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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맥파인더 Mar 12. 2024

칠천량 해전의 진실(중)- 거북선의 진실 14

배설에 대한 변명

 上曰 此豈獨人謀之不臧? 天也奈何? 命元曰 若遣將則誰可爲者? 恒福曰 今日之事, 惟在是而已. 上曰 元均則初不欲往 而聞南以恭之言 裵楔亦曰 雖依軍律 我當獨死 軍卒豈可盡置之死地云云. 大槪凡事 當看勢爲之 固守要害 可也. 都元帥督促元均 致有此敗耳.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어찌 사람의 지혜만 잘못이겠는가. 천명이니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김명원이 아뢰기를, 장수를 보낸다면 누가 적임자가 되겠습니까? 하고, (병조판서) 이항복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할 일은 단지 적절한 인재 선발에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균은 처음부터 가려고 하지 않았으나 남이공의 말을 들으면 배설도 비록 군법에 의하여 나 홀로 죽음을 당할지언정 군졸들을 어떻게 사지에 들여보내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대체로 모든 일은 사세를 살펴보고 시행하되 요해처는 고수해야 옳은 것이다. 이번 일은 도원수가 원균을 독촉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패배가 있게 된 것이다. - 선조실록 90권, 선조 30년(1597) 7월 22일 신해


몸을 임금을 위해 바치고 공격해 온 적(敵)을 쳐서 치욕을 막아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은 이순신은 전쟁이 터진 그 해 1592년 임진년 5월 1일(6.10)부터 일기를 썼다. 임진왜란이 끝나기 직전 조선의 진회가 되어 삭탈관작(削奪官爵)된 후 낙향하여 그때부터 쓴 유성룡의 징비록과 달리 그날그날의 날씨가 함께 기재된 일기를 이순신은 죽기 이틀 전인 1598년 11월 17일(12.14)까지 썼다. 난중일기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 그의 일기는 그러나 난중일기가 아니다. 난중일기란 이름은 정조(正祖)의 명을 받은 윤행임과 유득공이 이순신의 친필 초고 일기 8권을 해독하여 편집할 때 편리상 붙인 것이다. 이순신은 임진년부터 무술년까지 연도별 간지를 따서 각 일기의 표지에 임진일기,  계사일기, 갑오일기, 을미일기, 병신일기, 정유일기, 무술일기라고 적어놓았다.


그중 시즈오카의 차(茶)가 담긴 청화백자가 아산과 평택을 통해 대량 수출되던 1595년의 을미일기는 초서(草書)로 쓴 친필 원고 자체가 없어졌다. 그리고 1만 4천 명의 조선 수군이 110척의 판옥선과 함께 궤멸(潰滅)된 칠천량 해전이 벌어졌던 1597년의 정유일기는 일정기간의 일기가 없는 상태로 같은 날짜의 일기가 두 개가 존재하는 등 의심할 바가 많은 두 권의 일기로 남아있다. 1597년 정유년 4월 1일(5.16)부터 10월 28일(12.6)까지 쓴 정유일기는 일기를 쓴 날짜의 간지 착오가 확인이 되고 있고 1597년 정유년 8월 5일(9.15)부터 1598년 무술년 1월 4일(2.9)까지 쓴 정유일기는 앞선 일기에도 쓰인 같은 사건을 더욱 상세하게 다시 쓴 것이 확인이 되고 있다고 초서체(草書體)로 쓰인 난중일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이순신의 종가(宗家)에서 난중일기 초고본(草稿本)과 함께 대대로 소장하고 있던 책이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였다. 18세기 이후 후손에 의해 필사(筆寫)된 것으로 보인다는 이 책에는 1693년 간행된 신경(申炅)의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의 초록(抄錄:필요한 부분만을 뽑아서 적은 기록)과 초서(草書)로 쓰인 이순신의 일기 중 일부를 골라 베껴 쓴 일기초(日記抄:난중일기에서 어느 부분만을 뽑아서 적은 기록)가 있었다. 이 중 일기초(日記抄)에는 이순신이 직접 쓴 초고본(草稿本)과 정조 때 발간된 전서본(全書本)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을미년(乙未年)의 일기 30일 치가 들어 있었다. 일기초(日記抄)중 을미년(1595) 5월 4일 맑음(晴)으로 시작되는 일기엔 요동(遼東)에 있는 고려 태조(太祖) 왕건의 후예인 왕울덕(王鬱德)이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는 아들(覓)의 편지를 보고 매우 놀라고 걱정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일본 찻잎을 차(茶)로 만들어 수출하는 것만이 고려의 살 길이라 판단한 고려의 충선왕이 원나라 황제인 무종으로부터 심양왕(瀋陽王)과 심왕(瀋王)으로 책봉(冊封)을 받아 부왕(父王) 충렬왕의 왕자로 몽골 혼혈이 아니었던 이복형 강양공의 아들인 연안군에게 그 심왕(瀋王)의 자리를 잇게 한 것은 심왕에게 다스리도록 한 봉지(封地), 즉 영토 때문이었다. 고려는 충선왕 자신의 몽골 혼혈 후손들로 왕위를 잇고 심양(瀋陽)을 도읍으로 한, 심왕(瀋王)이 다스리는 땅은 몽골의 피가 섞이지 않은 충렬왕의 후손들로 왕위를 잇게 한다는 계획이었다. 심(瀋)이란 지역명은 찻잎을 울릉도(鬱陵島)에서처럼 울창법(鬱鬯法)으로 즙을 내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는데 북방 대륙으로 고려 차(茶)를 수출하기 위해서는 고려가 반드시 확보해야 할 요처(要處)였다.


