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후손들이 강릉에 처박힌 이유

쿠다라(kudara くだら)의 진실과 에밀레종의 비가(悲歌)

by 역맥파인더

궁예(弓裔)가 왕(王)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명주(溟州:강릉)에 터 잡고 생존해 온 태종무열왕 둘째 아들 김인문(金仁問)의 오세손(五世孫)인 김주원(金周元)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支援) 덕분이었다. 궁예가 북원(北原:지금의 원주原州)에 터 잡고 반군(叛軍)을 일으킨 양길(梁吉)의 휘하(麾下)에서 전공(戰功)을 쌓고 그 공(功)으로 얻은 신임으로 양길이 내어 준 일부 병력(兵力)을 이끌고 명주(溟州)로 쳐들어가 명주장군(溟州將軍) 김순식(金荀息)을 굴복시켜 무혈입성(無血入城)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맥락적(脈絡的) 이해가 전혀 없는, 앞뒤가 맞지 않는 허무맹랑(虛無孟浪)한 소설이다. 명주(溟州)를 전투 없이 무혈(無血)로 내주었다는 명주군왕(溟州郡王)이라 자칭했다는 김순식(金荀息)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후손(後孫)이었다. 세계 최강의 제국(帝國)인 당(唐) 나라의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자장율사(慈藏律師)가 개척하고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확립한 통일신라의 차무역로(茶貿易路)는 명주(溟州)에서 제공하는 찻잎(茶葉)들에 기초해 운용(運用)되는 명주(溟州)의, 명주에 의한, 명주를 위한 교역로(交易路)였다. 궁예에 의해 군사적으로 제압되어 순종(順從)했다는 김순식은 오히려 당(唐) 나라의 삼한(三韓) 차산업(茶産業) 괴멸(壞滅) 정책에 맞서 저항한 자장(慈藏)과 의상(義湘)의 희생(犧牲)이 헛되지 않도록 황소(黃巢)의 반란이 진압(鎭壓)된 후 또다시 극도의 혼란(混亂)에 빠진 신라의 차산업(茶産業)을 지키고 발전시키고자 궁예(弓裔)를 발탁(拔擢)해 역사의 전면(前面)에 내세운 사람이었다. 영월(寧越) 세달사(世達寺)에서 궁예가 재(齋)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까마귀들이 무슨 물건을 물어다 그가 가지고 있는 바리 속에 떨어뜨리고 가므로 이를 들어 보니 왕(王)이란 글자의 참서(讖書)가 있으므로 곧 이를 감추어 말하지 않고 속으로 왕이 될 것을 자부(自負)하고 있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사는 궁예가 발탁(拔擢)되었다는 사실을 시사(示唆)하고 있다. 평범한 승병(僧兵) 일을 하는 수원승도(隨院僧徒) 신분으로 비범(非凡)한 지도력(指導力)을 보이고 있던 궁예에게 금강(錦江)과 남한강(南漢江)을 연결(連結)하는 데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하는 안성(安城:아산, 천안, 안성) 지역을 샅샅이 돌아보게 하고 영월의 북쪽인 북원(北原:원주)을 포함한 그 이북(以北) 지역인 북한강(北漢江) 유역(流域) 또한 자세히 살펴보게 한 다음 명주(溟州)로 들어오도록 기획(企劃) 한 것 역시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순식(金荀息)이었다. 궁예가 명주(溟州)로 들어가기 전 죽주(竹州:지금의 安城)에서 활동하던 군벌(軍閥) 기훤(箕萱)을 찾아가 그의 휘하(麾下)에 들어가려고 했다는 기록과 곧이어 기훤의 휘하에 있던 원회(元會) 신훤(申煊) 등과 같이 기훤 휘하에서 벗어나 북원(北原:원주)의 군벌(軍閥) 양길 휘하(麾下)로 들어가 원주(原州), 영월(寧越), 울오(鬱烏:지금의 평창), 어진(御珍:지금의 울진)까지 점령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이를 증거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 까마귀로 은유(隱喩)된 김순식과 그에게 왕재(王材)로 발탁(拔擢)된 궁예가 명주 사람들과 함께 황소(黃巢)의 반란이 진압된 후 기아선상(飢餓線上)에 놓인 신라인들을 구하기 위해 의상대사가 무역로를 만들어 냈던 것처럼 차(茶)를 수출(輸出)할 수 있는 무역로(貿易路)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 후고구려와 마진(摩震)과 태봉(泰封)의 역사(歷史)였다.

