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과 당태종이 보낸 모란 그림의 진실 4

비담의 난 그리고 김춘추

by 역맥파인더

신라로 돌아온 비담(毗曇)은 칠숙(柒宿) 이후 또다시 강력하게 일본 차(茶) 중계무역의 폐지를 주장했다. 심상치 않은 신라의 움직임에 일본 또한 그해 가을(646년 9월), 사신(使臣) 타카무코도 쿠로마로(高向玄理)를 신라에 보내 정확한 신라의 입장을 확인하려 했다. 일본 차(茶) 수입을 흔들림 없이 계속하겠다는 선덕여왕의 의지를 재확인하는 국서를 들고 일본 사신은 귀국했다. 결국 비담(毗曇)은 일본 사신에게 최종적으로 전달된 선덕여왕의 일본 차(茶) 중계무역 고수(固守) 결정을 듣고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확인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반란의 와중(渦中)에 선덕여왕은 죽었고 반란이 진압되자 김춘추는 즉시 일본으로 건너가 선덕여왕의 일본 차(茶)중계무역 고수 정책이 철회(撤回)되었음을 통보했다. 통보받은 일본은 김춘추를 억류했지만 소용없다는 것을 일본 스스로가 더 잘 알았다. 일본서기 (日本書紀) 고우토쿠 천황 편에는 김춘추의 솔직한 차(茶) 수입중지(輸入中止) 통보에 대한 일본인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었다. ‘김춘추는 용모와 얼굴이 아름답고 이야기를 잘했다.’ 그때가 647년이었다.



다음 해인 648년 김춘추는 아들 김문왕(金文王)을 데리고 함께 당나라 장안을 방문해 일본 차(茶) 중계무역을 중지했음을 알리고 당 태종에게서 군사동맹(軍事同盟)을 이끌어 냈다. 643년에 장안을 방문해 군사동맹을 제의하는 김춘추에게 당 태종은 신라는 여자가 왕위에 있어 남들이 우습게 본다는 모욕을 주며 거절했었다. 일본 차(茶)를 수입 가공해 해상 무역으로 전 세계에 판매하는 행위를 그만두지 않으면 당나라 황실 종친을 보내 신라왕을 시키겠다는 협박(脅迫)마저 서슴지 않았던 당 태종이었다. 일본 차(茶) 수입 중지 조치는 자신의 아들 대(代)에도 지속(持續)될 것이라는 것을 김춘추가 약속해도 믿지 않았던 당 태종은 함께 간 김춘추의 셋째 아들 김문왕이 면전에서 조아리며 약속하자 믿어 주었다. 그 증표(證票)로 진덕여왕 이후 신라왕은 김춘추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선덕여왕이 자신의 일생을 걸고 지켰던 신라의 차(茶) 산업은 여왕이 죽고 일 년이 채 안되어 사라졌다. 일본 차(茶)의 신라로의 수입은 중지되었고 일본 차(茶)를 가공 처리해 전 세계에 수출하던 신라의 차(茶) 산업은 역사 기록 속에서마저 철저히 사라졌다. 차(茶)를 실크 로드 무역로(貿易路) 위로만 유통시키려는 진상(晉商)과 소그드 상방(商坊)의 계획은 성공가도를 질주(疾走)하고 있었고 신라를 사로(斯盧)라 부르게 한 시루(斯盧 si lu) 또한 그저 떡이나 찌는 기구로 전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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