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골제와 수산제가 저수지라고?

선종 사찰엔 문도가 많다. 그 이유가

by 역맥파인더

궁예(弓裔)가 열 살의 나이로 차(茶) 가공 노동자가 되어 영월(寧越)에 있는 세달사(世達寺)에 들어간 건 운명(運命)이었다. 당(唐) 나라에서 황소(黃巢)의 난이 발발하고 황소(黃巢)의 유도(誘導)대로 반란군이 장안(長安) 대신 명주(明州:杭州)와 복주(福州), 광주(廣東)로 칼끝을 돌려 그곳에 상주(常住)하는 수십만 명의 페르시아와 아랍의 머천트(Merchant:茶商人)들을 학살(虐殺)했고 그 결과 신라에서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경제 활황(活況)이 일어났다. 일본에서 생산되는 찻잎(茶葉)들의 대부분을 입도선매(立稻先賣)해 복주(福州)와 광동(廣東)으로 가져가 완제품(完製品)으로 가공했던 대식국(大食國:사라센)의 페르시아 상인들과 아랍 상인들이 황소 반란군들에 의해 살해(殺害)당하거나 혹은 바다로 달아나면서 일본 찻잎(茶葉)들을 구매(購買) 해 줄 사람들이 사라져 버렸다. 산더미처럼 쌓인 채 변질해 가는 찻잎(茶葉) 들을 보면서 일본은 타개책(打開策)으로 신라에 사신(使臣)을 보냈고 878년 8월부터 신라는 황금을 주고도 구입(購入)할 수 없었던 찻잎(茶葉)을 일본으로부터 마음껏 확보해 완제품으로 가공한 후 전 세계로 수출하는 개국(開國)이래 최고의 경제 호황(好況)을 누리게 되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일본 찻잎들을 가공해 처용(處容)처럼 복주(福州)와 광주(廣州)에서 학살을 피해 도망(逃亡) 나온 아랍과 페르시아 머천트들이 의뢰(依賴)하는 대량 주문(注文)에 기한(期限)과 물량(物量)을 맞추려면 궁예(弓裔)처럼 이제 막 열 살이 넘은 사내아이들도 동원되어야 했다. 선종(禪宗) 사찰(寺刹)에는 적게는 수백 인 많으면 이천 명에 이르는 많은 문도(門徒)들이 거주(居住)하고 있었다는 기록(記錄)은 여기에 연유(緣由)하는 것이었다. 당시 신라는 폭발적 경제 호황에 즐거운 비명(悲鳴)을 지르고 있었다.

세달사부석사무역로전략적위치(1) (1).jpg 명주(동해안)를 남한강에 연결하는 세달사와 울진영덕을 세달사에 연결하는 부석사

그러나 이런 경제 호황은 황소(黃巢) 반란군을 이용해 복주(福州)와 광주(廣州)에 무역망(貿易網)을 구축하고 실크 로드 상방(商幇)이 아닌 마린 로드 상방(商幇)에게서 차(茶)를 수입하는 페르시아와 아랍의 머천트(merchant 茶商人)들을 일거에 제거(除去)한다는 목적을 달성한 실크로드 상방이 황소(黃巢) 반란군을 용도폐기(用途廢棄)하면서 급작스럽게 끝났다. 학살(虐殺)을 피해 신라로 도망쳐 온 페르시아와 아랍인 머천트(merchant)들이 원래 있던 항주(杭州)와 복주(福州), 광주(廣州)로 모두 돌아가고 일본에서 쏟아져 들어오던 찻잎(茶葉)들도 다시 복주와 광주로 선적(船積)되기 시작하면서 신라는 극심한 경제 공황(恐慌)에 빠졌다. 태종 무열왕 이후 일본 찻잎(茶葉) 수입가공 무역(貿易)을 놓고 금지(禁止)와 진흥(振興)이라는 양극단(兩極端)의 정책이 오락가락하면서 혜공왕(惠恭王)과 애장왕(哀莊王)이 살해(殺害)되고 장보고(張保皐)가 암살(暗殺)당했던 과거의 정치적 난장(亂場)이 다시 재현(再現)되었다. 이 정변(政變)들은 마린로드 상방과 실크로드 상방(商幇)이 각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당(唐) 나라 황실(皇室)과 조정(朝廷)에 엄청난 공작(工作)을 벌인 결과로 발생한 급변(急變)들이었다. 당(唐) 헌종(憲宗)이 즉위한 805년 이후부터 60년 가까이 지속(持續)되었던, 우이당쟁(牛李黨爭)이라 기록된 정쟁(政爭)도 재상(宰相) 우승유(牛僧孺)와 이덕유(李德裕) 간의 정책 대립인 것처럼 보이나 실은 세계 무역 패권(覇權)을 놓고 다투던 두 상방의 이해(利害)를 대변(代辨)해 격돌한, 청부(請負) 정쟁(政爭)에 불과했다. 그 정쟁의 결과가 당(唐)의 멸망을 가져온 875년 발발(勃發)한 황소(黃巢)의 난(亂)이었다. 무역 패권 쟁탈전이 결과한 폐해(弊害)의 단적(端的)인 예(例)였다. 소그드인 안록산(安祿山)의 반란이 진압된 후 진상방(晉商幇)과 함께 실크로드를 쥐락펴락하던 소그드상방(Sogdian group of merchants)은 현종(玄宗) 이후 차례로 황제에 즉위한 현종(玄宗)의 아들(肅宗)과 손자(代宗)그리고 증손(德宗)에 의해 철저히 축출(逐出)되었다.

