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역맥파인더 Oct 15. 2024

동인도회사와 30년 전쟁의 진실 - 거북선의 진실 17

임진전쟁을 두고 조선과 명나라, 일본이 기괴한 강화회담을 진행하고 있던 1594년, 창업주(founder)를 기재하는 란(欄)에 암스테르담의 새 시민들(Neuf citoyens d'Amsterdam)이라고 기재한 회사 하나가 암스테르담에 문을 열었다. Compagnie Van Verre라고 프랑스 사서(史書)에 기록된 이 회사는 그러나 유리제품 운송회사가 아니었다. 1581년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아비스(Avis) 왕조의 후사 문제를 빌미 삼아 동군연합으로 포르투갈을 전격 병합해 버리자 푸거가(House of Fugger)로 대표되는 마린로드 상방의 유럽 내 입지는 축소되기 시작했다. 아비스(Avis) 왕조는 마린로드 상방이 캐러벨(Caravel)이라 불린 대양 항해가 가능한 최첨단 선박 설계도까지 넘기며 자신들의 유럽 내 본거지로 육성해 온 터전이었다. 아프리카 희망봉까지 돌아 인도 항로를 개척하고 일본까지 경략해 이제 본격적으로 실크로드 상방이 장악한 세계의 돈이 집중된 중국을 공략하려던 때에 터진 최악의 악재였다. 헨리 8세 시절부터 푸거가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언제나 보여 온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후계 문제로 고집을 피우기 시작한 것도 1581년부터 수세에 몰린 푸거가의 궁색한 처지 때문이었다. 펠리페 2세의 공세를 꺾고 유럽의 정세를 되돌려 놓으려면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들은 그 돌파구를 스페인 펠리페 2세가 사주해 일으킨 조선 전쟁에서 찾았다. 화약을 푸거가가 아닌 자신들이 독점적으로 관리하는 공급망을 통해 조달하려는 펠리페 2세의 야심은 명나라 황제의 예상치 못한 참전으로 파열되고 있었다.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는 마린로드 상방이었다. 그곳 사람들이 스페인에 대항할 때부터 전폭적으로 지원해 오던 네덜란드를 포르투갈을 대신할 새로운 근거지로 선택하고 본격적인 투자에 들어갔다. 그 신호탄이 1595년 4월 2일에 텍셀(Texel)에서 인도네시아 자바를 향해 출항한 248명으로 구성된 Compagnie Van Verre의 원정대(expedition)였다. 비용과 위험부담 모두 오롯이 창업주인 암스테르담의 새로운 시민들이 책임지고 있던 항해였다. 왕가(王家)나 국가가 책임져 왔던 그동안의 원정(expedition) 항해가 아니었다.


1596년 6월 6일에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반텐(Banten)에 도착하고 그 후 1597년 1월 11일에는 다시 자카르타의 바위안(Bawean)에서 사망한 선원들을 수장하고 출항해 1597년 8월 14일, 87명이 살아남아 암스테르담으로 귀환한 이 원정대(expedition)는 본격적인 동인도회사 원정 함대의 시작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선도자(precursor)로 기록된 어느덧 Brabant company로 이름이 바뀐 유리 운송 회사(Compagnie Van Verre)의 원정단은 당시 엄청난 이익을 올려 전 유럽을 뒤흔들었다는 전설로 남았다. 그러나 이 원정대의 진짜 목적은 정보였다. 포르투갈과 영국을 버리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본부를 옮긴 마린로드 상방 지도부에게 조선에서의 전쟁 상황과 정탐된 일본에서의 스페인 쪽 활동들이 베레(Verre) 원정대에 의해 보고됐다. 결국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조선전쟁에서 최소한 자신이 원한 중국 초석(saltpeter) 확보를 통한 화약 자체 공급망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고 정보 분석을 끝낸 마린로드 상방은 판단했다. 스페인의 동아시아 화약 공급망을 그대로 놔 둘 경우 막강한 스페인 테르시오(Tercio)군(軍)에게 네덜란드마저 점령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스페인의 동아시아 화약 보급망 핵심은 일본이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 내 전통적인 마린로드 상방 조직이었으나 오다 노부나가에게 철저히 짓밟혀 1571년 막강했던 승병들과 함께 전소(全燒)된 엔랴쿠지(延暦寺) 천태종단 부활이 결정되었다. 문제는 엔라쿠지 재건축과 천태종단(天台宗團) 재육성에 소요되는 막대한 재정 조달이었다. 머뭇거리는 사이 스페인의 마닐라 갈레온(galleon)들이 조선 함대를 전멸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더 이상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돈을 쏟아부어서라도 당장 일본을 스페인의 손아귀에서 빼내와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고려에 청자(靑瓷) 제작 기술을 이전(移轉) 해 주었듯 일본에 청화백자(靑畫白磁) 기술을 이전해 주자는 안(案)이 채택되었다. 일본인들로는 그러나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 당시 고려인들과 달리 도기 제작에 관한 기초 기술과 기반이 일본엔 전혀 없어서였다. 명나라에서 도공(陶工)들을 빼 올 방법은 전무(全無)했다. 결국 전쟁 중인 조선에서 도공들을 빼 온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조선 도공들이 일본으로 가려하지 않는다는 보고가 올라왔고 극도의 공포를 조성해 안 갈 수 없도록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때부터 일본 병사들은 조선인들을 학살하고 귀와 코를 베어가기 시작했다. 가져온 조선인의 귀와 코에 엄청난 보상금이 주어진 것은 당연했다. 도자기 제작과 관련된 모든 기술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의 귀와 코는 대부분 온전했다. 도공과 가마 제작자등 도자기 관련 기술자들과 그들의 가족들 전체가 마지못한 집단 이주를 하도록 하기 위한 전대미문의 학살전이었다. 물론 조선인의 귀와 코를 잘라온 사람들에게 지급되는 막대한 보상금은 마린로드 상방에게서 나왔다.


