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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맥파인더 Mar 08. 2024

칠천량 해전의 진실 (상) - 거북선의 진실 13

순천왜성과 사천왜성, 울산학성의 축조 이유

予已前言 彼賊六年相持 豈爲一張封典乎? 大槪賊船 比前極大云 然耶? 應南曰 然. 上曰 大砲 火箭 亦載來乎? 命元曰 此則不知 金軾言 倭賊薄上我船 將士不能措手而敗沒 云. 내가 전에도 말했거니와 저 왜적들이 6년간을 버티고 있는 것이 어찌 한 장의 봉전(封典)을 받기 위해서였겠는가. 대체로 적의 배가 전보다 대단히 크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우의정) 김응남이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포와 화전(火箭)도 배에 싣고 왔는가? 하니, (형조판서) 김명원이 아뢰기를이는 알 수 없고 (선전관宣傳官) 김식(金軾)의 말에 의하면 왜적이 우리 배에 접근하여 올라오자 우리 장사들은 손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패몰되었다고 합니다.  - 선조실록 90권, 선조 30년(1597) 7월 22일 신해


1565년 태평양의 무역풍과 편서풍이 대서양의 그것처럼 큰 활 같은 모양으로 불 거라고 생각해 타고 있던 갈레온을 북위 40도선까지 북상시킨 우르다네타는 드디어 편서풍을 만나 마닐라에서 아카풀코로 돌아가는 회귀 항로를 발견해 냈다. 그 후 우르다네타 루트(Route)로 명명된 이 회귀 항로가 확고해지자 1571년 미적거리는 융경제가 제거되고 어린 만력제를 대신한 장거정에 의해 일조편법(一條鞭法)이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마닐라 갈레온으로 불린 태평양 무역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신흥 유럽 제일의 대제국과 전통의 아시아 제일 대제국이 중간에 그 어떤 중개자도 없이 직접 맞닥뜨리게 되는 최초의 역사가 시작된 거였다. 조총을 내세우며 으스대던 왜군을 평양성에서 내쫓은 것은 명나라 부총병 양원이 지휘하는 화군(火軍)이라 불리던 불랑기(佛狼機) 포병대였다. 불랑기라는 말은 중국인들이 포르투갈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프랑크(Frank)라는 말의 음차였다. 15세기 들어 나타난 잘 못 보던 사람들에 놀란 중국인들이 그들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중국인들이 잘 아는 외국인인 아랍인들은 그들을 프랑크인이라고 알려줬고 그래서 포르투갈은 불랑기가 되었다.


메카의 무함마드가 알라를 유일신으로 믿는 이슬람교를 창시하고 그 신도들인 아랍인들이 정복사업을 벌여 프랑스의 프아티에(poitiers)까지 쳐들어 갔을 때 그들을 막아 선 게 카를 마르텔(Karl Martel)이 이끌던 프랑크 왕국군이었다. 732년에 벌어졌던 역사를 1521년에 써먹어도 모를 정도로 중국은 유럽에 대해 무지했다. 사실 중국은 무식해도 좋을 정도로 다른 곳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었다. 1371년 확립된 개중법(開中法) 체제는 고려의 동참 없이는 불가능했던 체제였고 영락제의 정난(靖難) 또한 조선 이방원 세력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했던 쿠데타였기에 1592년까지 조선 또한 그 어느 곳에도 관심을 둘 필요가 없는 나라였다. 전 세계가 그동안 죽어라 생산해 온 은(銀)의 5분지 4를 갖고 있는 나라의 황제 만력제는 영락제의 후손이었고 조선의 임금 선조는 태종의 후손이었다.


