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몽학 난의 진실
備忘記曰 寡昧自前孤懷 祈懇不得 日夜耿耿 如坐鍼氈上. 到今朝廷之上 怪說異論 左右橫生 可駭可愕 不可障流 只恨不得決退. 爲諸卿拘繫 終聞不忍聞之言 無非予罪. 前日予言 予退賊退 者 良有以也. 如使予盡書所懷 雖禿盡中山之兔 亦不能盡矣. 只願速退 只願速退. 今陳奏倭奴之事 亦未免遷就苟媚之狀. 비망기(備忘記)로 일렀다. 우매한 내가 전부터 외로운 회포로 간곡히 기원했으나 되지 않아 밤낮으로 조바심하면서 바늘방석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조정에 괴이한 의논들이 좌우에 마구 나돌고 있으니 해괴하고 경악스럽다. 그러나 그 유행을 막을 수가 없으니 그저 결연히 퇴위(退位)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경(卿)들에게 잡혀 마침내 차마 듣지 못할 말을 듣게 되었으니, 모두가 나의 죄이다. 전일 내가 말한 ‘내가 퇴위해야만 적이 물러간다.’고 한 것은, 실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한 말이다. 나로 하여금 소회(所懷)를 다 쓰게 한다면 붓이 다 닳도록 쓴다 하더라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속히 퇴위하고 싶을 뿐이다. - 선조실록 51권, 선조 27년(1594) 5월 27일 갑진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이 봉공안(封貢案)을 내세워 일본과의 강화협상을 자신의 주도로 이끌어 가고 요동에 거주하면서 조선의 사신(使臣)들이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도록 압박을 가하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때 이를 견제(牽制)하고 나선 이가 병부상서 석성이 파견한 유격(遊擊) 심유경이었다. 1593년 4월 송응창이 사용재(謝用梓)와 서일관(徐一貫)을 참장(參將)과 유격(遊擊)의 관명을 주고 황제의 강화사절로 위장해 일본에 보내 그 해 5월 13일 풍신수길을 만나 뒷배가 누구인지 확인할 때 유격(遊擊) 심유경은 웅천에서 소서행장과 별도의 회담을 벌여 조속한 전쟁 종식과 통상 재개를 위해 명나라 조정에 일본의 항복사절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송응창이 파견한 사용재와 서일관을 진짜 명 황제의 칙사(勅使)인 줄 알았던 풍신수길이 시즈오카 찻잎을 조선을 통해 대륙으로 수출하는 문제를 그들과 합의한 후 자신의 강화조건 7개 항을 열심히 설명했다. 만약 명나라가 이를 받아들이면 영원한 화의(和議)를 약속할 만큼 흡족해했던 그에게 마침 도착한 소서행장의 사절 파견 요청은 흔쾌히 허락되고 꾸려진 사절단의 대표로 선정된 것이 소서행장의 가신인 나이토 조안(内藤如安)이었다. 그러나 소서행장이 나이토를 항복 사절로 명나라에 보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풍신수길이었다.
경덕진 청화백자의 광고와 특수(特需)를 위해 기획된 나고야 회담을 마친 송응창의 강화사절이 일본을 떠난 건 진주성에 있던 조선인 삼만 명이 학살당하던 1593년 6월 28일(7.26)이었다. 시즈오카의 찻잎이 아산(牙山)으로 가는 길에 최대의 위협이었던 진주성은 나고야에서 송응창의 특사와 관백 풍신수길의 합의가 이뤄진 5월 15일 이후 그렇게 치워졌다. 세례명이 돈 주앙이고 고니시 히다노카미조안(小西飛彈守如安)라고 불린 나이토 조안이 풍신수길이 준 납관표(納款表)를 소지한 채 35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이끌고 북경으로 가기 위해 부산을 떠난 건 1593년 7월 8일이었다. 심유경과 함께 요동에 들어온, 조선왕조실록에 소서비(小西飛)로 기록되어 있는 나이토 조안에게 북경으로 들어가는 조선 사신들을 협박하기 위해 요동에 자리 잡고 있던 송응창이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풍신수길의 항복문서를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나이토 조안의 거짓 정체가 탄로 날 것을 우려한 심유경이 제포에 있는 소서행장에게 사람을 보냈고 소서행장은 풍신수길의 항복문서를 위조한 후 그 문서를 12명의 보호대와 함께 다시 요동에 보냈다. 위조 항복문서가 요동에 도착한 1594년 2월엔 그러나 그 문서를 검사할 송응창은 거기 없었다.
