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선은 정지 장군이 만드셨다.
世子喜形於色 上過臨津渡 觀龜船 倭船相戰之狀. 세자가 안색이 기쁜 빛를 띄었다. 임금이 임진도(臨津渡)를 지나다가 거북선[龜船]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 -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1413) 2월 5일 갑인其六, 龜船之法 衝突衆敵 而敵不能害 可謂決勝之良策. 更令堅巧造作 以備戰勝之具. 愼時知兵曹. 上覽之 下兵曹. 여섯째는, 거북선(龜船)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 탁신(卓愼)이 이때에 병조를 맡았는데, 임금이 보고 병조에 내리었다. -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1415) 7월 16일 신해
신이 일찍이 섬오랑캐(島夷)들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거북선(龜船)을 만들었습니다. 이물에는 용머리를 붙이고, 그 아가리로 대포를 쏘며, 등에는 쇠못[鐵金尖]을 꽂았습니다.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으므로, 비록 왜적선 수백 척 속에라도 쳐들어가 대포를 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2차 출정)에야 돌격장(突擊將)이 그것을 타고 나왔습니다. 거북선을 운용하는 요령은,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왜적선이 있는 곳으로 돌진케 합니다. 그다음에 먼저 천자·지자·현자·황자 등 여러 종류의 총통을 쏘게 합니다. - 이충무공전서 권 2 장계 1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 중에서(사천해전:1592.5.29. 당포해전:1592.6.2)
朔壬午/員外劉黃裳將還京 上遣使問候. 劉回帖云…一面積穀催糧 運至釜山 竝整大小龜船 水兵火器列于諸島 以待倭至. 不爾 敗亡可立以待也. 원외(員外) 유황상(劉黃裳)이 장차 경사(京師)로 돌아가려 하니, 상이 사신을 보내 문안하였다. 유황상이 회첩(回帖)하기를…그리고 곡식을 재촉해 거두어 부산으로 실어 보내는 한편, 아울러 크고 작은 귀선(龜船)과 수병(水兵)·화기(火器)를 정돈하여 제도(諸道)에 배치한 뒤 왜적의 침범에 대비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패망할 날이 곧 닥치고 말 것입니다. -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593) 8월 1일 임오
上曰 龜船之制若何 以恭曰 四面飾以板屋 狀若龜背 以鐵釘揷於傍兩頭. 若與倭船遇 則所觸皆破. 水戰之具 莫良於玆. 上曰 何不多造乎? 趙仁得曰: 小臣在黃海道時 造一隻 揷之以劍 似若龜背. 其制殊爲神妙. 以恭曰 戰艦 以輕捷爲上. 當今只患無軍 不患無船. 以公私賤之居海濱者 專委舟師 則其於國計 可謂得矣. 상이 이르기를, 귀선(龜船)의 제도는 어떠한가 하니, 남이공이 아뢰기를, 사면을 판옥(板屋)으로 꾸미고 형상은 거북 등 같으며 쇠못을 옆과 양머리에 꽂았는데, 왜선과 만나면 부딪치는 것은 다 부서지니, 수전에 쓰는 것으로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많이 만들지 않는가 하니, 조인득(趙仁得)이 아뢰기를, 소신이 황해도에 있을 때에 한 척을 만들어 검(劍)을 꽂고 거북 등과 같이 하였는데, 그 제주가 아주 신묘(神妙)하였습니다. 하고, 남이공이 아뢰기를, 전선은 가볍고 빠른 것이 상책입니다. 지금은 군사가 없는 것이 걱정이지 배가 없는 것은 걱정이 아니니, 바닷가에 사는 공천과 사천을 오로지 수군에 충당하면 국가의 계책에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 선조실록 82권, 선조 29년 (1596) 11월 7일 기해
柳永慶曰 倭船則庸劣 不若我國之制. 雖似輕捷 而觸於我國船 則卽碎破無餘. 南以恭曰 我國大船所觸 常破賊船二三隻. 人人皆言 若有舟師 則可以鏖戰 其禦大賊 雖未可知. 而輜重船則定擊無疑 云. 今宜不論公私賤 蠲除本役 專屬舟師 則舟師稍專而民亦得保 豈不便好乎? 유영경(柳永慶)이 아뢰기를, 왜선은 용렬하여 우리나라의 것만 못하므로, 가볍고 빠른 듯하기는 하나 우리나라의 배에 부딪치면 곧 남김없이 부서집니다 하고, 남이공(南以恭)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큰 배가 부딪치면 늘 적의 배 두세 척을 부수므로, 사람마다 다들 말하기를 주사(舟師)가 있으면 힘껏 싸울 수 있으니, 큰 적을 막는 것은 알 수 없더라도 치중선(輜重船)은 틀림없이 칠 수 있을 것이다 합니다. - 선조실록 82권, 선조 29년(1596) 11월 7일 기해