세달사비마라사지도 (1).jpg

황소의 난이 진압(鎭壓)되고 일본이 더 이상 찻잎(茶葉)을 신라에 수출하지 않자 구산선원(九山禪院)에 속한 수많은 사찰(寺刹)들에 차(茶) 가공 관련 기술자로 취직해 있던 궁예(弓裔) 같은 문도(門徒)들이 졸지(猝地)에 실업자(失業者)가 되어 온 가족이 끼니를 걱정하게 되었다. 대공황(大恐慌)이었다. 궁예(弓裔)가 선종(善宗)이라는 스스로 지은 법명(法名)을 가지고 취업(就業)해 일해 왔던 세달사(世達寺)는 그러나 구산선원(九山禪院)의 다른 사찰들과는 수행하는 역할(役割)에서 그 격(格)을 달리하는 특별한 사찰(寺刹)이었다. 문무대왕(文武大王)으로부터 대당전쟁(對唐戰爭) 전비(戰費) 마련을 부탁(付託) 받은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그 과업(課業)을 완수하기 위해 창건(創建)한 사찰이 부석사(浮石寺)였고 세달사(世達寺)였다. 전비(戰費) 확보(確保)를 위해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고안(考案)한 자금(資金) 창출 방법은 명주(溟州) 해안으로 본의 아니게 표류(漂流)해 들어오는 일본 차무역선(茶貿易船)에서 거둬들인 찻잎(茶葉)을 가공해 차(茶) 완제품을 만들어 전 세계로 수출하는 것이었다. 명주(溟州)의 남북(南北)으로 길게 뻗은 해안선(海岸線)을 따라 일본 찻잎(茶葉) 무역선(貿易船)이 오고 가며 발달시킨 포(浦)와 진(津)으로부터 들어오는 일본 찻잎(茶葉)들을 가공해 당(唐) 나라의 감시와 견제(牽制)를 물리치고 수출함으로써 전비(戰費)를 마련한다는 계획이었다. 의상대사(義湘大師)가 나당전쟁(羅唐戰爭)이 발발(勃發)한 다음 해인 671년 해동화엄(海東華嚴)의 애국애족(愛國愛族)을 시작한 곳이 명주(溟州) 양양(襄陽) 낙산사(洛山寺)인 연유(緣由)였다. 그러나 이 계획의 가장 큰 문제는 당(唐)에 의해 이미 장악(掌握)되어 신라의 땅이면서 당나라 땅이 된 기존 무역로(貿易路), 즉 당성(唐城)을 향해 있는 계립령과 죽령이 아닌, 당(唐)이 모르는 새로운 무역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최치원(崔致遠)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화엄십찰(華嚴十刹)로 기록된 사찰(寺刹)들이 화엄사상적(華嚴思想的) 잣대로는 그 보편성(普遍性)을 찾을 수 없고 교통(交通)의 요충지(要衝地)라는 점에서만 보편성(普遍性)을 찾을 수 있는 연유(緣由)였다.

화엄 십찰의 분포 - 섬진강과 낙동강, 금강과 남한강을 이용하는 교통의 요지에 분포되어 있다.

