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계(壬癸) 역병(疫病)과 계갑(癸甲) 대기근(大飢饉)의 진실
只有左兵使高彦伯 留在慶州 而率飢羸數百之卒 無望於捍禦其方張之賊…人民飢餓 癘疫大熾 丁壯死亡殆盡 餘存者 多僅厲聲氣 雖欲呼集軍兵 以爲救援之計 其路無由. 다만 좌병사(左兵使) 고언백(高彦伯)만이 경주에 주둔하고 있는데, 굶주리고 파리한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있을 뿐이니, 한창 기세를 떨치는 적을 방어할 가망이 없습니다… 인민(人民)들은 기아(飢餓)에 허덕이고 전염병이 크게 기승을 부려 장정(壯丁)들이 거의 다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도 대부분 목숨이 겨우 붙어 있을 뿐이니, 비록 군병(軍兵)을 불러 모아 구원(救援)할 계획을 세우고자 하여도 방도가 없습니다. - 유성룡. 선조실록 41권, 선조 26년(1593) 8월 13일 갑오
수군들은 먼바다에 진을 친지 벌써 5개월이 되어 군정이 풀어지고… 전염병이 크게 번졌습니다… 진중의 군졸들이 태반이나 전염되어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으며, 더구나 군량이 부족하여 계속 굶게 되고 굶던 끝에 병이 나면 반드시 죽게 되는지라…- 충무공 이순신. 1593년 8월 10일 왜군의 정세를 아뢰는 계본 중에서
전염병이 지난봄, 여름보다 심하게 번져 무고한 군사와 백성들이 연달아 죽게 되니 군졸의 수는 나날이 줄고 병력이 날로 약해지는 형편이라 앞날의 일이 참으로 염려되는 것입니다. - 충무공 이순신. 1593년 윤 11월 7일 장계 중에서
금년 1월에는 처음으로 진중에 유행병이 크게 번져 누워서 앓는 자가 서로 이었으므로… 사망자가 매우 많은 데, 그중에 오랫동안 병들어 있는 사람은 배로 실어다가 내어 보냈습니다…1월부터 2, 3, 4월까지 전라좌도의 사망자가 606명에 앓고 있는 자가 1373명, 우도의 사망자가 603명에 앓고 있는 자가 1878명, 경상우도는 사망자가 344명에 앓고 있는 사람이 222명, 충청도는 사망자가 351명에 앓고 있는 자가 286명으로 모두 3도의 사망자 수는 1304명이며 앓고 있는 사람이 3759명입니다. - 충무공 이순신. 1594년 4월 20일 방비군을 결석시킨 여러 장수들을 처벌해 주기를 청하는 계본 중에서
1592년 8월부터 1593년 말까지 조선의 경상도 지역에서 가장 극성을 부린 전염병은 우리 역사 속에서 병자호란이 있었던 1637년의 그것과 더불어 가장 극적인전염병 창궐 사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원인을 그저 전쟁이 일어나고 그 과정 중에 생기는 위생 불량으로 또한 굶주림 같은 영양부실로 면역력 약화에 따른 것으로만 기계적으로 설명하나 진실은 그렇지 않다. 1592년 4월 14일(5.24) 일본군의 침공으로 시작되어 1593년 6월 29일(7.27) 진주성 함락으로 일단락된 만일 년 동안의 임계병란(壬癸兵亂)에서 조선군과 일본군이 공수(攻守)를 바꿔가며 벌인 전투 대부분은 경상도의 육지와 해안에서 각종 총통과 비격진천뢰, 조총 같은 화약무기를 서로 사용해 치른 전투였다.
