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감(Lingam)과 미로(Labyrinth)의 역할
遊擊曰 上年蔚山之役也 至十二月二十三日 騎兵先到 攻破蔚山外柵 翌日俺領步兵 共破內木柵三重 至石窟下. 城堅攻之未易下 欲以積草而焚之 人持一束而上 銃丸如雨 近者輒倒 無敢撲城者. 欲以大碗撞破 而城高勢仰 不得施技. 명나라 진인(陳寅) 유격(遊擊)이 말했다. 지난해 울산 싸움에서는 12월 23일 기병(騎兵)이 먼저 도착하여 울산성의 외부 방책을 격파하였고, 다음날 제가 보병을 거느리고 안에 있는 목책 세 겹을 격파하여 석굴(石窟) 아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성이 견고하여 공격해도 쉽게 함락(陷落)시키지 못하였으므로 풀을 쌓아 태우려고 사람마다 한 단씩을 가지고 오르는데 총탄이 비처럼 쏟아져 가까이 가는 자마다 총을 맞고 넘어졌기 때문에 감히 성(城)에 다가가는 자가 없었습니다. 대포(大砲)로 격파하려고 하였으나 성이 높아 쳐다보 아야 하는 형세라서 기예를 발휘할 수가 없었습니다. - 선조실록 96권, 선조 31년(1598) 1월 20일 병오
1592년 4월 13일(5.23), 부산과 다대포에 상륙해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군이 사실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경상좌도의 이른바 삼포(三浦)로 불린 제포(내이포:진해), 염포(울산), 부산포 지역을 장악해 통치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일본의 의도는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의 기동(機動)을 보면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4월 13일에 부산과 다대포(多大浦)에 상륙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1군은 부산진성과 다대진성을 함락시킨 후 4월 15일 동래성마저 함락시켜 부산포와 주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후 조령을 향해 북상했다. 고니시의 1군이 확보한 부산포를 통해 4월 18일 조선에 들어온 가토 기요마사의 2군은 곧장 울산(염포) 확보를 위해 나아갔고 4월 19일 언양(울산)을 함락시킨 후 경주를 거쳐 조령으로 진격했다.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의 3군이 다대포를 거쳐 서낙동강을 거슬러 김해 죽도에 상륙한 건 4월 19일이었다. 구로다 군(軍)은 김해읍성을 함락시킨 후 목표였던 합포(마산)를 점령했다. 이후 함안, 합천, 성주로 나가 추풍령을 넘어 한양으로 진격했다. 조선왕 선조를 생포해 전쟁을 단기에 끝내기 위해 일본군 1,2,3군은 보급선을 확보하며 진군하는 전통적인 전선(戰線)을 형성하지 않고 한양을 향해 일로(一路)로만 북상했다.
보급로를 확보하며 진군하지 않고 오로지 한양을 향해서만 전속 진격한 1군과 2군, 3군과 달리 화약 보급 없이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 제4군부터 9군까지의 6개 군(軍)은 부산포와 염포(울산) 그리고 제포(진해)와 합포(마산)를 잇는 해안지역을 영토화하는 성곽 축조에만 총력을 기울였다. 1592년과 1593년 사이에 이 삼포(三浦) 지역에 축조된 일본 성곽만 19개였다. 부산일본성, 부산진성, 임랑포왜성, 기장 죽성리왜성, 구포왜성, 김해 죽도왜성, 눌차왜성, 가덕도왜성, 서생포왜성등이 그 일 년 동안 축조된 대표적 성곽들이었다. 경상좌도에 일본 왜성이 한 해 동안 이렇게 집중적으로 건설된 것은 이 지역에 일본 찻잎 수출 중간 기지를 확보하려는 일본의 오래된 염원 때문이었다. 쿠로시오 해류와 남동계절풍에 대한 얄팍한 지식은 일본으로 하여금 삼포 지역 영유(領有)에 대한 종교적인 열망을 가지게 했는데 이런 잘못된 열망은 무로마치 막부 시절 영파(寧波)를 통해 이루어졌던 명나라와의 감합무역에서 깊어진 것이었다.