일본의 쇼군도 아니고 관백에 불과한 풍신수길을 왕으로 책봉하여 명나라와 조공무역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한 후 일본의 숙원인 감합무역을 재개하여 동쪽을 안정시키겠다는 계획에는 서로 동의하는 병부상서 석성과 병부우시랑 송응창이었다. 그런데 청화백자(靑華白磁)를 내세운 절강성 상방을 위해 움직인 송응창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1593년에 일어난 진주성 전투와 청화백자에 담아 아산에서 수출한 시즈오카 일본 차(茶)가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일본에게 통상재개를 허락해 주는 게 목적이 아니라 조선에서의 전쟁을 조속히 끝내는 것이 목적인 석성이었다. 조선에서의 전쟁이 빨리 끝나야 이제 안정 궤도에 들어선 일조편법과 은본위체제를 지킬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일조편법과 이에 따른 조세(租稅)의 금납화(金納化)로 실질적인 은본위제 화폐제도가 20년 넘게 시행되자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지킬 수 없게 된 농민들의 반란이 심각해져 가고 있었다. 조선의 강력한 고발로 일본군이 조선에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알게 된 황제에게 송응창이 책임을 지게 되었다. 병부상서 석성까지 날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 1593년 12월 송응창은 탄핵되어 파직되었다.
송응창 후임으로 새로 경략이 된 고양겸(顧養謙)은 당연히 봉공안에 반대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일본과의 강화회담에서 봉공안을 성사시키려 한 책임을 물어 심유경을 곤장 치겠다며 위협까지 했다. 위조된 풍신수길의 항복문서를 소지한 소서비가 이끄는 일본 사절단은 1594년 3월 16일(5.5) 북경으로 들어가 명 조정으로부터 항복사절단으로서의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항복의 반대급부로 원했던 가장 중요한 봉공(封貢)중 공(貢)에 해당하는 통상(通商) 재개(再開)는 허락되지 않고 있었다. 명나라 대신들도 얼굴을 모른다는 명나라의 황제 만력제를 만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고 결국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송응창은 고향으로 내려가 안착했다.
송응창이 파직되고 그가 주장했던 봉공안(封貢案)을 기반한 일본과의 강화조약에 강하게 반대하던 하북총독(薊遼保定總督) 고양겸(顧養謙)이 후임 경략(經略)이 된 데 힘입어 아산과 평택을 수출항으로 하는 일본 시즈오카 찻잎 수출을 막고자 했던 선조(宣祖)는 차(茶) 수출을 계속하려는 호서(湖西) 지방 사람들의 거센 저항을 받아야 했다. 송유진의 반란이었다. 송유진의 반란을 진압한 이후엔 그러나 이내 표변(豹變)해 버린 경략(經略) 고양겸의 어처구니없는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1594년 4월 23일(6.11) 고양겸은 자신의 수하인 참장(參將) 호택을 보내 일본의 풍신수길을 일본왕으로 책봉하고 일본의 감합무역을 재개해 달라는 주청(奏請)을 명 황제에게 올리라고 선조에게 강요했다.
고양겸은 강소성 양주(楊州)가 고향인, 정요(定窯) 백자로 유명한 곡양현을 다스리던 보정(保定 Baoding) 총독이었다. 청화백자(靑華白磁)의 가치를 금세 알아차렸다. 당시 조선은 화약 사용에 따른 전염병 창궐로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고 있었다. 왕실을 빼고 이산화황 가스에 처음 노출된 조선 사람들은 천연두와 홍역과 매독에 쓰러졌고 산천은 산성비에 죽어갔다. 선조는 그때 그런 나라의 임금이었다. 주청(奏請) 하지 않으면 군사를 압록강 이북으로 물려 압록강을 경계로 지키기만 할 뿐 조선의 일은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거라는 참장(參將) 호택(胡澤)의 협박은 이제 선조에게는 폐부를 찌르며 박히는 비수였다.