귀선(龜船)이라 불리던 거북선이 왜선(倭船)과 맞서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오해되어 온 것은 태종실록 태종 13년 2월의 임진도 관련 기록 때문이지만 그러나 거북선은 왜선 따위와 경쟁하기 위해 만들어진 배가 아니었다. 귀선은 부산포 외해(外海)나 거제 옥포 외해 같은 큰 바다(대양)를 항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배였기에 그 성능을 시험하려 대마도와 부산포를 오가는 왜선과 비교해 본 것 뿐이지 결코 대적(對敵)을 염두에 두고 만든 배가 아니었다. 귀선이 그동안 조선이 만들어 온 대부분의 배와 달랐던 것은 연안의 섬들 사이 바다를 다니는데 특화된 배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섬과 육지 사이의 또는 섬과 섬 사이의 바다는 똑같은 바다라 해도 수평선이 보이는 바다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특히 파도의 힘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달랐다. 노를 저어 배를 나아가게 했던 격군들에게 거제의 옥포와 부산포 바깥 바다는 노를 저어 항해할 수 있는 바다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물(선수)과 고물(선미)이 모두 장방형으로 평평한 조선 특유의 판옥선은 만들어진 구조 자체가 거대하고 힘 있는 큰 파도를 헤치며 나갈 수 있는 배가 아니었다. 파도를 갈라 파도의 타격을 분산시키지 못하는 구조를 가진 판옥선은 능파성(凌波性)이 거의 없는 연안 항해용 배였다. 그러나 귀선은 내파성(耐波性)이 월등한 대양 항해가 가능한 배였다. 당시 이런 대양 항해가 가능할 정도의 선박을 조선할 기술을 가진 나라는 중국과 조선뿐이었는데 구체적인 지역으로는 중국의 복건성 샤먼(廈門)과 조선의 전라도 나주였다.
1406년 황제의 명령으로 남경에서 영락제를 만나고 돌아온 세자를 그 후 멀리만 두던 태종이 세자의 동반을 허락해 세자의 안색이 기쁘게 변했다는 그 기사 마지막에는 성능을 시험하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귀선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2년 후인 1415년 음력 7월에 탁신의 상소로 밝혀진 사실은 임진도에서 성능을 시험하던 귀선(龜船)이 단 한 척도 조선에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탁신은 상소에서 귀선을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를 갖추게 하라고 건의해 이년 전에 성능을 시험하던 배가 이제는 만들어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다. 태종 13년(1413) 왜선을 동원해 항해 속도까지 시험하던 귀선은 결국 조선에서 사용한 배가 아니었다. 배의 생김새부터 남달랐던 귀선은 하서양(下西洋)이라 기록된 1405년부터 1433년 사이에 행해진 7번의 정화 함대의 대양 원정에 사용된 배와 구조가 동일한 첨저선이었다. 연왕(燕王)이었던 주체(朱棣)가 반란을 일으켜 조카인 건문제를 내쫓고 황제가 된 다음 해 즉 1403년에 건설을 명해 1405년 6월에 인도 캘리컷(지금의 코지코드)까지 항해한 함대에는 푸거가(家)에게 전달할 화약과 차(茶)가 자기(磁器)에 담겨 있었다. 인도 서남부 캘리컷까지만 항해했던 세 번째까지와는 달리 1413년 12월에 떠난 네 번째 항해엔 본대가 아라비아 반도 남쪽 지금의 예멘의 아덴까지 항해했다. 아덴에서 함대의 일부가 분대를 형성해 남쪽으로 지금의 아프리카 케냐 말린디까지 가는 당시로서는 가장 긴 원양 항해 기록을 세운 원정이었다. 따라서 1413년 겨울에 떠난 네 번째 정화 함대에 동원된 선박들은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의 조선 (造船) 기술이 집약되어 건조된 배들이었다. 당연히 세계 최고의 조선(朝鮮)의 기술자들이 조선(造船)한 배들이어야 했다.
