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샨과 가야, 쿠다라와 낙랑, 그리고 부여

by 역맥파인더

金庾信 王京人也. 十二世祖首露 不知何許人也. 以後漢建武十八年壬寅 登龜峯 望駕洛九村 遂至其地 開國 號曰加耶 後改爲金官國. 김유신은 경주사람(王京人)이었다. 그의 12 세조 수로왕(首露王)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그는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 임인(서기 42)에 구봉(龜峰)에 올라가 가락(駕洛)의 9촌(村)을 바라보고, 드디어 그곳에 가서 나라를 열고 이름을 가야(加耶)라 하였다. 후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 三國史記(삼국사기) 권제 41 열전 제1 김유신 (상) 중에서

삼한관경(三韓管境)의 위치와 낙랑 부여, 북부여의 위치. 마한의 실제 강역


차(茶) 나무가 자라지 않는 중국 땅에 차(茶) 나무를 인공재배((人工栽培)해 중국을 차(茶) 생산국으로 만들겠다는 전한(前漢) 선제(宣帝)의 야망이 드러난 기원전 69년, 월지인(月氏人)들은 이제 더 이상 역사 속에 숨어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채 자신들이 구축한 세계 질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음을 절감했다. 자신들이 지원한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과 흉노(匈奴)에게 배신당해 천오백년을 공들여 키워온 하서회랑(河西回廊) 무역로(貿易路)에서 쫓겨나 기원전 167년부터 박트리아(Bactria)와 소그디아나(Sogdiana) 지역에 흩어져 동서무역(東西貿易)을 중개하며 살던 월지(月氏)의 다섯 부족이 중국의 차(茶) 나무 인공재배라는 사변적 사태에 맞서기 위해 단일 제국으로 통일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용의주도하고 음흉한 선제(宣帝)는 차(茶) 나무 인공재배를 통한 차(茶) 생산국으로의 진입과 동시에 대륙의 동서무역로(東西貿易路) 장악에 나서기 시작했다. 중국 역사 최초로 동서무역로(東西貿易路)상에 중국군(中國軍)의 주둔(駐屯)이 시작된 거였다. 기원전 68년 선제(宣帝)는 군대를 파견해 동서(東西) 무역로의 중요한 관문인 지금의 투루판(Trupan)에 있는 차사국(車師國)을 점령하고 군대를 주둔시키며 정길(鄭吉)을 호선선이서교위(護鄯善以西校尉)에 임명했다. 노골적으로 자신들이 서역남로(西域南路)라 부르는 동서무역로(東西貿易路)를 노리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 관직명(官職名)이었다. 월지(月氏)로서는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서역남로(西域南路)에는 월지(月氏)가 절대로 뺏길 수 없는 우전국(于闐國)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호탄(Hotan 和田)이라고 부르는 지역에 터 잡은 우전국(于闐國)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첫 번째 패자(霸者)였던 제(齊) 나라 환공(桓公)이 화폐(貨幣)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고 묻는 질문에 화폐(貨幣)로 쓸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로 관중(管仲)이 답한 우 씨(禺氏)의 옥(玉)을 생산하는 나라였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서쪽에 위치해 지금은 누란(樓蘭)이라고 알려진 선선(鄯善)과 동서로 연결되어 후일 서역남로(西域南路)라 불린 동서무역로(東西貿易路)의 기둥이 되는 호탄은 그러나 단순히 옥(玉 Jade)을 생산하는 무역로상(貿易路上)의 요충지(要衝地)가 아니었다. 우리 민족이 환국(桓國)과 배달국(倍達國), 고조선을 거쳐 오는 동안 내내 개척한 몽골고원 북쪽의 평양(平壤)과 아사달(阿斯達) 그리고 아스타나(Astana)를 연결한 초원로(草原路)라 불린 전통의 동서무역로(東西貿易路)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천산산맥과 타클라마칸 사막, 곤륜산맥(崑崙山脈)이라는 거대한 자연 장애(障礙)를 극복하고 서역(西域) 남로(南路)와 북로(北路)라는 동서무역로(東西貿易路)를 개척해 낸 사람들은 우루(Ur 虞婁)라고 불렸던 수메르인들이었다. 사마천(司馬遷)이 자신이 쓴 사기(史記)에 월지(月氏)로 기록한 사람들이다. 월지의 월(月)은 중국말로 위에 [yue]라고 발음되고 루[lu]라고도 발음되는 글자인데 월(月)이 위에 [yue]라고 발음되는 이유는 그들이 아카드말로 에아(Ea)라고 부르는 엔키(Enki) 신(神)을 주신(主神)으로 섬기는, 찻잎을 다른 여러 약초들과 함께 고깔처럼 생긴 그릇에 넣고 압착(壓搾)해 즙(汁)을 내어 주스(Juice)로 만들어 먹었기에 위[yu]라고 불린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몽골 볼강 아이맥의 볼강(Bulgan)시에 남아있는 유적들. 제단이 정상부에 설치되어 있는 흙산과 이정표로서의 탑이 보인다.


코탄(Khotan)이라고도 불렸던 지금 호탄이라고 불리는 이 도시를 눈이 깊고 코가 높은 다른 서역인들과 달리 중국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모습의 호탄 사람들은 그러나 호탄이라고, 우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토카라(Tochara) 말을 쓰는 다른 서역인(西域人)들과 달리 간다라(Ghandara)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쓰는 말과 같은 말을 썼던, 삼국지 위지 서역전의 기록에 따르면 중국인(華夏)과 겉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았던 호탄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쿠스타나(Kustana)라고 불렀다. 산스크리트어로 대지의 가슴, 즉 땅의 젖이란 말이었다. 육상무역파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황제가 된 당(唐) 태종(太宗)의 지원으로 인도 천축국(天竺國)과 서역(西域) 여러 나라를 두루 여행하며 얻은 삼장법사(三藏法師)라는 권위로 해상무역의 유리함을 설파하는 천태종(天台宗)을 억누르기 위해 법상종(法相宗)을 개창한 고승(高僧) 현장(玄奘)이 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는 호탄(Hotan)을 쿠스타나를 음차(音借)한 구살단나(瞿薩旦那)로 기록하고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대지의 가슴, 땅의 젖이라는 쿠스타나(Kustana)는 곧 지유(地乳)를 말하는 거였다. 우리 민족이 달(月)의 산(山), 루왜은조리(Ruwenzori)에서 마고(麻姑)와 궁희(穹姬), 소희(巢姬)등 삼신할머니가 다스리던 곳에서 살았을 때 먹었던 땅에서 나는 젖. 지유(地乳). 생명의 나무인 차(茶)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샘물(乳泉)을 뜻하는 땅의 젖. 우리 민족의 창세기(創世記)가 기록되어 있는 박제상(朴堤上) 선생이 쓴 사서(史書), 징심록(澄心錄) 부도지(符都誌)에 기록된 마고대성(麻姑大城)과 실달성(實達城), 허달성(虛達城)이 있던 산(山 shan)에서 먹던 그 지유(地乳)가 나는 곳이 고탄(Khotan)이라고도 불렸던 호탄(Hotan)이었다. 일본인들이 백제를 쿠다라(kudara)라고 기록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산스크리트어로 쿠(ku)는 젖(乳) 즉 주스인 즙(汁)을 뜻했고 다(da)는 우리 민족이 차(茶 cha)를 달리 부르는 말인 다(茶)를 의미했다. 라(ra)는 주다, 수여하다(granting, bestowing)란 뜻이어서 결국 쿠다라(くだら)로 기록된 백제는 바로 차즙(茶汁)이란 주스, 넥타(nectar)를 세상에 보급하는 나라이기에 붙여진 국호였다. 이런 장구(長久)하고도 혁혁(赫赫)한 수메르인들의 역사가 새겨져 있는 호탄을 넘보는 한(漢) 나라를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월지(月氏)였다.