위화도 회군이란 비극으로 끝난 요동정벌군의 출정은 이런 심왕(瀋王)의 땅을 주원장이 원나라의 땅이었기에 당연히 명나라가 인수해야 한다며 철령위 설치를 고집해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데 2백 년이나 지나 왜란에 시달리는 지금, 뜬금없이 그곳의 고려 충렬왕 후손이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치려고 한다는 소식을 이멱(李覓)이 보내온 것이었다. 이건 조선 왕실의 금기(禁忌)를 거론하는 것이었다. 선조가 이런 감추고 싶은 역사가 담겨 있는 종계변무(宗系辨誣)의 부당함을 바로잡았다고 종묘, 사직, 문묘에 직접 고하며 종결시킨 게 1589년이었다. 아산에 있는 이멱이 요동의 거병(擧兵) 정보를 알리고 있었고 이순신은 이를 을미년(1595)에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1596년 9월 2일(10.22) 오사카 회담에서 명나라의 심유경과 스페인의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Dasmarinas)는 양국을 대표해 종전안에 합의했다. 1. 스페인은 명나라의 조공동맹체제를 인정한다. 2. 명나라는 일본 차(茶)에 대한 스페인의 권리를 인정한다. 3. 스페인은 일본의 조선 침략을 지지하지 않는다. 4. 명나라는 광주와 영파에 해상무역 감독기구를 재개한다. 였다. 스페인이 명나라의 아시아 지배체제를 위협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고 명나라는 그 대가로 일본 차(茶)에 대한 봉쇄를 스페인에 대해서만 해제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일본의 조선 진출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에 대한 대가로 마닐라 갈레온의 보호를 위해 광주와 영파에 해상감시기구(함대)를 설치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모든 거래는 은괴로 한다는 대원칙은 확고했다. 임진전쟁으로 명나라에서의 일조편법에 의한 은본위체제는 한층 더 확고부동해졌고 스페인 마닐라 갈레온의 항로와 거래는 확실하게 안전을 보장받았다. 복건상인들은 청화백자를 그리고 절강상인들은 초석을 팔았다. 광동항이야 원래부터 유럽인들에 개방되어 있던 항구였다. 이번 오사카 조약의 핵심은 영파항의 개방이었다. 1599년 영파에 새로 설치된 해상감시기구(함대)로 절강상인들은 주산군도와 제주도, 대마도, 가나자와(金澤)로 연결되는 항로의 안전을 확보했다. 푸젠상인과 차(茶)를 거래해 온 스페인에 의해서만 1597년부터 유럽 각지에 팔리기 시작한 시즈오카 차(茶) 때문에 포르투갈을 제외한 모든 유럽인들은 Cha를 Tha(다)라고 발음하는 복건 상인들을 따라 Thai, Te, Ti, Tea라고 차(茶)를 발음하게 되었다.


