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을 위한 변명
恒福曰 在洋中則雖敗 或有逃出之理 而今則不然 屯泊狹隘之地 猝遇賊船 窘迫下陸 大槪必至於全軍覆沒矣. 上搜海圖 指示恒福曰 退來之時 未及見乃梁 而遇賊於固城之地 而有此敗耶 由彼則可以易退於閑山 而由此而致敗耶 恒福曰 是. 成龍曰 若失閑山 則南海 是要衝之地 今必爲賊所據. 上曰 領相憂南海耶 成龍曰 豈獨以南海爲憂哉. 上曰 此豈獨人謀之不臧, 天也奈何. 항복이 대답하기를, 넓은 바다라면 패전하였더라도 혹 도망하여 나올 수 있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렇지 않아 비좁은 지역에 정박하였다가 갑자기 적선을 만나 궁지에 몰려 하륙하였으니 대체로 전군이 패몰되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해도(海圖)를 살펴보며 항복에게 가리켜 보이면서 이르기를 후퇴해 나올 때 견내량(見乃梁)에 이르기 전에 고성에서 적병을 만나 이와 같이 패배를 당했단 말인가? 저쪽을 경유하였다면 한산으로 쉽게 퇴진하였을 것인데 이곳을 경유하여 패배를 당하였는가? 하니, 항복이 이르기를 그렇습니다 하고, 성룡이 아뢰기를, 한산을 잃는다면 남해는 요충지대인데 지금 이곳도 필시 적의 점거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도 남해를 근심하고 있는가? 하자, 성룡이 아뢰기를, 어찌 남해만 근심이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어찌 사람의 지혜만 잘못이겠는가. 천명이니 어찌하겠는가. - 선조실록 90권, 선조 30년(1597) 7월 22일 신해
정유재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끄는 일본이 자신들만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자신들만의 전략으로 조선을 침략해 조명 연합군과 싸운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이 스페인의 화약 확보를 위한 용병전쟁이었다면 정유재란은 오로지 일본만을 위한 일본의 전쟁이었다. 정유재란을 통해 획득하고자 했던 일본의 이익은 시즈오카 차(茶) 수출로 확보였다. 조선 수군이 궤멸된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본군은 한산도에 있는 이순신을 피해 제포(진해)와 서생포를 통해 각각 상륙한 후 진해로 상륙한 좌군(左軍)은 남원성을 목표로, 울산으로 상륙한 우군(右軍)은 전주성을 목표로 재빨리 기동 했다. 진해를 출발한 좌군(左軍)은 진주와 사천, 하동과 구례를 거쳐 남원성에 도달했다. 이후 임실을 거쳐 전주성에 들어갔다. 청화백자의 원료가 되는 산화코발트와 고령토를 각각 책임지게 될 고니시와 시마즈가 이끄는 56,000명의 대군이었다. 울산의 산화코발트 광산이 있는 지역에 학성을 쌓게 될 가토와 모리가 이끄는 78,000명은 밀양, 창녕, 합천, 함양 황석산성을 거쳐 장계와 진안을 통해 전주성에 들어갔다. 시즈오카 차(茶) 수출로였다.
1380년 고려 우왕 때 아지발도가 이끄는 2만 명의 왜구들이 진포(지금의 군산)로 상륙해 침략한 고을은 영동, 선산(구미), 성주, 함양, 남원이었는데 이는 섬진강으로 들어와 남원, 함양, 성주, 김천, 추풍령, 영동, 옥천, 대전, 논산 , 익산, 군산으로 연결되는 차(茶) 무역로와 정확히 일치했다. 이 무역로는 백제 무왕이 왕으로 있던 600년부터 641년까지 40년 동안에 걸쳐 구축하려 끊임없이 시도했던 차(茶) 무역로였다. 1380년, 아지발도의 2만 왜구가 상륙한 후 진포에 정박해 놓은 5백 척의 왜군선은 최무선의 함포사격으로 모두 수장되었고 남원까지 진출해 무역로를 완성시킨 후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가려던 2만 명은 남원 바로 앞, 운봉에서 이성계를 만나 황산대첩이라 불린 전투로 전멸했다. 이 섬진강과 전주, 군산을 잇는 아지발도 라인 구축이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군의 목표였다. 물론 가토가 건설한 울산, 밀양, 창녕, 합천, 함양, 진안, 전주 선이 여기에 추가되었다. 울산과 군산을 잇는 선 이남 지역의 정복이 일본군의 목표라는 게 분명해졌다. 원래 진짜 일본이 원한 건 군산과 전주 그리고 울산을 잇는 선이 아니라 경주를 잇는 선이었다. 경주 사람들이었기에 한사코 쫓아낸 일본군이었다.
