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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맥파인더 Feb 29. 2024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분당의 진실-거북선의 진실 11

1594년 아산 평택에서 일어난 송유진 난과 향소부곡의 진실

上敎政院曰 倭賊 今春添兵事 孰不虞之 頃見柳成龍狀啓 則 李舜臣獲運糧倭船 朴毅長又捕新衣製來倭賊. 則其添兵之狀 已爲無疑. 而有倭船無數到泊之語 言于備邊司 使之更加措置. 상이 승정원(承政院)에 분부하였다. 왜적이 금년 봄에 병력을 증파하는 일에 대해 누구인들 염려하지 않겠는가. 지난번에 유성룡의 장계를 보건대 이순신이 식량을 운반하는 왜선(倭船)을 포획하였고 박의장(朴毅長)도 새 옷을 만들어 가지고 오는 왜적을 사로잡았다 하였으니, 그들이 병력을 증파하는 실상은 이미 의심할 것이 없다. 그리고 무수한 왜선이 도착하여 정박하고 있다는 말이 있으니 비변사에 일러서 다시 조처를 강구하게 하라. - 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1593) 4월 18일 임인

 

선조(宣祖)가 부산포와 제포(薺浦: 진해 熊川)로 쏟아져 들어오는 왜놈들에 대한 대책을 비변사에 강구하도록 승정원을 통해 명을 하달한 건 일본군에 뺏겼던 한양을 수복해 다시 돌아온 바로 그날이었다. 그 전날 명나라와의 1차 강화협상 타결에 따라 한양에서 모두 철군해 부산포로 내려간 일본군이었다. 후퇴하는 일본군을 명나라 경략 송응창의 명령으로 공격도 못하고 안전하게 보내줘야 했던 조선군과 의병들이었다. 책봉을 통해 일본과의 통상관계를 열어 동쪽의 위험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명나라의 장기이익에 부합한다는 송응창의 봉공안(封貢案)에 막혀 일본군과의 결정적 전투들에서 연속으로 이기며 전쟁의 고삐를 움켜쥐고도 더 이상 아무것도 못하게 된 선조였다. 평양성 전투 말고는 한양과 경상도와 충청도, 남해 모두에서 침략군 일본을 조선군 단독의 군사력으로 사정없이 두들기며 쫓아내고 있었던 전쟁이었다. 전쟁 초반 일본군의 작전 의도와 목표를 제대로 알아채지 못해 신립 장군의 기마군단이 괴멸되면서 초래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선조는 전쟁 초기 조선의 힘을 과소평가해 명나라를 너무 일찍 불러들이는 실수를 범했고 계사년(1593)에 부산포와 제포(薺浦: 진해 웅천)로 밀려 들어오는왜놈들과 배들을 병력 보충으로 생각하는 실수를 또 저지르고 있었다. 그들은 병사들이 아니라 갓 따온 시즈오카의 찻잎들을 대륙으로 수출하기 위해 중간 경유지인 조선으로 찻잎들을 반입하는 일본인 노동자들이었다.


고려 성종 때부터 시행해 온 12목(牧) 방어 체제를 사실상 폐지하고 오위(五衛) 체제를 채택한 것은 화약무기의 발전 때문이었다. 12목(牧)중 자기(瓷器)의 수입로를 지키는 나주와 전주, 지리산의 찻잎 생산지를 지키는 승주(순천)와 진주를 제외한 8목(牧)은 차(茶) 수출로를 지키기 위해 설치된 군사행정단위였다. 산성(山城)들로 이루어졌던 고래(古來)의 방어체제가 읍성(邑城) 중심으로 이루어진 건 한반도의 기후변화로 차나무들이 대부분 사라져서였다. 다른 곳에서는 모두 사라진 차나무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산은 그래서 땅이 다른 산이란 뜻의 地異山으로 불렸다. 지리산이 地理山과 智異山, 둘 다로 적히는 연유였다. 차(茶) 나무가 자라는 산을 지키는 산성체제가 이제 일본에서 찻잎을 들여와 차(茶)로 가공하고 이를 대륙으로 수출하는 교역 기지들을 지키는 체제로 바뀌었다. 주군현(州郡縣)이라는 중국이 발전시켜 온 행정체제가 아닌 중국이 30년(BC 8~ AD 25)밖에 운용하지 않고 폐기한 목(牧)이라는 행정단위를 사용한 이유는 차(茶)를 실은 수레를 한반도에서는 소(牛)가 끌었기 때문이었다. 공주목과 상주목부터 각 목(牧) 사이의 거리가 일정한 것도 소가 끄는 수레 속도 때문이었다. 전국을 북과 남 그리고 중앙의 3군(軍)으로 나눈 후 각 목(牧)을 지키기 위해 구성한 12사(司)를 3군(軍)에 배속시킨 군제(軍制)였다.