마닐라 갈레온 무역에서 주로 취급한 품목은 두 가지였다. 중국과의 무역에서 늘 거론되는 비단은 사실 흑색화약을 숨기려는 의도적 과장이 담긴 유럽 역사학자들의 상투적인 레토릭이었다. 이미 AD 6세기에 동로마 황제는 경교(景敎) 수도사들을 이용해 중국 북위(北魏) 시절 비단 제조에 관한 모든 원천 기술을 훔쳤고 이들을 시실리와 나폴리에 성공적으로 이식해 유럽 비단 산업을 반석 위에 정착시켜 놓았었다. 천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유럽이 중국의 비단에 목을 매고 있었다고 기술하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후추와 계피, 정향, 육두구 같은 향신료는 목면(木綿)과 함께 포르투갈이 거의 독점적으로 다루도록 이미 양해한 것이 1494년의 토르데시야스 조약과 1529년의 사라고사 조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친어머니는 포르투갈 국왕이었던 주앙 3세의 친여동생이었고 국왕인 세바스티앙은 펠리페 2세의 친고모였던 카타리나 주앙 3세 왕비의 친손자였다. 세바스티앙이 죽고 1580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펠리페 2세가 다스리는 동군연합 왕국이 된 것은 그런 연유였다. 차(茶)와 비단 그리고 생활용품이라고 기록되어 온 마닐라 갈레온의 거래 품목은 청화백자에 담긴 차(茶)와 흑색화약 두 가지였다. 다른 걸 싣기엔 너무도 절박한, 푸젠에서 건너온 푸거가(家)와의 패권 다툼이 치열했던 시절이었다. 차(茶)는 화약 폭발이 만들어 내는 가스에 사람 몸이 매독과 천연두에 견디게 하는 면역력을 높여 주는 묘약이었다.

 

1555년 포르투갈의 범선(帆船) 카락(Carrack, Nau)을 몰고 와 조선으로 하여금 판옥선을 건조하게 한 송나라 휘왕(徽王) 왕직의 본거지는 영파항 앞에 있는 주산 군도가 아니었다. 그의 본거지였다는 그래서 포르투갈 사람들이 수천 명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는 쌍서도(雙嶼島)는 주산군도에 속한 어느 섬이 아니었다. 만력제의 아버지 융경제가 개중법 체제의 숨겨진 핵심인 해금(海禁)을 폐지하고 마닐라 갈레온과의 은괴(銀塊) 무역을 위해 1567년에 개항한 항구는 보주항(莆田港)에서 바라보이는 미주도(湄洲島)가 아니었다. 지금 양안의 긴장을 높이고 있는 금문도가 있는 장주(漳州) 앞바다에 있는, 하문시(厦門)가 금문도와 마주 보는 그 앞바다에 있는 항구였다. 월항(月港)이었다. 후일 해증(海澄)으로 지금은 용해(龍海) 시로 이름을 바꾼 월지(月支)의 항구였다.