태종실록에 기록된 귀선은 1413년 겨울에 하문(廈門)을 떠나 처음으로 앙코르와트 항로 대신 팔렘방 항로를 택한 4차 원정대에 징발된 첨저선이었다. 연안을 따라 항해하며 인도의 캘리컷(지금의 코지코드)에 다다르는 앙코르와트 경유 인도 항로는 그래서 운항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마린로드 상방이 천태종을 이용해 물샐틈없이 완전히 장악한 일본의 찻잎을 시장에 상품으로 판매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실크 로드 상방의 오래된 철칙이었고 차는 언제나 부족했다. 비밀리에 유럽의 푸거에게 화약과 차를 공급해 주어야 하는 영락제로선 달리 대안이 없었다. 일본의 찻잎을 제공받는 대신 아시카가 요시미쓰에겐 조공무역과 다를 바 없는 감합무역을 허락해 주고 조선에게는 찻잎 생산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기술을 아웃소싱해 필요한 선박과 천문 기구들을 생산할 수 있도록 라이선스를 허락해 줘야 했다. 용골과 격벽이 특징인 첨저선은 대양 항해에 반드시 필요한 능파성을 가진 당시로서는 최첨단 선박이었다. 이러한 선박을 조선은 이미 고려 왕조에서부터 만들어 내고 있었다.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요나라와 금나라, 서하에 의해 서쪽과 북쪽이 모두 겹겹이 막힌 북송이 그 타개책으로 내놓은 게 바다를 통한 무역로 개척이었는데 19살의 신종이 북송 황제로 즉위한 후 내건 마린 로드 개척에 46살의 왕안석이 목숨을 걸고 화답해 시행된 게 고려와 일본을 참가시킨 삼국 해상 동맹이었다, 왕안석은 이 삼국 해양 동맹의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신법이라 불린 개혁을 추진했다. 1067년부터 시작된 신법체제에서 요나라와 맺은 협약을 파기해야 했던 고려는 그 전쟁 위험을 떠안는 대가로 이 첨저선의 설계와 제작 기술 그리고 청자의 제작기술을 확보하게 되었다. 신종과 그의 아들 철종과 휘종에 의해 굴곡졌으나 계속 이어진 한중일 삼국 해상동맹은 끝내 실크로드 상방의 총력을 기울인 파괴 공작으로 북송의 휘종이 아들 흠종과 황실 전체가 금나라의 포로가 되는 중국 역사상 최악의 비극으로 끝났다. 고려는 문종과 그의 아들 숙종과 대각국사 의천, 숙종의 아들 예종과 손자인 인종이 현명하게 대처하며 오히려 의종대의 영화를 누렸다, 특히 인종(仁宗)은 실크로드 상방의 사주를 받은 이자겸과 북송의 사주를 받은 묘청의 반란을 교묘히 진압함으로써 결국 아들 의종(毅宗)이 청기와 장수의 번영을 누리다 허리 분질러져 죽게 했다. 유사 이래 공짜는 없었다.