  

성(城)을 쌓아 지키는 방식의 전통적인 진관(鎭管) 체제는 일반 백성들을 동원해야 하기에 간접 비용이 많이 드는 국방체제였지만 차(茶) 무역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고수해야 하는 방어체제였다. 고려 성종 때 12목(牧) 설치로 나타난 고려의 진관체제는 차(茶) 무역로를 따라 설치된 것이었다. 시즈오카 일본 찻잎의 수입항(港)과 지리산의 차(茶) 생산지를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진주목과 승주목(지금의 순천)을 시작으로 청주목 -충주목 -광주목(廣州牧) -양주목(楊州牧) -개경 -황주목(黃州牧)으로 이어지는 차(茶) 수송로는 방어 체제의 중심축이었다. 부산과 울산을 통해 들어오는 일본 찻잎은 경주와 상주목을 거쳐 충주목에서 합쳐졌다. 일본에서 수입된 찻잎을 낙동강 동안과 서안에서 합천 해인사와 양산 통도사에서 각각 가공해 차(茶)로 만들어 낸 후에는 대륙으로 수출하기 위해 용기포장(容器包裝)을 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 중국 절강성에서 만든 청자와 백자 같은 자기(瓷器)가 영파항으로부터 수입되었다.


영파항으로부터 들어오는 자기(瓷器)를 안전하게 수송하기 위해 나주목과 전주목, 공주목이 설치되었는데 이 자기(瓷器) 수송로의 끝은 청주목이었다. 가야산 합천 해인사와 양산 통도사에서 차(茶)로 가공된 시즈오카 찻잎들은 청주목에서 절강 청자와 백자에 담겨 아산과 평택, 화성을 통해 서해로 나가 대륙으로 수출되었다. 아산까지 오는 중에 습기(濕氣)로 산화(酸化)되어 수입지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차(茶)들은 대륙으로 들어가기 전 서산(瑞山) 가야산에 있는 고란사라고도 불린 보원사(普願寺)에 보내져 배화(焙火) 처리를 받았다. 대바구니(竹籠)에 차(茶)를 넣고 숯으로 살청 하는, 습기를 없애는 탄배(炭焙) 처리였다. 대부분의 탄배는 청주에서 이루어졌기에 탄배용 특수 숯을 만드는 공장은 공주 명학소(鳴鶴所:지금의 대전)에 대규모로 시설되었다.


향소부곡(鄕所部曲)은 천민들이 사는 곳이 아니라 차(茶) 산업의 글로벌화를 위해 만들어진 특수 행정 구역이었다. 찻잎을 차(茶)로 만드는 지역을 향(鄕)이라, 찻잎을 차(茶)로 만드는 데 필요한 숯과 무쇠솥 같은 특정 물품들과 그 원료가 되는 선철(銑鐵)등을 만드는 지역은 소(所)라, 향과 소의 생산물을 수송해 주는 지역은 부곡(部曲)이라 했다. 향소부곡은 중국 송나라의 차(茶) 산업 세계화 전략에 의해 1069년부터 고려에 설치된 자유무역지대였다. 향소부곡에 고려 조정에서 파견한 지방관이 없었던 연유였다. 또한 하삼도(경상, 전라, 충청)에 향소부곡이 집중되어 있었던 연유였다. 경상도에만 321개소, 전라도에 256개였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기록했다. 송나라가 차(茶) 산업 세계화 전략을 일방적으로 중지한 1162년 이후 왜곡되기 시작한 향소부곡이 없어진 건 일본 찻잎 가공산업을 완전히 포기한 태종 13년(1413)이었다.