지금은 법흥사(法興寺)로 개칭한 영월(寧越) 사자산(獅子山) 흥녕사(興寧寺)에 세워진 징효대사탑비(澄曉大師塔碑)에는 대국통(大國統) 자장율사(慈藏律師)가 개척한, 명주(溟州)를 통해 들어오는 일본 찻잎들을 가공해 대륙으로 수출하는 사자산문(獅子山門)의 무역로(貿易路)인 차령로(茶嶺路)가 어떤 곳들을 지나가는지 적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강릉- 원주- 제천(堤川)을 통해 남한강으로 들어서는 경로(經路)와 섬진강(蟾津江)으로 들어온 찻잎들이 장수(長水)를 통해 금강(錦江)으로 연결되어 공주(公州)- 진천(鎭川)- 죽산(竹山)을 지나 장호원(長湖阮)의 청미천(淸渼川)을 타고 남한강으로 들어가는 경로(經路)였다. 섬진강(蟾津江)과 금강(錦江)을 연결해 주는 곳의 지명(地名)은 그래서 장수(長水)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강(江)을 이용한 물류(物流)에는 퇴적(堆積) 같은 작용으로 지형(地形) 변형(變形)이 일어나 생기는 문제가 있었다. 섬강(蟾江)에서 남한강으로 수로(水路)를 변침(變針)할 때 섬강의 물줄기가 남한강과 거의 수직(垂直)으로 접하는 지형상의 문제 때문에 좌초(坐礁)가 많이 발생했는데 결국 월지국(月支國)이 다스리던 삼한(三韓) 시대 때 사용되었던 방법이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다. 찻잎들을 제천(堤川)까지 가져온 후, 의림지(義林地)의 저수문(貯水門)을 열어 그 수량(水量)을 활용해 주포리(周浦里)에서 배를 띄워 남한강 수로(水路)에 올리는 방안이었다. 의림지는 원래 관개(灌漑)를 위해 축조된 것이 아니라 차무역(茶貿易)을 위해 축조(築造)된 선당(船塘)이었다.

제천 의림지 지도 (1).jpg 제천 주포리는 산골 마을이나 배가 드나드는 걸 의미하는 포자가 들어가는 마을이름을 가지고 있다.

벽골제(碧骨堤)와 수산제(守山堤)도 동진강(東津江)과 낙동강(洛東江)의 차운반(茶運搬) 수운(水運)을 용이(容易)하게 하기 위해 축조된 선당(船塘)들이었다. 서해와 남해의 조석(潮汐)을 이용한다는 점이 의림지와 달랐을 뿐. 수산제(守山堤)는 차(茶)를 싣고 나르기 위해 밀양강(密陽江)을 출입해야 하는 차선(茶船)이 모래가 퇴적(堆積)되어 낙동강 상류 쪽을 향해 돌출된 삼랑진(三浪津)의 특이 지형 때문에 선회(旋回)에 곤란을 겪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축조(築造)된 선당(船塘)이었다. 삼랑진에서 조금 더 상류 쪽으로 올라가면 세천(洗川)이 흐르는데 바로 그 세천으로 들어가 낙동강 상류 쪽으로 올라가다 다시 삼랑진을 향해 하행하기 위해 낙동강으로 들어갈 때 사용하는 선당(船塘)이었다.

수산제지도 (1).jpg

기후변화로 차나무가 사라지자 전형적 선당(船塘)이었던 벽골제(碧骨堤)는 관개(灌漑) 시설로 무리하게 전용(轉用)되었고 수산제는 폐기되었다. 선당(船塘)은 선거(船渠)를 뜻하는 오늘날의 독(dock)과 같은 역할을 하는 시설이었다. 바다의 조류(潮流)가 함께 뒤섞이는 강물(기수역: 汽水域)을 확실하게 막아주는 둑(堤)을 쌓고 둑 안쪽으로 바닥을 깊게 파 도랑(渠)을 만들어 배(船)가 다닐 수 있는 당(塘)을 만든 다음, 당(塘)의 양쪽에 물을 끌어들일 때 사용하는 보(湺)와 물을 흘려보낼 때 사용하는 언(堰)을 설치해 수문(水門)의 시의적절한 개폐(開閉)를 통해 밀물과 썰물의 힘을 최대한 이용한, 수운(水運)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시설이었다.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우거왕(右渠王)과 진한(辰韓)의 우거수(右渠帥) 염사치(廉斯鑡)등은 이러한 선당(船塘)을 운영하는 전문가들이었다.