1597년 8월 20일 무혈입성한 전주성에서 열린 일본군 작전회의에서 부대를 수륙으로 나눠 조선의 해상과 육지의 연결을 차단해야 한다는 지침이 나왔다고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은 난중잡록(亂中雜錄)에 기록했다. 이는 일본군 지휘부가 제대로 된 군사적 판단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7월 15일에 조선 수군을 자신들의 손으로 궤멸시켰다면 조선의 수군과 육군을 분리시키기 위해서라도 일본 수군은 명량부터 뚫어 서해안으로 들어서서 교두보부터 확보했을 터였다. 비어있는 전주성을 무혈로 입성한 일본군이 아산 평택을 차지하기 위해 그 중간에 있는 직산을 가다 조명 연합군과 맞닥뜨린 게 9월 7일이었다. 명량에서 이순신이 미증유의 기적을 일으킨 건 9월 16일이었다. 두 달 동안이나 허송세월을 보낼 만큼 여유가 있던 일본이 아니었다. 이것이 칠천량 해전을 일본 수군이 이룬 승리가 아니라 주장하는 첫 번째 근거가 된다.
남해에서 서해를 돌아 지금의 군산과 부안 지역을 장악하는 건 663년 백강구 전투로 이미 증명된, 일본군이 조선에서 반드시 이루고 싶었던 오래된 꿈이었다. 자신들이 대륙으로 차(茶)를 수출하기 위해서 반드시 수호해야 할 북방한계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선 수군을 7월 15일에 전멸시켜 놓고도 9월 16일까지 명량 근처에도 오지를 않았었다는 건 일본군이 조선 수군의 궤멸을 모른 채 여전히 이순신이 건재하다고 생각해서였다. 조선 수군을 궤멸시켜 놓고도 진포(군산)로 안 갔을 일본이 아니다. 7월 15일 칠천량에서 일본 해군이 원균의 조선 해군을 자신들의 힘으로 전멸시켰다면 일본 수군이 절대로 9월 16일까지 기다렸다가 명량을 통해 서해로 진출하려 했을 리가 없다. 7월 15일에 이미 조선 수군을 전멸시켜 놓고도 명량을 빠져나가 평택 앞바다에 있는 덕적도로 가는 교두보들을 확보하지 않은 채 8월 13일 남원성 전투에 일본 수군이 참여했다면 일본군 전체는 빠가야로들만 있었음에 틀림없다. 방어하는 이 하나 없는 서해 항로를 장악하지 않고 섬진강을 거꾸로 거슬러 6만 명에 가까운 대군이 이미 투입된 남원성 싸움에 수군이 끼어들었다고 하는 걸 믿으라는 건 당시 일본 수군들에게나 지금 듣는 한국 사람들에게나 너무 모욕적이다. 7월 15일에 자신들의 힘으로 조선 수군을 전멸시켜 놓고서 그 길로 달려가 명량을 확보하고 더 나아가 꿈에도 그리던 덕적도가 있는 아산 평택의 남양만까지 확보하지 않은 채 두 달이나 지나서야 명량을 지나 서해로 나가려 하다가 이순신의 12척 판옥선에 치명적인 패전을 당했다는 일본 수군은 그렇다면 한심하다.
칠천량 해전에서의 조선 수군 궤멸이 일본 수군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노도반도를 끼고 있는 카가번(加賀藩)의 깜짝 놀랄 번영과 부상(浮上)이었다. 본국 백제와의 시혜(施惠) 무역이 끊긴 지 백 년 만에 어쩔 수 없이 선포한 743년 간전영년사재법(墾田永年私財法)에 의해 시작된 일본의 근본적 변화는 결국 율령국과 다이묘 체제까지 가버렸다. 송나라가 주도한 국제 무역 체제에 가입한 것에 대한 실크로드 상방의 보복으로 고려와 똑같이 무신 통치가 시작된 가마쿠라 막부시대의 율령국중 카가(加賀) 국은 미미한 존재였다. 지금의 이시카와현을 노토(能登) 국과 양분했던 카가국은 이후 센코쿠 시대에는 슈고(守護) 다이묘가 없는 지역이었다. 여기를 차지한 게 오다 노부나가의 일개 부장(部將)이었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였다. 게다가 마에다 토시이에는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의 승부가 판가름 난 이후에 에도 막부에 참여한 도자마(外樣) 다이묘였다.