澤曰 俺見朝鮮人餓死殆盡 歸報于顧爺 顧爺轉稟石爺 題請金 復糧二萬二千七百石 欽賜朝鮮 以委國王處置矣…若使經略 早斷貴國之事 前年八 九月 必已結局矣. 顧爺 最剛且明 貴國之事 盡力措置. 委遣俺 與國王相議 使之上本 以請封貢. 貴國若從所言則已 不然將盡撤川兵 限鴨綠爲守 東事不復顧矣. 前日見諸宰臣 言之已悉 且送文書二道 未審啓知否 【此乃顧養謙請封倭題奏】 호택(胡澤)이 말하기를, 제가 조선 사람들이 거의 다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돌아가서 고야(顧爺)께 보고했더니, 고야(고양겸)께서 석야(石爺)께 품달하였고 석야(병부상서 석성)께서는 금주·복주 지방의 양식 2만 2천7백 석을 조선에 흠사(欽賜)하여 국왕에게 맡겨 조처하도록 하자고 제청(題請)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송 경략이 일찍 귀국의 일을 결단하였더라면 지난해 89월에 이미 끝을 맺었을 것입니다. 우리 고야(고양겸)는 매우 강직하고 명석한 분으로 귀국의 일에 대해 힘을 다하여 조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위임해 보내어 국왕(國王)과 서로 의논해서 주본을 올려 봉공을 청하도록 한 것입니다. 귀국이 말한 바대로 따른다면 그만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천병(川兵)을 모두 철수해다가 압록강을 경계로 하여 지키면서 조선의 일은 다시 돌아보지 않을 것임을 전일 여러 재신(宰臣)을 만나 이미 다 말하였고 또 두 통의 문서도 보냈는데, 아뢰어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바로 고양겸이 왜를 봉공해 주도록 제주(題奏)하기를 청한 것이다.】 - 선조실록 51권. 선조 27년(1594) 5월 11일 무자
아산(牙山)과 평택을 수출항으로 하는 일본 시즈오카 차(茶) 무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허용하라는 압력이었고 그것은 곧 봉공안(封貢案)에서 주장하는 일본과의 통상 재개와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니 이참에 황제에게 일본의 봉공을 허락해 달라고 주청 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선조(宣祖)는 이미 3월부터 경략(經略) 고양겸으로부터 세자 광해군에게 양위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송유진의 반란을 진압하고 아산과 평택을 봉쇄한 조치 때문에 받는 보복이었다. 세자 광해군은 이미 명나라 조정의 지시(明旨)로 3월부터 호서 지역의 홍주에 머물며 영파에서 보낸 청화백자(靑華白磁)를 인수해 아산과 평택으로 보내며 포구 봉쇄를 해제하고 있었다. 2품 이상의 대신들은 선위(禪位)하겠다는 선조의 뜻을 거두어 달라는 집단 읍소를 하고 있었다. 선조실록 1594년의 4월 5일(5.24) 기사는 슬픈 선조와 조선 대신들의 모습이 가감 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1593년 당시 경략 송응창에 의해 아산과 평택을 통해 이루어진 일본 시즈오카 차(茶) 수출은 청화백자(靑華白磁)로 인해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수익을 올렸고 1594년 다시 그 엄청난 이득을 얻기 위해 관계된 세력들이 반대하는 선조를 제거(除去)하기 위해 거칠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도 주청(奏請)은 하지 말았어야 했을 일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내 땅을 범(犯) 한 원수(怨讐)에게 결코 해 주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했다. 후일 그 주문(奏文)을 제술(製述)한 영의정 유성룡이 조선의 진회(秦檜) 소리를 들으며 탄핵된 연유였다. 당시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으로 의논에 참여한 종 6품 문신 정엽(鄭曄)은 이점을 뼈아프게 임금에게 지적했다.