백제 무왕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키는 이세민 반란군에 조공한 갑옷 명광개(明光鎧)

김춘추가 당시 돌궐(突厥)까지 무릎 꿇린 세계제일 당제국(唐帝國)과 군사동맹을 체결(締結)하고 그의 아들 문무대왕(文武大王)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滅)하고 당나라까지 신라에게 한 약속(約束)을 지키도록 강제(强制)한 이후 김춘추가(金春秋家)가 영원히 통일신라의 왕위(王位)를 차지할 거라는 사실을 의심(疑心)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김춘추의 후손(後孫)들이 외진 동해안(東海岸) 바닷가에 숨어 들어가 오랜 세월 웅크리고 있었던 데는 굴곡진 역사적 사연(事緣)들이 있었다. 산서성(山西城) 지역을 봉토(封土)로 하는 당국공(唐國公)이었기에 당연히 산서성을 본거지로 하는 진상방(晉商幇)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그들의 지원으로 황제까지 올라간 당(唐)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마음을 바꾼 건 황태자 이건성과 제왕(齊王) 이원길 때문이었다. 해상무역이 가지는 엄청난 수익성(收益性) 때문에 이연(李淵)이 마린로드 상방(商幇)에게 경도(傾倒)되자 진상방(晉商幇)은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을 지원(支援)해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을 일으켜 이건성과 제왕(齊王) 이원길을 죽이고 이세민을 이연(李淵) 대신 황제로 만든 후, 마린로드 상방(商幇)이 천태종(天台宗)을 내세워 장악한 차무역(茶貿易) 패권(覇權)을 무력(武力)으로 강탈(强奪)했다. 이제 그들의 다음 목표(目標)는 천태종단(天台宗團)의 마린로드 상방(商幇)에게 대량의 차(茶)를 공급하고 있는 신라(新羅)였다. 당 태종의 최후통첩에도 천사옥대(天賜玉帶)를 믿고 일본차(茶) 중계무역(中繼貿易)을 포기하지 않는 신라 진평왕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해 그들이 주목(注目) 한 것은 백제였다.

쿠다라 백제와 야마토 일본의 관계를 보여주는 쿠샨제국 수도 시르캅에 있는 전방후원분의 원형(무덤이 아니다. 차가공및 저장시설이다)

성왕(聖王)의 비극적 죽음 이후 위덕왕(威德王)은 아좌태좌와 임성대군등 자신의 아들들은 물론 백제의 모든 학자, 기술자들을 일본으로 가게하고 자신의 죽음으로 쿠샨(Kushan) 간다라(ghandara) 백제를 스스로 멸(滅)해 버리자 극도의 혼란에 빠진 진(辰)의 백제를 구한 건 출신을 알 수 없는 무왕(武王)이었다. 위덕왕의 명령으로 떠나야만 했던, 쿠다라(kudara くだら) 백제가 여기에 있었다는 걸 기억해 주길 바랐던 사람들이 당시 도달해 있던 모든 과학기술을 총동원해 묻어놓은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는 다행히 그들이 기억해 주길 원했던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고이 보관되고 있다. 법륭사(法隆寺) 몽전의 구세관음상(救世觀音像)이라 불리는 아버지 성왕의 등신불상(等身佛像)을 만들어 먼저 일본에 보내놓는 등 죽기 전 쿠다라 백제(百濟)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치밀한 조치를 취해 간 위덕왕에 맞서 서동(薯童) 출신이라 알려진 무왕은 진(辰) 백제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신라를 굴복시키기 위한 실크로드 상방(商幇)의 꽃놀이 패(覇)로 뽑혀 그들이 기꺼워할 정도로 줄기차게 신라를 군사적으로 침략했다. 무왕의 집념 어린 공격에 신라는 점점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고 있었다. 결국 합천(陜川)의 대야성(大耶城)이 진(辰) 백제에 함락되고 신라는 차산업(茶産業)을 끝내 포기하지 않으려는 내물왕계(奈勿王系)의 왕권(王權)이 태종무열왕계(太宗武烈王系)로 이양(移讓)되는 사변(事變)에 이르게 되었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뼈에 새기고 사는 사람들이 진지왕(眞智王)의 후손인 김춘추가(金春秋家) 사람들이었다. 무측천(武則天)과 현종(玄宗)의 치세(治世) 기간 벌어진 극적인 정세(情勢) 변화에 기민(機敏)하게 변신(變身), 적응함으로써 나라를 안정시키고 왕권(王權)을 유지했던 건 태종무열왕계 왕가(王家)의 업적이었다. 만파식적(萬波息笛)과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 설화(說話)는 이러한 극단(極端)을 오가는, 귀신같은 변신(變身)의 와중(渦中)을 은유(隱喩)하여 지어진 기사(紀事)였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태종무열왕계 왕가의 귀신같은 변신이 결국 차산업(茶産業)을 포기했던 처음으로 돌아갔음을 알리는 건축물이었다.