1596년 9월 2일의 오사카 회견 이후 자신의 몰락을 예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기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를 위해 구축한 오대노(五大老) 체제는 마에다 토시이에의 카가번(加賀藩)이 얼마나 급부상한 다이묘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도요토미가 오대로(五大老) 체제를 만들 때 카카번의 마에다가 포함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마닐라 갈레온이 기항지로 가나자와(金澤)를 선택한 것을 산 펠리페(San Felipe) 호의 항로를 통해 이미 확인했던 도요토미는 도쿠가와를 견제할 비장의 대안으로 마에다의 카가번을 뽑은 거였다. 1598년 도요토미가 죽자 그가 만들어 놓은 오대노(五大老) 체제를 즉시 붕괴시키려는 도쿠가와 이에야쓰를 주저앉힌 것도 카가번의 마에다였다. 1598년에 벌써 도쿠가와마저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 카가번이었다. 오다 노부나가 시절 다이묘도 없을 정도로 별 볼 일 없던 지역이 단 2년 만에 도쿠가와마저 함부로 못할 정도의 국력을 갖춘 번(藩)으로 변모한 것은 오직 마닐라 갈레온의 기항지가 되어 화약과 차(茶)를 수출했기 때문이었다. 화약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때까지 차(茶)는 2차 아편전쟁(애로우호 사건) 때까지 관계하는 모든 아시아인들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 주었던 품목이었다.
오대로(五大老) 체제를 이루고 있는 각 번들이 소유하고 있는 영지들의 경제력을 나타내는 고쿠다카(石高:각 번의 경제력을 쌀 생산량으로 환산한 지표)를 살펴보면 이와 같은 상황은 확연해진다. 256만 석(石)의 도쿠가와 이에야쓰, 120만 석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 112만 석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에 이어 마에다 토시이에의 카가번(加賀藩)이 83만 석으로 쇼군 직할령을 빼면 3번째였다. 마에다가 다스리는 카가번(加賀藩)은 쌀 생산에 있어서는 지리적 이점이 별로 없는 땅들이었다. 지금의 이시카와현(石川縣)과 도야마현(富山縣)으로 이뤄진 카가번은 바다에 연해 있는 땅에 나머지는 일본 알프스로 불려질 정도로 3,000m가 넘는 산들로 대부분이 채워진 그런 땅이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쓰 집안이 쇼군이 되어 대대(代代)로 다스린 에도 막부시대에 카가번의 본거지인 가나자와는 동경(에도), 경도(교토), 대판(오사카)에 이어 4번째로 큰 도시였다. 그렇게 된 것은 1597년부터 가나자와가 스페인 마닐라 갈레온들이 매년 찾아와 자신들에게 약속된 화약과 시즈오카의 차(茶)를 가져가는 기항지였기 때문이었다.
고령토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땅에서 찻잎을 따서 팔고 저장하려면 칠(漆)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다. 자기(瓷器)를 못 만드니 칠기(漆器)라도 발전시켜야 그나마 찻잎을 보관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왕안석의 신법으로 청자를 만들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나전(螺鈿) 칠기(漆器)가 발전했던 연유였는데 일본에서 그런 칠기(漆器)로 유명한 곳이 발해와의 동해무역으로 성장한 금박(金箔)으로 유명한 가나자와(金澤)였다. 그러나 1597년부터 시작된 가나자와의 번영은 금박 때문이 아니었다. 고카야마(Gokayama) 염초관에서 만드는 화약 때문이었다. 1596년 9월 체결된 오사카 조약에 의해 절강성 영파에서 수출한 초석(硝石, 염초 焰硝: 질산염 또는 질산칼륨: KNO3)을 받아 일본에서 나는 황(S)과 백산(Hakusan)의 나무로 만든 숯(C)을 비율에 맞게 배합해 흑색화약으로 만들어 갈레온에 선적시키는 것이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화약을 싣기 위해 기항하는 갈레온은 시즈오카의 차(茶)들까지 가나자와로 오게 했다. 가나자와로서는 번영의 시대였다.
쿠로시오(Kuroshio) 해류를 타고 온 마닐라 갈레온이 제주도 남쪽에서 대마 난류로 갈아타고 쓰가루(Tsugaru) 해협까지 가는 항로 중간에 있다는 지리적 이점 외에도 가나자와는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특장(特長)이 있었다. 숯(木炭)을 아주 정교하게 갈아(礪) 황과 염초와 함께 배합함으로써 화약의 품질을 높여주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흑색화약에서 숯이 맡은 역할이란 게 밀폐된 공간에서 불에 잘 타서, 가스를 생성하고 생성된 기체를 빨리 뜨겁게 만들어 폭발(급팽창)하게 만드는 역할이었기에 잘 탈 수 있도록 정밀하게 깎아 황과 초석(염초)하고 배합하는 게 중요했다. 토나미(礪波)와 난토(南礪)는 숯을 가는(礪) 기술에 특화된 곳이라 그런 이름이 붙은 지역이었다. 흑색화약에서 연소물인 숯이 공기 유입 없는 밀폐된 공간에서도 계속 맹렬히 타게 하려면 산소가 공급되어야 하는데 이런 산소를 공급하는 추진제 역할을 하는 것이 초석(硝石, 염초 焰硝: 질산염 또는 질산칼륨: KNO3)이었다. 명나라 영파에서 수출되는 질산염은 밀폐된 약실 안에서 확실하게 산소를 공급해 주는 훌륭한 추진제였다.