지리산에서 생산되는 찻잎을 지키기 위해 설치된 승주목과 진주목, 합포에서 시작된 1 로와 부산포와 울산포에서 상주목을 거쳐 오는 2 로가 찻잎 수송로라면 나주목과 전주목, 공주목을 거쳐 오는 3로는 차(茶)를 담을 자기(瓷器)의 수송로였다. 충주목과 광주목, 양주목을 차례로 거쳐 개경에 들어온 차(茶)는 해주목과 황주목으로 갈렸는데 백령도와 초도를 통해 서해 항로로 산동성 등주의 봉래수성과 천진항으로 수출될 물량은 해주목으로 들어갔고 북방 초원로로 수출될 물량은 황주목을 통해 거란과 여진에게 이어진 의주로 나갔다. 고려 성종의 12목(牧) 체제가 성립된 연유였다.


이후 몽골이 고려의 차(茶) 산업을 뺏기 위해 1231년부터 침략해 오자 차(茶) 산업을 지키기 위한 해상 무역로가 정비되었다. 조선술과 항해술을 발달시켜 귀선(龜船) 모양을 한 봉래 3호 같은 원양 무역선까지 끝내 개발하게 되는 해상 조운로(漕運路)였다. 대륙을 질주하던 몽골기병(騎兵)은 배만 타면 말이나 병사나 모두 뱃멀미로 녹초가 되어 전투력을 상실했고 이를 간파한 고려는 해상 조운로를 주력 무역로로 만들어 차(茶) 산업을 유지해 갔다. 고려의 국가 방어 체제가 12목 중심에서 11 조창(漕倉) 중심으로 변경된 연유였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로가 차(茶) 무역로와 동일한 고려의 조운로(漕運路)와 겹치는 것은 왜구의 침입 목적이 시즈오카의 찻잎 수출이라는 강력한 증거였다. 1593년 휴전이 시작된 조선에 그 고려의 차(茶) 수출로가 부활되었고 송유진과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는 호서 지역은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宋經略移咨 請以世子講官二三人 將該講經傳 前來討論. 文學柳夢寅 司書黃愼 說書李廷龜就學. 경략(經略) 송응창이 자문(咨文)을 보내어 세자 강관(世子講官) 두세 명에게 강론할 경전(經傳)을 가지고 자기에게 와서 토론(討論)하게 할 것을 요청하였다. 문학(文學) 유몽인(柳夢寅), 사서(司書) 황신(黃愼), 설서(說書) 이정귀(李廷龜)를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 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1593) 4월 14일 무술

 又奏請王世子經理全 慶 奉旨降勑 令王世子權摠節制. 또 왕세자가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을 경리(經理)하도록 주청한 결과 성지(聖旨)와 칙서(勅書)가 내려왔는데 왕세자로 하여금 임시로 절제(節制)를 총괄하게 하였다. -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9월 1일 임자


부산포로 철군한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명나라와의 강화협상에서 일본이 처음부터 요구했던 것은 오직 두 가지였다. 그 첫째가 전쟁을 지원해 준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원하는 화약 원료인 초석을 확보할 수 있는 명나라와의 통상허락이었고 두 번째가 원나라의 일본 침략(1281년) 이후 일본이 줄곧 요청해 왔던 조선에서의 기항지(寄航地) 확보였다. 일본이 조선의 땅을 원한 건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시즈오카 찻잎의 수출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과학기술로는 일본배가 조선 땅을 거치지 않고 대륙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여진을 통해 대륙 동북방과 거래를 하려 해도 동해에서 안전하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기항지가 있어야 했다. 홋카이도(北海道)와 사할린은 너무 추워 차(茶)들이 얼어 버려 경유할 수 없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독식하고 있는 남방과의 무역 이익을 나누기 위해서라도 조선 남해안에 자유롭고 안전하게 쓸 수 있는 기항지가 있어야 했다. 조선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요구한 건 만약 이 기항지 사용에 관한 사안이 합의될 때 그 합의의 준수를 보장받기 위해서였다.