월지(月氏)가 개척한 무역로(貿易路)들을 뺏으려는 한(漢) 나라의 점증(漸增)된 노력은 흉노(匈奴)의 분열(分裂)을 더욱 부채질했고 결국 흉노는 내란(內亂)에 휩싸였다. 무역로(貿易路) 들을 지키라고 월지(月氏)에 의해 용병(傭兵)으로 고용(雇傭)된 흉노들이 주인을 배신하고 내쫓은 지 백 년 만에 사분오열되어 내전에 돌입하게 된 거였다. 원래 진한(辰韓)의 남쪽 경계에 동서로 연결되어 무역로를 관리하며 살던 월지(月氏)가 둘로 쪼개져 지금의 감숙성의 월지와 산서성의 동호(東胡)로 나누어진 것도 진시황(秦始皇)의 배신(背信)으로 월지가 속수무책(束手無策)이던 사이 오르도스 지역을 치고 들어온 흉노의 두만선우(頭曼單于) 때부터의 일이었다. 천산남로(天山南路)라 불린 서역북로(西域北路)를 지키던 흉노의 일축왕(日逐王)이 내전에 지친 나머지 기원전 60년에 한(漢) 나라에 투항해 버리자 한(漢) 나라는 그 즉시 호선선이서교위(護鄯善以西校尉) 정길(鄭吉)을 호차사이서북도(護車師以西北道)로 임명해 서역북로(西域北路)와 남로(南路)를 모두 관장하는 실질적인 서역도호(西域都護)가 되게 했다. 호선선이서교위가 누란(선선 鄯善) 서부지역을 지키는 교위(校尉)라는 관직(官職)이라면 호차사이서북도는 투르판(Trupan 車師) 서부지역에 있는 서역북로(西域北路)를 지키는 관직이었다. 월지가 피땀으로 건설한 서역남로(西域南路) 뿐 아니라 서역북로(西域北路)까지 차지하겠다는 한(漢) 나라의 의도를 노골화한 거였다. 동서무역로(東西貿易路)인 서역남로(西域南路)의 기지(基地 Base)가 호탄(Hotan)이라면 서역북로의 기지(基地)는 쿠차(Kucha)였다. 쿠차라는 도시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차(茶)로 만든 젖(乳), 즉 찻잎을 압착(壓搾)해 즙(汁)을 내어 만든 주스(juice), 넥타(nectar)를 뜻했다. 찻잎을 압착(壓搾)해 즙을 만들고(Yu 餘) 이 즙(汁)을 다른 먹을거리와 합쳐(Bu 扶) 죽(broth 粥)과 국(soup 羹)으로 만들어 먹는 사람들이 개발한 도시였기에 붙여진 이름이 쿠차(Kucha)였다. 차(茶)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땅의 젖(地乳)이라는 의미를 분명히 나타내는 산스크리트어 쿠차(Kucha)를 한자로 음차(音借)해 구자(龜玆)라고 기록한 건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였다. 김수로왕(金首露王)을 포함한 가야(伽倻)의 여섯 금란(金卵)이 나타난 곳이 구지봉(龜旨峯)인 연유이고 김수로왕과 그 형제들에 대한 환영가가 구지가(龜旨歌)인 까닭이었다.

칡뿌리의 색깔은 갈인 또는 토인이라 불렸던 사람들의 피부색과 비슷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환웅이 풍백,우사,운사, 삼천무리와 함께 하강했다는 신시는 볼강이다.


땅의 젖(地乳)이란 뜻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해 쿠르스탄(Kurstan)이라 부르던 곳을 헤티안(Hetian)이라고 바꿔 불러 화전(和田)이라 기록되게 한 연유(緣由)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색이 어두운 흙빛을 한 토인(土人)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흑인과 토인(土人)을 구분했는데 흑인에 비해 그 까만 정도가 훨씬 덜한 토인(土人)의 피부색은 토색(土色)이라 하여 칡뿌리 색과 비슷했기에 갈인(葛人)이라고도 불렀다. 일본어로 칡을 쿠즈(くず)라고 하는 연유인데 신라의 갈문왕(葛文王)과 갈사부여(曷思扶餘)에 나타난 갈(葛) 자도 같은 맥락으로 사용된 용어였다. 우리나라 말로는 갈(曷)로도 알(曷)로도 발음되는 曷자는 중국 발음으로는 헤 [he]인데 토인(土人)의 어두운 흙색(土色) 피부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갈(曷) 자를 같은 헤 [he] 발음이 나는 화(和) 자로 바꿔 기록하는 바람에 생긴 오기(誤記)가 화전(和田)이었다. 이와 같은 오기(誤記)는 신라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도 발견되는데 원래는 토인과 백인이 섞여 있는 부족대표들이 함께 모여 국정을 논의하는 회의였기에 갈백회의(葛白會議)라고 했던 것을 동일한 과정을 거쳐 화백회의로 그 음을 바꿔 기록한 거였다. 부모가 둘 다 백인이어도 자식은 토색 피부를 가진 갈인을 낳을 수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던 특수한 사정 때문에 생겨난 여러 이름이었다. 화전(和田)의 전(田)이란 글자는 스탄(stan)처럼 찻잎(茶葉)을 구할 수 있는 땅을 나타낸 글자였다. 우전(于闐)이라고 하는 호탄의 또 다른 이름은 토색(土色)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뜻으로 사용한 헤티안(Hetian)을 변경해 옥(玉)이 많이 나는 곳이라며 옥전(玉田)이라고 지명을 바꾼 후 옥(玉) 자와 전(田) 자를 각각 중국어로 같은 발음이 나는 우(于) 자와 전(闐) 자로 다시 바꿔 사용해 나온 이름이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삼국지 위지(魏志) 서역 전에 우전(于闐)이란 이름으로 기록된 쿠르스탄(Kurstan)은 원래 그 도시이름이 가진 지유(地乳)라는 뜻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쿠차(Kucha)라는 원래 이름을 음차로 구자(龜玆)라고 기록한 것은 쿠스타나(Kustana)를 우전(于闐)으로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엄밀하기까지 한 기록이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후한 말 채옹(蔡邕)에 의해 묘호(廟號)가 취소된 후한(後漢)의 황제들이 월지 사람들이었던데 기인하는 것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추후 자세히 논한다.)

신라의 영토확장 역사는 마한의 강역 밖에서 이루어졌다. 박혁거세가 다스리던 시절의 마한왕은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알려진 추모였다. 당시 마한은 부여와의 관계때문에 낙랑으로도 불렸다.