1600년 9월 15일(10.21) 센코쿠 시대를 끝내는 거대한 전투가 왜 세키가하라(Sekigahara) 에서 벌어졌는지에 대한 해답도 카가번(加賀藩)의 화약에 있었다. 오대로 체제를 해체하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8만 대군이 세키가하라로 진군한 경로는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에도(지금의 동경)를 떠나 쓰루가(지금의 시즈오카현)와 미가와, 그리고 오와리(지금의 아이치현) 루트가 아니었다. 도쿠가와가 8만 대군을 거병(擧兵)할 때 내건 명분은 오대로 체제의 규약을 무시하고 교토에서 허락도 없이 자기 번으로 돌아간 우에스기 가케가쓰(우에스기 겐신의 조카)가 있는 지금의 후쿠시마현 아이즈(Aizu; 會津)를 정벌하기 위해서라고 선전되었다. 도쿠가와 군대가 에도(동경)에서 후쿠시마를 향해 북진하는 것을 확인한 오봉행(五奉行)의 핵심,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는 이를 이와미 은광의 모리 데루모토와 노량해전의 시마즈 요시히로에 연락해 그들의 군대를 가나자와(Kanazawa, 金澤)로 진군하도록 안내했다.
양 세력의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 카가번(加賀藩)의 화약이란 걸 모를 리 없는 도쿠가와는 모리군과 시마즈군의 기동을 보고받자 군대를 군마(群馬)현 다카사키(Takasaki, 高崎)로 돌렸다. 다카사키에서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나가노의 마츠모토(Matsumoto, 松本)와 기후(岐阜; Gifu)현의 다카야마(高山)를 차례로 밟은 그의 군대가 최종적으로 주둔한 곳은 지금의 후쿠이현 카츠야마(勝山)였다. 모리군과 시마즈군이 카가번에 들어가기 전에 그 입구를 틀어막아버린 거였다. 조선침략군의 주축으로 조총병 위주의 전술에 익숙한 모리군과 시마즈군은 끝내 화약을 확보하지 못했다. 카츠야마에 주둔하며 카가번의 새 영주 마에다 도시나가(도시이에의 장남)의 항복을 받아 낸 도쿠가와는 그에게서 화약(和約)의 증표로 충분한 화약(火藥)을 상납받은 후 모리와 시마즈군이 교토에서 가나자와로 갈 수 있는 길을 모두 봉쇄하며 역으로 교토를 향해 남진해갔다. 화약을 확보하지 못한 12만명의 서군이 세키가하라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승부는 도쿠가와가 이끄는 동군의 승리로 세시간만에 결판났다. 카츠야마가 승산(勝山)이 된 연유였다.
1596년 9월 2일 오사카 회담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조선에 기항지(寄航地)를 확보하지 못하면, 확보하더라도 기항지 제공을 담보하는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볼모로 잡고 있지 못하면 시즈오카의 차(茶)를 일본 자력으로 수출할 수 있는 길은 여전히 없었다. 명나라와 스페인의 숨겨진 종전안을 알 리 없던 조선 측 배신으로 참가한 황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미친 듯한 분노를 보고 전쟁은 반드시 다시 일어날 거라고 선조에게 보고 했다. 선조는 이 정보를 제일 먼저 한산도에 나가 있는 이순신에게 전했다. 일본의 재침 정보를 전하면서 선조와 조선 조정은 정 2품 상 정헌대부(正憲大夫)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1만 5천 명의 휘하 수군을 지휘하여 상륙을 기도하는 일본군을 부산포 외해에서 섬멸해 줄거라 굳게 믿었다. 1591년 정 6품 상 돈용교위(敦勇敎尉)였던 이순신은 1596년엔 정 2품 상 정헌대부가 되어 있을 정도로 나라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가토 기요마사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다시 돌아온다는 정보까지 확보해서 전해 준 보람도 없이 가토군이 상륙해 울산 쪽에 배치되었다는 소식에 선조의 분노는 폭발했다. 그러나 철수하지 않고 남아 부산포와 제포, 서생포를 중심으로 몰려있던 일본군이 2만 명이나 되어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조선 수군이 출동했다가는 수륙 양쪽에서 협공을 당한다는 사실을 선조는 간과하고 있었다.