네덜란드 원정단(expedition)의 대성공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조바심을 일으켰다. 그녀 또한 그들이 자신을 떠난 이유가 후계 문제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할아버지 헨리 7세와 아버지 헨리 8세 그리고 엄마 앤 블린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튜더(Tudor) 왕가를 자신의 대(代)를 마지막으로 끝내게 할 수는 없었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에게 시집간 큰고모의 핏줄인 제임스 6세에게 제위(帝位)가 갈 수 있도록 여왕은 설득했지만 윌리암 세실(Cecil)은 동의해 주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을 지원하며 지금까지 영국을 키운 건 합스부르크가 가 고집하는 로마 교황청에 의한 유럽 지배를 깨뜨리기 위해서였다. 로마 교황이 지도하는 단일된 유럽에 마린로드 상방이 꿈꾸는 세상을 만든다는 건 불가능했다. 로마 교황청이 인정하지 않는 이혼과 수장령(首長令)이 아니었다면 헨리 8세와 그의 해군을 지금과 같은 위용(威容)으로 키워 줄 이유가 없었던 마린로드 상방이었다. 펠리페 2세의 증조부인 막시밀리언이 로마 교황에 의해 대관(戴冠)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에 그토록 연연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영국도 지금과 같은 튜더 왕조의 위엄도 없었을 터였다.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개구리라고 엘리자베스 여왕을 괘씸해하는 마린로드 상방이었다. 네덜란드로 옮겨 간 곱슬머리 털북숭이들의 성공을 보면서 여왕은 초조해 그들이 바라보는 곳을 같이 바라보려고 서둘렀다. 탐색된 정보는 한 개의 국가처럼 모든 권한을 가진 콤파니(company)라는 정보였다. 조세 징수권과 조약 체결권에 전쟁 개시권까지 가진 회사라는 거였다. 네덜란드에서 곱슬머리 털북숭이들이 하는 그대로 따라서 만들라는 허가를 여왕은 런던 상인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곱슬머리 털북숭이들이 아니었다. 이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건 털북숭이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곱슬머리 털북숭이들이 떠나버린 중국에서 그 후 과학기술 발전면에서 그 어떤 성취도 일어나지 못한 연유였고 조셉 니덤이 그토록 궁금해 한 수수께끼(puzzle)가 만들어진 연유였다. 경쟁자를 없애고 독점할 수 있는 합법적 권한과 여왕처럼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는 허가장을 가졌음에도 런던 상인들은 뭘 해야 하는지 몰랐다. 윌리암 세실(Cecil)은 사라졌다.