특히나 이순신 장군이 정 3품 절충장군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두 번의 출동을 통해 치른 임진년 7월까지의 해전들은 모두 옥포, 합포, 적진포, 사천, 당포, 웅포, 당항포, 율포 같은 경상우수영 관할의 바다들이었다. 경상도 쪽 남해안에서 전투를 치른 후 여수에 있는 전라좌수영으로 바로 돌아갈 수 없었던 당시 해전의 특성상 전라좌수영 수군들은 경상도 여러 포구에 식수 확보와 격군들의 휴식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기항을 해야만 했었다. 통영 앞바다에서 벌어진 한산도 대첩과 안골포(지금의 진해) 해전 승리 이후 종 2품 가선대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치른 장림포, 화준구미, 서평포, 절영도, 초량목, 부산포 해전도 모두 1592년 임진년 하반기에 경상도 쪽 남해안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총통(화포) 발사 시 발생한 하얀 연기가 제대로 빠지지 않는 갑판에서 그 포연(砲煙)을 뒤집어쓰며 격전을 벌이느라 땀에 절은 조선 수군들의 폐와 코점막 같은 피부에는 그 연기 속에 들어있는 이산화황이 잔뜩 스며들어 갔다.
발사체인 대완구 같은 총통(화포) 뿐만이 아니라 발사물인 포탄마저 화약의 폭발을 이용하는 비격진천뢰가 사용되었던 경주성 탈환전과 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그 전투에 참가한 병사들의 땀에 절은 피부에 이산화황 가스가 가득 달라붙게 했다. 화약 사용량이 가장 많은 천자총통과 화약 폭발로 터지는 비격진천뢰, 사전총통(四箭銃筒) 50개가 장전(裝塡) 배치된 발사판에 한번 점화로 200개의 화살이 발사되는 화차(火車) 같은 그동안 고려와 조선이 개발한 모든 화약무기들이 총동원된 행주산성 전투에 참가한 전라도 순찰사(巡察使) 권율 휘하의 병사들도 하루 내내 치러진 전투 속에서 이산화황 가스 세례를 받아야 했고 그래서 이들의 폐 속엔 스모그가 그대로 스며들었다.
사람이 이산화황 가스에 장시간 노출되면 호흡기에 염증(炎症)이 생기고 코와 목에 건조함과 통증(痛症)이 일어나고 기침이 심해지며 급성 폐손상이 일어난다고 밝혀져 있다. 이렇게 발생한 폐(肺) 손상은 황제내경과 동의보감에 따르면 그 폐해가 피부에 나타나게 된다고 했다. 폐 손상은 피부에 발진을 일으키고 종기로 발전했다가 화농성 종기인 등창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이것이 곪아 짓물러지면 궤양(潰瘍)이 되었다. 피부에 좁쌀만 한 종기가 돋는다 해서 마마(痘)가 폈다는 발진(發疹)이라 했고 화농성 균이 들어가 부풀어 오른다 해서 종기(腫氣)라 했다. 고름이 잡히는 종기라 해서 부스럼 창(瘡)이라 했고 악성 부스럼이라 해서 저(疽)라 했다.
임진전쟁 중 조총을 사용하는 일본군에 맞서 화약무기를 전략적으로 사용해 승전한 조선 장수는 이순신, 권율, 김시민 세명뿐이었다. 조총 같은 소형 개인 화기가 아닌 대포와 화차(火車) 같은 대량의 화약을 사용하는 화망(火網) 화기를 병력이 밀집된 전장(戰場)에서 운용하는 것은 장수(將帥)가 기마(騎馬)하며 활 쏘고 창검을 휘두를 줄 안다고 해낼 수 있는 일도, 글만 잘 읽는다고 해낼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임진왜란 발발 한 달 전 유성룡이 이순신에게 전달했다는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책을 읽어 이해하고 그 책에 나온 진법(陣法)의 묘에 따라 실제 전투 지형에 알맞게 여러 종류의 총통(銃筒)과 화차(火車)들을 배치하고 사격 시점까지 통제할 수 있는 응용력까지 갖추어야 가능한 화망화기(火網火器)들의 운용이었다. 조선은 이미 문종 때 각종의 화약무기로 유사시 육군과 수군을 모두 무장시켜 싸울 수 있게 하는 총통방사군(銃筒放射軍)이라는 전략기동군을 중심으로 한 국방체제를 확립해 놓고 있었다.
