兒童列書家口某生身厄消滅字於紙鳶之背任其所飛日暮斷其線而放之 아이들이 집안식구대로 “ 生 身厄消滅”(은 성명, 은 干支, 즉 누구의 몸에 있는 액운이 소멸되라는 뜻)이라는 문구를 연 등에 써서 연이 날아가는 데까지 띄우다가 해질 무렵에 액을 멀리 보낸다는 의미로 연줄을 끊어 날라 가게 놓아버린다. 鳶制竹骨糊紙徵似箕狀五色 연을 만드는 방법은 대나무 살에 종이를 발라 마치 키 모양처럼 만든 다음 오색으로 칠하면 된다. 或棊斑墨額錚盤方革猫眼鵲翎魚鱗龍尾名色特繁 연 바탕에는 다양한 종류의 무늬를 넣는데 그 무늬에 따라 바둑판무늬를 넣은 기반연(棊斑鳶), 이마 부분에 검은 칠을 한 묵액연(墨額鳶), 접시처럼 둥근 모양의 쟁반연(錚盤鳶), 방패 모양의 방혁연(方革鳶), 고양이 눈을 그린 묘안연(猫眼鳶), 까치날개 모양의 작령연(鵲翎鳶), 물고기비늘 모양의 어린연(魚鱗鳶), 용꼬리 모양의 용미연(龍尾鳶) 등으로 연 이름을 붙인다. 作絲車繫絲而運投之空中隨風戱之謂之風錚 또 얼레[絲車]를 만들어 연줄을 붙들어 맨 다음 공중에 띄워 바람 부는 대로 날리며 노는 것을 연날리기[風錚]라고 한다. 中國則製樣奇巧自冬而始爲晩春之戱 중국에서 만드는 연의 모양은 기이하고 정교하다. 중국 사람들은 연날리기를 겨울에 시작하여 늦봄까지 즐긴다. 東俗亦自冬天市上賣之至于上元 우리나라에서도 겨울부터 연날리기를 시작하지만 정월 보름(上元)까지만 한다. 연은 시장에서 매입해 쓰기도 한다. 諺傳昉自崔瑩伐耽羅之役國俗至今行之 고려 말에 최영(崔瑩) 장군이 탐라(제주도)를 정벌할 때 연을 이용하여 사방이 절벽인 섬에 상륙했다는 전설이 있어 이때 연(鳶) 날리기가 시작된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계속 행하고 있다. 合絲淬膠淨如白馬尾或染梔黃 연줄을 만들 때는 실을 겹친 다음 아교를 먹여 흰 말의 말총같이 말쑥하게 한다. 혹은 노랗게 치잣물을 들이기도 한다. 飛無定處縱橫掃盪與他相交以多割爲快 연이 정처 없이 이리저리 날다 보면 다른 연과 서로 교차하여 어느 한쪽 연줄이 끊어지게 되는데 남의 연줄을 많이 끊을수록 더 통쾌하게 여긴다. 凌風而呌者最善割甚者傅以磁末銅屑然在交法之能否 바람을 타고 윙윙 소리를 내는 연줄이 남의 연줄을 잘 끊는다. 남의 연줄을 잘 끊을 수 있고 반대로 자기 것은 잘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사금파리 가루나 구리 가루를 연줄에 바르기도 한다. 그러나 연줄에다 교차시키는 방법이 능숙한 가에 따라 승부가 좌우된다. 都下年少有以善交鳶噪名者豪貴家往往廷致觀之 서울의 젊은이들 중에는 연싸움 잘하기로 유명한 자들이 있어 가끔 부잣집이나 지체가 높은 집에서 이들을 초대하여 연 날리는 재주를 구경한다. 每上元前一兩日手標橋沿河上下觀交鳶者簇如堵墻 매년 정월 보름 한 이틀 동안은 수표교(手標橋) 개울 위아래로 연싸움을 구경 온 사람들이 담을 쌓은 듯이 빽빽이 늘어선다. 羣童候斷搶絲或追敗鳶睨空奔波踰垣越屋勢莫可遏 人多怖駭過上元不復飛鳶 아이들은 무리를 지어 끊어진 연줄을 쫓아 하늘만 쳐다보고 물결처럼 분주히 달리다 보면 담장을 뛰어넘고 지붕 위를 마구 넘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 기세를 막을 수 없으며 이를 보고 겁을 내고 놀래는 사람들도 많다. 보름날이 지나면 다시는 연을 날리지 않는다. -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 상원(上元 정월대보름) 중에서