일본은 조선의 경상도에 있는 삼포지역만 장악하면 그들에게 찻잎 수출을 통한 역사적 번영을 가져다줬던 중국 절강성 영파와의 바닷길이 다시 열릴 거라고 착각했고 이는 화약의 원료인 초석 (硝石)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던 스페인이 전쟁을 벌이도록 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중국의 초석(硝石) 최대 생산지는 황하가 태산에 부딪치는 산동 반도의 린위(臨沂 Linyi) 북쪽 지역이었는데 이곳에서 캐내어진 질산나트륨(초석:salipeter)은 휘상(徽商: 徽帮)들에 의해 경항(京杭) 대운하와 절동(浙東) 운하를 통해 영파로 실려와 절강(浙江)상인들에 의해 일본으로 밀무역되고 있었다. 산서 상방(商帮)과 섬서 상방, 절강 상방과 복건 상방 등 중국 역사상 유명한 10대 상방 중 가장 마지막에 등장한 안휘 상방의 배경엔 초석(硝石) 밀무역이 있었다. 이렇듯 스페인에게는 한없이 귀중한 초석(硝石)을 실은 배가 쿠로시오 해류로 인해 자주 삼포(三浦)지역으로 들어갔고 조선은 그것을 그때마다 고이 돌려주지 않았기에 스페인으로서도 조선 삼포지역의 장악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또한 쓰루가(시즈오카)의 찻잎을 팔아 번영을 되찾으려는 일본과 쓰루가의 찻잎을 구매해 복건 상방과 광동 상방에게 뺏긴 고래로부터의 차무역(茶貿易) 지배권을 되찾아 오려는 절강상인들의 셈법도 삼포지역을 조선으로부터 뺏아오려는 국제 연합을 공고히 한 배경이 되었다.
1565년 마닐라 갈레온(Galleon) 무역로가 개척되기 전 오랜 세월 동안, 대륙의 동쪽 끝에 고립된 섬으로 존재하는 일본이 자신들의 유일한 수출품인 쓰루가(시즈오카)의 찻잎을 내다 팔아 돈을 벌 수 있던 유일한 방법은 한반도(신라, 고려, 조선)를 경유(經由)해 대륙으로 수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오로지 동북(東北) 방향으로만 빠르게 흐르는 쿠로시오 해류에 큰 책임이 있었다. 쿠로시오 해류(黑潮 海流)가 흘러가 닿는 일본의 동북쪽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는 차디찬 동토(凍土)만이 있을 뿐이었다. 결국 쓰루가(시즈오카)의 찻잎들을 수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채취한 찻잎을 이키섬과 쓰시마를 거쳐 조선에 들여놓는 것이었다. 쿠로시오의 빠른 해류(海流)는 가끔 찻잎을 실은 배를 거제 옥포나 부산포, 제포(薺浦:진해)가 아닌 염포(鹽浦:울산)까지 밀고 올라갔기에 경상좌도에 소재한 삼포(三浦:부산포, 제포, 염포)는 일본에 있어선 생명줄과 같은 것이었다. 쓰루가(시즈오카)의 찻잎들을 수입한 삼포의 상인들은 찻잎을 나주로 운반해 매년 6월과 8월 사이에 북태평양 고기압 영향으로 생겨나는 북서쪽으로 부는 남동 계절풍을 이용해 나주로 들어오는 중국 절강 상인들에게 판매했다.