협공을 당하지 않고 상륙을 기도하는 일본군을 섬멸할 유일한 길은 육지로부터의 공격이 미치지 못하는 먼바다에서의 작전이었는데 150척이나 되는 판옥전선으로 이루어진 막강한 조선수군은 그러나 먼바다에서의 작전이 어려운 함대였다. 먼바다에서의 작전이 그나마 가능한 첨저선으로 된 귀선은 달랑 세척뿐이었다. 능파성이 없는 판옥선을 먼바다로 기동시켰다가는 크기와 힘에서 차원이 다른 파도를 맞아 싸워보기도 전에 전복되거나 표류하기 십상이라는 걸 나룻배 정도 타 본 조정 대신과 선조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이순신은 반드시 죽여야 할 신하가 되어 그의 바다에서 그의 임금의 부하에게 잡혀 의금부로 끌려갔다. 당시 판옥선은 배수량이 227톤으로 전장(全長)이 28~30미터, 전폭이 약 9미터, 전고가 2.5미터인 평저선이었다. 조선 수군의 자랑인 함포는 선수, 선미, 좌현, 우현을 합쳐 총 17~24문의 함포를 함재(艦載)하고 있었다. 삼도수군통제사영이 설치된 한산도에는 이런 판옥선이 150척이 준비되어 전투대기 중에 있었고 1만 5천 명의 수군이 이순신의 지휘하에 엄정한 군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산 평택에서 시즈오카 차(茶)들이 수출된 것은 명나라 영파에서 출항한 선박들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을 거라 이해하고 그러나 대마도에서 부산포로 건너오는 일본 배들에 대해서는 이순신이 추호의 용서도 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었던 선조였다.
하늘처럼 믿었던 명나라의 배신이 총명했던 선조의 판단력과 자제력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대한 강박이 조선과 선조를 망치고 있었다. 이순신과 원균은 똑같은 바다에서 서로 다른 적과 싸웠고 서로 다른 상관에게 매를 맞았고 똑같이 적과의 전투중에 죽었다. 정 2품 도순찰사나 되는 벼슬아치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것이 같은 전쟁에서 두 사람이나 된다는 사실은 세계 전쟁사에 길이 빛날 자랑스러운 역사다. 칠천량은 결코 부끄러워할 전투가 아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스페인의 더러운 전쟁을 숨겼던 명나라와 조선과 일본의 지배자들이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원균이 아니었다. 스페인의 갈레온이 조선의 해역에 나타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페인이 명나라의 초석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을 시켜 조선을 차도살인 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명나라 절강상인들이 자신들의 항해에 방해가 될지도 모를 조선 수군을 스페인 함대를 시켜 차도살인(借刀殺人) 하리라고는 그 역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이순신은 그래서 화약과 총통과 군량미와 판옥선을 원균에게 인계하고 압송되었고 원균은 선조도 알고 있는 한산도로의 퇴각을 포기하고 좁디좁은 칠천량으로 갈레온들을 끌어들여 뒤로 빠져나간 배설의 함대가 추격당하지 않도록 막아섰다. 배설이 한산도로 돌아가 이순신이 남긴 화약과 군량미, 총통과 판옥선을 그리고 무엇보다 백성들을 대피시킬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였다. 좁디좁은 칠천량으로 유인되어 들어온 갈레온들은 옥쇄작전으로 막아선 조선 수군들에 가로막혀 빠져나간 배설의 함대를 놓쳐 버렸다. 한산도를 알지 못하는 그들은 결국 목표로 했던 한산도를 파괴하지 못한 채 돌아서야 했다. 이순신은 이렇게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옥쇄함으로써 남긴 그 화약과 총통과 판옥선으로 명량에서 일본군을 막아내고 끝끝내 정유전쟁을 조기에 끝낼 기적을 만들어냈다. 자기 할아비보다 더 떠받들고 믿었던 명나라의 배신 앞에 그럴 리가 없다며 자기부정에 빠진 선조와 계유정난 파는 끝내 원균을 희생양으로 삼아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밀어붙였다. 조선의 진회가 되어 버린 채 이순신이 암살되던 날 삭탈관작된 유성룡은 낙향해 징비록만 썼다. 선무일등공신이 된 원균이었지만 끝내… 시호(諡號)는 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