벽골제는 서해의 밀물과 썰물을 이용해 차무역선을 들여오고 내보내는 선당(도크)이었다.

태백산(太白山)에 의해 남북으로 갈라진 명주(溟州)의 해안(海岸) 특성을 고려할 때 태백산 남쪽의 포(浦)와 진(津)중 당나라에 의해 포착되지 않은 곳은 울진(蔚珍)뿐이었다. 사도성(沙道城: 지금의 盈德) 이남의 모든 포구(浦口)는 이미 당나라가 파악해 들고나가는 물동(物動)들을 감제(監制)하고 있었다. 의상대사는 울진(蔚珍)을 포함해 태백산(太白山) 이남에서 유통되는 찻잎(茶葉) 중 당나라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모든 찻잎(茶葉)을 새로 창건한 소백산(小白山) 동쪽 끝 영주(榮州)의 부석사(浮石寺)로 집결시켰다.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 그리고 유일한 수출항(輸出港)인 당항성(党項城)을 이미 모조리 당(唐)에게 뺏긴 신라로서는 자장율사(慈藏律師)가 개척한 차령로(車嶺路)를 통해 서해안(西海岸)으로 옮겨진 차(茶)들을 국외로 수출할 항구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쉬운 대로 서산(瑞山) 가야산(伽倻山)의 보원사(普願寺)와 공주(公州) 계룡산(鷄龍山)의 갑사(甲寺)를 수출전진기지(輸出前進基地)로 운용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당(唐) 수군(水軍)에 의해 덕적도(德積島)와 기벌포(伎伐浦)에서 차무역선(茶貿易船)들이 요격(邀擊)되었다. 결국 고구려 평원왕(平原王) 연간(年間) 온달(溫達) 장군이 개척하다 신라의 요격(邀擊)으로 중단한 소백산(小白山)의 동북쪽 끝자락의 험준한 마구령(馬驅嶺)이 개통되었다. 월지국(月支國)이 다스리던 삼한(三韓) 시대 때 사용했던 내륙수로(內陸水路)를 통해 북쪽의 거란(契丹)에 닿아 그들을 통해 초원로(草原路)로 차(茶)를 수출하려는 계획이었다. 부석사(浮石寺)로 집결된 태백산 남쪽 지역의 찻잎(茶葉)은 마구령(馬驅嶺)을 통해 소백산(小白山)을 넘은 뒤 남대천변(南大川邊)을 타고 남한강(南漢江) 수로(水路)에 올려졌다. 명주(溟州)의 주문진(注文津)부터 삼척(三陟)까지 남북(南北)으로 이어진 모든 포(浦)와 진(津)을 통해 들어오는 일본 찻잎(茶葉)은 영월(寧越)과 단양(丹陽)의 경계(境界)에 있는 태화산(太華山) 기슭에 새로 창건(創建)한 비마라사(毘摩羅寺)에 집결(集結)되어 차(茶)로 만들어 진 뒤 남한강(南漢江) 수로(水路)로 올려져 한강 하류(下流) 향했다.