다섯 부족의 느슨한 연합국가였던 월지가 단일한 통치체로서의 제국(帝國)을 세워 그 통일제국의 국호(國號)로 선포한 쿠샨(Kushan)은 산스크리트어로 젖(乳)이라는, 즙(汁)이라는 뜻을 가진 쿠(Ku)가 땅에서 샘솟던 달의 산(Shan)을 가리키는 국호였다. 김수로왕과 그의 다섯 형제들, 그리고 김수로왕의 배우자로 건너온 허황후(許皇后)와 그녀의 오빠 장유화상(長遊和尙) 또한 바로 이 쿠샨(Kushan) 제국에서 파견한 사람들이었다. 장유화상(長遊和尙)이란 이름으로 기록된 허보옥(許寶玉)은 그가 멀리(長遊) 호탄(和田)에서 온 쿠샨제국의 황족(皇族)인 귀상부족(貴霜部族) 사람이란 걸 알려주고 있고 찻잎을 가공하는 공장이 이젠 돌로 만든 고인돌(宮)이 아니라 목재로 만든 궐(闕)로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존재였다. 김해의 장유사(長遊寺)와 하동의 칠불사(七佛寺)는 쿠샨제국이 한반도 남쪽 지역에 어떤 의도로 진출했는지 보여주는 또한 쿠샨의 대승불교가 언제 한반도에 전파되었는지 알게 해주는 증거였다. 실질적인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가 꾸려진 투르판(Turpan)에 그에 걸맞은 한(漢) 나라 군대가 차사성(車師城)에 주둔하면서 월지(月氏)의 결단은 더욱 재촉당하고 있었다.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한(漢) 나라의 차(茶) 산업 진출에 따른 시장 교란을 통제하고 나아가 한(漢) 나라가 목표로 하고 있는 차(茶) 산업 독점을 막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서둘러야 했던 월지(月氏)의 통일제국 건설이었다. 지금의 영국 서남부 콘월(Cornwall) 지역에서만 채굴되는 주석(朱錫)을 가지고 들어와 구리와 섞어 청동(靑銅)을 만들어 내고 이후 구할 수 없었던 주석(朱錫) 대신 아연(亞鉛)을 섞어 두석(豆錫 놋쇠)을 만들어 다른 월지(月氏)들을 누르고 패권을 거머쥔 귀상족(貴霜族) 흡후(翕侯)는 동쪽의 북부여(北扶餘)와 접촉해 한(漢) 나라의 차(茶) 나무 인공재배를 최대한 방해해 지연시키는 방안을 강구하도록 지시했었다. 북부여(北扶餘)는 얼마 안 있어 박혁거세가 이끄는 원정군을 파견하여 트리켈(Triskele)이라 불리는 나선형 (螺旋形) 문양을 상징으로 삼는 사람들(켈트족)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을 점령하고 왜(倭)에서 생산되는 찻잎(茶葉)을 독점했다.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성씨가 박(朴)이 된 것은 태어난 알 모양이 박(朴)과 비슷해서가 아니고 부여(扶餘)의 부(扶) 자가 박(朴)과 같은 발음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민족이 [b] 발음과 [p] 발음, [f] 발음을 구분하지 않는 연유에서 나온 소이였다.

백제의 활동이 마한 강역 밖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 금동관 발견지들. 출처 EBS 다큐


후일 북부여(北扶餘)가 나선형(螺旋形) 문양족(켈트)을 정벌했다 하여 서라벌(徐羅伐)이라 불린 곳에서 박혁거세는 왜(倭)로부터 들어오는 찻잎을 독점해 차(茶)로 만들어 한(漢) 나라와 맞설 수 있는 흉노 세력을 지원했다. 그 결과 한(漢) 나라의 꼭두각시였던 악연구제 선우(單于)가 허려권거 선우(單于)의 아들들에게 축출되었고 기원전 57년 당시 북부여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지역은 흉노의 좌현왕이 된 허려권거 선우(單于)의 장남 질지골도후(郅支骨都侯)에게 분봉되었다. 흉노 전체의 선우(單于)가 된 동생 호한야(呼韓邪)와는 달리 특별히 한(漢) 나라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질지골도후(郅支骨都侯)였기에 북부여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협력자로 선정되었고 그로 인해 북부여와 서라벌의 박혁거세로부터 황금과 똑같은 가치를 지닌 차(茶)를 지원받은 질지골도후가 동생 호한야(呼韓邪)를 누르고 선우(單于)가 된 건 당연했다. 기원전 54년 다섯 명의 선우(單于)가 난립하며 분열했던 흉노제국은 질지선우(郅支單于)로 통일되었다. 질지선우(郅支單于)가 지금은 부르칸 칼둔(Burkhan Khaldun)으로 불리는 백악산아사달 남쪽의 케를렌(Kerlen) 강변의 흉노제국의 도읍인 선우정(單于庭)을 점령했을 때 모든 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눈에 가시 같은 투르판에 주둔한 한나라 군대를 없애기 위해 질지선우(郅支單于)가 이끄는 흉노군을 월지가 서역으로 동원한 이후부터 상황은 꼬이기 시작했다. 기원전 49년 지금의 투루판에 있는 한(漢) 나라의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공격하기 위해 출정한 질지선우(郅支單于)는 투루판(吐鲁番)을 그냥 지나친 후 강거와 오손이 차지하고 있는 견곤(堅昆)이라 불렸던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지역으로 쳐들어갔다. 결국 질지선우가 이끄는 흉노군은 당나라 고선지가 사라센군에게 패배한 탈라스(Talas) 전투로 유명한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탈라즈(Taraz)에 눌러앉아 서역(西域)의 오아시스 국가들을 약탈했다. 질지선우의 배신에 대해 북부여에게 그 책임이 물어질 것은 당연했다.


내부적으로 통일에 반대하는 다른 부족들을 억누르면서 쿠차(Kucha)의 턱 앞까지 진출한 한(漢) 나라 군사들을 내쫓기 위해 귀상(貴霜) 흡후(翕侯)가 채택한 대안(對案)은 용병(傭兵)으로 흉노를 불러들이는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기원전 49년 흉노 질지선우(郅支單于)의 서역(西域) 출정(出征)이 이루어진 연유였으나 그러나 그 결과는 처참했다. 말이 끄는 전차(chariot)가 아니라 말 등에 올라타 말달리며 화살을 쏘고 검을 휘두르며 싸웠던 초원의 전사(Comitutas)들이 공유했던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는다는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상무정신(尙武精神)을 잃어버린 흉노는 돈에 눈먼 말 탄 망나니에 불과했다. 투루판에서 출격한 한(漢) 나라 군사들에게 패배한 흉노 질지선우(郅支單于)는 한(漢) 나라 대신 피부색이 어두워 우리 민족이 토인이라 부른 오손(烏孫)과 소그드인인 강거(康居)를 짓밟으며 천산북로(天山北路)라 불린 동서무역로의 요충지인 지금의 키르기스스탄의 타라즈(Taraz)에 틀어박혔다. 한(漢) 나라 군대를 투르판에서 없애달라는 월지의 거듭된 출정 요청에도 아랑곳 않고 지금의 키르기스스탄을 지배했던 오손(烏孫)과 우즈베키스탄 동부지역과 타지키스탄 북부지역을 지배했던 강거(康居), 이싴쿨(Issyk Kul) 호수 북변지역에 물러나 있던 귀방(鬼方)들의 후손인 정령(丁靈)을 복속시켜 천산북로(天山北路) 무역로에서 나오는 이익을 갈취하고 있었다. 없느니만 못하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질지선우(郅支單于)에 대한 지원은 철회되었다. 그 여파로 질지선우(郅支單于)를 활용한 대한(對漢) 나라 정책을 입안(立案)하고 실행한 북부여(北扶餘)에 대한 쿠샨의 신뢰는 사라졌다. 북부여(北扶餘)와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대신할 사람이 필요했다. 기원전 37년 주몽(朱蒙)으로 더 잘 알려진 추모(鄒牟)가 동부여(東扶餘)에서 탈출해 고구려(高句麗)를 건국하고 왕이 되었다 기록된 연유였다.