화약과 차(茶)를 원했던 스페인 갈레온은 그것들이 있는 푸젠 성의 월항(月港)까지 가야 했지만 쿠로시오 해류를 이용해야 했기에 대만까지만 갔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건 언제나 어디서나 옳은 일이다. 판자 하나라도 바다에 나갈 수 없다는 해금의 서슬이 시퍼럴 때 월항에서 나온 왕직의 배들이 마닐라까지 가서 청화백자에 담긴 화약과 차(茶)를 팔았다고 하는 것은 믿기 어렵다. 대만이 가깝고 게다가 대남(臺南) 가기 전 국도(菊島)까지 있는 월항(月港)에서 그 멀리 마닐라까지 항해한다는 건 그사이 벌어질 모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걸 감안(勘案)할 때 납득하기 어렵다. 목마르지 않은데 맨땅에 삽질할 사람은 없다. 그 위험을 안고 장사할 만큼 어리석은 중국인은 역사 이래로 없었다. 시즈오카의 차(茶)를 가져와 월항(月港)에서 청화백자에 담아 화약과 함께 대만의 대남(臺南)으로 가져가면 엄청난 은괴를 벌 수 있었다. 대남(臺南)에 부려진 왕직의 화물은 북쪽 대북(臺北)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편서풍을 받기 위해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북태평양으로 올라가는 스페인 갈레온에 선적되었다. 스페인이 대북을 개발한 연유였다. 화약과 차를 각각 담은 청화백자는 그 안에 든 화약과 차를 꺼내 팔고 난 후 빈 자기만을 판매해도 3배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매년 6월 혹은 7월에 마닐라 외항인 카비테(Cavite)에서 출항한 스페인 갈레온들은 아카풀코로 돌아가기 위해 쿠로시오 해류가 시작하는 대만에서 쿠로시오(Curoshio) 해류를 이용해 북위 40도선에서 부는 편서풍을 돛에 받기 위해 북동쪽으로 항해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편서풍(偏西風)을 이용해 뉴스페인(멕시코)으로 항해했다. 갈레온들은 길게는 4달의 항해 끝에 멘도시노 곶(Cape Mendocino)에 도착해 태평양 연안을 따라 남하해 아카풀코(Acapulco)에 입항했다. 가져온 물건의 5분지 4가 아카풀코에서 팔렸고 나머지가 베라크루스로 보내졌다. 이듬해 3월 혹은 4월에 3백만 은괴(silver peso)를 싣고 갈레온은 괌(Guam)을 거쳐 마닐라로 들어가는 항해를 시작했다. 매년 2척씩만 마닐라와 아카풀코에서 각각 운항하도록 칙령(decree)으로 제한된 게 1593년이었다. 태평양 항해에 나설만한 스페인 보유 65척의 갈레온들이 모두 몰려드는 바람에 대중국 가격 협상력이 추락하고 있었고 이윤을 늘리기 위해 과적을 일삼다 침몰하는 경우도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세상 밖으로 나온 은(銀)의 대부분이 월항(月港)으로 흘러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그 압도적인 양의 은괴들 때문에 왕직은 결국 불랑기인들에게 배신당해 참수당했고 그 어마어마한 양의 은괴때문에 융경제는 1567년 해금을 폐지하고 월항을 대외무역항으로 개항했다. 물론 일본은 제외였다. 중국은 여전히 일본의 시즈오카의 차(茶)가 자신들이 주도하는 국제무역체제에 들어오지 못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일본 차(茶)는 언제나 거래 금지 품목이었다. 스페인이 그런 일본을 부추겨 임진왜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연유였고 왕직을 배신하고 마카오를 얻은 불랑기들처럼 풍신수길을 죽여 일본 차(茶) 사용권을 중국으로부터 양해받은 연유였다. 중국은 오리진이 몽정산에서 차(茶)를 인공 재배해 낸 이후부터 일본 차(茶)를 금기시(禁忌視) 해왔다. 그건 일본 시즈오카의 차(茶)가 연오랑과 세오녀로 일본이 분리되기 전까지 부상국(扶桑國)의 차(茶)였기 때문이었다. 차(茶)는 원래 부상국(扶桑國)의 것이었지 중국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무엇보다 차(茶)를 오롯이 갖고 싶어 했다.


푸젠 출신 푸거가(家)가 태평양 무역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각종의 규제를 가했던 스페인이었다. 1503년부터 세비야에 설치해 운영한 카사 데 콘트라타시온(Casa de Contratacion: House of Trade)이라는 동인도회사의 원조격인 조직을 통해 1593년부터 마닐라와 아카풀코에 각기 매년 2척의 갈레온만 항해할 수 있도록 통제한 것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무역 대표부로 번역할 수 있는 이 조직은 스페인 식민지에서의 조세와 관세를 거두는 것은 물론 해도(海圖)와 지도(地圖)를 제작하고 배포하는 것도 독점 관리했고 이 해도(海圖:Chart) 들을 소지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 선장들의 면허까지 일일이 챙겨 모든 바다에서의 항해를 통제했던 스페인 왕실이 허가한 독립 기구였다. 결코 스페인은 허접한 나라가 아니었다.