송응창이 선조의 간섭 없이 세자인 광해군이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을 통치할 수 있도록 명황제에게 주청해 이를 허락하는 황제의 성지와 칙서를 받은 게 1593년 9월 1일이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시즈오카 찻잎들이 조선 땅으로 들어와 차(茶)가 되어 아산 평택을 통해 대륙으로 수출되었다.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를 돌며 백성들을 위무(慰撫)한 세자 광해군이 무군사(撫軍司)를 이끌고 전라도와 충청도를 돌면서 군량을 수집해 명나라 군대에 보급한 게 1593년 윤 11월이었다. 1593년 12월 송응창은 당연히 경략에서 파직되고 귀국조치되어 조선을 떠났다. 1594년 1월 3일, 광해군을 임금으로 옹립하자며 송유진의 난이 아산과 평택에서 일어났다. 결국 1593년 계사년에 양광도 지역에 연속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은 광해군이 임진왜란 초기 분조(分朝)를 통해 헌신적이고 용감하고 유능한 모습을 분명히 보였음에도 선조에게 평생 신임받지 못한 채 의심받게 한 이유가 되었다.


북직례(北直隸:산동성) 출신인 병부상서 석성이 파견한 심유경은 송응창에게 있어선 다른 나라 사람이었다. 영락제가 자금성을 지어 제국의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긴 이후부터 다시 노골화된 남조와 북조의 대결이었다. 북경은 거란과 여진 그리고 철천지 원수 몽골의 수도였지 한족의 도읍지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송나라의 전통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던 강남이었고 1126년 정강지변(靖康之變) 이후 북방 유목민들에게 눌려있던 강북인들을 멸시하는 강남인들이었다. 일본군이 부산포로 철수해 자신의 주도권이 강화된 틈을 이용해 자신의 부하들인 절강성 출신의 사용재(謝用梓)와 서일관(徐一貫)을 황제가 파견한 칙사로 위장해 일본에 보낸 송응창이었다. 그들은 1593년 5월 15일 이시다 미스나리(石田三成)의 안내로 나고야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 만났다. 일본의 정확한 요구조건을 파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뒷배가 누구인지 확인하려는 의도였다. 무엇 때문에 일어난 건지 바보만이 모른 채 끝난다는 나라 간 전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뒷배가 실크로드 상방이 아니란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항주(杭州) 출신 송응창은 일본의 찻잎 수출을 한사코 막고 있는 실크로드 상방에게 일본 찻잎 교역이 얼마만큼 수지맞는 일인가를 보여주고자 했다. 실크로드 상방은 여전히 차(茶)를 종이에 싸서 대바구니(竹籠)에 담아 낙타와 나귀에 실어 운반했다. 자기(瓷器)에 담긴 차(茶)가 얼마나 오랫동안 변함없이 보존되는지 북방 대륙으로 수출되는 일본 차(茶)가 증명해 줄 터였다. 북경 조정에서 감찰 어사인 호과(戶科), 형과(刑科), 예과(禮科)의 급사중(給事中)을 거쳐 산동성과 산서성,하남성과 복건성으로 전근하며 포정사(布政使)까지 오른, 지방관으로 잔뼈가 굵은 항주(杭州) 사람 송응창이었다. 과도관(科道官)이라 불린 감찰관들과 그들의 후원자인 진상방(晉商幇)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항주인이었다. 게다가 그는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는 조명연합군 총사령관이었다. 사대(事大)가 국시인 조선이기에 휴전된 상태로 강화 협상이 진행될 수 있도록 관리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시즈오카의 찻잎 교역이 풍신수길과 합의되었다. 일본은 펠리페 2세에게 곧 책봉을 통해 감합무역 형태로 명나라와의 통상(通商)이 이루어질 거라고 확신에 차 보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즈오카 찻잎을 조선을 통해 대륙으로 대량 수출하는 일은 명과의 통상이 곧 재개될 거라는 좋은 징조로 여겨졌다. 조선의 계유정난 공신 집안들만 빼고는.