평화로운 바다에서 왜선(倭船)과 맞설 이유는 없었다. 그런 왜선을 대적해야 할 이유는 왜선에 도적들이 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구였다. 왜구와 맞서기 위해 개발된 배는 조선 태종 때 개발된 배가 아니었다. 조선 태종 때 언급된 배는 왜구를 대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배가 아니었고 정화함대의 대양 원정을 위해 만들어진 배였다. 그래서 배 밑바닥이 평탄한 평저선이 아니었다. 중국 산동성 등주 수성에서 발굴된 봉래 3호로 명명된 고려말에 건조된 고려배는 앞부분이 위로 들린 용골을 가진, 남아있는 길이만 17.1 미터에 달하는 원양 무역용 첨저선이었다. 선체가 거북등 모양을 한. 고려말 확립된 수군 체계는 연안용 평저선과 원양용 첨저선이 작전 구역을 달리 하며 함께 쓰이는 병용 체제였다. 고려말 왜구를 아랫도리만 천으로 겨우 가린 미개한 인간들이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배 타고 건너와 약탈을 일삼는 극악무도한 이미지로만 설명해 왔기에 우리 역사뿐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 전체가 왜곡(歪曲)되어 버렸다. 13세기 이래로 굽이쳐 온 동아시아의 제대로 된 모습이 입체적으로 중층적으로 복원될 수 없었던 배경이었다. 한족(漢族)이라 불리는 동아시아 역사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해 온 중국인들이 간단없이 북방 오랑캐들에 의해 지배되어 온 자신들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심한 거부감을 드러낸 것이 칭기즈칸으로 대표되는 몽골족의 지배였다. 이후 한족(漢族)이 세웠다고 주장되는 명나라에 의해 몽골족이 중국땅에 세운 원나라의 역사가 삭제되고 은폐되고 왜곡된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었고 그 속에서 관계된 고려와 일본에 관한 수많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도 그래서 사라졌다.
사라진 그중 가장 중요한 역사가 차(茶)와 도자기(陶瓷器) 산업에서의 송나라와 고려, 일본의 국제적 분업체제였다. 고려 고종 때인 1219년부터 시작된 몽골의 한반도 침입은 북송의 주도로 고려와 일본에 구축된 국제적 차(茶) 분업체제를 허물어 뜨리려는 실크로드 상방의 사주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몽골군이 고려를 침략하면서 처음부터 노린 것은 고려의 차(茶) 공장(해인사 같은 불교 사찰들)과 청자와 백자를 구워내는 도요지(陶窯址)였다. 고려에 대한 몽골군의 침입로를 지도에 나타내면 그 길은 고려가 일본 시즈오카의 찻잎을 들여와 차(茶)로 만든 후 청자와 백자에 담아 수출하던 내륙 차(茶) 무역로 바로 그 길이었다. 차(茶)를 먼 곳까지 운반하기 위해서는 고대 크레타에서 선박 운송용 도기로 유명했던 암포라(amphora)처럼 도자기(陶瓷器)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도자기는 간장 된장을 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고 실내를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 더더욱 아니었다. 도자기(陶瓷器) 개발 역사는 차(茶)를 얼마나 오랫동안 저장하고 운반할 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무역 시장 확대를 얼마나 상인들이 간절히 원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였다. 더 먼 곳까지 차(茶)를 수출하기 위한 상업적 노력은 차(茶)를 더욱 오랫동안 저장할 수 있고 더욱 부서지지 않는 용기를 만들어 내기 위한 산업적 노력으로 이어졌다. 습기와 온도를 통제하는 과학기술 발전의 역사였다. 엄청난 이윤을 가져다주는 차(茶)의 무역사는 그대로 세라믹(ceramics) 발전사였다. 암포라(amphora)처럼 도기(陶器)를 생산하는 수준에서 고령토를 찾아내지 못해 자기(瓷器) 생산으로 나아가지 못한 그리스 로마는 일본처럼 칠기(漆器)에서 멈춰야 했다.