우리 민족이 연(鳶) 날리기를 민속(民俗 Folklore)으로 전승시킨 건 최영(崔瑩) 장군 때가 아니었다. 우리 민족의 민속(folklore)은 그 어느 것 하나랄 것 없이 모두 먹고사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고 특히 그 존재 및 발전사(發展史) 자체가 우리 민족 역사였던 차산업(茶產業)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연(鳶) 날리기도 마찬가지였다. 최영(崔瑩) 장군의 탐라(耽羅) 정벌(征伐)이 뜬금없이 연(鳶) 날리기라는 민속(民俗) 놀이의 시작과 관련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기록된 것은 최영 장군의 탐라(耽羅) 정벌에서 이루어졌던 연날리기가 왜 우리 민족이 연날리기를 했는지 또 어떻게 연날리기를 했는지를 제대로 보여준 연(鳶) 날리기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최영(崔瑩) 장군의 탐라 정벌은 우리 민족이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 당(唐) 태종(太宗) 때부터 중국과 맞서 온 차산업(茶產業)의 종주권(宗主權)을 중국에 완전히 강탈(強奪)당하는 사건의 시작이었는데 그것은 그 정벌 중에 차산업(茶產業)을 끝까지 지키려 한 공민왕(恭愍王)이 실크로드 상방(商幫)이 보낸 자객(刺客)들에 의해 암살(暗殺)되었기 때문이었다. 공민왕이 국력(國力)을 기울여 20년 동안 육성해 온, 전원(全員)이 말(馬)을 타고 기동(機動)하는 25,605명의 화약무기(火藥武器)로 무장한 기마총통방사군(騎馬銃筒放射軍)을 그것도 최영에게 직접 지휘하게 하여 탐라를 정벌하게 한 것은 명(明) 나라에 군마(軍馬)나 조공(朝貢)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탐라(耽羅)를 장악하여 밀양(密陽)에서 비밀리에 일본 찻잎(茶葉)을 가공해 만든 말차(末茶)를 유럽의 푸거(Fugger)와 연결된 복건성(福建省)의 복주항(福州港)과 천주항(泉州港)으로 수출하는 해상(海上) 무역로(貿易路)를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에서 채엽(採葉)된 찻잎들을 후쿠오카(福岡)와 쓰시마(對馬島), 김해(金海)를 거쳐 낙동강(洛東江)을 통해 밀양으로 수입(輸入) 해 온 후 밀양에서 말차(末茶)로 제조(製造)해 거문도(巨文島)와 서귀포(西歸浦)를 거쳐 중국의 복주항(福州港)과 천주항(泉州港)으로 수출하는 해상무역로(海上貿易路)였다. 고려의 이 해상무역로(海上貿易路)에서 밀양(密陽)과 서귀포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지역이었다. 공민왕 때 밀양(密陽)에 대량의 찻잎(茶葉)을 신속히 건조(乾燥) 하기 위해 밀양강(密陽江) 가의 절벽(絕壁) 위에 영남루(嶺南樓)가 새로 지어지고 찌어진(蒸) 찻잎들을 신속히 빻기(臿) 위해 찐(蒸) 찻잎들을 냉각(冷却)시켜 줄 얼음을 찾아 천황산(天皇山)의 얼음골이 개발되고 얼음저장고까지 지어진 연유였다. 특히 밀양의 남천강(南川江)에서 말차(末茶)를 가득 실은 배가 낙동강 하구(河口)로 진입하는데 변침(變針) 애로(隘路)가 발생하자 이를 해결키 위해 수산제(守山堤)가 중수(重修)된 연유이기도 했다.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와 그녀의 호위대(護衞隊)가 실크로드 상방(商幫) 자객단의 공민왕 암살을 막다가 1365년 전멸당하는 사건이 벌어져 더 이상 암살을 막아줄 경호대(警護隊)가 없어진 공민왕이 암살을 피하기 위해 숨어 지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자 어쩔 수 없이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신돈(辛旽)이 공민왕의 지원하에 비밀리에 추진한 사업들이었다.