선조가 다가오는 왜란에 대비해 장수를 선발할 때 왜 그토록 글은 잘 읽느냐고 물은 연유였고 2만의 여진 군대가 침공한 1583년의 니탕개의 난을 화약무기를 사용해 진압했던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이 왜적과 싸울 수 있는 장수를 추천하라는 선조의 하명에 니탕개의 난 때 눈여겨보아 두었던 휘하의 이순신과 이억기, 김시민 등을 신성군(信城君)의 장인인 신립과 함께 추천한 이유였다. 이순신과 이억기가 전라좌, 우수사로 임진왜란을 맞은 연유였고 진주성 대첩 때 김시민 진주목사(牧使)가 자기보다 품계가 높은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兵使) 유숭인의 진주성(晉州城) 입성을 불허한 연유였다. 총통등록이란 병기서와 전수방략이란 병법서에 근거해 화약무기를 중심으로 전투를 치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전쟁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제승방략(制勝方略)은 문종 때 확립한 5위 진법에 따른 국방전략이었다. 제승방략의 근간과 핵심은 총통방사군(銃筒放射軍)이란 2만 5천 명에 달하는 기마포병(騎馬砲兵)들이었다. 총통(대포)들을 실은 수레를 기마포병이 탄 말로 끌고 가는 기동포병대였다. 평안, 함경, 전라, 경상, 경기를 각각 담당하는 5위 체제였다.
그런데 이런 대량의 흑색화약이 터지는 화망(火網) 화기의 사용은 유연화약(有煙火藥)이 발생시키는 이산화황(SO2) 연기 때문에 역병(疫病)이 발생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1593년 계사년(癸巳年) 남해안에는 역병이 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계사((癸巳) 일기 3 월편에 남해에 전염병이 번졌을 때 스스로도 병에 걸려 12일 동안이나 고통을 당했다고 적었듯이 당시 전염병은 남해안에서는 심각한 것이었다. 1592년 당시 삼도수군 병력이 21,500 명이었는데 이중 1,904명이 역병(疫病) 사망자로 3,759명이 역병 확진자로 각각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전체 수군의 3분의 1이 고통받고 있었다. 다도해 바닷길을 자기 손금 보듯 잘 알고 있어 이순신 장군의 깊은 신뢰를 받던 조방장 어영담도 1594년 4월에 병사했다.
1495년 무거운 대포(cannon)를 포대(砲臺) 위에 고정한 후 말들이 끄는 수레에 실어 이동식 대포를 만들어 낸 프랑스군은 나폴리 원정을 감행했다. 수레에서 내려진 포대(砲臺)에서 대량의 집중 포격을 계속해 성벽을 무너뜨리는 공성 전법을 처음 선보인 프랑스 샤를 8세의 나폴리 원정은 대성공이었으나 이때 발생해 프랑스 병이라고 불린 역병이 돌았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천연두(天然痘)로 알려진 역병이었다. 1952년 런던에서 발생한 스모그(Smog)로 인해 이산화황이 인체에 어떤 폐해를 끼치는지 정확히 알게 해 줄 때까지 감춰졌던 병, 매독(梅毒)이었다.
1592년 5월 7일(6.16) 옥포에서부터 시작해 9월 1일(10.5) 부산포에서 끝난 임진년의 15번의 해전은 조선 수군의 전승으로 끝났고 이는 조총을 대포로 무력화(無力化)한 전략무기에서의 승리 때문이었다. 게다가 1592년 10월 4일(11.7)부터 7일간 계속된 진주성(晉州城) 대첩(大捷)은 충무공 김시민(金時敏)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이끄는 3,800명의 조선군이 열 배에 가까운 3만 명의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한 전투였는데 이 또한 화약무기가 있어 가능했던 것이었다. 경주성 탈환전에서는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같은 화약을 사용하는 작렬탄(炸裂彈)을 역시 화약 폭발의 힘으로 적진에 날려 보내는 대완구(大碗口) 같은 각종 유통식(有筒式) 화기들을 사용해 거둔 승리였다. 그만큼 임진년의 남해안 전역(戰域)에는 화약이 폭발할 때 생기는 이산화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과 함께 진주성 대첩을 이끌어 낸 김성일 경상우도순찰사와 김면 경상우도병마절도사도 1593년 갑자기 병사했다. 수군(水軍)들은 좁은 배안에서 화포 발사 시 생기는 그 하얀 연기의 이산화황 독가스를 무방비로 몽땅 흡입(吸入)하고 있었다. 결국 1592년의 조선 수군들과 격군들의 폐(肺)에는 독이 쌓여갔다. 계사년의 조선역병도 영국의 모든 무역을 중지시켰던 유럽 최후의 흑사병이라는 1665년의 런던 대역병(Great Plague of London)도 1952년 12월의 런던 스모그처럼 원흉은 이산화황이었다.