의상대사차무역로(1).jpg 임진강과 남강 그리고 대동강을 통해 거란에 연결되는 고대 차 무역로

전통적 일본 찻잎 수입로(主輸入路)인 섬진강(蟾津江)으로 들어오는 물량은 기벌포(伎伐浦)가 당(唐) 수군(水軍)에 의해 장악되어 공주 넘어 부강(芙江)까지 위협받게 되자 금강(錦江) 수로(水路)는 포기(抛棄)되고 대신 대가야(大伽倻) 때 운영되던 곡성(谷城)- 남원(南原)- 함양(咸陽)- 합천(陜川)- 고령(高靈) 교역로를 이용하여 성주(星州)와 달성(達成), 상주(尙州)를 거쳐 부석사에 집산되어 남한강 수로에 올려졌다. 부산(釜山)으로 들어오는 일본 찻잎은 범어사(梵魚寺)에서 출발해 낙동강 수로(水路)를 따라 신돈(辛旽)으로 뜻깊은 창녕(昌寧) 화왕산(火旺山) 옥천사(玉泉寺)와 달성(達成) 공산(公山) 미리사(美理寺)를 거쳐 부석사로 모였다. 하동(河東)과 구례(求禮)를 거쳐 곡성에서 순창(淳昌)과 임실(任實)로 가지 않고 남원으로 틀어져 함양(咸陽)과 합천으로 이어진 섬진강 교역로(交易路)는 후일 후백제가 왜 그토록 합천(陜川) 대야성(大耶城)을 확보하려 했는지 알게 해주는 연유다. 왕도(王都) 경주(慶州)가 가까워 신라 또한 대야성(大耶城) 방어(防禦)에 사력을 다했다고만 설명되는 건 낙동강(洛東江)의,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준령(峻嶺)들의 군사전략적 가치를 폄훼(貶毁)하는 일이다. 또한 왕건이 즉위한 후 후백제와 고려가 공산(지금의 팔공산) 전투와 고창(지금의 안동) 전투등을 치열하게 벌인 연유가 이 교역로(交易路)의 패권(霸權) 다툼에 있었음을 간과(看過)하게 하는 일이다. 쟁점(爭點)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는 후삼국시대의 남악(南岳:지리산)과 북악(北岳:가야산)으로의 화엄종(華嚴宗) 분열(分裂) 또한 차교역로(茶交易路)때문이었다. 섬진강을 금강에 연결시켜 백제 시절 개척한 서해횡단항로(西海橫斷航路)로 차무역로(茶貿易路)를 운영해야 한다는 관혜(觀惠)의 주장과 섬진강을 낙동강과 한강에 연결해 예성강(禮成江)과 대동강(大同江)까지 차교역로(茶交易路)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희랑(希朗)의 주장(主張)이 맞서 일어난 일이었다. 완도(莞島)의 청해진(淸海鎭)이 없어지고 강화도에 혈구진( 穴口鎭)이 설치되는 바람에 세력(勢力)을 갖게 된 왕건(王建)으로서는 예성강(禮成江)을 제외(除外)하고 임진강(臨津江)을 대동강과 연결해 차무역로(茶貿易路)를 운영하려던 궁예만큼이나 후백제는 위험했다. 관혜(觀惠)가 주석(駐錫)했던 최치원의 화엄십찰(華嚴十刹)중 하나였던 합천의 보광사(普光寺)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연유였다.



한강(漢江)과 임진강(臨津江)이 만나 하나의 강(江)이 되어 황해(黃海)로 나가는, 김포반도(金浦半島) 북변(北邊)의 강(江)을 조강(祖江)이라 하는데 이 조강(祖江)의 간조(干潮:썰물)와 만조(滿潮:밀물)가 순차적(順次的)으로 일어나는 물때를 맞추면 한강(漢江) 하구(河口)에서 임진강(臨津江) 하구(河口)로 옮겨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에 두 번 썰물과 밀물이 반복해 발생하는 바다의 물때를 맞추기 위해 한강 하류의 마지막 지류(支流)인 창릉천(昌陵川:德水川)이 흐르는 부아산(負兒山:北漢山) 기슭, 진관(津寬)에 청담사(靑覃寺)를 지었다. 화엄십찰(華嚴十刹)중 최북단(最北端)에 위치한 청담사(靑覃寺)는 그러나 법계무진연기(法界無盡緣起)의 화엄(華嚴) 사상(思想)을 수행(修行) 하기 위한 사찰(寺刹)은 아니었다. 오랜 운반(運搬)으로 산화(酸化)가 일어난 찻잎(茶葉)들을 숯불 화로(火爐) 위 배롱(焙籠)에 올려 서서히 다시 건조(乾燥)시키는 홍배(烘焙)를 하기 위한 사찰(寺刹)이었다. 그리고 차(茶)를 운반(運搬)하는 사람들을 위한 숙식(宿食) 시설이 갖춰진 곳이었다. 2007년 서울 은평구 진관내동(津寬內洞)에서 삼각산청담사삼보초(三角山靑覃寺三寶草)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암키와가 발견되어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건물지(建物址)가 일반 사찰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결과가 발표된 연유(緣由)였고 사면(四面)에 회랑(回廊)이 설치(設置)된 독특한 건물 구조(構造)를 가진 연유(緣由)였다. 회랑(回廊)은 기둥과 지붕만 있는 낮게 지은 루(樓)로서 복도(複道)처럼 보이는 구조물인데 홍배(烘焙)를 마쳐 뜨거워진 찻잎(茶葉)을 신속히 냉각(冷却)시키기 위한 통풍(通風) 시설이었다. 건물지(建物址)가 사찰(寺刹)로 보기 어렵고 당시의 공공(公共) 여관(旅館)인 원(院)으로 쓰였을 거라고 주장된 연유(緣由)였다. 홍배(烘焙)는 탄배(炭焙)라 불릴 정도로 숯(炭)이 가장 중요한 역할(役割)을 하는 차(茶) 가공공정(加工工程)인데 창릉천(昌陵川)을 따라 상류로 거슬러 가면 지금은 사기막골로 불리는 청담골이 있었다. 사기막골(沙器幕谷)이라는 이름도 사기(沙器)를 굽던 가마(窯)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인데 사기(沙器)를 굽기 전 그곳은 숯(炭)을 구워내던 숯가마터(炭窯地)였다. 청담사(靑覃寺)는 사실 청탄사(靑炭寺)를 뜻하는 암호였다. 담(覃) 자가 사성음으로 탄(tan)으로 발음되기에 이루어진 작명(作名)이었다. 숯(炭)을 사용한 홍배(烘焙) 공정을 마치면 산화(酸化)가 진행되어 누렇게 변해가던 찻잎(茶葉)들이 다시 푸르러(靑) 졌기에 청담사(靑覃寺)라 명명(命名) 한 것이었다. 홍배(烘焙)를 마친 찻잎들은 회랑(回廊)에서 신속 냉각(迅速冷却)된 뒤 다시 배(船)에 실려 조강(祖江)이 밀물로 바뀌기 전 창릉천(昌陵川)에서 한강(漢江)으로 나아가 곧 밀물로 변할 조강(祖江)에 다다랐다. 지금 강화도 동쪽 끝 연미정(燕尾亭)이 있는 앞바다에서 닻을 내린 채 만조(滿潮)가 올 때를 기다렸다. 조강(祖江)이 황해(黃海) 만조(滿潮)의 힘으로 임진강(臨津江) 오두산성(烏頭山城:關彌城) 앞을 지나 연천(漣川) 어유지리(魚游池里)까지 올라가는 걸 이용해 차(茶)들은 손쉽게 철원읍(鐵原邑)까지 운반(運搬)되었다.