이렇게 비밀리에 쏟아부은 엄청난 투자를 물거품으로 만들고 있었던 게 소위 목호(牧胡)들이었다. 말과 양들을 키우는 사람들이라 해서 목호(牧胡)로 알려진 그들의 진짜 정체는 하치(hachi 哈赤)였는데 우리에게는 신안선(新安船)으로 잘 알려진 원(元) 영종(英宗) 연간(재위 1321-1323)에 본격화된 원(元) 나라의 차(茶) 해상무역(海上貿易)을 위해 탐라에 파견된 차(茶) 제조 기술자들이었다. 하치(哈赤)의 치(赤)는 찻잎을 불로 덖는 또는 찌는(蒸) 모습을 상형한 글자이고 하치(哈赤)의 하(哈) 자는 찌어(蒸) 진 찻잎들을 절구에 찧는(臿) 것을 뜻하는 삽(歃) 자를 감추기 위해 중국어로 같은 발음인 하(哈) 자로 바꿔치기된 글자였다. 결국 하치(哈赤)는 말이나 양 같은 동물을 기르는 사람이란 뜻의 목호(牧胡)의 다른 말이 아니라 찻잎을 쪄서(蒸) 건조하고 냉각시킨 후 절구에 찧어(臿) 만드는 말차(末茶)를 제조하는 기술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말차(末茶) 제조 기술자들을 원나라가 탐라에 파견했다는 것은 고려가 일본의 찻잎을 수입해 병차(餠茶)를 만들어 수출했던 왕안석 신법이래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시작됐었던 오랜 전통은 금지되었고 고려는 그저 일본의 찻잎을 탐라에 전달해 주는 역할만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뜻이었다. 개경으로의 환도(還都)를 결정함으로써 강화도를 포기하고 원나라에 굴복한 고려 원종(元宗)에 반대해 진도(珍島)와 탐라(耽羅)로 그 근거지를 옮기며 항쟁했던 삼별초(三別抄)들도 하치(哈赤)처럼 거짓말로 가려워진 말차(末茶) 제조 기술자들이었다.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로 천도한 최충헌의 아들 최우(崔瑀)가 횡행하는 도적을 잡기 위해 용사를 선발해 조직한 경찰(警察) 부대라는 야별초(夜別抄)는 그러나 경찰(警察) 조직이 아니었다. 글자 그대로 밤에 특별히 초(抄)하는 사람들이었다. 초(抄)라고 하는 글자는 일창이기(一槍二旗) 모양의 찻잎을 상형한 소(小) 자라는 글자에 찻잎을 가루로 만들어 빼내는 모습을 상형한 삐침 별(丿) 자를 손 수(扌) 자와 합친 글자였다. 즉 야별초(夜別抄)는 찻잎을 찌고 빻아 가루로 만들어 말차(末茶)를 만드는 어려운 작업을 캄캄한 밤에 해내는 특별한 말차(末茶) 제조 기술자들을 말하는 거였다. 말차(末茶)를 만드는 어려운 일을 밤에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일본 찻잎을 사용한 고려에서의 말차(末茶) 제조 및 수출을 금지했던 몽골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차(茶) 시장을 독점하기 위한 육상무역파(실크로드상방)의 최대 목표는 고려와 일본의 차(茶) 연합을 깨트리는 일이었다. 일본에서 생산된 찻잎을 고려가 수입해 말차(末茶)로 만들어 해상무역을 통해 전 세계로 수출하는 것을 막아야만 세계 차(茶) 시장을 독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실크로드 상방(商幫) 때문이었다. 송(宋) 나라가 실크로드 상방(商幫)에 의해 짓밟힌 이유였다.
개경의 야별초(夜別抄)가 삼별초(三別抄)가 된 것은 남해도(南海島)와 진도(珍島)에도 말차(末茶)를 제조하는 야별초(夜別抄)가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송(宋) 나라가 남송(南宋)이 되어 버티던 시절이라 가능했던 일이었고 삼별초(三別抄)가 일본 찻잎을 수입해 말차(末茶)로 제조해 복주(福州)로 수출해 준 덕에 오히려 또 남송(南宋)이 버티던, 고려-일본-남송이 서로를 존재하게 했던 시절이었다. 1273년 탐라에서 김통정의 마지막 삼별초 군대가 김방경이 이끄는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에 의해 격파되자 삼별초(三別抄)에 의해 수출되던 말차(末茶)에 의존해 명맥을 유지하던 남송(南宋) 또한 1276년 수도 임안(지금의 항주)이 몽고군에 의해 함락되어 실질적인 명을 다했다. 