일본에서 삼포(三浦)를 통해 한반도로 들어온 찻잎을 나주까지 운반할 때 남해안에서 경유지로 채택된 곳은 등거리(等距離)에 있는 사천과 승주(昇州:순천)였다. 제포(진해)로 모두 모여진 찻잎들이 남해안을 통해 나주로 가는 항로(航路)는 고래(古來)로부터 정해져 있었는데 그것은 자연 방파제가 되어 강력한 바다 파도를 막아주는 섬(島)들 사이로 항해하는 바닷길이었다. 유럽에서는 차(茶)를 나르는 바닷길이라는 뜻의 채널(channel)로 불리고 중국에서는 물길이라는 뜻의 수도(水道:waterway)로 불리는 그것을 한국인들은 차(茶)를 나르기 위해 바다에 놓은 징검다리라는 뜻으로 량(梁)으로 불렀다. 합포(마산)와 제포(진해)에서 출발한 차선(茶船)은 거제도의 칠천량(漆川梁)과 견내량(見乃梁) 그리고 미륵도의 남쪽 끝 원량(遠梁)을 돌아 미륵도의 당포(唐浦) 앞바다를 거쳐 사량도의 상도와 하도 사이의 사량(蛇梁)과 남해도와 창선도 사이의 적량(赤梁)을 차례로 지나 사천으로 들어갔다. 사천(泗川)에서 정비와 보급을 받은 차선(茶船)은 남해도의 북쪽 끝 노량(露梁)을 지나 섬진강으로 들어섰고 구례에서 보성강으로 빠져 승주(昇州:순천)에 기항했다. 승주에서 보성강과 장평천을 통해 영암에 다다라 그곳에 다시 기항한 차선은 당시 내해(內海)였던 영산강을 통해 영암에서 나주에 도착했다. 나주에서 차선(茶船)은 가져온 찻잎들을 절강(浙江) 상인들의 배에 옮겼다. 나주를 떠난 차선(茶船)은 북서쪽으로 불어 가는 남동 계절풍을 이용하여 서해안을 따라 북상해 영광, 부안, 군산에 차례로 기항한 후 서산에 도착했다. 서산에서 육로로 아산(牙山)으로 운반된 찻잎들은 덕물도와 당성(黨城:화성)을 거쳐 산동반도를 향해 떠났다. 한반도에 고조선, 부여, 마한(나주, 승주), 변한(사천, 창원) 그리고 월(목)지국(직산:아산:화성) 같은 고대국가가 일찍부터 존재한 연유는 차무역 관리 때문이었다. 쿠로시오 해류의 영향으로 삼포가 아닌 동해안의 포구들로 들어온 찻잎들은 충주(忠州 ) 덕흥창(德興倉)과 원주(原州) 흥원창(興元倉)에 모여져 한강과 조강(祖江) 수로를 이용, 황해도 장연 안란창(長淵 安瀾倉)으로 보내졌다.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에 의해 본격적으로 봉쇄되기 시작해 그 후 차(茶) 무역 지배권을 두고 벌어진 실크로드 상방과 마린로드 상방 간의 경쟁 결과에 따라 사라졌다 복원되기를 반복한 이 전통적인 바다를 통한 차(茶) 무역로가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한 건 북송(北宋) 시대였다. 서하(西夏)와 요(遼), 금(金)나라에 의해 차(茶) 무역로인 실크로드와 초원로(Steppe Road)의 자유로운 이용을 제한당한 북송의 신종(神宗)이 타개책(打開策)으로 내놓은 대책은 고려, 일본과의 삼국경제동맹이었다. 일본 쓰루가(시즈오카)의 찻잎을 고려를 통해 들여와 서하(西夏)와 요(遼), 그리고 금(金) 나라의 방해를 받지 않고 바닷길을 이용해 인도와 페르시아로 수출하는 마린로드(Marine Road)의 전면 복원이었다. 왕안석의 신법(新法)으로 구체화된 삼국경제동맹으로 고래(古來)로부터 이뤄져 온 전통적인 시즈오카 찻잎 무역로가 부활되어 더욱 보강되었다. 고려에서 차선(茶船)의 기항지(寄港地)로 다시 선정된 합포(마산)와 사천, 승주, 영암, 나주, 영광, 부안, 임피(군산), 서산, 아산에는 찻잎을 보관하고 가공하는 특수 시설인 창고가 지어져 별도 관리되었다. 이들 지역은 고래(古來)로부터 차선(茶船) 경유지(經由地)로 이용되었던 데다 삼한시대에는 찻잎들을 절구로 찧어 액즙(液汁)으로 만든 후 통관(筒管)을 통해 찻잎의 액즙(液汁)을 물에 섞이게 하는 저수조(貯水槽)로 보내 레몬수 같은 찻물(茶水)을 공급했던 지역이었기에 찻잎의 액즙이 통하는 길이라는 뜻을 가진 조(漕) 자를 써서 조창(漕倉)이라 불렀다.