영파에서 가나자와까지 가는 항로는 대포로 무장한 150척의 전함에 승선(乘船) 한 만오천 명의 조선 수군이 지키고 있는 바다를 지나가야 했다. 절강상인들은 명나라 수군보다 더 크고 튼튼한 배를 명나라에 뒤지지 않는 대포로 무장시켜 함포 사격전으로 해상전투를 벌이는 조선 수군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오사카 회담이 끝나고 합의문이 비준되면 이제 그 바다는 절강수군이 지배하는 바다여야 했다. 화약의 원료가 되는 초석(硝石: 焰硝: saltpeter)을 하루라도 빨리 많이 가져가야 하는 스페인으로서는 초석을 대가로 더 주겠다는 절강상인들의 요청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어차피 2년 치 시즈오카 찻잎을 모두 싣고 가야 했기에 투입 가능한 갈레온을 모두 끌어 모아 대마도로 보낼 계획이었다. 배수량이 800톤이 넘는 갈레온만 최소 12척이 동원된 함대였다. 절강상인들이 견본(見本)으로 지원한 화약으로 충분히 무장된 갈레온의 대포들이었다. 품질이 최고라고 정평이 난 명나라 화약이었다. 이순신은 진즉에 제거되었고 게다가 원균은 권율에게 끌려가 곤장까지 맞았다. 14,000명이 110척의 판옥전선과 2640문의 화포와 함께 절멸되었다. 조선 수군은 갑자기 나타난 갈레온 함대에 쫓겨 제대로 된 전투 한번 못하고 도망 다니다 일부는 표류되어 울산에서 격파당하고 나머지는 부산포 외해에서 전멸당하는 치욕을 당했다. 경상우수사에게 배속된 판옥선 12척을 이끌고 뒷일을 맡긴 원균의 뜻에 따라 전선을 이탈한 배설은 유일하게 살아남아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영을 깨끗이 정리한 후 다시 복귀한 이순신 통제사에게 함대를 인계했다. 배설은 끝내 칠천량 해전의 진상을 제대로 밝히지도 못한 채 주섬거리다 그 죄로 권율에 의해 적전도주죄(敵前逃走罪)로 목이 베여 죽었다.


조선 수군이 사라진 1597년 7월 15일(8.27) 이후의 남해 바다에 그래서 제일 먼저 나타난 건 3,200명으로 꾸려진 절강(浙江) 수군이었다. 유격(遊擊) 계금(季金)이 이끄는 절강 수군은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남원으로 상륙해 함양, 합천, 김천, 추풍령, 옥천, 보은, 청주, 아산, 홍성, 보령 순으로 진군하면서 시즈오카 차(茶)의 내륙 교역로와 청화백자 하역항으로 사용하기 위해 설치했던 중요 시설들을 파괴해 다시 사용하지 못하도록 모든 흔적을 지웠다. 일부는 가나자와로 초석을 보내기 위해 대마도로 항해했다. 이후 일본 좌군이 1597년 8월 16일(9.26) 남원을 점령하자 명 조정으로부터 참전을 명령받아 요동에서부터 내려온 부총관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에 합류해 그의 지휘를 받았다. 총 11,000명의 절강성, 복건성, 광동성 출신 병사들로 이뤄진 명나라 수군은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연합군을 이루어 일본 수군과 격돌했다.


남해 바다를 전쟁터로 삼은 명나라 장수중 전사한 이는 등자룡과 계금뿐인데 등자룡(鄧子龍)은 1558년 무과 진사(進士) 급제자로 경덕진 인근 이춘시(宜春市) 출신이었고 계금(季金)은 1568년 무과 진사 급제자로 절강성 태주시(台州市) 출신이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남의 나라 바다에서 남의 나라를 지켜주려다 죽은 게 아니었다. 명나라 무과 진사급제자들로서 명나라에 엄청난 은괴를 가져다주는 경덕진(景德鎭)의 청화백자와 영파의 초석 무역로를 지키다가 죽은 것이었다. 부장(副將) 등자룡이 자신들의 배보다 우수하다고 알려진 조선의 판옥전선을 선물 받아 그 배로 노량에서 치열하게 전투하다 전사한 건 청화백자의 원료인 산화코발트와 고령토를 일본으로 가져가려는 순천의 고니시와 사천의 시마즈를 막기 위해서였다. 진린은 그들과 달리 무과 진사출신도 아니었고 청화백자와는 아무 관련도 없었다. 1598년 11월 19일(12.16) 벌어진 노량해전에 참전 후 1598년 12월 죽었다는 계금은 등자룡과는 달리 1급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책훈되었고 1643년(명 숭정 16)에는 충무(忠武)라는 시호까지 받았다. 계금이 등자룡과는 달리 다른 특별한 일을 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충남 보령에는 그의 공덕비가 남아 있다.