발진(發疹/뾰루지/rash)으로 시작해 종기(腫氣/부스럼/furuncle)와 종창(腫脹) 같은 피부 농양(膿瘍)으로 발전하고 끝내는 피부 궤양(潰瘍)과 발열, 인후통. 두통으로 번지는 증상 때문에 pox라 불리던 천연두(痘瘡)를 smalllpox로 밀어내고 greatpox의 자리를 차지한 매독(梅毒)은 14세기의 흑사병처럼 흑색화약이 급속히 타면서 발생하는 이산화황 가스에 의한 병이었다. 17,000명에 달하는 포병대(砲兵隊)와 중장갑 기병대 그리고 8천 명의 스위스 장창(pike) 병들로 이뤄진 프랑스 샤를 8세 군대가 유럽 비단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나폴리 왕국을 점령하기 위해 이탈리아 원정에 나선 건 1495년 2월이었다. 많은 화약을 쓰는 대형 대포인 캐논(cannon)들을 포대(砲臺)들에 각각 고정시킨 뒤 말들이 끄는 수레에 실어 원하는 지점으로 이동시켜 포격하는 새 전법이 선보인 전투였다. 컬버린(Culverin)이라는 이동식 대포가 개발되는 단초가 된 전쟁이었다.
수백 년 동안 난공불락으로 유명했던 나폴리의 몽 산 조반니 요새는 말과 당나귀가 끄는 수레에 실려 파괴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까지 이동된 대포들이 8시간을 쉬지 않고 한 곳을 집중 포격하자 무너지기 시작했다. 샤를 8세가 지휘하는 중장갑 기병대와 스위스 장창병(Pikeman)들이 프랑스 대포의 포격으로 무너져 내린 성벽을 타고 성안으로 밀려 들어가면서 결전은 오래 걸리지 않아 끝났다. 나폴리 왕국의 너무 빠른 항복과 프랑스의 철저한 약탈에 놀란 베네치아 공화국 등 이탈리아 북부의 각국과 교황,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1세는 1495년 3월 베네치아 동맹을 맺었다. 밀라노 공국까지 참여한 이 동맹으로 프랑스로의 후퇴로가 막힌 프랑스군은 반(反) 프랑스 동맹군을 포르노보 전투에서 깨트리고 프랑스로 가는 길을 확보했다. 전장에서 가장 파괴력을 낼 수 있는 위치로 대포들을 이동시켜 포격하는 샤를 8세의 마차 대포는 압도적인 승리의 일등공신이었다. 그런데 샤를 8세는 연속된 승리에도 불구하고 나폴리에서 약탈한 보물마저 그대로 놔둔 채 그 길로 급거 프랑스로 철수했다.
이유는 매독이란 16세기의 흑사병이 창궐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병사들이 나폴리의 사창가에 들러 매춘부들과 난잡하게 어울리는 바람에 매춘부들이 갖고 있던 매독이 프랑스 병사들에게 옮겨졌고 감염된 병사들이 프랑스로 돌아간 후 프랑스 여자들과 성관계를 맺어 매독을 퍼트렸다는 지금까지의 정설은 그러나 사실이 아니다. 프랑스 병이라고 불려지며 프랑스에게 성병 창궐국이란 불명예까지 뒤집어쓰게 한 매독(梅毒)은 그러나 난잡한 성관계 때문에 발생하는 역병이 아니었다. 8시간 동안 쉬지 않고 포격할 만큼 포병대의 포격을 전투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중점을 둔 샤를 8세의 전투는 언제나 엄청난 포연(砲煙)을 만들어냈고 그 포연은 시야마저 가릴 정도였다.