거서간(居西干)과 불구내(弗矩內)라고 불렸던 박혁거세(朴赫居世)는 그 이름들에서 알 수 있듯 그가 가진 찻잎가공 기술력 때문에 북부여의 왕보다도 더 오래 쿠샨(Kushan)의 징계(懲戒)를 피해 살아남았다. 불구내(弗矩內)는 산스크리트어를 한자로 음차해 나타낸 글자였다. 불구내(弗矩內)의 불(弗)은 부 [bu]라는 발음으로서 산스크리트어로 땅(earth) 또는 통합시키다(to unite)라는 뜻이고 구(矩) 자는 [ju 쥐] 발음으로 주스(Juice)라는 뜻이며 내(內)는 일을 잘하다는 뜻이다. 주스(jus)라고 할 때 주[ju]라는 발음이 쥐 또는 위[yu]라는 발음으로 변화하는 이유는 산스크리트어가 고대 그리스어를 거쳐 고대 라틴어로 옮겨질 때 변형이 생겨서였다. 따라서 주[ju]와 위[yu]는 같은 글자에 대해 다른 발음을 하는 것뿐이었다. 따라서 불구내(弗矩內)의 불구(弗矩)는 땅의 주스(juice 차즙)를 즉 지유(地乳)를 뜻하는 글자였고 내(內)는 그 지유(地乳) 만드는 일을 잘한다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였다. 거서간(居西干) 또한 마찬가지여서 거서간의 거(居) 자는 주[ju] 또는 지[ji]라고 발음되는 압착 하다(to press on) 압박하다(impel) 뜻의 산스크리트어로 찻잎을 찧어 압착(壓搾)해 주스를 만드는 일을 뜻하는 글자였고 서(西) 자는 시[xi] [shi]라고 발음되는 사(師 [shi] 즉 영어로 Master 또는 Teacher 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다. 즉 찻잎으로 차(茶) 쥬스를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는 마스터란 뜻이었다. 거서간(居西干)의 간(干)은 산스크리트어로 군대(troops) 또는 무리(flocks)를 뜻하는 글자다. 따라서 거서간(居西干)은 많은 사람들에게 찻잎을 찧어 압착(壓搾)해 차주스(tea juice)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스승이라는 뜻이었다. 거서간(居西干)의 간(干)은 산스크리트어로 군대(troops) 또는 무리(flocks)를 뜻하는 글자다. 따라서 거서간(居西干)은 많은 사람들에게 찻잎을 찧어 압착(壓搾)해 차주스(tea juice)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스승이라는 뜻이었다.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박(朴)은 찻잎들을 절구에 넣고 찧어 즙을 낼 때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절굿공이(卜)를 상형한 글자였고 발음 또한 부여(夫餘)의 부(夫)와 중국어로 같은 발음이었다. 이렇듯 찻잎을 압착(壓搾)해 차쥬스(tea juice)를 만드는 것이 중요했던 이유는 그렇게 해야 암포라와 같은 용기에 담아 포도주처럼 배에 실어 멀리까지 안전하게 대량으로 실어 나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유민 고선지가 당나라 장군으로 사라센군과 맞붙어 패배한 그 탈라스(Talas) 강에서 부여와 월지로부터 지원이 끊긴 질지선우는 기원전 36년 타라즈(Taraz)로 쳐들어 온 서역도호(西域都護) 한(漢) 나라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질지선우가 폐기되던 때, 주몽으로 더 잘 알려진 추모가 북부여와 질지선우(郅支單于)를 대신할 쿠샨의 대리자로 내세워졌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환국(桓國)과 배달국(倍達國) 그리고 고조선(古朝鮮) 다음으로 그 이름을 새기고 있는 부여(夫餘)는 우리 민족이 어떻게 저 먼 가나안(Canaan) 땅의 유대인들과 민족적 기원(起源)을 함께 나누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였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가나안(Canaan)은 땅의 젖을 뜻하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쿠스타나(Kustana)와 그 뜻을 같이 하고 있었고 그들 모두는 자신들의 기원(起源)을 박제상 선생이 징심록(澄心錄) 부도지(符都志)에서 기록한 달의 산(月山)에 두고 있었다. 찻잎을 시루에 삶고 절구에 찧어 즙(汁)을 내어 그것을 주스로 먹거나 다른 채소와 함께 합쳐 국(羹)과 죽(粥)으로 먹는 문화를 개발한 사람들은 주스(Jus)라고 불리던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넥타(nectar)를 암브로시아와 함께 마시던 희랍(希臘)의 올림푸스 신들, 그리고 우리 민족뿐이었다. 우리 민족이 찻잎을 찧어 즙(汁)을 내는 방식으로 차(茶)를 가공했다는 사실은 부여(BuYu)라는 나라 이름에서 그냥 증명되는 사실이었다. 산스크리트어로 부여(夫餘 BuYu)는 모자란 찻잎을 찌고 찧어 만든 차즙(茶汁)을 기본으로 해서 다른 여러 음식 재료들과 합쳐 섞어 수프(soup)로 만들고 죽(broth)으로 만들어 먹는 것을 뜻했다. 우리 민족이 국 없이 밥을 못 먹는 습관이 생긴 연유였다. 이렇게 여러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차주스에 합쳐 좋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을 산스크리트어로는 부여(Buyu)라 했다. 산스크리트어로 부(Bu)는 존재하다, 있다(to be)는 뜻이고 여(yu)는 합치다(to unite) 또는 주스(Ju) 즉 젖이란 뜻이다. 찻잎을 찧어 차즙(茶汁), 즉 차주스를 만들고 거기에 여러 다른 먹을 것들을 합쳐 지유(地乳)를 만든다는 뜻이었다. 차즙(茶汁)을 만드는 방법은 아브라함의 유대인들이 찻잎을 가공하는 방법과 동일한 방법이었다. 결국 부여(夫餘) 사람들의 선조(先祖)는 수메르의 우르(Ur)에 그 기원(起源)을 두고 있었다.