당(唐) 나라의 정치행정 조직이었던 3성 6부제(三省六部制)를 쓸 때 사용하는 성(省)이란 글자는 이렇게 찻잎들을 찌고 냉각 건조하고 찧어 가루로 만들어 낸 말차(末茶)를 그릇(皿)에 받아내는 모습을 상형한 글자였다. 눈 목(目) 자의 옛날 모양은 그릇 명(皿) 자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로 들어갔다는 의미는 실크로드 상방(商幫)의 차산업(茶產業) 포기 강요를 거부했다는 의미였고 강화도를 버리고 개경으로 환도한다는 것은 차산업(茶產業) 포기를 강요한 실크로드 상방(商幫)에게 굴복한다는 의미였다. 이것은 942년 고려 태조 25년에 요(遼) 나라 황제가 사신을 통해 보내온 낙타 50마리를 만부교(萬夫橋) 교각에 매어 놓고 굶겨 죽이며 태조 왕건(王建)이 천명한 일본 찻잎을 수입해 차(茶)로 만들어 해상무역을 통해 전 세계로 수출한다는 해상무역 입국(立國)의 국시(國是)를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삼별초(三別抄)의 마지막 저항이 탐라에서 끝났다는 것은 그만큼 탐라가 일본과 고려 그리고 복건성(福建省) 복주(福州)로 이어지는 해상무역로(海上貿易路)에서 중요한 무역 기지로 기능해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1320년 용골(龍骨)과 수밀격벽(水密隔壁 bulkhead) 구조로 조선(造船)된 밑이 뾰족한 첨저선(尖底船)인 원양항해용(遠洋航海用) 선박인 신안선을 최초 개발해 해상무역(海上貿易)의 고수익성을 실제로 증명해 냈던 복건성 천주(泉州)의 마린로드 상방(商幫)에게 적극적 지지를 보내주었던 원(元) 영종(英宗)이 즉위 4년도 안돼 암살되자 하치(哈赤)들은 일본의 찻잎을 가공해 만든 차(茶)를 서귀포(西歸浦)를 통해 천주(泉州)로 보내던 그동안의 무역로를 반대로 돌려 제주에서 흑산도(黑山島)와 백령도(白翎島)로 보내 대륙 북쪽의 실크 로드 상방(商幫)에게 차(茶)를 넘겼다. 이렇게 차(茶)를 북쪽으로 보내왔던 하치(哈赤)들에게 밀양(密陽)의 말차(末茶)를 북쪽 백령도가 아닌 다시 남쪽 천주(泉州)로 보내라는 공민왕(恭愍王)의 명령은 몇 번씩 거역되었다. 결국 토벌이 결정되었다. 기존의 탐라 목호(牧胡)들을 확실하게 진압해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북원(北元)과 명((明)의 영향력 행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중대한 임무를 띠고 파견된 정벌군이 완강하게 버티며 좀처럼 항복하지 않는 목호(牧胡)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사용한 전법이 연날리기였다.
개전 초기 척후대(斥候隊)로 먼저 11척의 배에 나눠 타고 탐라(耽羅)의 서북부에 위치한 명월포(明月浦)로 상륙한 고려 병사들을 몰살시킬 정도로 강한 전투력을 과시했던 3천 명의 목호(牧胡) 기마병(騎馬兵)들은 결국 자신들의 총인구 2만보다 많은 고려군 본진(本陣)과 여러 번 접전(接戰) 한 후에는 후퇴하여 범섬이라 불리는 서귀포 앞바다에 떠있는 사방이 절벽인 섬으로 후퇴해 농성(籠城)에 들어갔다. 하루라도 빨리 목호(牧胡) 반란군을 진압해 탐라를 장악하여 신돈(辛旽)의 밀양(密陽)에서 일본 찻잎(茶葉)을 가공해 만든 말차(末茶)를 유럽의 푸거(Fugger 福建)와 연결된 복건성(福建省)의 천주항(泉州港)으로 보내는 해상 무역로(海上貿易路)를 완성하고 개경으로 복귀해 심각한 암살 위협에 시달리는 공민왕(恭愍王)을 지켜야 하는 최영(崔瑩)에게 범섬으로 들어가 농성을 하는 목호군(牧胡軍)은 눈의 가시였다. 한 명의 군사가 만 명의 적군을 막을 수 있다는 범섬의 유일한 출입로는 촉(蜀) 나라 검문각(劍門閣)처럼 방비되어 있었다. 이때 깎아지른 주상절리(柱狀節理)로 이뤄진 범섬으로 고려 군사들을 올려 보낸 건 말(馬)이 아니라 연(鳶)이었다. 