曄曰 前見奏草 已具於箚辭中矣. 今三司主大義 廟堂主利害 以利害言之 臣未知大有所益. 藏頭之辭 決不可爲也. 上謂曄曰 今將以日望天朝爲我國征討 而今不可復請. 其後沈惟敬封貢之說 亦不得成. 小邦間於其中 將爲糜爛 悶迫之狀 爲奏如何 曄曰 領相所啓 雖與前奏似異 畢竟未免同歸於請封. 若不及封貢語 則慮胡不持去 恐刼於胡 爲此苟且之事. 若置此議 仗大義絶封貢 有何不可 廟堂雖以事勢悶迫 爲如此事 自古主和者 誰不以事勢之如此爲辭 頃日箚子時 以秘密出入 使國人不得知 臣甚咄咄. 國雖亡 義不可亡. 臣恐幷與大義而失之也. 정엽(鄭曄)이 아뢰기를, 전일에 주문의 초본을 보니, 그 내용이 이미 차부의 말 중에 들어 있었습니다. 지금 삼사(三司)는 대의를 주장하고 묘당(廟堂)은 이해를 주장하는데, 이해로써 말하더라도 신은 과연 얼마나 소득이 있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서두를 숨기는 말은 결코 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상이 정엽에게 이르기를, 이번에 날마다 명조가 우리나라를 위해 정벌해 주길 바랐으나 이제는 다시 청할 수도 없고, 그 뒤에 심유경(沈惟敬)의 봉공설도 이루어지지 않아 우리가 그 중간에 끼어 장차 여지없이 부서지게 되었다는 민박(悶迫)한 상황으로 상주(上奏)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정엽이 아뢰기를, 영상이 아뢴 것이 비록 전 주본과 다른 듯하지만 결국은 똑같이 봉공을 청하는 결과로 됨을 면치 못합니다. 만약 봉공에 대한 말을 하지 않으면 호(胡澤)가 가져가지 않을까 염려하여 호(胡澤)에게 겁을 먹은 나머지 이와 같은 구차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논은 그만두고 대의를 들어 봉공을 거절한다고 하더라도 무슨 안 될 것이 있겠습니까. 묘당이 비록 사세가 민박하다 하여 이런 일을 한다고는 하나 예로부터 화친을 주장하는 자로 그 누가 사세가 이렇다는 것으로 말하지 않은 자가 있었습니까. 지난번 차자를 올릴 때에도 비밀히 드나들게 하여 나라 사람 모르게 하였으므로 신은 매우 탄식하였습니다. 나라가 비록 망하더라도 대의를 잃어서는 안 되는데 신은 대의마저 잃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 선조실록 52권 선조 27년(1594) 6월 18일 을축
2대 경략(經略) 고양겸이 불과 5개월 만에 파직되고 병부우시랑 손광(孫鑛)이 3대 경략으로 부임해 오는 그 공백기를 이용해 아산과 평택을 통해 청화백자에 담긴 시즈오카의 차(茶)들이 다시 대량으로 수출되었다. 송응창과 고양겸은 일본군이 조선에서 모두 철수했고 일부 소수의 병력만이 경상도 남해안에 남아 명 황제의 봉공 허락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본국 정부에 허위 보고한 죄로 탄핵되어 차례로 파직되었다. 그러나 파직된 두 사람은 비참한 노후를 보내지는 않았다. 그 이후 전 세계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 청화백자 덕분이었다. 청화백자를 백 년 만에 부활시켜 안휘상방(安徽商帮)을 만들어 낸 왕직(王直)이 참수된 후 처음 합법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된 휘상(徽商)들과 청자(靑瓷) 이후 청화백자 수출로 역사의 전면에 다시 나서게 된 진상(晋商)의 영원한 맞수 저장(浙江) 상인들은 그들의 은공을 잊지 않았다.
명나라 조정은 그 후에도 일본과의 통상(通商)을 재개하는 문제로 계속 첨예하게 분열되어 있었다. 호부와 병부 같은 행정부는 강력하게 일본과의 통상 재개를 주장했고 과도관(科道官)이라 불렸던 오늘날의 정보부와 검찰에 해당하는 감찰부(監察部)는 일본과의 통상 재개는 불가하다고 팽팽히 대립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실크로드와 마린로드의 싸움이었다. 진상방(晋商帮)에게 늘 밀려왔던 마린로드 상방이 실크로드 상방에 호각을 이룰 정도로 세를 얻은 건 송나라 청자(靑瓷) 이후 세력을 상실했던 강소(江蘇)와 저장상방(浙江商帮)에 안휘상방과 조상(潮商)이라 불렸던 푸젠(福建) 상방이라는 신진 세력들의 가세때문이었다. 경덕진(景德鎭)의 청화백자 덕이었다. 1594년 7월에 부임한 3대 경략 손광(孫鑛)도 송응창처럼 절강성 사람이었다. 항주 사람이었던 송응창과 달리 손광은 아예 청자의 고향인 월주(越州)의 여요(余姚) 출신이었다. 여요와 영파(寧波)는 이웃한 고장이었다.