포연은 그러나 그냥 산에서 불날 때 나는 연기가 아닌 이산화황(sulphur dioxide) 자체인 가스였다. 결국 그 포연(砲煙))으로 오염된 공기를 계속 무방비로 흡입한 프랑스 병사들의 폐(肺)에 쌓인 독성물질들로 인해 생긴 역병(plague)이었다. 게다가 샤를 8세는 그 대포들을 모두 말과 당나귀들이 끄는 수레에 싣고 이동했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전장(戰場)을 가득히 채운 포연(砲煙)은 말과 당나귀들의 폐에도 독성을 쌓이게 했고 이는 결국 말과 나귀의 코 점막(粘膜)에 화농성(化膿性) 염증(炎症)을 일으켜 온몸의 림프계(lymph系)에 퍼져 쓰러지게 하는 역병도 일으켰다. 마비저(馬鼻疽)였다. 사람에게도 전염되는 가축병이었다. 조선(朝鮮)은 말과 당나귀가 아닌 소(牛)로 물자를 날랐다. 우역(牛疫)이 발생한 연유였다. 홍역도 천연두도 매독도 등창도 모두 흑색화약과 관련이 있음을 역사는 사료로 보여주고 있었다
동양의학의 변치 않는 기본 자료로 평가받는 황제내경(黃帝內經)의 소문(素問)에는 피모 속폐(皮毛屬肺)라는 진단이 존재한다. 이를 폐(肺)는 피부(皮膚)와 털을 주관한다로 해석한 이는 허준이었다. 그는 폐(肺)와 배합되는 것은 피부이고 폐의 상태가 겉에 나타나는 곳은 털이다. 그러므로 사기(邪氣)가 폐(肺)에 있으면 피부가 아프다고 내경(內經)을 인용하여 동의보감에 밝혀놓았다. 중국 소주(蘇州)에서 한약방을 하던 장세민(張世民)이 개발한 섬소(蟾酥 : 두꺼비의 이선(耳線)에서 분비되는 점액질의 응고액)로 음부의 발진과 궤양을 치료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조선 전역의 두꺼비들이 잡혀온 1593년이었다. 인후종통(咽喉腫痛)이나 각종 종양(腫瘍), 통증, 모든 종창(腫瘡) 등의 증상을 치료하는 이른바 해독소종지통(解毒消腫止痛)의 비방들이 개발되었다. 방풍통성산과 백화사주(白花蛇酒)를 만드는 방법이 동의보감에 기록된 연유였다.
녹색 페스트라 불리는 산성비는 황(sulfur)과 질소 혼합물로 유발된다고 밝혀져 있다. 화석 연료의 연소에 의해 생기는 황화합물(황과 산소의 결합)과 질소 산화물(질소와 산소의 결합)들을 함유한 비, 안개, 눈, 이슬들은 대리석을 녹일 정도로 환경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공해로 과학계에서 공인되어 있다. 질소 산화물인 질산염과 황(sulfur)을 배합해 만드는 흑색 화약은 연소되면서 이산화황(sulfur dioxide) 가스를 만들어 내는데 이것은 산성비의 주요 원인 물질이었다. 산성비가 내린 조선의 산하에 곡식이 제대로 자랄 리 없었고 매년 농사 끝에 챙기는 종자 또한 얻을 수 없었다. 결국 계사년(癸巳年)과 갑오년(甲午年)에 대기근(大飢饉)이 닥쳐버렸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임진년(壬辰年 1592) 4월에 시작해 계사년(癸巳年 1593) 10월에 끝난 임계병난(壬癸兵亂)은 전(全) 조선 반도가 모조리 전화(戰禍)에 휩쓸린 그런 전쟁이 아니었다. 전(全) 영토에 선(線)을 그은 것 같은 전선(戰線)이 형성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 6.25 사변과는 완전히 다른 전쟁이었다. 고려 공민왕 때까지 운영되었던 차(茶) 무역 기지와 무역로만을 따라 오르내린 전쟁이었다. 1595년 2월 12일 도원수 권율(權慄)은 하삼도(下三道)의 육군과 수군을 조사했다. 수군은 큰 배와 작은 배가 도합 84척이었고 사군(射軍:활과 포를 쏘는 병사)과 격군(格軍:노 젓는 병사)은 도합 4천109명으로 이 가운데 환자가 절반이 넘는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갑오년(甲午年)인 1594년 초 수군 1만 8천500명에 비하면 엄청나게 줄어든 병력이었다. 이산화황으로 인한 전염병과 산성비 때문에 야기된 곡식 수확량의 감소 때문이었다. 1637년 풍년 기록은 18세기 중반 때까지 기록된 조선의 유일한 풍년이었다. 소빙하기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국방체계는 화약무기 중심으로 완전히 전변(轉變)되었다. 