캄캄한 밤 범섬 가까운 바다에 띄운 배 위에서 큰 방패연들을 줄줄이 엮은 후 제주의 강한 바닷바람에 띄우고 일정한 간격으로 뭉뚝한 매듭들을 가지도록 꼰 두꺼운 동아줄 하나를 그 띄어진 연(鳶)들에 연결된 연실에 묶어 꼬리처럼 날아오르게 했다. 방패연(防牌鳶)들이 밤섬 절벽 위로 지나가는 순간 연(鳶)들을 범섬의 정상 지역에 있는 나무들 위로 떨어지게 했다. 떨어지기 전 연(鳶)들을 연(鳶) 싸움할 때처럼 서로 얽히게 해 연줄은 물론 달고 간 매듭 많은 동아줄들도 얽힌 채로 범섬의 절벽 위 나무들에 떨어뜨려 나뭇가지들에 걸리게 했다. 범섬 위 나무들에 떨어진 연(鳶)들에 연결되어 나무 가지들에 걸린 줄들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겨 나무들에 매듭들이 단단히 걸리게 한 다음 그 줄들을 이용해 병사 하나를 절벽을 타고 올라가게 했다. 범섬 위 나무들에 얽힌 연줄들을 이용해 절벽에 올라선 병사는 몸에 감고 간 튼튼한 굵은 동아줄을 풀어 나무에 단단히 묶고 동아줄의 다른 쪽 끝을 절벽 아래로 던졌고 그 줄을 통해 다른 동아줄을 몸에 감은 병사들이 속속 절벽 위로 소리 없이 올라와 자신들이 가져온 동아줄을 나무에 묶고 그 끝을 다시 절벽 아래로 던졌다. 결국 범섬 정상위로 올라온 고려군이 유일한 출입로만을 방비하며 휴식을 취하던 목호군(牧胡軍)을 짓이긴 건 당연했다. 그러나 목호군(牧胡軍)의 완강한 저항으로 예정보다 오래 탐라에 머문 최영(崔瑩)은 결국 철군(撤軍) 길에 태풍을 만나 개경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탐라(耽羅)에 발이 묶여 버렸고 그 사이 개경의 공민왕은 염초(焰硝)를 갖고 왔다며 벽란도(碧瀾渡)에 정박한 명나라 선박에 숨어 있다 한밤중 튀어나온 실크로드 상방(商幫)이 고용(雇傭)한 최정예 자객단(刺客團)에 의해 암살되었다. 탐라 주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이 뒤따랐던 건... 공민왕이 사라진 고려에 최영은 그저 늙은 한 명의 장수에 불과했고 백성들의 자발적 단결을 끌어내던 공민왕을 대신할 수 있는 지도력(指導力)은 이제 고려에 없었다. 실크로드 상방(商幫)의 사주(使嗾)를 받아 1361년 홍건적(紅巾賊)을 이끌고 이미 개경을 점령한 바 있었던 명(明) 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의 턱없는 공갈(恐喝) 협박(脅迫)에 맞서는 사람은 이제 소수의 충신들밖에 없었다. 일본의 찻잎을 수입해 비밀리에 말차(末茶)로 가공한 후 중국 복건성(福建省)으로 보내 유럽으로 수출하는 해상무역로를 기획, 개척하고 말차(末茶) 산업 진흥을 위해 말차(末茶) 제조(製造)에는 초은(樵隱) 이인복을, 말차 수송(輸送)에는 목은(牧隱) 이색을, 일본 찻잎 조달과 해운(海運)에는 포은(圃隱) 정몽주를 비밀리에 포진시켜 후일 도자기 분야를 책임진 도은(陶隱) 이숭인과 야금(冶金)을 책임진 야은(冶隱) 길재까지 오은(五隱) 체제를 엮어낸 익제(益齋) 이제현(李齊賢)은 1367년에 이미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말차(末茶) 제조(製造)에 필요한 모든 시설과 설비를 처음부터 비밀리에 추진해 자기 고향에 완비하고 말차(末茶)를 생산하던 신돈(辛旽)은 1371년 진즉 실각당해 유배(流配) 길에 죽었다. 신돈(辛旽) 이후 어쩔 수 없이 공개적으로 나서서 말차(末茶) 제조(製造)와 수출을 지휘했던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은 1374년 공민왕과 함께 암살되었다. 전 세계 패권(霸權)을 장악한 실크로드 상방(商幫)이 가장 경계하는 일본 찻잎으로 만든 차(茶)와 해상무역을 동시에 했기에 비밀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그래서 은(隱) 자로 운을 맞춘 호(號)를 지어 그들의 결속을 나타냈다. 오은(五隱) 중 이인복과 정몽주 그리고 이숭인은 암살되었다.