그들과 달리 고령토(高嶺土)를 찾아내어 청자를 넘어 백자까지 나아갔던 송나라는 연운십육주의 상실로 고북진에 있던 고령토 산지를 잃어버리자 필사적으로 장강 이남에서 고령토를 찾는 한편 고령토가 있던 고려에 장인집단을 파견해 집단 거주시키며 산업적으로 도자기를 만들어내는 자기(瓷器) 생산 단지를 강진과 용인 등에 설치했다. 그곳에서 만들어진 청자와 백자에 일본에서 들여온 시즈오카 찻잎들을 가공한 차(茶)를 담아 송나라로 수출하게 했고 송나라는 그 차(茶)들을 페르시아와 아랍으로 팔아 거대한 번영을 이룩했었다. 동아시아 삼국의 평화로운 번영의 시대였다. 왕안석의 신법으로 구축된 신종(神宗) 체제였다. 마린로드 상방의 거대하고도 찬란한 성공이었다. 북송이 남송이 되고 결국은 몽골에게 멸망당하면서 고려와 일본에 있던 마린 로드 상방의 차(茶) 산업 기지에 대한 침탈도 시작되었다. 경주의 황룡사를 비롯한 수많은 고찰들이 불 탄 이유였다. 고려와 일본에 대한 몽골 침입이 집요하고 악랄했던 연유였다. 1232년 살리타이가 김윤후에게 화살 맞고 죽은 곳이 용인의 처인성인 연유였다. 처인성은 성이 아니라 고려의 백자 도요지(陶窯址)였다. 청자가 아닌 백자 도요지였다. 고려의 차(茶) 산업을 왕안석의 신법으로 구축되었던 삼국동맹 수준으로 다시 일으키려던 포은 정몽주 선생이 살아생전 발이 닮도록 용인 지역을 헤매고 다녔던 연유였다. 나라와 겨레를 위해 남해와 서해를 누비며 몸소 배를 타고 명나라와 일본을 총 다섯 차례나 오고 가며 몸이 부서져라 일했던 원통한 선생의 유택이 용인 처인(處仁)에 모셔져 있는 연유였다.
고려가 몽골에 굴복한 후 일본의 차(茶)를 뺏으려는 목적으로 두 차례나 벌어진 여몽 연합군의 대규모 일본 원정이 태풍으로 인해 실패하자 일본의 대륙으로의 차(茶) 수출은 원나라에 의해 금지되었다. 마린 로드 상방의 일본 차(茶) 무역 중계 기지인 대월(북베트남)과 참파(남베트남), 말래카 해협이 있는 자바까지 몽골군이 쳐들어 간 연유였고 사할린까지 군대를 보낸 이유였다. 14세기로 들어오면서 일본의 차(茶) 수출은 물 샐 틈 없이 원나라에 의해 봉쇄되었다. 칠기(漆器)만으로는 차(茶)를 담아 더 멀리 수출할 수 없었던 일본이었다. 자기(瓷器)가 절실히 필요했다. 전 세계에서 청자와 백자 같은 자기를 만드는 곳은 중국과 고려뿐이었다. 고려로의 뱃길은 일본으로서는 마지막 살 길이었다. 그만큼 절박했고 그래서 악착같았다. 공민왕이 즉위한 1350년부터 왜구는 남해안을 돌아 평양까지 침략했다. 경기와 충청을 아울러 부르던 양광도의 아산과 평택, 화성은 언제나 그들의 제일 목표였다. 동북방 대륙으로 차(茶)를 수출하던 바닷길을 따라 동해안의 울진, 강릉, 통주까지도 침략했던 왜구였다.
1385년 9월 함경도 함주(咸州)에 150여 척의 배로 왜구가 나타나 함주, 홍원(洪原), 북청(北靑)등을 약탈한 것은 그 뱃길들이 송나라에 의해 구축되었던 고려와 일본의 국제 차(茶) 무역로였음을 증거 하는 것이었다. 일본 입장으로서는 생명선인 무역로였다. 몽골의 원나라 때문에 동해와 서해의 그 바닷길을 막아야 했던 고려도 원했던 봉쇄가 아니었다. 원나라의 무력 침략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원나라의 봉쇄 정책이 시행되던 초기에는 송나라 때부터 해 오던 정상적 차(茶) 무역을 하면서 왜구의 침탈로만 거짓 보고 하던 것이 탄로 나 고려 왕들이 원나라로 압송되어 가는 일들이 자꾸 벌어지자 철저한 봉쇄가 점차 이루어져 갔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고려와 일본 간에 쌓였던 국제 차(茶) 무역의 주축국(主軸國)으로서의 저간의 협력이 잊혀 가자 가난해진 일본은 이제 살기 위해 고려를 약탈해야 했고 그 약탈을 당한 고려는 뺏기지 않기 위해 싸워야 했다. 왜구가 그토록 집요하게 고려를 침탈했던 연유였다. 1350년부터 1385년까지 동해와 서남해에서 일어났던 그 악랄한 고려말 왜구의 침입로를 확인해 보면 임계병란 후 시작된 강화협상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조건이 어디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시즈오카 찻잎의 수출로 확보, 바로 그것이었다.