기원전 2004년 메소포타미아의 우르(Ur)에서 사라진 수메르인들은 일부가 아브라함처럼 생명의 나무인 차나무를 찾아 가나안(Canaan)으로 떠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은 본격적인 해상무역로를 건설하기 위해 인더스강 유역으로 떠났다. 메소포타미아에서처럼 성공적인 문명을 인더스강 유역에서 해상무역을 통해 다시 꽃 피운 수메르인들에게 육상무역을 고집하는 아카드인(Akkadian)들의 공격은 집요했다. 바퀴(輪 wheel)라는 뜻의 아라(ara)와 이동하다(to move)란 뜻의 안(Yan)으로 이뤄진 아리안(Aryan)이라고 불린 육상무역파들에게 또다시 그들의 해상무역 터전을 뺏긴 수메르(Sumer)인들은 이제는 수메르인이 아닌 우르(Ur)인이 되어 다시 동쪽을 향해 유랑(流浪)을 시작했고 거대한 벽처럼 늘어선 히말라야 산맥을 따라 끝없을 것 같은 희망 없는 동쪽으로의 유랑(流浪)을 계속해야 했다. 기원전 1700년경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인더스로부터의 엑소더스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북쪽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passage)가 있는 지금의 네팔과 부탄 사이에 있는 시킴(Sikkim) 지역을 통과해 그들에게 차(茶)를 보내주던 고조선의 강역까지 가서야 끝이 났다.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티베트 고원을 가로질러 선발대가 고조선의 강역에 도착해 국경선 근처에 정주(定住)를 허락받은 기원전 1652년까지 우르(Ur)를 떠난 수메르인들의 오랜 유랑(流浪) 생활은 그들에게 또 하나의 이름을 갖게 했는데 그것이 바로 낙랑(樂浪)이었다. 정처(定處) 없이 유랑(流浪)하는 우르인이라는 뜻의. 그러나 우르인들이 낙(樂) 자를 쓰는 루[le]라고 불린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이 차(茶) 나무에서 찻잎을 수확하는 독특한 방법 때문이었다. 우르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래로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찻잎 수확법인 자귀를 이용한 가지 절단법을 통해 찻잎을 확보했다. 대부분의 차(茶) 나무들이 근접하기 어려운 곳에서 키 큰 나무로 자라는 특성상 개발된 전통적 방법이었다. 그런데 우르인들은 차(茶) 나무에서 찻잎을 딸 때 자귀를 사용해 가지를 절단하지 않고 차(茶) 나무에 직접 올라 손으로 찻잎 하나하나를 따는, 산스크리트어로 루(lu 婁)라고 하는 플럭킹(plucking) 방식을 사용했다. 낙랑(樂浪)이라는 용어는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차(茶) 나무에 직접 올라가 손으로 찻잎을 따는 독특한 찻잎 수확 방법을 사용하는 정처 없이 유랑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그런 낙랑(樂浪)이 드디어 확보한 정처(定處)가 중국 최대의 염호(鹽湖)라는 청해호(青海湖) 주변의 염수가였다.


수메르인들이 동아시아의 역사에 처음 등장한 건 기원전 1733년이었다. 몽골 원나라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고려의 차(茶) 산업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모든 고려인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분투하던 고려말에 죽은 후 문정(文貞)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을 정도로 나라의 신임을 받았던 행촌(杏村) 이암(李嵒) 선생이 편찬한 단군세기에는 그 해 고조선 궁궐 소나무에 황학(黃鶴)이 날아들었다고 기록해 수메르인들의 역사적인 동아시아 지역 입성(入城)을 알리고 있었다. 고조선의 중흥 군주였던 13대 단군 흘달(屹達)이 즉위한 지 50년째 되던 해였다고 단군세기에 기록된 기원전 1733년에는 오성취루(五星聚婁: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다섯 행성이 근접한 곳에 모이는 천문 현상)라는 또 하나의 특기할 만한 사실도 함께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단군세기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전인 기원전 1767년에 흘달(屹達) 단군이 중국 하(夏) 나라의 멸망과 상(商) 나라의 건국에 깊숙이 주도적으로 개입한 뜻밖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하(夏) 나라의 걸왕(桀王)을 돕다 결국에는 상나라의 탕왕(湯王)을 지원해 하(夏) 나라를 멸망시킨 역사가. 게다가 흘달단군은 하상(夏商) 왕조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군대를 파견해 하(夏) 나라의 영토였던 황하 이남의 지금의 섬서성 지역에 있는 빈(邠)과 기(岐)의 땅까지 점령했는데 그때 동원된 군대는 견군(畎軍)과 낙랑(樂浪)의 군사였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단군세기(檀君世紀)의 이 기록들은 낙랑(樂浪)이 견융(犬戎)처럼 사람들을 가리키는 단어이지 지역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견융(畎戎)은 사냥개를 토템으로 하는 켈트(Celt)족 중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의 밀라노에서처럼 운하(運河) 같은 관개(灌漑) 시설을 건설할 줄 알았던 켈트족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낙랑(樂浪)은 말 그대로 정처(定處) 없이 유랑(流浪)하는 우르(Ur)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차(茶) 나무의 일창이기(一槍二旗)를 상형한 글자인 낙(樂). 출처 네이버 한자사전

후일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 의거(義渠)라고 기록된 사람들이 운하 같은 관개시설 설치에 능한 견융(畎戎)이었다. 차(茶) 나무를 찾는 발군의 능력을 지닌 사냥개 견(犬)자에 관개시설을 갖춘 땅을 의미하는 밭 전(田)자를 추가한 연유였다. 낙랑(樂浪)의 낙(樂)이 르[le]라고 발음되기에 자신들을 우르(Ur)에서 왔다고 하는 사람들을 낙(樂)이라고 옮겼지만 그러나 우르(Ur)에서 온 사람들을 다른 르[le] 발음이 나는 글자가 아닌 굳이 낙(樂) 자로 옮긴 특별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르(Ur)에서 온 사람들을 루[lu 樂]족이라고 강조해 부른 것은 그들의 독특한 찻잎 채취(reaping) 방법 때문이었다. 우루(Ulu) 사람들은 찻잎을 채취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모두 사용하는 자귀(scythe)를 쓰지 않고 직접 나무에 올라 어린잎들만을 손으로 직접 뜯어 따는(pluck) 채취(採取)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 산스크리트어로 손으로 뜯다, 따다(pluck)는 말이 루[lu]였기에 우르(Ur)인들은 우루(Ulu) 또는 루(lu)족이라고 불렸다. 몽골인들의 울루스(Ulus)와 투르키예인들의 울루스(Ulus)는 모두 이 우루(Ulu)에서 파생된 단어들이다. 이런 우르인들을 가리켜 낙랑(樂浪)이라고 낙(樂) 자를 쓴 이유는 발음이 같아서 뿐만 아니라 낙(樂) 자가 일창이기(一槍二旗)의 찻잎들이 달린 차(茶) 나무를 상형한 글자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르(Ulu)인들을 낙랑(樂浪)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들이 차(茶) 나무에서 찻잎을 딸 때 자귀로 가지를 잘라 찻잎을 채취하지 않고 손으로 뜯어 따는 그것도 일창이기의 잎들을 뜯어 따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흘달(屹達) 단군 때 발생한 일들이라고 단군세기에 기록된 사건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우르(Ur)를 떠나 인더스(Indus) 강 유역에 모헨조다로(Mohenzo-daro) 같은 도시들을 건설해 살던 수메르인들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고조선 강역(疆域)으로 유랑해 들어와 낙랑(樂浪)이라는 이름으로 떠돌고 있었고 그런 그들은 자귀로 가지를 베어 찻잎을 채취하는 게 아니라 손으로 직접 일창이기(一槍二旗)의 찻잎들을 주로 따는 독특한 찻잎 채취법으로 인해 루(lu 婁)라고 불렸다는 사실을 기록한 거였다.


