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巢氏之族 支巢氏 與者人 往飮乳泉 人多泉少 讓於諸人 自不得飮而如是者五次. 백소씨족(白巢氏族)의 지소(支巢)씨가, 여러 사람과 함께 젖을 마시려고 유천(乳泉)에 갔는데, 사람은 많고 샘은 작으므로, 여러 사람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마시지 못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다섯 차례나 되었다.
乃歸而登巢 遂發飢惑而眩倒 耳嗚迷聲 呑嘗五味 卽巢欄之蔓籬萄實. 起而偸躍 此被其毒力故也. 乃降巢闊步而歌曰浩蕩兮天地 我氣兮凌駕. 是何道兮 萄實之力. 衆皆疑之 支巢氏曰眞佳 諸人奇而食之果若其言. 於是諸族之食萄實者多. 곧 돌아와 소(巢)에 오르니, 배가 고파 어지러워 쓰러졌다. 귀에는 희미한 소리가 울렸다. 오미(五味)를 맛보니, 바로 소(巢)의 난간의 넝쿨에 달린 포도열매였다. 일어나 펄쩍 뛰었다. 그 독력(毒力)의 피해 때문이었다. - 징심록(澄心錄) 부도지(符都誌) 제5장 중에서
已矣出城諸人中 悔悟前非者 還到城外 直求復本 此未知有復本之時所故也. 더구나 성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 전날의 잘못을 뉘우친 사람들이, 성 밖에 이르러, 직접 복본(復本)을 하려고 하니, 이는 복본에 때가 있음을 모르는 까닭이었다.
乃欲得乳泉 掘鑿城廓 城址破損 泉源流出四方. 然卽化固土不能飮. 以故城內遂乳渴 諸人動搖 爭取草果 混濁至極 難保淸淨. 곧 젖샘을 얻고자 하여, 성곽의 밑을 파해치니, 성터(城址)가 파손되어 샘의 근원이 사방으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곧 단단한 흙으로 변하여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성 안에 마침내 젖이 마르니 모든 사람들이 동요하여, 풀과 과일을 다투어 취하므로, 혼탁(混濁)이 지극하여, 청정(淸淨)을 보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 징심록(澄心錄) 부도지(符都誌) 제8장 중에서
백제와 가야, 왜의 연합 공격으로 멸망의 위기에 몰린 신라 내물왕이 어쩔 수 없어 요청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원병(援兵)때문에 후일에는 고구려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해 신라가 신음하던 시절, 대아찬(大阿湌) 박제상이 내물왕과 실성왕 때 일본과 고구려에 각각 인질로 보내진 눌지왕의 동생들을 구하려 고구려와 일본에 차례로 건너가 복호와 미사흔을 구해내고 자신은 끝내 일본왕에 의해 화형 당해 죽기 전 저술했다는 징심록(澄心錄) 부도지(符都誌)에는 만년 전 우리 민족이 율려(律呂)에 의해 시작된 창세기(創世記)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기록에는 우리 민족이 땅(地)의 젖(乳), 지유(地乳)를 먹고살았고 금지된 포도를 먹어 끝내 역병이 돌아 마고와 궁희, 소희의 삼신 할매가 다스리던 루왜은조리에서 복본(復本)을 맹세하며 떠나야 했던 배달(倍達, 背達)의 역사도 기록되어 있었다. 우리 민족이 배달(背達)하여 처음으로 세운 나라의 국호(國號)가 환국(桓國)과 배달국(倍達國)이었던 것은 배달(背達)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 복본(復本)하겠다는 맹세를 다짐하기 위해서였고 그 후 국호가 조선(朝鮮)과 부여(扶餘), 구리(句麗)였던 것은 복본의 맹세를 잊지 않게 할 땅의 젖, 즉 지유(地乳)를 만들어 먹는 것을 전승해 가겠다는 의지의 구현이었다. 땅의 젖, 지유(地乳)를 산스크리트어로는 쿠[ku]라고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고 즙(汁)을 주스[jus]라 발음해서 생긴 이름이었고 주[ju]가 수[su]로 여[yu]로 변형되어 발생한 일이었다.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이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를 근거로 조선이라는 국호가 고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이름인 주신(珠申)에서 비롯된 숙신(肅愼)에서 유래되었다고 밝힌 연유였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이름이 주신(Jus)이라고 주장된 것도 차즙(茶汁)을 만드는 독보적인 기술 때문이었다. 세계 곳곳에 생명의 나무인 차(茶) 나무가 다 같이 여전할 때에도 우리 민족은 차(茶) 나무에서 채취한 찻잎들을 가지고 차(茶)를 만드는 차(茶) 산업에서 단연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던 절대적 존재였다. 누구나 찻잎을 가질 수 있었던 시절에도 누구나 가질 수 없었던 차(茶)를 만들어 차(茶) 산업계의 지존으로 군림하게 한 최강의 기술이 찻잎에서 진액(津液), 즉 즙(汁)을 짜내 차주스(tea juice)를 만드는 기술이었다. 찻잎들에서 짜낸 진액으로 만든 차주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올림푸스 신들만이 먹을 수 있다는 넥타(nectar)가 되었고 그 차주스에 다른 약초들과 과일들을 섞어 걸쭉하게 만든 차죽(茶粥 tea broth)은 암브로시아(ambrosia)가 되었다.