고려말 왜구와의 전쟁에서 1359년의 서경(평양) 전투와 1361년의 황주(사리원) 전투에서의 이방실과 정세운 그리고 홍산의 최영과 운봉(雲峰)의 이성계 등이 승리자로 역사에 크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러나 근본적인 왜구 퇴치의 공은 화통도감 제조 겸 부원수 최무선(崔茂宣)과 해도원수(海道元帥) 정지(鄭地) 에게 있었다. 화약 무기인 함포로 정박해 있던 왜선들을 격침시켜 한국사 최초의 화약무기 해전 사용의 기록을 세운 진포해전의 최무선과 공격해 오는 왜선들을 바다 한가운데서 함포사격으로 격침시켜 화약무기를 사용한 두 번째의 해전을 승리로 이끈 관음포(觀音浦) 해전의 정지 장군이 그들이었다. 정지 장군이 승전을 기록한 관음포는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 해협 바로 남쪽에 있는 포구다. 남해안에 량(梁) 자가 붙은 해협은 칠천량과 견내량, 적량, 노량과 명량인데 모두 일본 차(茶) 무역선이 지나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1970년대 미국에 있어 지금의 호르무즈 해협처럼 일본에게는 그 당시 대륙으로 시즈오카의 차(茶)를 수출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바닷길목이었다.
정지 장군에게 패배를 당한 왜구들도 임진란 때의 왜군들처럼 합포로 들어왔었다. 고대부터 일본 찻잎들은 이키섬과 쓰시마섬을 거쳐 합포로 운반되었다. 고대 가야 시절부터 개발된 내륙 무역로를 살펴보면 합포로 들어온 찻잎들은 합천을 거쳐 가야산에서 차(茶)로 가공된 후 김천, 추풍령, 보은, 청주를 거쳐 아산으로 보내져 뱃길로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김춘추의 사위가 죽어서 유명한 합천의 대야성은 경주로 가는 길목이어서 중요했던 게 아니라 차(茶) 무역로여서 그토록 중요했던 곳이었다. 임진년에 구로다의 제3군이 이 길을 통해 한양으로 진격한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임진년의 일본군들은 분명히 세 갈래의 차(茶) 무역로를 복원하며 침입하고 있었다.
포상팔국의 난으로도 유명한 합포를 포함한 주변 여덟 포구들은 임진년에 모두 이순신 함대의 승전고가 울려 퍼진 곳들이었다. 낙동강 서안의 합포와 당항포, 적진포, 웅천, 안골포, 옥포, 율포, 사천은 일본에게는 가장 중요한 한반도 차(茶) 무역 전진기지였다. 1383년 왜구들은 대선(大船)이라고 부른 큰 배 20척을 선봉으로 삼고, 배마다 힘센 군사 140명씩을 배치해 합포로 전진해 왔었다. 고려의 수영이 설치되어 있던 나주에서 목포를 통해 바다로 나온 고려 함대는 합포에서 서해로 나가려는 왜구들을 관음포 앞바다에서 만나게 되었다. 해전을 앞두고 바다에 비가 내리자 지리산 신령께 빌어 비를 그치게 했다는 정지 장군의 일화는 고려 함대가 화승으로 발사하는 화포에 얼마나 많은 의존을 하고 있었는지 알게 해 준다.