일본 시즈오카의 찻잎을 조선으로 들여와 요동을 통해 여진과 대륙 북쪽에 팔아 절강성에 자기(瓷器) 특수(特需)를 일으키려면 경상도와 전라도를 선조의 통치로부터 떼어내야 했다. 일조편법(一條鞭法)이 시행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개중법(開中法) 시대의 절도(節度)에 절어있는 선조와 그의 신하들을 송응창은 업신여겼다. 절강성에서 보내오는 자기(瓷器)들에 차(茶)를 담아 바다를 통해 수출하면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문제는 조선 수군이었다. 한산도에 통제사 수영(統營)을 세우고 견내량을 봉쇄하는 바람에 합포로 들어온 찻잎들을 남해안을 통해 서해안으로 내보낼 수가 없었다. 당시 해로는 합포에서 견내량을 통과해 미륵도를 가로질러 사량도의 사량을 지나 남해 창선도의 적량을 지나 노량을 거쳐 돌산해협을 지나 나로도 손죽도 초도 청산도 보길도 추자도 명량을 통해 서해로 들어가는 순서였다. 통제영이 지키는 견내량과 전라 좌수영이 지키는 돌산해협, 전라우수영이 지키는 명량 때문에 결국 육로로 아산과 평택으로 보내 선적하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일본군이 경상도의 조선인들에게서 소와 말을 대량으로 사들인 연유였다. 소와 말이 끄는 수레에 차(茶)를 실어 아산과 평택까지 날랐다. 진주성을 함락시킨 후 3만 명을 모두 학살해 주변 지역을 확실히 진압해 놓은 일본군이었다. 일본에서 합포로 찻잎을 들여놓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절강성에서 자기(瓷器)를 싣고 온영파배는 나주에 자기(瓷器)를 내렸고 나주에 내려진 자기(瓷器)들은 다시 조선배에 실려 지금의 충남 서산까지 옮겨졌다. 자기(瓷器)들은 서산을 거쳐 아산에 도착했고 아산과 평택에서 자기(瓷器)에 담긴 차(茶)들은 수출선에 실려 서해로 나갔다. 일본이나 절강성이나 뜻하지 않은 전쟁 특수(特需)였다. 그들이 벌어가는 그 많은 돈들을 그 땅의 주인인 조선인들이 똑똑히 보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그 무역을 했던 사람들의 후예였다.


1593년 12월 일본군이 남아있음에도 조선에서 일본군이 모두 철수했다고 가짜 보고를 한 죄로 송응창이 파직되어 본국으로 소환되자 곧 터진 것이 송유진(宋儒眞)의 난이었다. 1593년 6월 말에 벌어진 2차 진주성 전투로 삼만 명의 군민이 학살되자 송응창의 집요한 차단에도 불구하고 조선 조정이 본격적인 고발 외교에 나선 결과였다. 사신으로 간 김수는 눈물을 철철 흘리며 비참하고 억울한 조선의 현실을 호소했다. 송응창이 본국으로 소환되고 후임에는 계료보정총독(薊遼保定總督) 고양겸(顧養謙)이 임명되었다. 그는 송응창의 봉공안(封貢案)에 반대한다고 공공연히 떠벌렸고 강화회담에 나간 심유경(沈惟敬)을 곤장까지 치려 했다. 아산 평택을 통한 일본 차(茶) 무역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걸 의미하고 있었다. 1594년 1월 3일, 송응창을 파직당하게 한 선조를 내쫒고 세자 광해군을 옹립하자며 아산과 평택에서 일어난 반란은 1월 11일 함정에 걸린 송유진이 체포됨으로써 진압되었다. 송유진이 자신을 스스로 판서(判書)로 불렀기에 선조(宣祖)는 괴수를 찾으라 명했고 비변사는 동인의 영수 이산해의 숙부이자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의 서자 의병장 이산겸이 괴수(魁首)라 보고했다. 그는 선조가 직접 국문(鞠問)한 추국(推鞫) 끝에 옥사했다. 의병장이 문제가 되는 건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병력 때문이었다. 송유진의 난은 차(茶) 무역을 가능하게 해 준 명나라 송응창의 파직에 조선인들이 왜 그를 파직당하게 했냐며 자신들의 왕에게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타도대상으로 지목당한 선조는 그래서 호서지방의 변화에 예민했고 집요했다.