우리 민족이 설날이라고 부르는 새해의 첫날을 중국사람들은 봄의 명절이라는 뜻으로 춘절(春節)이라고 부른다. 일본인들은 새로운 해(歲)를 축하한다는 뜻으로 신넨 오메데토 고자이마쓰(新年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라고 부르고 영어로는 모두가 잘 알듯이 새로운 해의 날이란 뜻으로 New Year’s Day라고 한다. 이렇듯 다양한 새해 첫 날의 명칭답게 세계 각국의 사람들은 새해 첫날을 맞아 자신들만의 고유한 풍속을 즐기며 새로운 일 년의 행운을 기원하는데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설 풍속을 꼽으라면 아마 차례(茶禮)와 떡국을 들 수 있을 듯싶다. 조상들께 차(茶)를 올리는 의례(儀禮)이기에 설과 함께 차례라고 불리는 추석 차례상에는 올리지 않는 떡국을 설날 차례상에는 밥과 국대신 올리는 날이 설날이니 차례와 떡국이 우리 민족 설 풍속의 대표라고 내세워도 큰 무리는 아닐 듯하다. 우리 민족 4대 명절 중 지금껏 명절(名節)로 지켜지는 설과 한가위에 공통적으로 행해지는 차(茶)를 올리는 의례인 차례는 그래서 우리 민족에게는 더욱 의미가 깊은데 그러나 아직도 왜 우리 민족이 새해 첫날을 설이라 부르고 음력 8월 보름날을 한가위라고 부르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특히나 중국과 일본에서는 한 단계 낮은 급으로 치러지는 중추절(仲秋節)을 우리 민족이 설과 같은 위상의 명절로 햇곡식을 수확하지도 않은 음력 8월 보름날에 쇠고 있는 이유 역시나 밝혀져 있지 않다. 결론을 미리 말하면, 우리가 우리의 설과 한가위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이유는 차(茶) 산업을 중국에 바치고 스스로 차(茶) 종주국으로서의 역사를 파묻은 이씨조선왕조의 비겁한 역사 때문이었다. 태종 이방원이 충주사고에 비장된 고조선의 역사서인 신지비사(神誌祕詞)를 한양 궁궐로 가져오게 해 소각한 사건을 시작으로 세조와 예종, 성종 그리고 중종 때까지 이어진 우리 민족 고유의 전래 역사서를 백성들로부터 강제로 압수하는 수서령(收書令)을 지속시킨 것은 차(茶) 산업과 관련된 우리 민족의 종주권(宗主權) 상납을 은폐하기 위해서였다. 생명의 나무인 차(茶) 나무와 함께 시작되고 꾸려져 온 우리 민족의 만년 역사는 차(茶) 나무에서 찻잎을 따고 가공해 차(茶)를 만들어 내는 차(茶) 산업의 존재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한 역사였다. 우리 민족의 역대 국호(國號)인 환국(桓國), 배달(倍達), 조선(朝鮮), 부여(扶餘), 구리(句麗), 쿠다라(kudara)라고 불리는 백제(百濟) 모두가 바로 이 차(茶) 나무에서 딴 찻잎(茶葉)들을 가공해 차즙(茶汁)으로 만드는 기술을 나타내기 위한 이름이었다. 올림푸스의 신(神)들만이 먹을 수 있었다는 넥타(nectar)가 바로 이 차즙(茶汁)이었고 배달(背達)이라는 말과 불가분의 관계인 땅의 젖이라는 뜻의 지유(地乳)가 바로 이 차즙이었다. 그리고 이런 차즙(茶汁)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차(茶)를 설(蔎)이라고 불렀다. 설날은 바로 이 최고급의 가공 기술로 만든 설(蔎)이라 불린 차(茶)를 조상들께 올리는 날이었기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차(茶)와 관련된 모든 다른 이름들을 집대성한 당나라 때 학자 육우도 그 뜻을 끝내 알아내지 못한 차(茶) 이름이 설(蔎)이었다. 무엇인지 알면서도 은폐한 차(茶) 이름이 설(蔎)이었다.
