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와 분황사 그리고 황룡사 9층 목탑이 건설된 이유

선덕여왕과 당태종이 보낸 모란 그림의 진실 3

by 역맥파인더

첨성대(瞻星臺)를 지어 동짓날을 정확히 가려내도록 했다. 동짓날을 정확히 가려내야 동짓날 이후 105번째 날인 한식(寒食)을 찾아낼 수 있고 그래야 한식 다음날인 청명(4월 5일)을 정할 수 있었다. 청명 이후 20번째 해돋이인 곡우(4월 20일)까지 계산해 언제 찻잎을 따야 하는지 일본에 가있는 사신(使臣)들에게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진평왕이 이미 583년부터 설치해 운영해 온 선부서(船府署)에 명령해 청명(淸明)과 곡우(穀雨) 기간 동안 채엽(菜葉)되는 많은 차(茶)를 한꺼번에 실을 수 있는 튼튼한 선박들을 더 많이 조선(造船)토록 해 일본으로부터의 차(茶) 수입에 만전을 기하게 했다. 선부서(船府署)에서 개발한 평저선(平底船)은 조수(潮水) 간만(干滿)이 커서 뻘(갯벌)이 많은 신라의 해안(海岸)을 모두 천혜(天惠)의 항구(港口)들로 만든 걸작(傑作)이었다.



아버지 진평왕이 584년 선부서(船府署)에 이어 설치한 승부(乘府)에 명령해 가공이 끝난 일본 차(茶)를 신속히 실직주(悉直州:동해 삼척)와 하슬라주(何瑟羅州=명주溟州:강릉)로 수송할 수 있도록 수레(車) 준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했다. 지금의 동해항과 강릉항을 떠난 배들이 울릉도(鬱陵島)를 거쳐 연해주의 혼춘(琿春:Hunchun)으로 입항해 두만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부여하(Buerha: 포미합통하)를 통해 목단강(牧丹江:Mudanjiang)으로 연결되었다. 목단강은 송하강(松花江) 하류와 합해져 흑수(黑水)로 흘러갔다. 흑수(黑水:Amur Riber) 이북으로 차(茶)를 수출하는 해상 무역로가 개척되었던 것이다. 계절풍(季節風)과 해류(海流)때문에 봄에만 출항(出航)할 수 있는 차(茶) 수출선(輸出船)들은 일본에서의 차(茶) 채엽(菜葉) 시기와 겹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업이 이루어져야만 제때에 떠날 수 있었다. 어려운 항해를 마치고 북서풍 부는 겨울에 돌아오는 배들을 위해 황룡사(皇龍寺)에 목탑(木塔)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645년 당 태종이 안시성 전투에서 눈알이 뽑힐 때 완공된 85미터 높이의 황룡사 9층 목탑은 개운포(開雲浦) 같은 동해안의 항구들을 찾는 세계 여러 나라의 무역선들에게 길을 안내하는 훌륭한 등대(燈臺) 역할을 해냈다. 먼 훗날 무스캇(muscat)에서 온 처용은 이 목탑을 보고 찾아온 것이었다. 신속한 차(茶) 가공을 위해 그리고 여왕의 차(茶) 산업을 유지하겠다는 강건한 의지를 선포하기 위해 당 태종이 향기(香氣) 없는 모란(牧丹) 그림을 보낸 2년 후인 634년에는 분황사(芬皇寺)가 창건되었다. 황제가 없다던 향기가 여기 있다며 분황사는 그렇게 당 태종을 조롱하듯 세워졌다.



632년에 즉위한 선덕여왕(善德女王)은 당 태종이 죽기 2년 전인 647년에 죽었다.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에서 실패해 죽어가는 와중에도 신라에서 차(茶)의 향기를 없애기 위해 비담(毗曇)을 646년 장안(長安)으로 불러들였다. 상대등(上大等)으로 화백회의(和白會議)를 이끌던 비담은 당나라에 신라 사신으로 가서 태종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해야 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일본 차(茶) 중계무역을 파괴시키겠다는. 그 약속을 이루는 것만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살리는 길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태종은 아홉째 아들 위진왕(魏晉王) 이치(李治)에게 진상(晉商)과 소그드 상방(商坊) 대표들 앞에서 의식(儀式)까지 올리게 한다. 그런 그에게 황위가 이어지게 하기 위해 626년부터 황태자였던 이승건(李承乾)과 넷째 아들 복왕(濮王) 이태(李邰)가 희생(犧牲)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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