 

忠淸道調度御使姜籤馳啓曰…一日出來 誘引同郡人曰 賊將姓李 而其名不可言. 方駐淸溪山 一陣在春川 一陣在海州 餘黨散在忠淸道 又一陣在全羅道. 今正月二十日內將擧事 而在全羅者 欲伺東宮行次 云. 충청도 조도 어사(調度御史) 강첨(姜籤)이 치계하였다…어느 날 이들이 나와서 동군 사람들에게, 적장(賊將)의 성(姓)은 이(李)인데 그 이름은 말할 수가 없고 현재 청계산(靑溪山)에 머물고 있으며 춘천(春川)·해주(海州)에 각각 1진(陣)씩 주둔하고 있는데 그 여당이 충청도에 산재하여 있고 또 1진은 전라도에 있는데 이달 1월 20일에 거사하려 하며 전라도에 있는 1진은 동궁의 행차를 살피기 위한 것이라는 말로 유인하였다고 했다.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47권, 선조 27년(1594) 1월 11일 경인

備邊司啓曰 保寧 李姓之人 意是李山謙…其後自湖西來者 多言山謙所聚之兵猶在 而軍糧軍器亦多 積峙山間. 비변사가 아뢰기를, 보령(保寧)에 사는 이(李)씨 성을 가진 사람은 이산겸(李山謙)인 것 같습니다. 그 뒤 호서(湖西)에서 온 사람들이 하는 말에 따르면 이산겸이 모집한 군대가 아직도 그대로 있는데 산속에 쌓아 놓은 군량과 무기 또한 많다고 하였습니다. -  선조실록 47권, 선조 27년(1594) 1월 17일 병신


아산과 평택을 근거지로 하여 일어난 송유진의 반란이 전라도와 해주에 연결되어 있다는 강첨의 조사 보고서는 정확했다. 춘천에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이제 동해 수출로까지 차(茶) 시장을 확대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적자와 서자의 구별이 엄연했던 시대였으나 선조밑에서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와 이산겸은 사촌지간이었다. 이산해는 동인의 영수였다. 후일 정여립의 난을 진압하는 와중에 서인 정철에 의해 최영경 같은 죄 없는 동인 선비들이 수없이 희생되자 정철을 단죄해야 한다는 북인을 이끈 사람이었다. 혼천의(渾天儀) 같은 천문관측기구의 제작과 연구가 금지된 것은 계유정난 이후부터였다. 갖고 있다 걸리면 양반도 노비로 만들고 신고하면 노비도 면천해 준다는 파격적 포상에 세종대의 찬란한 천문과학은 조선에서 사라졌다. 천문학이 대양 항해에 관계된 과학이기에 혼천의 제작 설계도를 책 속 종이 안에 숨겨 위험을 무릅쓰고 절멸되지 않도록 전승되게 한 이황의 뜻은 그래서 각별했다. 그런 이황의 문인들은 정철의 단죄에 반대했다. 그래서 그들은 남인이라 불렸다.


일본의 찻잎을 수입해 차(茶)로 가공하여 외국에 수출해 조선의 국부를 늘려 나가야 한다는 주장과 조선이 개창할 때 이미 다시는 일본 찻잎을 다루지 않겠다 약조했으니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또다시 맹렬하게 부딪치기 시작한 건 1572년 명나라에서 일조편법이 시행된 이후부터였다. 조선의 선비들이 이조전랑(吏曹銓郞)이라 불리던 벼슬자리 4개를 차지해 인사권을 휘두르려고 학연 지연 등 연고관계가 있는 사람들끼리 뭉쳤다는 의미를 가진 붕당(朋黨)이란 이름으로 1575년 나뉘었다는 건 조선 선비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욕이다.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에도 목숨을 걸고 결코 그치지 않았던 무엇으로 나라를 지키고 부강하게 할 것이냐에 관한 대립이었다. 고려 때까지 차(茶)를 마시던 한국인들이 조선이 되면서 술을 마시게 된 건 차(茶) 산업 포기와 왕실을 맞바꿨기 때문이었다. 이제 일조편법으로 야기된 변법의 시대에 다시 등장한 단심가(丹心歌)와 하여가(何如歌)였다. 김효원의 집이 한성부 동쪽 건천동에 있었고 심의겸의 집이 서쪽 정릉방에 있어서 동인과 서인으로 불린 게 아니었다. 명나라가 1572년 일조편법을 시행해 사실상 은본위제에 기반한 화폐경제체제로 경제 구조를 혁명적으로 바꾼 것에 대한 대책 때문에 갈린 것이었다.