우리 민족이 새해 첫날을 설날이라고 하는 이유는 설(蔎)이라고 불리는 아주 진귀한, 차(茶)로 만든 죽(broth)을 그러니까 차수프(tea soup)를 조상님들께 올리고 함께 나눠 먹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차(茶)로 만든 죽, 즉 차죽(茶粥 Tea Broth)인 설(蔎)을 올리는 날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 설날이다. 지금은 차례(茶禮)라는 이름으로만 남아있기에 차례(茶禮)의 역사를 추적하다 보면 우리 민족이 왜 새해 첫날을 설날이라고 불렀는지 그 이유도 자연스럽게 증명될 것이다. 차례(茶禮)는 말 그대로 조상들에게 차(茶)를 올리는 의례다. 조상들의 돌아가신 날에 조상들의 영혼을 모셔와 음식을 대접하는 제사(祭祀)와는 그러나 확실히 다른 의례(儀禮)다. 돌아가신 조상에게 음식들을 올리는 데 목적이 있는 의례가 제사라면 차례는 말 그대로 조상들에게 차, 그러니까 티(tea)를 올리는 것이 목적인 의례다. 그만큼 차(茶)가 인간에게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몹시 중요한 것이었음을 알게 해 주는 의례인데 그래서 차례라는 의례를 맨 처음 만들어 시행했다는 중국에서는 차례상을 차리는 법까지 정해놓았다.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보면 차례상에는 술 한잔과 차(茶) 한잔, 그리고 과일 한 쟁반만 차리라고 되어있는데 술도 한 번만 올리고 축문(祝文)도 읽지 않는다고 해놓아 차례(茶禮)의 목적은 차(茶)를 올리는 의례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12세기 송나라에서 살았던 주희에 의해 차례(茶禮)에 대한 예법이 만들어진 이유는 사실 과다한 차(茶)의 소비를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차(茶) 생산국이 된 이래로 중국은 늘 차(茶)가 부족한 나라였다. 그 당시 유일한 항생제로 자양강장제 역할까지 했던 차(茶)는 중국 입장에서 보면 고려에서 전량을 수입해 와야 하는 고가 수입품이었다. 불로초(不老草) 또는 불사초(不死草)라고까지 불리며 중국인들과 전 세계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끈 차(茶)는 그래서 국가를 운영해야 하는 지배층 입장에서는 심각한 무역적자를 가져오는 골치 아픈 수입품이었다. 중국을 통일해 천하에 부러울 게 없던 진시황이 큰돈을 들여 서복(徐福)과 노생(盧生)을 바다로 보내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라는 조선의 삼신산(三神山)으로 불로초를 찾아 가져오게 시도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이렇게 엄청난 무역적자의 원인이 되는 차(茶) 소비량을 통제하기 위해 중국이 마련한 규제가 차례(茶禮)였다. 차례를 오직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그리고 춘절과 동지에만 사당(祠堂)에 차(茶)를 올리는 참례(參禮)와 청명, 한식, 단오, 백중, 중양 등 총 5차례의 절기에만 사당에 차(茶)를 올리는 천신례(薦新禮)로 나눠 거행한 것은 차(茶)를 소비하는 횟수를 제한하기 위해서였다. 차(茶) 소비량을 억제해 차(茶) 수입으로 인해 발생하는 무역적자를 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차례(茶禮)였던 거다.