이런 촘촘한 관리 때문에 1566년부터 본격화한 마닐라 갈레온에 대한 기록은 상세했고 관리 또한 철저했다. 이런 무역 거래에 대한 자료를 연구한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매년 마닐라 갈레온을 통해 이루어진 무역 규모를 당시 화폐 기준으로 평균 3 ~ 4 million silver pesos라고 밝혀 놓았다. 1565년부터 1815년까지 이루어졌던 마닐라 갈레온 무역에서 이 평균을 뛰어넘는 기록은 오직 한차례뿐이었다. 1597년이었다. 그 해 기록된 무역 규모는 12 million silver pesos였다. (By 1590 between 2 and 3 million silver pesos were going annually to Manila and in 1597 the figures reached 12 million - Borah, Manila Galleon, p. 123, 1954). 연구자들도 최대 평균치 4백만 페소를 훨씬 뛰어넘은 이 해의 무역 규모를 매우 특이하다고 따로 기록할 뿐 그 이유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카풀코 갈레온이라고도 불렸던 이 항로는 한 해 최대 4척의 배만 마닐라와 아카풀코를 오고 갈 수 있었던 무역 규모가 최대 평균 4백만 페소였던 단일 항로였다. 1593년 황제의 조칙으로 정해진 규제였다. 각 항구마다 매년 2척의 갈레온만 운항하라는. 따라서 한 척당 한 해 무역 규모는 최대 평균 1백만 페소였다. 12백만 페소라면 12척이 1597년, 그 한 해에 모두 투입되었다는 말이다. 보라(Borah) 연구를 따르면 4척이 3백만 페소였으니 12백만 페소는 16척이 한해 투입되어야 달성할 수 있는 무역액이었다.

 

명나라 조정에서 황제의 윤허를 받아 파견한 책봉사절단의 정사(正使)가 도망치자 심유경은 자신이 부사(副使)가 되고 부사로 파견된 양방향(楊方享)을 정사로 만들어 일본으로 들어가는 모험을 감행했다. 정사로 파견된 이종성이 부산포에서 도망친 것이 1596년 음력 4월이었고 그 혼란을 수습해 심유경이 양방향과 함께 일본에 도착한 것이 8월 28일(10.19)이었다. 9월 1일(10.21) 대판(오사카)에 도착한 그들을 풍신수길은 그다음 날 바로 만나주었다. 물론 이 가짜 사절단에는 조선의 임금 선조가 파견한 황신(黃愼)이 배신(陪臣)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후일 명나라가 유성룡에게 북경의 명나라 조정에 직접 출석해 황제 앞에서 황신이 조선 대표 자격으로 배신이 되어 참가한 경위에 대해 해명하라고 명령을 내린 빌미가 된 일이었다. 그만큼 1596년의 오사카 회견(會見)은 당사자들에게는 마지막 주사위였고 그래서 관련국들 모두 사력을 다해 움직이고 있었다.


풍신수길은 1596년 9월 2일(10.22) 대판 회견(大阪會見)이라 기록된 사건을 통해 명나라의 분명한 입장을 최종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 국왕으로 책봉은 해주되 감합무역은 안되며 시즈오카 차(茶) 수출을 위한 조선의 기항지 제공도 허락할 수 없다는. 결국 일본 봉쇄를 결코 해제해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대판회견이 있기 3일 전 일본 시코쿠(Shikoku) 섬의 고치(Kochi 高知市) 우라도(Urado 浦戸)에는 산 펠리페(San Felipe)라는 마닐라 갈레온 한 척이 조난을 당해 정박해 있었다. 1596년 6월 17일(7.12) 아카풀코(Acapulco)로 가기 위해 마닐라 외항인 카비테(Cavite)를 출발한 산 펠리페호(號)에는 당시 1백만 페소가 넘는 가치의 화물이 실려 있었다. 마티아스 데 란데쵸(Matias de Landecho) 선장이 지휘한 이 갈레온은 항해 중 세 번의 태풍(typhoon)을 만나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조난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마닐라 갈레온이었다. 250년 동안 태풍 때문에 일본으로 조난당한 마닐라 갈레온은 1596년 양력 7월 12일에 기록된 산 펠리페호가 유일했다.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 당시 스페인령 필리핀 총독은 1596년 6월 19일(7.14), 신임 총독 프란시스코 데 테요 데 구즈만(Francisco de Tello de Guzman)에게 총독직을 인계하고 개인 자격으로 캄보디아 원정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쿠로시오 해류는 고수온과 고염분을 유지하며 흐르는 거대한 물덩어리다. 해류의 폭은 100km에 달하고 수면에서 수심 200m까지는 2~5노트(시속 4~8km), 수심 400~1000m에서는 1~2노트(시속 2~4km)의 속도로 한반도 쪽이 아닌 일본 쪽 방향으로 흘러간다. 초당 유량이 5천만 톤으로 추산되어 한강의 10만 배라고 알려져 있는 쿠로시오 해류가 이렇게 흐르는 것은 한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불어오는 바람 때문이다. 지속적인 바람은 수면의 물을 끌고 가면서 해류를 만드는데 적도 부근에서 서쪽으로 부는 북동무역풍이 쿠로시오를 시작시킨다. 열대 해역의 데워진 공기가 상승하면 주변의 공기를 끌어들이는데, 지구 자전의 영향으로 동풍이 형성되며 이 바람이 열대 해역의 바닷물을 서쪽으로 끌고 가면서 북적도 해류를 일으키게 된다. 태평양의 북적도 해류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필리핀에 이르면 육지에 부딪히고 방향을 바꾸어 강력한 난류를 형성하며 북쪽으로 대만과 오키나와를 거쳐 일본 동부로 빠져나가는 데 이것이 쿠루시오 해류였다.