일본 법륭사 몽전에 있는 구세관음상 - 백제 성왕의 등신불 (토인의 얼굴이다)

그러나 경덕왕(景德王)이 안록산 쪽에 줄을 서는 결정적 오판(誤判)을 저지름으로써 태종무열왕가(家)의 현란(絢爛)한 변신은 왕권(王權)을 내물왕계(奈勿王系)에게 다시 돌려주어야 하는 비극으로 끝났다. 안록산(安祿山)의 반란으로 수모(受侮)를 당해야 했던 숙종(肅宗), 대종(代宗), 덕종(德宗) 같은 현종(玄宗)의 직계후손(直系後孫) 황제들이 그 치욕을 와신상담(臥薪嘗膽)하여 안록산의 손을 잡은 경덕왕의 죄를 물어 아들인 혜공왕(惠恭王)을 시해(弑害) 당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안록산 편에 섰던 경덕왕이 죽기 7년 전에 겨우 얻은 외동아들 혜공왕이 왕비(王妃)와 함께 이찬(伊湌) 김지정(金志貞)에게 시해당한 건 당(唐) 현종(玄宗)의 증손(曾孫) 덕종(德宗)이 즉위한 바로 다음 해였다. 시해범 김지정은 관등(官等)이 각간(角干) 다음으로 높은 이찬(伊湌)이었다. 그런 김지정이 국왕을 시해했다는 것은 당시 지배세력(支配勢力)이 안록산과 결탁(結託) 한 일에 대해 신라를 위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고 그건 경덕왕이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김지정은 국왕을 시해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상대등(上大等) 김양상(金良相)과 이찬(伊湌) 김경신(金敬信)에 의해 참수(斬首)되었다. 이후 선덕왕(宣德王)이 된 김양상이 오년 만에 죽고 그 후사(後嗣)를 정할 때 내물왕(奈勿王) 후손인 후일(後日) 원성왕(元聖王)이 되는 김경신과 왕위를 다투게 된 태종무열왕의 후손 김주원(金周元)은 호우(豪雨)로 불어난 알천(閼川)을 핑계로 왕위 경쟁을 포기하고 하슬라(何瑟羅)로 물러났다. 즉위(卽位)하자마자 아비의 죄를 물어 혜공왕을 처참한 죽음으로 문책(問責)한 당(唐) 황제 덕종이, 당제국 내(唐帝國內) 소그드인들을 모조리 도륙(屠戮)한 현종(玄宗)의 증손(曾孫)이 안록산 편(便)에 서서 자신들을 욕보인 경덕왕 집안을 계속 신라의 왕가로 군림(君臨)하게 하지 않을 거라고 알아챈 김주원의 살기 위한 삼십육계(三十六計)였다. 원성왕(元聖王)은 즉위한 후 이러한 김주원(金周元)의 처신(處身)에 대한 보상(報償)으로 그를 하서주도독(河西州都督)으로 임명하고 그가 사는 곳 명주(溟州)의 군왕(郡王)으로 봉(封) 해 주었다. 유혈사태(流血事態) 없이 왕위(王位)를 돌려준 것에 대한 마땅한 은사(恩賜)였다.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자신의 둘째 아들 안경서(安慶緖)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경덕왕(景德王)은 그때부터 죽는 날까지 전전긍긍(戰戰兢兢) 해야 했다. 안록산이 암살당했다는 비보(悲報)가 전해지던 날까지 경덕왕은 자신의 왕위를 잇게 할 아들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진압(鎭壓)의 수순(手順)으로 들어간 안록산의 반란은 자신의 아들로 후사(後嗣)를 담보(擔保) 하지 않는다면 왕가(王家)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공포를 왕에게 불러일으켰고 그래서 경덕왕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명색(名色)이 대승불교(大乘佛敎) 승려(僧侶)라는 인간이 견마배(牽馬陪)가 끄는 말(馬)을 타고 다니는 법상종(法相宗) 중, 경흥(慶興)에게 국사(國師)와 삼랑사(三郞寺)를 뺏기고 심심산골 부석사(浮石寺)에서 쓸쓸히 입적(入寂)한 의상대사(義湘大師)의 십대제자(十大弟子)중 하나이며 신라십성(新羅十聖)중 하나인 