전 세계적인 기후변화로 차(茶) 나무가 모두 사라지고 일본과 함께 차(茶) 나무가 생장하는 유일한 지역이 된 한반도는 그래서 금싸라기 땅이 되어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 불렸다. 그런 땅에 터 잡고 사는 우리 선조들은 그래서 차(茶)를 마시는 방법도 차(茶)를 수입해야 하는 나라와는 많이 달랐다. 차(茶)를 필요한 만큼 수입할 수 없었던 고대 중국에서는 부족한 차(茶)를 아끼기 위해 차례라는 제도를 만들어 일 년에 차(茶) 마시는 횟수까지 통제해야 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값비싼 찻잎을 아껴 먹기 위해 찻잎을 물에 넣어 끓여 마시는 포차법(泡茶法)을 개발했다. 포차법(泡茶法)으로 만들어진 차수(茶水)는 그래서 엽차(葉茶)라고 불렸다. 그러나 이렇게 비싸고 귀한 차(茶)를 자체 생산했던 우리 민족은 차(茶) 수입국이었던 중국하고는 다른 방법으로 차(茶)를 마셨는데 정확히 말하면 마신 게 아니라 먹었다. 차즙(茶汁)을 넘어 죽(粥)을 만들어 먹었다. 차죽(茶粥). 차(茶)를 죽(粥)으로 먹으려면 차(茶)를 마시는 거 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차(茶)가 필요했는데 일본과 함께 차(茶) 나무가 유일하게 생장하고 거기에 일본과 달리 무엇이든 끓여내도 깨지지 않는 청동기까지 만들어 내던 우리 민족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찻잎들을 가공해 차즙(茶汁)으로 만드는 기술자들이 넘쳐났던 우리나라에서 차죽(茶粥)을 만들어 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였다. 한반도와 함께 차(茶) 나무가 생장해 찻잎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던 일본도 차죽(茶粥)을 만들어 먹을 수 있었지만 그러나 일본은 우리처럼 차죽(茶粥)을 만들어 먹지 못했다. 이유는 차죽(茶粥)을 끓일 그릇이 없어서였다. 물을 끓이기 위해서는 섭씨 100도의 열(熱)에도 깨지지 않는 그릇이 있어야만 하는데 일본은 고분(古墳) 시대라고 불리는 기원후 3세기가 되어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들이 정착한 연후에야 이런 그릇들을 가질 수 있었다. 일본에서 동복(銅鍑)이라고 불리는 청동제 조리기구(調理器具)가 발견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자기 나라 영토 안에서 차(茶) 나무가 자라고 청동기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산업기반과 기술을 가진 나라는 전 세계에서 오직 우리나라뿐이었다. 이렇게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만들어 먹는 차죽(茶粥)은 설(蔎)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其名 一曰茶 二曰槚 三曰蔎 四曰茗 五曰荈. 周公云 槚 苦荼。扬执戟云 蜀西南人谓荼曰蔎. 郭弘农云 早取为荼 晚取为茗 或曰荈耳. 그 이름은 첫째는 다(茶) 요 둘째는 가(檟) 요 셋째는 설(蔎)이요 넷째는 명(茗)이요, 다섯째는 천(荈)이다. 주공(公)은 말하기를 가(檟)는 쓴 차(苦茶 또는 苦荼)이다라고 하고 양집극(揚執戟)은 말하기를 촉(蜀) 나라 서남(西南) 사람들이 차(茶)를 설(蔎)이라 하더라고 말했으며 홍농(郭弘農=郭璞)은 말하기를 일찍 딴 것을 다(茶)라고 하고 늦게 딴 것을 명(茗)이라고 하며 혹 일설에는 천(荈)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 육우(陸羽)의 다경(茶經) 중에서
서기 780년경에 다경(茶經)이라는 책을 써서 차(茶)에 관한 모든 것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받는 당(唐)나라의 육우(陸羽)는 그의 책에서 차(茶)를 달리 부르는 이름들을 소개했는데 그 이름들을 살펴보면 도(荼), 가(檟), 명(茗), 천(荈), 설(蔎)등이었다. 이런 육우의 설명을 기준으로 볼 때도 가장 특이한 건 설(蔎)이다. 차, 다, 명, 천(荈) 같은 이름들은 찻잎을 수확하는 시기, 즉 일찍 땄느냐 아니면 늦게 땄느냐 하는 채엽 시기를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이었고 또한 가격(價格)이란 말을 만들어 낸 가(檟)라는 차(茶)의 다른 이름은 차(茶)의 약효를 결정해 주는 아미노산인 테아닌(Theanine) 성분이 많이 함유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 주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었다. 테아닌이 많이 함유되어 단 맛이 나는 차(茶)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생긴 이름이 가였다. 