 

 

쿠로시오 해류(海流)는 마닐라 갈레온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결정적 자연조건이었고 스페인이 대만의 대북(臺北)을 개발하게 한 원인이었다. 고온(高溫)과 고염(高鹽)을 견디는 청화백자가 필수품이었던 이유였고 일본이 그토록 조선에 목매달았던 연유였다. 시즈오카의 차(茶)를 세계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선의 땅과 바다가 있어야 했다. 주변 바다에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해류가 없었기에 차(茶)를 팔기 위해서는 대운하(大運河)를 파야만 했었다. 실크로드 상방이 대운하를 판 수 양제(隋煬帝)를 거꾸러뜨리고 장보고를 암살하고 자기(瓷器)를 개발한 송나라를 북방 유목민들로 하여금 그토록 침략하게 하고 원나라 이후부터는 일본을 봉쇄하는데 집요하게 매달린 연유였다. 그로 인해 고려와 조선의 역사가 그토록 굴곡지게 된 연유였다. 1596년 양력 10월 19일은 부산을 떠난 심유경과 양방향이 책봉사절로 일본에 입국한 날이었고 산 펠리페 사건(San Felipe Incident)이라 역사에 기록된 배수량 1천 톤의 스페인 국적의 갈레온 한 척이 시코쿠에 정박한 날이었다.


명나라의 책봉사절단과 풍신수길의 오사카 회견에는 조선의 황신과 스페인의 다스마리냐스 필리핀 총독이 참가하고 있었다. 정사 이종성(李宗城)이 도망간 상태에서 심유경이 황제의 윤허가 있어야만 가능한 책봉사 변경을 임의로 해가며 양방향과 일본으로 들어가 풍신수길과 회담을 강행한 것은 반드시 합의를 봐야 할 조정 사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575년부터 준비된 스페인의 대중국 전쟁이었다. 스페인의 필리핀 총독부가 대중국전쟁 준비사령부가 된 것은 프란시스코 데 산데(Francisco de Sande)가 3대 총독으로 부임한 1575년 이후부터였다. 명나라가 은본위 세계무역체제에서 벗어나지 않을 거라는 탐사를 통해 확인된 정보는 화약과 차에 대한 스페인의 우선권을 중국이 더 많이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이었다. 1576년 6월 6일, 펠리페 2세에게 중국 점령 계획이 보고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만력제에게 보내진 펠리페 2세의 두 번에 걸친 서한전달에 이어 1583.6.20 교황청에 5대 총독 디에고 론키요(Diego Ronquillo)의 대중국전쟁 개시보고가 접수되었다. 펠리페 2세는 그 모든 걸 영국 전쟁 이후로 미루게 했다. 1589년 영국과의 전쟁은 패전으로 끝났다. 임진왜란은 스페인의 중국에 대한 차도살인이었다. 심유경은 스페인의 대중국전쟁을 이제는 끝내게 해야만 했다.