은괴(銀塊)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그동안 금지되어 왔던 동(東) 쪽 일본의 찻잎을 수입가공해 차(茶)로 만들어 세계시장에 판매하는 사업을 재개해 국부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과 서(西) 쪽에 있는 진상(晉商), 즉 실크로드 상방의 일본 차(茶) 교역 금지령을 조선 개국 때처럼 계속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 서로 맞서 나뉘게 된 것이었다. 대책(對策)이 동과 서(東西)를 중시한 것이기에 동서로 불리게 된, 붕당 아닌 정당(政黨)으로의 발전이었다.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뉜 것 또한 서인 정철의 단죄 찬반(贊反)에 따라 나뉜 게 아니었다. 일본 찻잎을 수입해 만든 차(茶)를 수출할 때 페르시아와 아랍시장까지 진출할 수 있는 해양 무역에 주력하자는 주장과 해상 무역으로의 치중이 가져올 해안지역과 내륙지역의 발전 격차를 염려해 전 국토를 수송로로 사용할 수 있는 북방 대륙으로의 수출에 중점을 두자는 주장이 달라서 분당된 것이었다. 거북선의 이층 모습을 귀갑선도로 남긴 천문학의 대가인 제자 이덕홍(李德弘)에게 퇴계 이황이 자신이 보관해 온 혼천의 설계도를 주며 제작을 의뢰했고 또한 서전대전도에 그려져 있는 선기옥형도 만들어 비교해 볼 것을 권했다는 것은 분명한 기록이다. 현재 도산서원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간재 선생의 ‘혼천의와 선기옥형’은 퇴계 학파가 어떤 지향을 가지고 있었는지 가늠하게 해주는 증거다.

 

혼천의(渾天儀)를 전승시킨 퇴계 이황과 경의검(敬義劍)을 전승시킨 남명(南冥) 조식의 문하들로 구성된 남인과 북인으로 이뤄진 동인과 계유정난 때 양녕대군의 주장에 찬성한 사람들의 후손들로 이뤄진 서인의 대립은 세력이 큰 동인의 우세 속에 진행되었는데 그런 동인의 우세를 멈춰 세운 게 호서(湖西) 지방의 선비들이었다. 고려조 때 양광도 (楊廣道)로서 지역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던 지역이었기에 영남학파에 대비해 기호학파(畿湖學派)라 불려지게 된 연유였다. 일본 찻잎을 차(茶)로 만들어 수출하는 산업을 포기하며 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나라였고 그런 왕실의 굳건한 기반이 호서(湖西) 지방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그것도 일본의 찻잎을 차(茶)로 만들어 수출하는 것 때문에 그것도 왜란 중에 호서(湖西) 사람들이 송유진과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에 호응했다는 것이 선조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충청도 해안지방인 아산과 평택, 서산과 홍성이 각 반란의 중심지였기에 또한 절강성에서 오가는 명나라 배들이 결부된 일이었기에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은 광해군처럼 선조의 의심 어린 시선 속에 늘 머물러 있게 되었다.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의심은 송유진의 난 때부터였고 이몽학의 난으로 확신에 가깝게 되었다.


                                                                                       출처 금성출판사
출처: KBS 역사저널 그날 영상한국사
고려시대의 조운로와 중요 지명.  출처: KBS 역사저널 그날 영상한국사
혼천의와 시계가 없다면 원양항해는 불가능하다. 정화함대를 통해 푸거가로 전달된 장영실이 만든 혼천의, 출처 나무위키  선기옥형. 출처:네이버 블로그 학당의 역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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