이렇듯 차(茶)의 품질을 나타내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다른 이름들과는 달리 설은 특정한 지역의 사람들이 차(茶)를 부르는 이름이라고 육우(陸羽)는 그의 책 다경(茶經)에 전한(前漢) 학자인 양웅(揚雄)의 말을 인용해 기록해 놓았다. 촉(蜀)의 서남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차(茶)를 설이라고 불렀다는 양웅의 기록을 되새겨보면 촉(蜀)이란 지역이 옛날엔 중국 사천성(四川省)을 가리켰으니 서남지역이라면 지금의 성도(成都) 지역이 될 텐데 이곳은 독특한 청동기 문화로 유명한 삼성퇴(三星堆) 문화가 꽃 피웠던 지역이었다. 상(商) 나라와 같은 시기에 성도(成都) 지역에서 꽃피웠던 삼성퇴 문화는 차(茶) 나무를 의미하는 생명의 나무를 연상시키는, 청동기로 만들어진 3미터에 달하는 나무 유물이 발굴되어 더욱 유명해진 독특한 고도의 청동기 문화가 꽃 핀 지역이었다. 주공(公)과 사마천(司馬遷)을 비롯한 중국의 그 어떤 역사가들도 그 존재를 기록해 놓지 않은 상(商) 나라의 청동기를 능가하는 뛰어난 청동기 문명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전한(前漢) 선제(宣帝)에게서 야생 차나무가 자라는 지역을 찾아 차(茶) 나무를 인공재배하라는 명령을 받은 보혜선사 오리진이 야생 차나무를 찾아내어 인공재배에 성공한 아안의 몽정산이 가까이에 있는 지역이었다. 이런 역사를 종합하면 설(蔎)이란 명칭은 성도(成都)에서처럼 차(茶) 나무가 생장하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차(茶)를 부를 때 사용하는 특수한 이름이라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설(蔎)이라는 한자의 갑골문을 보면 설(蔎)이라는 차(茶)의 또 다른 이름이 차(茶)로 만든 차죽, 즉 tea broth를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이라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풀 초변 밑에 말씀 언변과 몽둥이 수변이 좌우로 배열된 형태의 설이라는 글자는 찻잎을 시루에 차곡차곡 쌓은 후 찌고 그 후 다시 절구에 절구공이로 찧어 압착해 즙을 내고 이 즙(汁)을 입 구자로 표현된 그릇에 받아내는 모습을 상형한 글자라는 것을 유추해 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설(蔎)은 찻잎들을 가공해 만드는 차(茶) 중에서 즙(汁) 형태로 즉 주스로 만들어진 차(茶)를 부를 때 쓰는 이름이었다. 차즙(茶汁) 즉 차주스(tea juice)를 우리 민족은 설(蔎)이라고 불렀는데 설날은 이런 차즙(茶汁), 차주스인 설(蔎)에 더 많은 찻잎들을 넣어 걸쭉한 죽(粥 broth)으로 만들어 조상님들께 올려 이름 지어진 명절이었다. 차주스(tea juice)인 설(蔎)에 더 많은 찻잎을 넣어 죽(粥)처럼 걸쭉하게 만든 설(蔎)을 차례상에 올리면서 차죽(茶粥)은 차주스와는 다른 우리 민족의 또 다른 기술이 되었고 그래서 이 차죽(茶粥)은 땅의 젖이라는 뜻의 쿠[ku], 구 [gu]와는 결이 다른 부여[Bu Yu]라는 나라 이름을 가져오게 한 중요한 유래가 되었다. 영어로 죽(粥)을 브로쓰(broth)라고 발음하는 연유였다. 이렇듯 우리 민족의 고유 풍속들과 나라 이름들은 차(茶) 나무와 그 잎인 찻잎을 가지고 차(茶)를 만드는, 차(茶) 산업에 대한 이해 없이는 결코 해석할 수 없다. 떡차라 불리는 떡 모양으로 만들어진 병차(餠茶)와 벽돌 모양으로 만들어진 전차(磚茶)가 고형차(固形茶)라면 차주스(tea juice)인 차즙(茶汁) 형태의 설(蔎)은 액상차(液相茶)를 말하는 거였다. 따라서 설날은 액상차(液相茶)인 설(蔎)을 조상님들께 바치는 차례(茶禮)를 모시는 날이기에 생겨난 이름이다. 이렇게 차죽(茶粥), 차즙(茶汁)인 차수프(tea soup), 차주스(tea juice)를 뜻하는 설(蔎)을 만들어 내는 특별한 기술은 우리 민족을 차주스 만드는 사람들이란 뜻의 주스(Jus) 즉 주신(珠申)으로 불리게 했고 차수프를 만드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숙신(肅愼)이라 불리게 했다. 차수프를 더욱 농축한 차죽(茶粥) 즉 브로쓰, 브라쓰(broth)를 만든 후에는 부루(夫婁), 부여(夫餘)로 불렸다. 이렇듯 고대 우리나라 이름들이었던 조선과 부여의 기원은 바로 이 차주스(tea juice)와 차브로쓰(tea broth)인 설(蔎)에 있었다.
설을 쇠다, 추석을 쇠다 같이 명절을 보내는 것을 우리 민족은 쇠다고 말하는데 이 쇠다는 설(蔎)을 만드는 작업 과정을 말하는 것이었다. 찻잎들을 즙(汁)으로 만들려면 시루에 찐 찻잎들을 엄청난 압력으로 압착(壓搾) 해야 했는데 이렇게 시루에 찐 찻잎들을 압착(壓搾)하는 작업을 쇠(刷)하다고 불렀다. 인쇄(印刷)하다고 할 때의 그 쇄(刷)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