 

 산 펠리페가 1597년분 시즈오카 차 인수대금으로 넘겨준 1백만 은괴를 밑천으로 풍신수길의 전쟁인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때 일본군이 택한 침략로는 마지막까지 시즈오카 차 수출로를 확보하기 위한 일본의 처절한 몸부림을 여실히 보여준다. 동시에 스페인이 시즈오카 차 수입에 선제조건으로 내건 청화백자를 확보하기 위한 조선 청화백자의 본향(本鄕)을 차지하려는 침략로였고 직산(稷山) 전투를 통해 노골적으로 보여준 아산 평택을 확보하려는 진격로였다. 정유재란에서 그들이 원한 건 임진왜란 때처럼 선조가 아니었다. 선조가 몽진하지 않은 연유였다. 남원과 순천이 철저히 유린당한 연유였고 울산에 학성이 새로 축성된 연유였고 하동이 가까운 사천에 시마즈가 왜성을 쌓아 똬리를 튼 연유였다. 그곳들은 청화백자 제작에 꼭 필요한 산화코발트 광산과 고령토가 있는 곳이었으며 도공들이 클러스터를 이루고 있던 곳이었다. 명나라가 종전의 대가로 넘긴 건 그저 시즈오카 차에 대한 수입판매권을 스페인이 갖는 것에 대해 양해해 준 것뿐이었다.


그런 정유재란을 발발시키기 전 펠리페 2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산 펠리페를 통해 풍신수길에게 백만 페소의 은괴와 요인 암살용 포르투갈 저격수들을 넘겨주고 대마 난류의 흐름과 바람을 확인하게 했다. 대마 난류가 1년 내내 똑같은 흐름과 방향으로 쓰가루(Tsugaru) 해협을 통해 태평양으로 들어가는 걸 직접 확인한 산 펠리페호가 11척의 다른 갈레온을 데리고 다음 해인 1597년 7월 14일(8.26) 칠천량 해전이 일어난 거제도와 부산포 외해에 나타난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그 해 아산과 평택을 통해 단 한 잎도 수출하지 못한 시즈오카의 차였다. 이제 그 많은 시즈오카의 차는 모두 스페인 차지였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그렇게 큰 배들을 그렇게 많이 본 적이 없었다. 마닐라 갈레온이 되려면 배수량이 1천 톤은 되어야 했다. 8백 톤짜리 갈레온들도 동원된 모두 12척이 넘는 함대였다. 8kg짜리 철환이 비처럼 날아와 배수량 227톤의 판옥선들과 거북선들을 박살내고 있었다.


宣傳官金軾 哨探閑山事情 還來入啓曰 十五日二更 倭船五六隻 不意夜驚衝火 我國戰船四隻 全數燒沒 我國諸將蒼皇動船 艱難結陣 鷄鳴 倭船不知其數 來圍三四匝 荊島等處 布滿無際. 且戰且退 勢不相敵 我舟師退屯于固城地秋原浦 賊勢滔天 我國戰船 全被燒沒 諸將軍卒 焚溺盡死. 臣與統制使元均及順天府使禹致績 脫身下陸 元均老不能行 赤身杖劍 兀坐松下. 臣走且顧見 倭奴六七 揮劍已到元均處 元均生死 不得詳知. 慶尙右水使裵楔 玉浦安骨萬戶等 艱難獲全 焚蕩諸船 火炎漲天 倭船無數向閑山島矣. 선전관 김식(金軾)이 한산(閑山)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입계 하였다.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우리나라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 선조실록 90권, 선조 30년(1597) 7월 22일 신해

칠천량 해전을 일으킨 1597년의 갈레온. 흘수선 위 컬버린 포를 함재한 포문들이 보인다. 한 현에 8문이니 좌우현을 합하면 총 16문이다.  출처:위키미디어
사진 오른쪽 건물이 세비야의 계약의 집(Casa de Contratacion). 출처:위키미디어
마닐라 갈레온 한척에서 운용한 함포들.   출처: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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