영파(寧波)는 조선으로 청화백자를 수출하는 항구였다. 일본과의 통상 재개를 놓고 벌인 격렬한 대립을 빙자해 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4년 동안이나 강화회담 한답시고 늘린 건 휴전을 이용해 일본 찻잎을 더 많이 청화백자에 담아 조선을 통해 수출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시즈오카의 찻잎이 아니면 해양 무역을 할 이유가 없었고 해양 무역이 아니면 도자기 개발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삼년이나 걸린 내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자금과 조선과 일본까지 동원해 해 준 마린로드 상방에게 화약과 차(茶)를 유럽에 나가 있는 푸젠(福建) 출신 마린로드 상방 소속 상인인 푸거(Fugger)에게 충분히 제공하겠다고 영락제(永樂帝)가 약속해서 시작된 일이었다. 비밀리에 푸거(Fugger)에게 화약과 차(茶)를 갖다주기 위해 추진된 정화 함대의 7차례에 걸친 하서양(下西洋)으로 이미 모든 중간 기착지(寄着地)도 완비된 개척된 항로였다. 투르크와 유럽이 청화백자에 열광하고 있었다. 지금의 도장용(塗裝用) 페인트 역할을 한 회청(回靑, 코발트) 때문에 염분(鹽分)까지 차단하는 청화백자에 1589년 부르봉 왕조를 열고 프랑스를 유럽 최강국으로 만들던 앙리 4세는 넋을 빼앗기고 있었다. 청화백자의 코발트블루는 브루봉 왕가의 문장색이 되었다. 팔아먹을 시간이 더 필요했다.
조부(祖父)인 영락제의 정난(靖難) 협조에 대한 보상(報償)으로 시작된 청화백자의 대량 생산은 결국 손자인 선덕제때 이뤄진 마지막 정화함대의 항해와 함께 중지되었다. 흑색화약을 변질 없이 바다를 통해 운반하기 위해 원나라때 개발된 청화백자는 그래서 선덕제(宣德帝)가 죽은 후 영락대전(永樂大典)의 발간이유처럼 비밀이 되어 파묻혔다. 청화백자를 만들던 경덕진의 모든 도요지(陶窯址)는 1435년 선덕제가 죽자 폐쇄되었다. 산화코발트는 전량 수입해 사용했는데 너무 비쌌다. 그렇게 선덕(宣德) 연간에 생산되어 잔존하던 것들을 황실에서만 사용하던 청화백자가 세상에 다시 나온 건 역시 화약 때문이었다. 1545년과 1546년에 포토시와 사카테카스에서 연이어 은광이 발견되면서 엄청난 은괴를 확보한 스페인은 제대로 만든 화약이 그것도 많이 필요했다. 문제는 중국에서 사 오는 화약이 인도양과 대서양을 항해하는 동안 변질되어 폭발력이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중국 화약이 질산칼륨이 아닌 주로 질산나트륨으로 이뤄진 초석(硝石)이어서 생긴 문제였다. 1565년 항해 기간을 대폭 단축하는 태평양 귀환 항로가 우르다네타에 의해 필사적으로 개척된 연유였고 그 항로에 위치했던 대만과 일본이 스페인 사람들의 시야에 조준되기 시작한 연유였다.