이순신이 화약 연기 때문에 얻게 된 병중에도 결코 붓을 놓지 않았던 일기(日記)가 1595년 을미년에는 없었다. 아예 없었다. 그 해 아산만(灣)을 통해 빠져나간 일본 시즈오카의 찻잎들은 기록적인 양이었다. 그래서 그 찻잎들을 차(茶)로 가공해 담은 청화백자들의 숫자도 기록적이었다. 전쟁터가 된 조선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기아와 질병에 고통받고 있었는데 주변엔 돈 번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이순신의 을미년 난중일기가 없어야 하는 이유였다. 군더더기 없는 무인의 필(筆)로 이순신은 이 상황을 고발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는데 일본의 찻잎이 수입되어 버젓이 조선의 백성들을 고용해 일을 시켜 차(茶)로 만들어 중국으로 수출하고 있었다. 1595년 유럽을 발칵 뒤집어 놓은 네덜란드 유리 운송 회사(Compagnie Van Verre)의 동아시아 무역선 사건의 진실이었다. 대만과 일본이 마닐라와 함께 연결된 태평양 갈레온 무역을 확립해 놓고 펠리페 2세는 1598년 9월 13일 죽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5일 뒤인 9월 18일에 오사카에서 죽었다. 일조편법과 은본위제의 정착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장거정의 섭정 체제를 만들기 위해 융경제(隆慶帝)를 쓰러트린 당시로서는 아무도 몰랐던 남미에서만 나는 독(毒)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죽이는 데도 사용되었다. 조선전쟁으로 명나라는 허상이 드러났고 조선은 완전히 폐허로 변했고 일본은 비이총(鼻耳塚)만 솟았다. 그렇게 동아시아를 파탄내고 끝난 전쟁 뒤 일본엔 그러나 이삼평(李參平)을 필두로 한 조선 도공들이 끌려와 있었다. 도자기를 한 번도 만들어 보지 못한 일본에 곧바로 청화 백자를 만들어 내는 기적을 그들은 일으켰다. 백자를 빚을 수 있는 고령토를 찾아낸 거였다. 1400도가 넘는 불길에 허물어지지 않는 유일한 흙이 고령토였다. 환원염(還元焰)을 만들어 내는 가마(窯)는 문제 될 게 없었다. 청화백자를 만들어 그 안에 찻잎을 넣어 수출했다. 일본에 야마토(yamato: 山倒=背達)가 세워진 이래 꾸어온 꿈이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1616년 이삼평이 규슈 사가현 아리타(有田) 근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자석(磁石) 광산을 발견해 여기서 정제한 고령토로 아리타 가마에서 백자를 구워냈다. 일본판 청화백자들이 시즈오카 찻잎들로 만든 차를 잔뜩 담고 이마리(伊万里)항을 떠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자 1598년에 끝난 동아시아 전쟁이 유럽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1597년 제2차 조선전쟁에서 전대미문의 학살전을 통해 일본으로 끌고 온 조선 도공들에게 기대어 꾸어왔던 꿈이 실현된 순간이었다. 1592년 조선전쟁은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사주해 일어난 화약 전쟁이었지만 1597년 조선전쟁은 푸거가(家)로 대표되는 마린로드 상방의 사주로 일어난 도자기 전쟁이었다.