 上曰 固守閑山 以爲虎豹之勢可也 而必令督出 以致此敗. 非人之所爲 天實爲之. 言之無益 豈可置之無可奈何 而不爲之所乎 當收拾餘船 防守於兩湖之界.  상이 이르기를, 한산을 고수하여 호표(虎豹)가 버티고 있는 듯한 형세를 만들었어야 했는데도 반드시 출병을 독촉하여 이와 같은 패배를 초래하게 하였으니 이는 사람이 한 일이 아니고 실로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말해도 소용이 없지만 어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방치한 채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은 배만이라도 수습하여 양호(兩湖) 지방을 방수(防守) 해야 한다. - 선조실록 90권, 선조 30년(1597) 7월 22일 신해


명량해전이 벌어지기 직전 탈영하여 전쟁이 끝난 1599년 선산(지금의 구미)에서 권율 도원수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 목이 잘린 경상우도수군절도사 배설(裵楔)은 1605년(선조 30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증직(贈職)되었다. 그 전해인 1604년 이순신과 권율, 원균에게 1등 공신이 수여된, 왜적을 정벌한 제장(諸將)들과 군량(軍糧)을 주청 하러 간 사신들 중 총 18명이 선정된 선무공신 발표가 있었으나 여기에서 빠진 전투에서 공을 세우거나 군수품 보급에 기여한 인물들에게 주어진 게 선무원종공신이었다. 참수되고 11년 뒤인 1610년(광해군 2년) 배설은 신원(伸寃)되어 종 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판서로 추증(追贈)되었다. 사후 추증은 1873년(고종 10년)에 다시 이루어져 정 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에 가증(加贈)되었다. 임진전쟁이 끝나고 적전도주죄(敵前逃走罪)라는 불명예스러운 죄목으로 참형을 당한 죄인에게 사후에 무공을 인정해 선무원종공신녹권을 수여하고 두 번이나 벼슬이 추존된 기이한 일이 274년 동안 잊히지 않고 벌어진 연유는 배설에 대한 애닳음이었다.


1597년 7월 15일 밤 이미 덫에 걸려 헤어 나올 길 없는 타격을 입은 조선 수군의 지휘부회의가 열렸을 때 원균은 한산도로 퇴각하자는 배설의 의견을 물리쳤다. 이제 마지막 희망은 한산도에 비축한 물자와 보전시킨 백성들에 달려있었고 그것들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곳으로 가는 길목을 막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대는 우리의 뜻을 살펴 행하라. 경상우수사 배설이 선발된 것은 그의 휘하 8척 판옥전선만이 한산도 통제영까지 움직일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잠겨가는 전선을 끌고 한산도로 가는 길목, 칠천량에 옥쇄(玉碎)를 각오한 원균이 그의 부하들과 함께 한산도가 어디인지 모르는 스페인 갈레온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한산도로 돌아온 배설은 백성들을 피난시키고 전선마다 가득가득 군량미와 화포와 화약을 싣고 실을 수 없는 나머지는 불태웠다. 통제영에 남아 있던 전라우수사 김억추와 함께 진에 파견되어 나가 있던 판옥선 4척을 회수해 12척의 판옥전선으로 회룡포로 후퇴했다. 원균이 옥쇄(玉碎) 작전으로 막아선 칠천량엔 아직도 연기가 피어올랐다. 원균은 도망가지 않았다. 원균은 한산도를 지키려 한산도로 가지 않았다. 선조가 두고두고 그를 애달퍼 한 까닭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로 돌아온 이순신은 배설이 두려워 하는 모습을 그의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7월 22일(9.3) 辛丑. 晴. 아침에 경상 수사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元均)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했다.

8월 12일(9.22) 庚午 晴. 그들에게서 경상 수사 배설이 겁을 내는 꼴을 들으니 더욱 한탄스러움을 이길 수 없었다.

8월 19일(9.29) 丁丑 晴. 여러 장수들이 교서(敎書:임금의 명령서)에 숙배를 하는 데 경상수사 배설은 받들어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너무도 놀랍다.

8월 27일(10.7) 乙酉 晴. 경상 우수사 배설이 와서 보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찌 피하려고만 하시오라고 말하였다.

8월 28일(10.8) 丙戌 晴. 새벽 여섯 시쯤에 적선 여덟 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우수사(배설)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8월 30일(10.10) 戊子 晴. 저녁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소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 좀 해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뭍으로 내려 몸조리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9월 2일(10.12) 庚寅 晴. 오늘 새벽에 경상 수사 배설이 도망쳤다.


이순신이 선조가 급파한 의금부 도사에게 잡혀 한양으로 압송되기 전 원균에게 인계한 한산도 삼도수군통제영 비축물자는 군량미 9,914석, 화약 4,000근(2400kg. 1근=0.6kg), 함재포 제외 여분 총통 300문이었다. 그리고 판옥전선은 134척이었다.


조선을 개국하며 이성계가 주원장에게 갖다바친,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인 충선왕이 고려의 미래를 위해 심왕으로 책봉되며 확보했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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