철원(鐵原)에서 다시 육운(陸運)으로 토산(兎山)을 거쳐 평산(平山)에 도착한 찻잎(茶葉)들은 재령강(載寧江)을 통해 서흥(瑞興)과 사리원(沙里院)을 지나 대동강(大同江)으로 들어갔다. 대동강을 따라 북으로 향한 차(茶)들은 안주(安州)에서 자기들을 초원로(草原路:Glass Road)를 통해 온 세상으로 유통(流通)시켜줄 거란(契丹) 머천트(merchant)들에게 인도(引渡)되었다. 이 무역로(貿易路)를 통한 차교역(茶交易)으로 확보된 자금(資金)은 대당전쟁(大唐戰爭)의 전비(戰費)로 사용되었다. 나당전쟁(羅唐戰爭)의 주요 전투(戰鬪)가 석문(石門:지금의 황해도 서흥瑞興)과 매소성(買肖城:지금의 경기도 연천) 등 임진강(臨津江)과 재령강(載寧江) 유역(流域)에서 벌어진 연유(緣由)였다. 궁예(弓裔)가 후고구려를 철원(鐵原)에 도읍(都邑)한 연유이기도 했다. 문성왕(文聖王)이 어쩔 수 없어 청해진(淸海鎭)을 폐쇄(閉鎖)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재정(財政) 결손(缺損)을 만회(挽回)하려 조강(祖江)에서 임진강(臨津江)과 한강(漢江)으로 들어가기 위해 닻을 내리고 밀물을 기다리는 선박(船舶)들로부터 통항료(通航料)를 징수(徵收) 하기 위해 지금의 강화도(江華島) 연미정(燕尾亭) 자리에 혈구진(穴口鎭)을 설치(設置)한 연유였다. 844년 8월부터 혈구진(穴口鎭)에서 강제된 통항료(通航料) 징수(徵收)는 임진강을 따라 이루어지던 차무역선(茶貿易船)의 교역로(交易路)를 통항료를 징수하지 않는 예성강(禮成江)으로 바꾸게 하는 계기(契機)가 되었고 이는 후일 왕건(王建) 집안이 역사의 전면에 나설 재력(財力)과 세력(勢力)을 갖게 하는 결정적 토대(土臺)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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