최영 장군이 탐라 정벌 시 범섬 침투에 사용했던, 연(鳶)에 동아줄을 매달아 하늘로 날리는 방법은 정확히 우리 민족이 연(鳶) 날리기를 하는 목적이었다. 우리 민족이 연(鳶) 날리기를 민속(Folklore)으로 전승시킨 것은 바로 동아줄을 연(鳶)에 매달아 하늘에 날아 올리기 위해서였다. 이유는 닿을 수 없는 차(茶) 나무에 가 닿기 위해서였다. 안동의 차전놀이에 쓰는 차와 광주의 고놀이에 쓰는 고가 높은 차(茶) 나무에 갖다 대어 안정적으로 찻잎을 따기 위한 교두보(橋頭堡) 였다면 연(鳶)은 도저히 길을 낼 수 없는 빽빽한 산림(山林)속에 있는 차(茶) 나무에 가닿아 찻잎을 따내기 위한 오늘날의 헬리콥터 같은 장치였다. 산림 한가운데 위치해 걸어서는 닿을 수 없는 차(茶) 나무를 목표로 방패연(鳶)을 여러 개 하늘로 띄어 올린 후 바람을 맞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연(鳶)들을 목표로 한 차(茶) 나무를 향해 날아가게끔 조종한 뒤 연(鳶)들을 서로 엮이게 조종해 그 연(鳶)들을 연결한 연줄들과 달고 간 동아줄들을 얽히게 한 다음 목표인 차(茶) 나무로 위로 떨어지게 했다. 목표(目標)한 차(茶) 나무 위로 연줄과 동아줄들이 얽힌 채로 연(鳶)들이 떨어지면 그 연(鳶)들을 연결한 연줄들과 동아줄들을 동시에 조심스럽게 잡아당겨 여러 줄들 중 어느 한 줄이라도 팽팽하게 잡아당겨지면 연(鳶) 날리기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었다. 목표로 했던 차(茶) 나무나 바로 그 주변의 나무들에 떨어져 어딘가에 얽매여 팽팽한 줄을 제공한 연(鳶) 날리기는 성공한 연날리기였다. 연(鳶)이란 한자가 주살 익(弋) 자와 새 조(鳥) 자라는 두 글자로 이뤄진 연유였다. 주살이란 것이 화살촉(鏃)에 구멍을 뚫어 줄을 매달아 놓은 것이어서 점 주(丶) 자가 있는 주살 익(弋) 자는 줄을 매달고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찻잎과 관련된 것이란 걸 뜻한다. 즉 주살이란 물건 자체가 찻잎을 따기 위한 도구라는 걸 말해주는 것이다. 동아줄들이 차나무 가지들에 얽혀 움직이지 않게 되어 팽팽한 줄이 생겨나면 이제 연날리기의 책무는 끝나고 우리 민족의 민속 가운데 하나인 줄타기의 책무(責務)가 시작되었다. 이런 연날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튼튼한 연실과 동아줄을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튼튼한 연실을 만들기 위해 아교가 개발되었고 나중엔 연실에 구리를 입히는 방법까지 개발되었다. 청동기와 경질도기가 개발되기 전 찻물을 담은 그릇에서 금보다 귀한 찻물이 스며 나오지 않게 개발된 것은 옻칠이었다. 자기(瓷器)라고 불리는 경질도기(硬質陶器)를 사기(砂器)라고 부를 만큼 자체적인 경질도기를 가지고 있던 우리 민족은 이 칠(漆)에도 독보적인 나전칠기(螺鈿漆器)라는 고유의 기술을 축적하고 있었다. 고령토(高嶺土)라 불린 경질도기(硬質陶器) 제작용 점토를 스스로 찾아내지 못한 일본이 칠(漆)에 목숨을 걸어 나라 이름도 칠기(漆器)를 뜻하는 재팬(yapan)이 될 정도로 칠(漆)에 고도의 기술을 개발했다 하더라도 우리 민족 또한 나전칠기(螺鈿漆器)라는 고유의 칠(漆) 기술이 있었고 이러한 칠(漆) 기술이 찻잎을 따는 데 사용하는 연(鳶)실에도 적용된 것은 당연했다. 튼튼한 동아줄은 우리 민족의 모든 민속에 쓰이는 물건이었기에 그 질(質)은 세계적이었고 게다가 우리 민족은 신발마저도 동아줄 만드는 기술로 만들어 신을 정도로 동아줄 제작 기술은 최고였다.