경덕진(景德鎭)의 남쪽으로 십오 리 떨어진 단산(團山)에서 토청(土靑)이라 불린 휘코발트 Cobaltite(CoAsS) 광산이 왕직과 그의 동향인 황산(黃山)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산소를 공급하면서 원광석을 계속 가열하면 비소(As)와 황(S)이 가스로 제거되는 원리를 이용해 산화코발트(Co2O3)를 얻는 공정이 확립되었다. 화감청(花紺靑)이라 불린 산화코발트를 안료(顔料)로 사용하여 고령토로 빚은 백자에 그림을 그린 후 장석 유약통에 담갔다 꺼낸 후 1,350도의 고온으로 환원염 가마에서 구워내면 장석유약이 만들어내는 피막 외에 별도의 피막이 또 덮혀진 백자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국산화된 화청(花靑)은 비용 걱정 없이 양껏 사용되었고 고령토 흙 안에 있던 알루미늄 성분이 안료로 묻힌 산화코발트와 결합하여 별도의 피막을 만들어내며 이중으로 장석유약을 시유한 효과를 내고 있었다. 습기뿐 아니라 염기(鹽氣) 까지도 막아내는 새로운 자기가 만들어졌다. 청화백자였다. 청화백자에 담긴 화약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지금 다시 황산시(黃山市)로 부르는 그곳을 그때 휘주(徽州)라 한 연유였다. 안칭(安慶)과 함께 안휘성이 생겨난 연유였다. 1571년 펠리페 2세가 필리핀의 루손섬을 점령해 마닐라에 요새를 건설하고 중국과 본격적인 무역을 강력하개 추진한 연유였다.
화약과 차(茶)를 담아 그들을 숨겨준 경덕진의 청화백자가 중국의 대표 무역 상품으로 자리 잡은 것은 마닐라 갈레온으로 불려진 태평양 무역 때문이었다. 아메리카에서 필리핀으로 연결되는 항로는 마젤란에 의해 1522년에 이미 개척되었으나 필리핀 마닐라에서 아메리카로 돌아오는 항로는 개척되지 못하고 있었다. 1565년 드디어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수도사 안드레스 우르다네타(Urdaneta)에 의해 북위 38도 지역에 늘 부는 편서풍을 이용해 캘리포니아 멘도시노곶에 돌아오는 항로가 개척되었다. 오늘날 자동차(car)라는 이름을 있게 한 카라벨(caravel)이라 불리던 포르투갈이 유럽에 소개한 선박의 시대는 가고 유럽의 대제국 스페인이 동양의 대제국인 중국과의 본격적인 무역을 위해 새로 개조한 엄청난 크기의 갈레온이 태평양 항로에 도입되었다. 배수량이 2천 톤까지 이른 전열함의 원조였다.
멕시코 아카풀코에서 사카테카스(Zacatecas)와 포토시(Potosi)에서 캐낸 은광석으로 만든 은괴(銀塊)를 한 척당 평균 1천 톤씩 싣고 북위 30도 이남 지역에서 늘 부는 북동 무역풍을 이용해 멕시코 아카풀코에서 필리핀 마닐라로 들어온 스페인 갈레온들은 푸젠(福建) 상인들과 계약을 맺은 후 가져온 은괴를 넘겼다. 아카풀코로 귀환하기 위해 마닐라 북동쪽 태평양으로 항해해야 했던 갈레온들은 대만(臺灣) 섬의 대남(臺南)에서 중국 월항(月港)에서 푸젠상(福建商)들이 청화백자에 담아 온 화약과 차(茶)를 넘겨받아 실은 후 일본의 후쿠시마 앞 먼바다까지 올라가 편서풍을 이용해 돌아갔다. 대만의 최고 도시가 대북(臺北)이 아닌 대남(臺南)이었던 연유였다. 광주 마카오에서 차(茶)를 가져간 최초의 유럽인, 포르투갈 인들은 차를 차라고 발음하지만 차를 다라고 발음하는 푸젠 인들에게서 차(茶)를 받아간 스페인 사람들은 차를 Thai, 줄여서 Ti라고 발음했다. 쏟아지는 주문에 물량을 맞추느라 비소가 미처 다 없어지지도 않은 코발트를 안료로 써서 빽빽이 그림이 그려진 청화백자가 구워졌다. 데카르트와 나폴레옹은 비소(砒素 As)로 암살된 게 아니었다. 그저 왕실과 유력 귀족 가문에서만 쓰는 청화백자에 담긴 티(tea)를 오랫동안 마셨을 뿐이었다.