1616년 규슈 아리타에서 청화백자에 버금가는 백자를 구워내자 전쟁 자금 마련에 확신을 갖게 된 마린로드 상방은 본격적인 네덜란드 독립전쟁에 착수했다. 포르투갈을 유럽의 근거지로 삼으려던 마린로드 상방의 시도는 1506년 리스본 유대인 학살로 알려진 사건으로 파탄나 버렸다. 캐러벨 설계도까지 넘기며 아비스 왕조의 번영을 만들어 주었건만 돌아온 건 배신이었다. 그때 리스본에서 학살된 사람들은 유대인들로 가장된 털북숭이 곱슬머리 호유용의 후손들이었다. 그 후 봉건제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독일 중부 지역으로 들어간 마린로드 상방은 푸거가(家)의 전설을 만들었지만 그러나 아비스 왕가와 같이 합스부르크가 의 막시밀리안에게서도 배신당했다. 영국으로의 근거지 이전 시도 또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튜더 혈통에 대한 집착으로 영국 왕위가 가톨릭 교도인 스코틀랜트 스튜어트가로 넘어가 버림으로써 무산(霧散)되었다. 결국 마지막 유럽 근거지 확보 시도가 네덜란드였고 그게 1595년이었다. 네덜란드에서는 반드시 안전하고 영구적인 근거지를 확보해야만 했다. 명 태조 주원장이 약속을 어기고 호유용(胡惟庸)을 시작으로 십만 명이 넘는 마린로드 상방 사람들을 학살하고 끝내는 이선장마저 처형하자 어쩔 수 없이 도망쳐 나와 흘러 들어온 것이 유럽이었고 안전한 근거지를 마련하겠다고 이백 년이나 넘어 발버둥 쳐 닿은 곳이 네덜란드였다. 바닷물이 항상 무릎까지 들어오는 땅이었다. 그 땅에 둑을 쌓아 바닷물을 막고 돌과 흙을 쏟아부어 다져 그 위에 살 집을 지었던 땅이었다. 이제 더 이상 그 땅은 왕이 다스리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또다시 왕후장상의 씨앗이 따로 있다는 듯 혈통을 따지는 땅에서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외모가 어디서든 너무나 튀는, 특이한 곱슬머리 털북숭이들이었다. 푸거가와 마린로드 상방은.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도 시비 걸지 못하게 네덜란드의 독립을 모든 유럽 세력들에게서 인정받아야 했다. 포르투갈과 독일과 영국에서의 실패를 되풀이할 수 없었다. 모든 유럽 세력을 무릎 꿇리는 데에 30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갔지만 아리타에서 구워낸 백자에 가나자와의 화약과 시즈오카의 찻잎을 담아 팔면 문제도 안 되는 액수였다. 1597년의 2차 조선전쟁은 그렇게 8백만 명이 죽은 유럽의 30년 전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네덜란드의 독립을 쟁취한 빌럼 오라녜 같은 원주민들이 독립에 있어 일등 공신인 푸거가를 위시한 곱슬머리 털북숭이 마린로드 상방 사람들에게 준 보상이 동인도회사였다. 서로는 남아프리카 희망봉부터 동으로는 일본에 이르는 그 사이 지역에서의 독자적인 모든 활동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이름으로 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이었다. 1390년 이선장이 처형된 후 살기 위해 중국에서 도망 와 유럽으로 이주한 후부터 마린로드 상방이 꿈꿔 온 일이었다. 장사도 전쟁도 협상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라가 네덜란드 뒤에 유령처럼 생긴 거였다. 30년 전쟁으로 네덜란드가 유럽 모든 나라들로부터 명실상부한 독립국 인정을 받아내면서부터 니덤이 궁금해하는 중국에서 발전하지 못한 근대 과학기술 문명이 유럽에서 꽃피기 시작한 연유였다. 마린로드 상방이 주는 번영을 받아내려면 왕정이 아닌 공화국이어야 했고 최소한 군림은 하되 통치는 못하는 입헌군주제 국가여야 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이후 튜더 왕조의 피를 이어받은 스튜어트 왕조가 다스리는 영국이 1600년부터 1688년 명예혁명 때까지 갈피 없이 헤맨 역사를 가지게 된 연유였다. 1600년에 설립된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오늘날 차지하고 있는 역사에서의 위치는 1688년 헨리 8세의 피가 이어진 제임스 2세를 폐위하고 네덜란드의 빌럼 공(公)을 입헌군주 왕으로 옹립한 명예혁명 이후부터 확립된 것이었다. 세 번에 걸친 영란(英蘭) 전쟁은 마린로드 상방에게 영국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런던 머천트(merchant)들의 아우성이었다. 대륙과 바다로 분리된 지리적 우월성은 마린로드 상방이 마지막 근거지로 네덜란드 대신 런던과 영국을 선택한 이유였다. 네덜란드는 주원장과 아비스와 합스부르크처럼 배신한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와 너무 가까웠다. 또다시 쓸데없는 분쟁에 너무 많은 돈과 시간을 써야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부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건 혼란도 안정도 아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하는 거다. 지구가 깨지는 일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일이라면 상관없는 게 부자다.


오늘날의 프랑스 공화국 국기(國旗)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사기(社旗)를 오른쪽으로 회전하고 가운데 새겨진 동인도회사 로고를 뺀 모양이다. 오늘날의 미국 국기(國旗)는 잉글랜드 동인도회사의 사기(社旗)에서 왼쪽 상단 네모난 부분에 있는 연합 상징 십자가들을 빼내고 별들로 채운 모양이다. 마린로드 상방이 설립한 동인도회사는 없어진 게 아니다. 미국과 프랑스란 공화국(共和國) 국체(國體)로 현재화한 동인도회사는 1597년 2차 조선전쟁에서 성공한 조선도공들의 일본 규슈로의 강제 이주로 시작된 역사다. 임진왜란은…그런 전쟁이었다. 조선은 유사 이래로 단 한순간도 세계사의 변방인 적이 없었던 나라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질서는 1597년 정유재란에 의해 잉태된 것이다.


교토에 있는 조선인들의 잘려진 코와 귀의 무덤 비이총. 출처:교토아이넷.     30년 전쟁 진행도.  출처:위키미디어
1595년 유럽을 흥분시킨 네덜란드 Compagnie Van Verre 원정함대의 출발지와 인도네시아 관련지 지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사기와 프랑스 공화국 국기.     출처:위키미디어
잉글랜드 동인도회사 사기와 미합중국 국기         출처:위키미디어




이전 16화 일본왜성 건설의 진실 - 거북선의 진실 1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