흘달(屹達) 단군이 재위하던 시절, 하(夏) 나라의 걸왕(桀王)은 당시 산동의 마한(馬韓) 사람 유시 씨(有施氏)와 손잡고 대규모의 찻잎 건조시설인 경궁(傾宮)과 대규모의 차(茶) 저장시설인 장야궁(長夜宮)을 새로 건설하고 또한 강을 이용한 수운(水運)을 발전시키기 위해 궁궐 뒤에 깊은 연못을 파고 배를 띄워 조선(造船)과 항주(航走) 기술을 축적시키고 있었다. 비를 피할 수 있게 지붕이 설치된 경궁(傾宮)은 경사지게 건축되어 항상 시원한 바람이 그치지 않고 불도록 고안되었는데 이런 바람은 건조하기 위해 널어둔 찻잎들의 수분과 온도를 떨어뜨려 찻잎의 품질을 높여 주었다. 이렇듯 경궁(傾宮)은 차(茶)를 만드는 당시 최신 특수 시설이었다. 또한 찻잎의 온도를 높이고 산화(酸化)를 촉발하는 햇빛을 차단해 늘 캄캄하게 만들었다 하여 장야궁(長夜宮)이란 이름이 붙은 건축물 또한 찻잎과 차(茶)를 오랫동안 산화(酸化) 없이 보관할 수 있는 특수 저장시설이었다. 배(舟)로 차(茶)를 운반할 경우 아무 곳에나 정박할 수 없는 수운(水運)의 특수성과 화재(火災) 염려 때문에 배안에서 조리(調理)할 수 없는 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언제 어디서든 별다른 준비(準備)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는 육포(肉脯)를 대량으로 만드는 기술 또한 개발되었다. 그리고 차(茶)의 약효를 오래도록 유지시키데 있어 가장 중요한 기술인 발효(醱酵)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대량으로 동시에 빚은 술로 채운 인공 연못도 팠다. 술로 채운 연못 주변 나무에는 육포(肉脯)를 걸어 건조해 출항하는 선원들의 식량으로 지체 없이 보급될 수 있도록 준비했다. 후일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수천 년 동안 지치지 않고 지탄(指彈) 받는 걸왕(桀王)의 용의주도한 차(茶) 산업 입국(立國) 정책이었다. 게다가 걸왕(桀王)은 카라반(Caravan)들이 하(夏) 나라를 거쳐가는 차무역로(茶貿易路)를 확보하기 위한 유인책(誘引策)으로 중국의 독점품인 비단(緋緞)을 이용하기까지 했다. 하(夏) 나라 전역에서 생산되는 비단을 최대한 매집하여 비단을 사려는 서역의 차무역상(카라반)들에게 특별할인율이 적용된 비단을 판매함으로써 하(夏) 나라를 거쳐 가는 새로운 동서무역로(東西貿易路)를 만들려고 했던 거였다.


마한의 강역이었던 산동반도로 들어온 카라반들의 목적은 차(茶)와 비단이라는 것을 이용한 술책이었다. 북경과 장가구(张家口)를 거쳐 지금의 다리강가(Dariganga)인 평양, 지금의 볼강(Bulgan)인 아사달(阿斯達)을 거쳐 카자흐스탄의 아사달인 아스타나(Astana)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차무역로(茶貿易路)를 이용하는 것이 아닌 하(夏) 나라의 영토인 지금의 하남성과 섬서성을 거쳐 서역으로 가는 새로운 무역로(貿易路)를 이용하도록 특별할인율이 적용된 비단(緋緞)으로 카라반들을 유혹했던 거였다. 고조선에게 하(夏) 나라 걸왕(桀王)은 당시 아사달(阿斯達)이 독점하고 있던 차(茶) 산업에 겁도 없이 뛰어든, 황금으로 이루어지는 무역(貿易) 결제(決濟)를 비단으로도 하려고 시도한, 게다가 무역로(貿易路) 변경마저도 서슴지 않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반란자였다. 이런 하(夏) 나라 걸왕(桀王)의 터무니없는 차(茶) 산업 진출과 비단(緋緞)을 기축통화(基軸通貨, key currency)로 만들고 무역로(貿易路)를 신설하려 시도한 배경에는 후일 우루인(虞婁人)이라 불린 정처 없이 유랑 중인 낙랑(樂浪)들이 있었다. 거연해(居延海)라 불린 거연호(居延湖)와 청해호(青海湖) 남쪽 지역을 근거해 돌아다니는. 흘달(屹達) 단군은 그런 우르인들에게 결백을 증명하라며 걸왕(桀王)의 토벌에 앞장서라고 명령했다고 단군세기는 기록하고 있다.

석재(石材)로 이룬 문명의 대명사인 테페(Tepe)의 분포와 흙으로 만든 벽돌과 자기로 이룬 문명의 대명사 후리인(Hurrian)들의 분포. 출처 위키미디어


하(夏) 나라를 멸망시키고 지금의 섬서성(陕西省) 서안(西安)과 보계(寶鷄) 근처에 있는 빈(邠)과 기(岐)의 땅까지 점령한 흘달(屹達) 단군(檀君) 때 전설로 알려진 누런 빛깔의 학(鶴)이라는 황학(黃鶴)이 아사달의 궁궐 후원에 날아들었다는 기사가 단군세기에는 기록되어 있다. 황학(黃鶴)은 인도(印度 India)에 사는 학(Indian crane)을 말했다. 황학이 산다는 인도는 인더스강 유역에 수메르인들이 건설한 모헨조다로 같은 도시들을 말하는 것이었고 결국 인도에 사는 누런 빛깔의 학이 고조선의 궁궐로 날아들었다는 것은 모헨조다로 같은 인더스강 유역의 도시들에 살던 사람들이 고조선으로 이주해 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인더스강 유역에 도시들을 건설해 아라비아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해상무역로를 개척한 수메르인들이 아리안(Aryan)의 침입으로 기록된 육상무역파들의 공격을 받고 우르(Ur)에서처럼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같은 도시들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 기원전 1700년경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남단의 우르(Ur)에서 지구라트를 건설한 사람들이 사라진 건 기원전 2004년이었고 모헨조다로에서 스투파(Sutupa)와 대형저수조, 인공상하수도를 건설한 사람들이 사라진 건 기원전 1700년경이었다. 황학(黃鶴)으로 묘사된 모헨조다로의 우르(Ur) 사람들이 고조선의 궁궐이 있는 아사달(阿斯達)이라 불린 지금의 몽골 불강(Bulgan) 애막(Aimag)의 볼강(Bulgan)에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르(Ur) 사람들이 건설한 인더스강 유역 도시들은 아리안(Aryan)들에게 완전히 점령당했다. 아리안들의 학살을 피해 인더스강 유역 도시들에서 탈출한 우르(Ur)인들이 향한 곳은 두 곳이었는데 그 하나는 원래 우르인들이 원래 살았던 메소포타미아였고 다른 하나는 배달국과 고조선의 도읍이었던 아사달(阿斯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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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로 돌아간 대부분의 우르(Ur)인들은 원래 자신들의 터전이었던 페르시아해 연안지역이 아닌 유프라테스강 상류 지역에 있는 카부르(Khabur) 강 유역에 자리 잡고 우르케시(Urkesh)를 도읍으로 하여 기원전 17세기에 미탄니(Mitanni)라는 나라를 세웠다. 우르케시(Urkesh)란 수도 이름은 산스크리트(Sanskrit)어로 우르(Ur)의 최고 수뇌부(supreme portion of the head)라는 뜻이다. 먼 옛날 아리랑을 불며 헤어졌던 옛 동포들을 떠올리며 고조선의 아사달로 향한 사람들은 넘을 수 없는 히말라야 산맥과 그 산맥(山脈)에서 흘러나온 강(江) 들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이동하며 그들이 남긴 흔적들은 지금도 그대로 그 지역의 강(江)들의 이름들에 남아있다. 인도인들의 성지인 갠지스(Ganges) 강은 우리 나라말로 강들이다. 차프라(Chapra)에서 강들이란 뜻의 갠지스(Ganges) 강(江)과 합류하는 고그라(Ghaghara) 강은 우리나라말로 강하라(Ghanghara) 강(江)이다. 장강의 강(江)과 황하의 하(河)는 강하라(Ghanghara)에서 유래한 말이었다. 갠지스강 남쪽에서 갠지스강과 같은 방향으로 흐르다 프라야그라지(Prayagraj)에서 합류하는 야무나(Yamuna) 강(江)은 산스크리트어로 가야만 하는(I shall go) 강(江)이란 뜻인데 히말라야를 넘기 위한 자신들의 의지를 강물에 남기며 동진(東進)을 계속했던 우르 수메르인들의 고뇌(苦惱)를 느낄 수 있는 이름이었다. 그렇게 솟구치는 의심들을 억누르며 동진(東進)을 계속하던 그들이 식킴(Sikkim)에서 드디어 히말라야를 넘어갈 수 있는 곳을 발견하고 함께 하지 못한 채 죽어간 이웃들의 영혼을 위령(慰靈)하는 의식을 치렀다. 이후 그들은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무(慰撫)하는 의식을 씻김굿이라 불렀다.