고려의 조창이 세곡(稅穀)을 위해 지어진 시설이 아니라 처음부터 찻잎 저장과 가공(加工)을 위해 특별히 지어진 시설이라는 것은 조창(漕倉)을 감독하는 책임과 권한을 가진 관리의 직명(職名)이 색전(色典)이라는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조창을 운영하기 위해 직제(職製)된 판관과 초공(梢工), 수수(水手)와 잡인이라는 관명이 그 자체로 해당 관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게 하듯 색전(色典)이라는 관명도 해당 관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게 해 준다. 색전(色典)은 조창으로 입고된 찻잎들의 산화(酸化) 정도를 나타내는 찻잎의 색깔을 살펴 산화되어 심하게 갈변된 찻잎들을 골라내 그들을 절구로 찧어 액즙(液汁)을 낸 뒤 물과 함께 섞어 찻물(茶水)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전(典)이라는 글자의 갑골문은 둥그런 절구에 갈변된 찻잎들을 여러 개의 절구공이로 찧어 그 액즙이 통관(筒管)으로 흘러나오는 모습을 상형한 것이었다.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 기술된 전대사전(典大舍典)이라는 관청(官廳)은 전대사(典大舍) 일인, 전옹(典翁) 일인, 사(史) 사인으로 구성된 조직(組織)이었는데 찻잎의 액즙(液汁)을 만들어 내기 위해 특별히 건축된 대사(大舍) 안에서 갈변(褐變)된 찻잎을 절구에 찧어 액즙(液汁)을 내고 이 액즙을 저수조(貯水에 흘려보내 물과 섞이게 해 찻물을 만드는 일을 하는 관청이었다. 보통 물을 담아놓은 저수통은 절구질로 만들어진 찻잎의 액즙이 섞이게 된 후에는 그래서 저수통(貯水桶)이 아닌 저수조(貯水槽)라 불렸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술된 삼한의 소도(蘇塗)들은 바로 이 찻물을 만드는 시설이 설치된 곳이었는데 이 소도들이 설치된 창원과 사천, 승주와 나주등은 후일 조창이 설치된 지역이기도 했다. 소도(蘇塗)는 죽은 것도 다시 소생(蘇生)시키는 찻잎들을 절구에 찧어 액즙을 내고 그 액즙을 저수통에 흘려 물과 섞이게 한 후 저수조의 찻물을 수로를 통해 아래로 흘려보내 사람들이 퍼가도록 한 찻물 공급 시설이었다.
푸거가(House of Fugger)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체적인 중국과의 초석(saltpeter) 무역망을 구축하려는 스페인 합스부르크가(House of Habsburg)펠리페 2세의 야망과 시즈오카(쓰루가)의 찻잎을 수출해 역사적 번영을 이루었던 1405년 이래의 아시카가 쇼군의 무로마치 막부시대를 재현하려는 일본의 숙원(宿願)이 만들어 낸 것이 임진왜란 발발 후 일 년 동안 조선의 삼포지역에 집중적으로 솟아오른 일본 왜성(倭城)들이었다. 결국 영파와의 차(茶)무역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삼포지역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일본은 정유재란을 통해 고려의 조창이 있었던 사천과 순천 두 곳에 고려의 조창처럼 왜성(倭城)을 따로 쌓아야 했다. 또한 나주까지 필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파악한 일본이 부랴부랴 명량을 통해 나주로 진출하려다 이순신 제독과 조선 수군에게 패퇴한 것이 명량해전이었고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킨 일본군이 아산만을 장악하려다 패퇴한 것이 직산전투였다. 정유재란때의 일본군 북진은 한양을 점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 찻잎의 대륙 수출을 위한 뱃길 확보를 위해 아산만 전 지역을 차지하려는 일본의 전략적 판단 때문이었다. 고려 조창의 마지막은 개경의 경창이 아니라 아주의 하양창(河陽倉)이었다.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에 있었던 아주(牙州) 하양창(河陽倉(便涉浦)이 차 무역을 위해 운영된 조창의 마지막 귀결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