1595년에도 강화회담 중에 역시 일본 시즈오카의 차(茶)가 영파에서 보내지고 충청도에서 받은 청화백자에 실려 아산과 평택을 통해 수출되었다. 1595년 6월 명나라 조정에서 풍신수길의 책봉(冊封)을 위한 사절단의 정사와 부사가 결정되어 북경을 출발했다. 9월 명나라 책봉사절단 부사로 임명된 양방향이 부산에 도착했다. 그 해 12월 책봉 사절단 정사인 이종성도 부산에 도착했다. 1596년 4월 일본 시즈오카의 차가 수출되기 위해 부산포에 들어왔을 때 이를 본 명나라 정사 이종성이 본국으로 도망쳐 버렸다. 명나라 책봉 사절단 정사 이종성이 사절단에서 이탈하여 본국으로 도망쳤다는 첩보는 조선 조정의 시즈오카 차 수출사업에 대한 중지 조치로 이어졌다. 결국 시즈오카 차 수출 사업에 생계를 매고 있던 조선 사람들의 반란이 터졌다. 이몽학의 난이었다. 1593년의 송유진의 난과는 규모가 달랐다. 이미 4년째 이어진 어마어마한 규모의 세계적 차원의 차 수출 사업이었다. 서산으로만 은밀하게 수입되던 청화백자는 4년째 되던 1596년엔 부여에 하역되어 아산으로 수송되고 있었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이 사업에 돈을 내고 참여하고 있었고 그 사업에 품을 팔아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돈을 댄 사람들과 차 가공 및 역참을 맡은 사찰의 승려는 물론 품을 팔던 가난한 농민까지 참여한 반란이었다. 그들은 조선 조정의 처사가 살게는 못 해 줄망정 벌어먹는 밥까지 걷어차는 만행이라고 생각했다. 충청병사 이시언이 이끄는 토벌군은 번번이 패퇴했다.
忠淸道巡按御史李時發書狀 定山縣監鄭天卿牒呈內 本月初七日 僧俗軍人無慮千餘名 鴻山地雙防築聚屯 直向鴻山官 縣監捉出 軍法施爲 印信責納 軍器搜出. 至於吹角 旗纛出持 行軍于林川 亦爲突入 郡守捉出 結項捧條目 捉入賊中云云. 聞見極爲駭愕 虛實間隨所報馳啓 一邊近官砲 殺手等調聚 勦捕計料云云. 충청도 순안 어사(忠淸道巡按御史) 이시발(李時發)이 보낸 서장(書狀)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정산 현감(定山縣監) 정천경(鄭天卿)의 첩정(牒呈) 내에 이달 7일 승려(僧侶)와 속인(俗人) 및 군사 등 무려 1천여 명이 홍산(鴻山) 땅 쌍방축(雙防築)에 모여 둔치 하고서 바로 홍산 고을로 가서 현감을 끌어내다 군법(軍法)을 시행하고 인신(印信)을 가져와 바치도록 했으며 군기(軍器)를 수색해 냈다. - 선조실록 77권, 선조 29년(1596) 7월 9일 갑술
도원수 권율이 전라도 병력까지 이끌고 이산까지 올라왔으나 수천 명으로 이뤄진 반란군의 군세가 워낙 커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홍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이몽학이 부하들에게 목이 잘리며 난은 끝났다. 관아(官衙)의 징세와 징발, 명나라 군대와 일본군의 횡포로 인해 일어난 반란이라고 상식적으로 얼버무려지는 임진왜란 강화회담 기간 중에 일어난 호서지방의 두 차례 반란은 시즈오카 차 수출과 관련된 반란이었고 이몽학의 난은 청화백자라는 향후 수백 년간 전 세계를 뒤흔드는 사업과 연관되어 일어난 사건이었다. 추국(推鞫)을 받고 승복한 뒤 처형된 자가 33명, 외방에서 처형된 자가 백여 명에 이르러 연좌율도 적용할 수 없었다. 김덕령과 최담령, 홍계남 등이 이몽학의 문서 속에서 이름이 나온 의병장이었다. 살아남은 한현이 세명과는 공모했다 하고 곽재우는 심복이라 대답하자 엄청난 고문이 시작되었다. 결국 김덕령과 최담령이 추국(推鞫)중 매 맞아 죽었다. 선조는 이제 더 이상 세자와 의병과 바닷길을 책임진 이순신을 믿지 않았다.
4년 동안의 강화회담 기간 동안 발생한 여러 문제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일본이 백자에 대해, 청화백자에 대해 알았다는 사실이었다. 사천 왜성과 순천 왜성, 울산학성을 쌓은 연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