수메르인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마지막 패권을 행사한 곳이 우르(Ur)였기에 그들은 우르사람들로 불렸고 그래서 그들이 인더스강의 모헨조다로를 탈출해 고조선 땅으로 들어왔을 때 고조선사람들은 그들을 우루(虞婁)라고 불렀다. 기원전 1652년에 우루(虞婁) 사람들 20가(家)가 조선에 와 살기를 청하니 대음(代音) 단군이 염수(鹽水) 가에 살게 허락하셨다는 단군세기의 기록은 수메르인들의 본격적인 집단적 동아시아 이주(移住)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원전 1780년은 불새로 상징되는 오백 년 기후변화주기에서 본격적인 온난화주기가 시작된 때였다. 험악해진 바다와 건조해진 기후는 수메르인들의 차(茶) 나무가 있는 동아시아로의 이주를 강제하고 있었다. 이렇게 들어온 우루(虞婁)인들이 살도록 허가받은 지역은 오늘날 사막으로 변해버린 거연호(居延湖)와 청해호(青海湖) 부근이었다. 청해호(青海湖)의 서남쪽에는 소금호수로 유명한 차카호수(茶卡盐湖)와 칼륨염으로 유명한 차미한염호(Cha'Erhan Yan Lake 察尔汗盐湖)가 연이어 있어 옛날부터 염수(鹽水)라 불리던 지역이었다. 게다가 청해호 북쪽의 거연호(居延湖) 또한 지금은 사막으로 변했지만 엄청난 규모의 호수가 동서로 각각 존재했던 곳이었다. 몰려드는 엄청난 모래 때문에 유사(流砂)라고도 불린 이곳은 결국 그 모래 때문에 지금은 고비사막(沙漠)으로 불리며 온통 모래로 뒤덮여있지만 그러나 그곳은 원래 거염해(居盐海)라고 불리던 거대한 호수였다. 옌[yan]이라는 동일한 중국어 발음 때문에 연(延)으로 바뀌어 기록된 이 염수(鹽水) 일대에 우루(Ur 虞婁)라고 불린 수메르인들이 대음(代音) 단군으로부터 정착을 허락받았고 그래서 이 바다 같은 호수의 이름은 살 거(居) 자에 소금 염(鹽) 자로 이루어진 거염해(居鹽海)가 되었다. 우루(Ur 虞婁)가 거주를 허락받은 염수가가 바로 이 거염호(居鹽湖) 남부와 청해호(青海湖) 남부를 아우르는 지역이었다.


소금기가 잔뜩 배어있는 그래서 소금 농사 말고는 다른 농사는 지을 수 없는 땅이었다. 우루인들은 이곳에서 짜다 못해 쓰기까지 한 호수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어 서쪽의 오아시스 나라들과 동쪽의 중국 하(夏) 나라 그리고 북쪽 고조선의 번한(番韓 Panhan)에 팔았다. 우루인들이 루왜은조리(月山)에서부터 소금을 만들 때 사용해 온 전통 증류법(蒸溜法)이었다. 이렇게 소금을 만들어 팔며 그들이 사 온 건 찻잎이었다. 아무리 깨끗한 소금을 먹는다 하더라도 차(茶) 없이 수인성(水因性) 전염병(傳染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우루인들은 남들이 원하는 막조선(莫朝鮮)의 병차(餠茶)와 전차(塼茶)를 마다하고 그들이 가진 소금으로 살 수 있는 최대한의 찻잎을 사 왔다. 그리고 그들은 그 찻잎을 시루에 찌고 절구에 찧어 긴압차(緊壓茶)를 만들지 않고 즙(汁)을 만들었다. 충분한 병차나 전차를 사 오기에는 소금이 모자랐고 사온 찻잎으로 긴압차(緊壓茶)를 만들기에는 찻잎이 너무 적었다. 그래서 차즙(茶汁)은 훌륭한 대안(對案)이었다. 모자란 찻잎을 찌고 찧어 만든 차즙(茶汁)을 기본으로 해서 다른 여러 음식 재료들과 섞어 수프(soup)로 만들고 죽(broth)으로 만들어 먹었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모자라지는 않게 되었다. 우리 민족이 국 없이 밥을 못 먹는 습관이 생긴 연유였다. 이렇듯 차즙(茶汁)을 기본으로 해서 여러 약초들을 합쳐 좋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을 산스크리트어로는 부여(Buyu)라 했다. 산스크리트어로 부(Bu)는 만들어내다(to produce)는 뜻이고 여(yu)는 합치다(to unite) 또는 즙(juice)이라는 뜻이다. 북부여와 동부여 그리고 두막루의 원천인 부여(扶餘)라는 이름이 나온 유래였다. 부여(扶餘)는 거연호 남부의 하서회랑(河西回廊)을 포함한 청해성 북부지역에 터 잡고 차죽(茶粥)을 먹었던 낙랑(樂浪)들이 살던 곳을 일컫는 말이었다. 북부여와 동부여의 방위(方位)를 결정한 기준이 되는 곳이었다.