지금 세상 광대[優人]에겐 답색놀이라는 게 있는데, 어떤 이는 이를 이승(履繩)이라고도 한다. 한(漢) 나라 때인 두 밧줄을 양쪽 기둥에 매어 놓고 그 두 광대가 마주 서서 춤을 추면서 밧줄 위로 다니는데, 서로 오가는 길에 얼굴이 마주 닿고 어깨가 서로 갈려도 넘어지지 않았다 하니, 장형(張衡)의 서경부(西京賦)에, 跳丸劒之揮霍 양쪽 손에 공과 칼을 쥐고 휘두르면서 뛰는데 走索上而相逢 밧줄 위로 달리다가 서로 마주 닿는구나 라는 노래가 바로 그것이다. 요즈음 와서는 이런 재주가 더욱 교묘해져서 마주 서서 춤을 출 뿐만 아니라 더러는 능란하게 몸을 번드쳐서 재주를 넘고, 손으로 해금(奚琴)을 퉁기는 등 흔들거리고 기울어지기도 하되 능히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니, 교묘한 재주들이 이와 같다. 혹 그 이유를 물으면, “외줄 타기가 쌍줄 타기보다 쉽다.”라고 대답한다. - 星湖僿說 제5권 만물문(萬物門) 답색 연장(踏索緣橦) 중에서
이렇게 차(茶) 나무와 튼튼히 연결된 외줄이나 쌍줄 위로 그 마을 최고의 줄타기 장인이 올라섰다. 몸에 다른 동아줄을 감고 평행을 잡기 위해 손에 평행봉을 쥔 다른 사람보다 훨씬 몸집이 작은 그 동네 최고의 줄타기 선수는 연(鳶) 줄들이 연결해 준 차(茶) 나무를 향해 연(鳶) 줄들을 타며 조심스레 나아갔고 무사히 도착한 그는 차(茶) 나무에 그가 가지고 온 동아줄들을 튼튼하게 맸다. 그 줄들의 다른 쪽 끝은 출발할 때 이미 다른 큰 나무에 매어져 있었다. 두 번째로 출발한 사람은 연(鳶)이 날아 연결한 연(鳶) 줄이 아닌 줄타기 장인이 직접 가지고 간 튼튼한 동아줄로 연결된 두줄이나 세줄로 만들어진 줄다리를 건너갔다. 나중에 줄을 타며 건너간 사람들도 몸에는 다른 동아줄이 매어져 있었고 차(茶) 나무에 도착한 그들도 자신들이 가져온 동아줄을 차(茶) 나무에 튼튼하게 맸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茶) 나무가 있는 산림 하늘에는 튼튼한 동아줄이 씨줄날줄로 엮어진 그물 다리가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이 오가도 끄떡없는 튼튼한 그물 길(网路)이 만들어졌다. 목표했던 빽빽한 산림 한가운데 길 만들 방법이 없어 접근할 수 없었던 차(茶) 나무에 사람들이 연(鳶) 날리기와 줄타기를 통해 만든 그물 다리가 하늘에 만들어졌다. 튼튼한 동아줄로 만들어진 그물 다리를 통해 사람들은 없어서는 안 될 찻잎들을 따 망태기와 대바구니에 넣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나무들로 빽빽한 산 한가운데에서 찻잎을 따도 될 만큼 충분히 자란 차(茶) 나무를 찾아내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런 차(茶) 나무를 찾아 산(山)을 드나들 수 있는 날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차(茶) 나무를 찾아 나서는 기간에는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소수의 어른과 어린아이들만 마을에 남고 그야말로 촌장(村長)의 명령을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마을 사람들은 산(山)에 올랐다. 그 산(山) 은 차(茶) 나무가 있는 산(山)이었고 그래서 산(山)에 오르는 사람들은 불을 피워서는 안 되었다. 차(茶) 나무를 찾아야 하는 초봄엔 언제나 바람이 심했고 그 심한 바람에 불씨가 날리면 차(茶) 나무가 사는 그 산(山) 은 불에 탔다. 불에 탄 차(茶) 나무에서 찻잎을 딸 수 없었고 그런 해 여름엔 많은 사람들이 배앓이를 했고 그들 중 일부는 죽었다. 그래서 차(茶) 나무를 찾아 산(山)에 올라야 하는 매년 그때가 오면 사람들은 불을 피우지 않았다. 한식(寒食)의 전통이 세워진 연유였다. 개자추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동짓날 해가 떠오른 후 105일째 되는 날이 한식(寒食)이었다. 한식(寒食) 이후로 보름 동안에 얼마나 많은 차(茶) 나무를 새로 찾아내는지에 마을 사람들의 부(富)와 건강이 달려 있었다. 누구도 따뜻하지 않은 음식에 불평하지 않았다.