전국의 군영(軍營)에서 화약을 제조했고 사용했다. 그랬기에 그 후로 조선은 반복된 흉년으로 계속적인 식량난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종기(腫氣)와 부스럼(瘡)은 이제 세종의 후손들로만 이어져 온 왕실만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 사람 모두의 질병이 되어버렸다. 잘 씻지 않아 생긴 병이 아니었음에도 그것이 흑색화약에서 나오는 이산화황이라는 가스 때문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조선은 종기 치료를 위해 열심을 다했다. 종기를 치료하는 치종의(治腫醫)와 그 업무를 관리하던 치종청(治腫廳)이 선조 36년(1603)에 다시 설치되었음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는 기록하고 있었다. 일본 교토대 도서관에서 보관 중인 임언국(任彦國)의 치종지남(治腫指南)이란 의서(醫書)는 조선이 종창(腫瘡)을 치료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는 조선 후기에 살았던 홍석모(洪錫謨, 1781~1857)가 일 년의 세시풍속을 체계적으로 수집해서 기록한 대표적인 세시풍속지인데 여기에 부럼 깨기 풍속에 대한 설명이 자세했다. 대보름날 아침이면 호두와 밤, 잣, 은행, 무를 깨물며 일 년 열두 달 아무 탈 없이 평안하고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원하는데 이것을 부럼 깨물기라고 했다. 질산 산화물인 질산염과 황을 배합한 화약 제조와 사용이 일상화되면서 벌어진 종창(腫瘡:부스럼)의 유행으로 인해 생긴 풍속이었다. 정월 대보름날 아침 눈사람 모양의 땅콩을 껍질째 깨물며 내 부스럼 다 가져가라 하고 주문을 외는 풍속이 생겨난 연유였다. 이명래가 고약(膏藥)으로만 자신의 이름을 조선의 보통명사로 만들 수 있었던 연유였다.
임진왜란의 교사범(敎唆犯)인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1598년 9월 13일 그 전쟁에서 무엇도 이루지 못한 채 돈만 쓰고 죽었다. 그가 죽고 백 년 만에 그의 가계(家系)는 절멸했다. 펠리페 2세의 꼬임을 넙죽 받아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범(主犯)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교사범이 죽은 지 일주일이 안돼 1598년 9월 18일 죽었다. 그가 죽고 2년 만에 그의 가계(家系)도 절멸했다. 임상원(任相元 1638-1697)은 자신의 손자가 간행해 준 자신의 문집, 염헌집(恬軒集)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심유경이 건넨 알 수 없는 독으로 죽었다고 한 양부하의 증언을 기록해 놓았다. 1598년 갑자기 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2년을 기다려야 했던 이유는 이와미 은광을 소유하고 있던 모리 모토나리의 적손(嫡孫) 모리 데루모토에게 스페인이 지원했던 화약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화약이 떨어진 조선 합병론자들을 상대로 전통 사무라이 전법으로 압승을 거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후 일본 전역에서 모든 화약무기를 없애 버렸다. 더 나아가 한번이라도 뎃뽀라고 부르던 총을 잡은 사무라이는 무사 족보에서 제적시키는 금기(禁忌)를 만들었다. 양반으로 족했다는 조선시대로 따지면 청금록(靑衿錄)에서 삭제되는 일이었다. 화약으로 인해 무수히 많은 일본인이 매독과 천연두와 홍역이란 이름도 모른 채 그저 발진과 종기와 등창과 악저(惡疽)라는 진단으로 죽었다. 에도시대의 사무라이 부활은 이산화황의 폐해에서 탈출하려는 열도(列島)의 몸부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