사이드(Scythe)라는 이름의 큰 낫. 흉노라는 이름을 만들어 낸 말잔등의 동복을 보여주는 신라 토우. 출처 위키미디어


흉노(匈奴)는 차(茶) 나무에서 찻잎을 딸 때 손으로 찻잎 하나하나를 따는 플럭킹(plucking)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로 루(lu 婁)라고 하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스키타(scytha)라 불린 큰 낫(sickle) 같은 자귀를 만들어 키 큰 차(茶) 나무의 가지를 잘라 찻잎을 채취(採取)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차(茶) 나무를 손상시키며 찻잎을 확보하다가 한랭건조해지는 기후 때문에 자신들의 거주지역 주변에 차(茶) 나무들이 모두 사라지자 이들이 택한 생존법은 이동(移動)이었다. 이동(移動)할 때 그들이 사용한 방법은 말에 수레를 얹어 끄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사용하는 전차(chariot) 방식이 아니라 수레를 없애고 말 위에 직접 올라타 이동하는 기마 (騎馬) 방식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특징적인 것은 그들이 올라타고 다니는 말 잔등에는 청동으로 만든 솥이 거치되어 있는 거였다. 그리고 그 솥 안에는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찻잎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주석(朱錫)이 산출되는 지금의 영국 남부 콘월(cornwall)에서 청동을 만드는 핵심 광물인 주석 광석을 가지고 차(茶)나무를 찾아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켈트족은 콘월의 땅 모양 같은 모자를 쓰고 다녔고 그런 모자를 처음 본 사람들은 콘월이라는 말을 고깔로 알아듣고 그 모자를 고깔모자라고 불렀다. 흉노(匈奴)의 흉(匈)자가 자귀 모양의 포(勹)자와 찻잎을 담은 그릇(凶) 모양으로 상형된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다. 흉노보다 먼저 콘월에서만 나는 주석원광(原鑛)을 들고 차(茶) 나무를 찾아 동아시아에 나타난 사람들이 있었다. 구리에 주석(朱錫)을 합금해 물에도 부식되지 않는 청동을 만들어 내던 그 사람들을 우르 인들은 귀방(鬼方)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토끼(兎)발을 토템으로 삼고 절굿공이와 절구를 사용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그들이 동아시아에 나타났을 때 우르인들은 개사원(蓋斯原) 욕살(褥薩) 고등(高登)을 중심으로 뭉쳐 그들 모두를 몰살시켰다. 토끼발을 토템으로 삼고 절구를 사용하는 극소수의 살아남은 사람들은 동아시아에는 없는 주석을 사용치 않고 아연을 사용해 황동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었다. 두석(豆錫)이라 불리기도 놋이라고도 불린 황동(黃銅)을 개발한 그들을 우루인들은 그래서 귀상(貴霜)이라고 계루(桂婁)라고 불렸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마한의 강역은 사방 사천리였고 그 북쪽 경계는 하얼빈(哈爾濱)이었다. 안중근 대한독립군 중장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로도 유명한 하얼빈(哈爾濱)은 빈(濱) 자가 가진 뜻 그대로 끝, 변방(邊方)이란 뜻이다. 하얼빈의 하(哈) 자는 마실 합자인데 찻잎을 절구에 찧어 즙을 내어 즉 주스로 만들어 마시는 것을 뜻했고 얼(爾)은 수메르인들이 주신으로 모시는 엔키(Enki)의 아카드어 발음 에아를 뜻해 결국 우르인을 뜻하는 글자였다. 기원전 2004년 메소포타미아의 우루(Ur)에서 사라진 수메르 사람들은 모헨조다로와 인더스문명이 멸망한 뒤 일부가 다시 메소포타미아로 돌아와 유프라테스강 중류 지역의 지류인 카부르강 상류에 우르케시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미탄니라는 나라를 세우고 기원전 1260년경 까지 존속했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우르가 아닌 후르(Hur)라고 쿠르(Khur 또는 Kur)라고 불렀다. 그것은 페르시아어를 고대 그리스어로 이를 다시 고대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생긴 변형이었다. 결국 얼(爾) 자는 우르인을 뜻했는데 지금의 서울을 중국어로 수미(首爾)라고 하는 연유였다. 마지막 글자인 빈(濱) 자는 강역의 경계선을 뜻하는 글자이기에 마한의 북쪽 경계인 하얼빈(哈爾濱)은 찻잎을 쥬스로 만들어 마시는 우르인의 후예들의 경계(境界)란 뜻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모든 사람들이 이동했던 유일한 이유인 찻잎 확보, 즉 차나무 때문이었다. 마한의 북쪽 경계인 하얼빈을 기준으로 사방 사천리의 정방형 강역을 지도상에 그려보면 서쪽 경계는 북경, 남쪽 경계는 천안, 동쪽 경계는 양양이 되는 마한의 강역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충남 태안과 괴산을 동서로 잇는 수평선과 양양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그은 수직선을 교차시켜 보면 중국 제남시와 고당현이 나오고 북쪽으로는 하얼빈 동쪽의 부여촌이 등장한다. 중국 북경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그은 연장선에는 시린 골과 하타부치 Hatabuqihaolai 哈塔布其浩来가나온다.


천군인 환인의 아들 환웅이 풍백, 우사, 운사와 함께 삼천 무리(Bul=troop)를 이끌고 하늘에서 내려와(gan=plunge) 배달국(倍達國)을 열었다는 신시(神市)는 단군왕검이 이어받은 고조선에서는 처음 세운(아시) 땅(달)이라는 뜻으로 아사달(阿斯達)이라 불렸다. 지금 그곳은 볼강(Bulgan)으로 불린다. 몽골 볼강 애막(Aimag)의 볼강(Bulgan)이 그곳인데 지금도 당시 고조선인들이 흙으로 쌓아 올린 산인 평양이 언덕 위 제단과 함께 여전하고 그런 흙산을 뜻하는 평양 바로 남쪽에는 돌들을 쌓아 만든 것이 분명한 터에 세워진 탑(Pagoda)이 건재하다. 이렇게 흙산을 쌓고 돌산을 건설해 가며 배달국과 고조선이 신시와 아사달의 이름으로 볼강 지역에 연이어 도읍한 이유는 그곳이 대륙의 동서 무역로로 개척된 초원로의 가장 핵심적인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막조선(莫朝鮮)의 남쪽 경계인 천안(天安)에서 차(茶)를 싣고 출발한 카라반이 초원로를 이용해 지금의 카자흐스탄의 수도인 아스타나(Astana)에 도달하는 무역로에서 지금의 볼강(Bulgan), 신시(神市)는 그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는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지금의 지역명으로 그 당시의 초원로를 살펴보면 막조선의 천안에서 차를 싣고 출발한 카라반은 풍납토성 앞에서 한강을 도하해 연천과 사리원을 거쳐 평양에 다다르고 이어 대련항이 있는 요동반도를 돌아 영구에 도착하고 요택을 피해 북상하다 사평에서 황수를 따라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시린 골에 들어섰다. 시린 골에서 다리강가를 거쳐 볼강에 도착하는 것이 당시 동쪽 초원로의 대강이었다. 이렇게 아사달에 도착한 카라반은 고르니 알타이의 악타시 협곡을 통과해 아스타나로 연결되었고 대륙의 동서를 연결하는 초원로의 한중간에 위치한 아스타나는 마한의 차(茶)들을 남쪽 인더스강 하류와 서쪽 키예프(Kyiv)로 나눠 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래서 하늘에서 삼천 무리를 이끌고 강하한 환웅이 홍익인간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신시(神市) 다음으로 세운 땅이 아스타나였고 그래서 이름 또한 아사달인 아스타나로 명명되었다. 산스크리트어로 아사(Asa)는 소망(wish, hope)을 뜻하고 스탄(stan)은 땅(land)을 뜻한다. 지금의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이브(kyiv) 또한 막조선에서 만들어 보낸 차들을 받아 동서남북의 유럽 전역에 공급하는 곳이었기에 공정해서 아름다운(fair and beautiful)이란 뜻을 가진 산스크리트어 케바(keva)에서 유래한 이름이 지어졌다. 공정하지 않았다면 아름답기는커녕 존재할 수도 없는 곳이었다. 후일 기후변화로 인해 곳곳에서 자라던 차나무들이 모두 사라지고 오직 한반도와 일본에서만 생명의 나무인 차나무가 자라게 되는 시대가 되자 공정해서 아름다웠던 이곳은 이제 찻잎을 확보하기 위해 전차를 버리고 말 위에 직접 올라타 대륙을 이동하는 전사(코미투타스)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자귀(scythe)로 차나무의 가지를 잘라 찻잎을 채취해 스키타이(Scythia)라고 불리던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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