이후 왜선을 이기고자 하는 정지 장군에 의해 고래로부터의 전통적인 평저선이 아닌 용골과 늑골로 배를 만드는 첨저선 조선법이 확립되었다. 첨저선의 모습을 하고 있는 봉래 3호의 모습을 보더라도 고려 첨저선은 능파성을 높이기 위해 선수가 뾰족하고 함포 사격 후 복원력을 위해 선미가 다소 네모난 독특한 선체 모양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모양이 거북의 등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귀선이었다. 첨저선이었기에 평저선과는 달리 능파성을 가져 왜선과 속도 경쟁을 할 수 있었다. 1387년 정지 장군이 왜구의 본거지인 쓰시마섬과 이키(一岐) 섬을 정벌하자고 주장한 자신감이 여기에 터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389년(창왕 2년) 음력 2월에 박위가 귀선 1백 척을 이끌고 쓰시마를 공격하여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노사태(盧舍殆)를 진멸하여 고려의 민간인 포로 남녀 1백여 명을 구출해 오는 일본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날벼락같은 사변이 벌어졌던 연유였다. 이제 고려는 귀선이 있기에 대마도 정벌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 2010년, 순천향대학교의 홍순구 교수는 간재 이덕홍(艮齋 李德弘. 1541~1596)의 문집인 간재집(艮齋集)에서 찾아낸 귀갑선도를 공개하면서 거북선의 지붕 역할을 하는 개판이 평면 구조로 묘사돼 있다고 설명했다. 간재집의 귀갑선도에는 거북선 구조에 대한 설명도 나오는데 등에는 창칼을 꼽고, 머리에는 쇠뇌를 설치하고 거북선의 허리 부분에는 판옥(板屋)을 만들어 그 안에서 사수가 활을 쏠 수 있도록 하고 아래 선실에는 총통을 설치해 화포를 사격할 수 있다고 돼 있다. 간재의 상소문인 상행재소(上行在疏)는 1593년 1월에 올린 상소로서 이 또한 왜적을 물리치고 국정을 회복시킬 수 있는 자신의 계책을 주달 한 것인데 특히 거북선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었다. 陣械圖ㆍ沈水眞木箭圖ㆍ龜甲船圖 등의 그림까지 첨부해 설명하고 있었다. 이 중 귀갑선도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일본 문학을 전공한 문헌학자 김시덕 박사가 삼프로TV에 나와 소개한 일본인이 그린 거북선의 모습은 간재가 남긴 귀갑선도로 그 정확함이 증명된다. 메이지 유신 전 발간된 조선정벌기라는 일본 책 속에 그려져 있다는 거북선은 선체 모양이 판옥선과는 다른 선수와 선미가 뾰족한 첨저선이고 지붕은 간재집의 귀갑선도에 그려진 모양과 동일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간재집의 귀갑선도와 조선정벌기의 매쿠라부네 삽화를 종합하고 이순신장군의 당포파왜병장에서의 묘사와 간재의 귀갑선도에서의 설명을 합치면 맨 처음의 그림과 같은 모습의 이층 거북선이 나온다. 허리 부분의 판옥 설치로 1층과 2층이 갑판으로 나뉘었고 1층에도 화약장과 포수들이 활동할 수 있게 2층처럼 갑판이 설치되었다. 1층에는 좌우 현측의 흘수선 위로 문(門)들을 만들어 항해 중에는 문을 닫아 바닷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다가 적선에 접근한 후에는 문을 열어 총통으로 장군전들을 날려 적선 흘수선 근처에 구멍을 내어 침몰하게 했다. 대포의 계량 단위가 문(門)인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대포가 몇 개냐 하지 않고 대포가 몇 문이냐 묻는 것은 바로 여기에 기인하고 있다. 2층에는 격군들을 배치해 노를 젓게 했고 이물(선수)에는 용머리를 달아 입으로 화포에서 발사한 석환 같은 대포알이 발사되게 했다. 지붕을 헥사곤(Hexagon 육각형) 모양의 판옥으로 덮고 선수와 선미를 역시 방패판으로 방어하니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볼 수가 없었다. 눈이 없는 배, 장님배란 메쿠라부네는 여기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런 배에서 무지막지한 몽둥이가 튀어나와 흘수선밑에 구멍을 내어 수장을 시키니 그 공포는 엄청났을 것이다.
전함의 흘수선 바로 위에 문(門)을 만들고 그 문(門)을 이용해 함포사격 하는 것을 시작한 건 영국 튜더왕조의 헨리 8세였다. 발굴되어 그 제원을 확인할 수 있었던 1510년에 건조된 Mary Rose호다. 랭커스터가 와 요크가의 공통 문장인 장미로 플랜테저넷 왕가를 계승했음을 자랑하는 이 전함은 용골 길이 32m, 너비 11.3m, 흘수 4.5m였다. 흘수선 바로 위에 청동제 중포 7문(門)과 철제 중포 34문(門)을 함재(艦載)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