불국사(佛國寺) 주지(住持) 표훈대덕(表訓大德)에게 경덕왕이 아들을 갖게 해 달라 간청하며 벌어진 일들을 정리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이(奇異) 경덕왕·충담사(忠談師)·표훈대덕(表訓大德) 조(條)에 실린 설화(說話)는 이런 연유(緣由)에서 나온 것이었다. 758년 그토록 원하던 왕자를 얻은 경덕왕은 후일 혜공왕(惠恭王)이 되는 이 왕자를 안록산과 결탁(結託)한 죄(罪)의 문책(問責)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더 나아가 태종무열왕계(太宗武烈王系) 왕권(王權) 유지를 담보하기 위해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이라 명명(命名)된 성덕왕(聖德王)의 원찰(願刹)인 봉덕사(奉德寺)의 동종(銅鐘) 주조(鑄造)에 착수했다. 안록산 편(便)에 서게 된 결정이 왕(王)의 독단(獨斷)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신라 귀족 모두가 아니 신라 백성 모두가 함께 내린 것이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의도(意圖)로 시작된 봉덕사(奉德寺) 동종(銅鐘) 제작(製作)은 그러나 경덕왕이 죽을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덕왕이 죽은 후 안록산과 협력한 것에 대한 책임(責任)을 누군가는 반드시 져야 한다는 추상(秋霜) 같은 당(唐) 황제의 질책(叱責) 앞에 8살에 즉위한 혜공왕을 대신해 섭정(攝政)을 맡은 만월부인(滿月夫人)이라 불리던 그 어린 왕의 에미, 경수왕후(景垂王后)는 남편(男便)인 경덕왕이 만들려다 못한 동종(銅鐘) 제작을 완료(完了)해 안록산 편에 선 잘못이 결코 왕가(王家)에만 있지 않음을 강변(强辯)했다. 소리를 내는 종(鐘)이 전면(前面)에 내세워진 이유는 무측천(武則天:측천무후)이 관계된 만파식적(萬波息笛) 때문이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를 당(唐) 황제 덕종(德宗)에게 상기(想起)시키기 위해 그리고 신문왕(神文王)과 효소왕(孝昭王) 때 무슨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잊어버린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경주(慶州) 귀족(貴族)들에게 그때의 합의를 기억(記憶) 나도록 하기 위해 소리가 상징(象徵)인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떠 올릴 수 있는, 소리라는 똑같은 상징(象徵)을 갖는 종(鐘)이 내세워진 것이었다. 종(鐘) 이름에 성덕대왕(成德大王)을 붙여 성덕왕(聖德王)을 도드라지게 한 이유 또한 책임자(責任者)를 단죄(斷罪)하라며 닦달하는 당(唐) 덕종(德宗)에게 그의 증조부(曾祖父)인 현종(玄宗)이 신라 성덕왕에게 무엇을 요청했었는지 기억하라는 힐문(詰問)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노력은 오히려 덕종(德宗)의 수치심(羞恥心)을 더 사무치게 하는 역효과를 가져왔고 그 죄(罪)로 그 에미의 소중한 아들, 혜공왕(惠恭王)은 무참히 시해당했다. 그 후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은 타종(打鐘)할 때마다 에미탓에... 에미탓에...라는 소리를 냈고 그건 사람들이 그 종(鐘)을 에밀레종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緣由)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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