들 확인들로 인한 각성은 임진전쟁 처리에 있어 만력제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예리한 판단과 단호한 결정들을 황제권으로 행사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조선에 대한 엄청난 지원과 파병 결정은 명나라 조정 대신들도 감히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만력제가 십 년 동안 장거정에 의해 체계적으로 사육되다시피 교육된 주원장, 주태의 후손이란 걸 잊어버린 대가를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톡톡히 치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