糊貼五色紙於竹骨左右方圓大小制樣不一以柄中揷小兒弄之當風而轉號曰回回兒 市多賣之 댓가지에 풀로 오색 종이를 붙이는데 종이 모양은 모가 지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고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여 일정하지 않다. 자루를 그 한가운데에 꽂아 이를 아이들이 들고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거슬러서 달리면 종이가 돌아간다. 이것의 이름을 바람개비[回回兒]라고 한다. 시장에서도 많이 판다. 用獨繭絲繫鵞毳小兒順風而颺之號曰姑姑妹蒙古語鳳凰也 아이들이 한 가닥 풋솜 실로 거위의 털을 붙들어 매어 바람에 날리는 것을 꼬꼬매[姑姑妹]라고 한다. 이 말은 몽고어로 봉황이란 뜻이다. -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 상원(上元 정월대보름) 중에서
바람이 많이 불지 않은 날에도 목표한 차(茶) 나무에 닿아 찻잎을 딸 수 있으려면 연(鳶)은 날려야 했기에 우리 민족은 어린아이들에게 연(鳶)을 하늘로 잘 날아 올리게 하는 방법을 가르첬다. 아이들에게 방패연(防牌鳶)이 달린 연줄을 들고 달리면서 연줄을 살살 풀어주라고 가르첬다. 아이들은 시키는 대로 열심히 달렸으나 바람이 없으면 방패연(防牌鳶)은 생각만큼 잘 날아오르지 않았다. 그런 아이들 중에서 유독 바람이 별로 없는 날에도 방패연(防牌鳶)을 잘 날아 올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방패연(防牌鳶)을 매단 연실을 살살 풀어주며 달리는 것은 다른 아이들과 같았으나 방패연(防牌鳶)을 잘 날아 올리는 아이들은 방패연(防牌鳶)의 머릿살이 있는 쪽을 달리는 방향으로 최대한 숙여지도록 연줄을 조종하며 달렸다. 방패연(防牌鳶)의 머릿살이 있는 쪽은 원래부터 머릿살을 약간 휘게 해서 연에 붙여놓았기 때문에 볼록한 모양이었는데 이렇게 볼록한 모양의 머릿살이 붙여진 쪽을 최대한 숙여서 달리면 달리기를 통해 생겨난 바람이 방패연(防牌鳶)을 잘 날아오르게 한다는 걸 아는 아이들이었다. 이걸 아는 아이들은 커서 연줄들이 연결된 얼레를 다룰 수 있는 큰 손을 가지게 되면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도 바람이 모자라 땅에 곤두박질치는 연(鳶)도 쉽게 다시 날아오르게 하는 묘기를 부릴 줄 알았다. 그 아이들은 어려서 바람개비놀이를 많이 해 바람개비가 돌아가는 원리를 알아챈 아이들이었다. 손에 들고 바람을 맞혀 쌩쌩 돌아가는 바람개비는 그 날개의 위와 아래의 바람 세기가 다르다는 걸 알아차린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이 다 커서 머리살을 구부려 볼록하게 만든 방패연은 조그마한 바람에도 쉽게 하늘로 솟아올라 날아다녔다.
베르누이 원리였다. 유체(공기)의 속도가 빨라지면 압력이 낮아진다는 베르누이 정리에 따라, 윗면의 압력은 낮아지게 하고 아랫면의 압력은 상대적으로 높아지게 만들면 위로 들어 올리는 양력(Lift)이 발생했고 이 양력이 바람개비를 돌게하고 연鳶)도 높이 날아오르게 했다. 이런 베르누이 원리를 이용하기 위해 우리 민족의 고유 연인 방패연은 세로가 가로보다 긴 장방형이었고 연의 윗부분에는 아랫부분에는 없는 머릿살이라 불린 얇은 원기둥형의 나뭇가지를 잘라 붙였다. 방패연의 머리 부분에 붙여놓은 원기둥형의 얇은 나무로 만든 머릿살은 앞면과 뒷면의 공기 흐름 속도를 다르게 해 양력을 발생하게 하는 장치였는데 공기 흐름의 속도를 더욱 확실하게 차이 나게 하기 위해 나무를 볼록하게 휘어서 만들었다. 이렇게 볼록하게 휘어진 원기둥형 얇은 나무를 머릿살로 삼아 방패연의 맨 위에 붙여 놓은 후 연을 바람 부는 방향을 향해 어느 정도 숙이게 하면 오늘날 비행기의 날개 부분에서 발생하는 양력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연인 방패연이 하늘에서 바람을 받고 날아 오른 머리 부분의 모습이 늘 휘어져 볼록한 모습인 연유였다. 바람개비놀이는 베르누이 원리가 제대로 작동되는 방패연을 만들 수 있는 기술자를 양성하고 또 그렇게 만들어진 방패연을 원할 때 언제나 날아오르게 하고 원하는 차나무 위에 언제든 떨어뜨릴 수 있는 조종사를 키워내는 훌륭한 조기 기초 교육이었다. 척석군을 길러내기 위해 비석 치기와 물수제비 놀이를 조기 기초 교육으로 활용한 우리 민족은 비행기와 조종사를 길러내기 위한 조기 기초 교육으로 바람개비놀이를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