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식사시간이야말로 우리 가족이 모이는 시간이다.
입주이모님께서 밥준비를 해주시면 내가 보통 먼저 식탁에 앉아 아내와 첫째 딸을 부르는데, 천둥벌거숭이인 둘째 아들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밥을 먹으므로, (솔직히 뭘 먹는지도 모르겠다) 엄밀히 저녁식사는 나와 아내, 그리고 첫째 딸이 처음 모이는 곳이다.
아내가 먼저 자리에 앉으면 하루의 이야기를 한다.
직장일과 장인장모님 이야기, 그리고 본인의 컨디션을 돌아가며 쏟아내는데 보통 결론은 나는 힘들다, 컨디션이 안 좋다 정도로 귀결된다. " 아 오늘 왜 이러지? " " 뭐 걸린 거 같아" " 좀 누워야겠어"라는 표현이 나온다면 그날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여느 책이나 인터넷글처럼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금물이고 "그랬구나, 힘들었겠구나"로 말을 끝내는 것이 오랜 경험상 현명한 방법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아내가 본인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전 첫째 딸이 식탁에 앉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땐 발언의 우선권이 아이에게 넘어간다. " 오늘 학교에서 많은 일이 있었어" "오늘 눈물이 났어"로 시작되면 아내도 본인의 말을 멈추고 아이에게 집중하는 것이 우리 집 우선순위이다. 아이의 말을 들어보면 내용은 다르나 본질은 비슷하다. 결국 힘들었다는 것으로, 아무래도 아이다 보니 해결책을 조금은 제시해 주는 게 좋으나, 결국 공감과 격려, 위로를 해달라는 것이 아이의 바람이다.
그런데 아내는 본인과 꼭 빼닮은 첫째 딸의 푸념을 견디지 못한다. "얘야 넌 그게 문제야, 엄마가 해결책을 말해주면 왜 하려 하지 않니?" "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하는 거 듣기 힘들어" 그러면 딸은 "에휴 엄마한테 말 안 해" 서로 티격태격 대기 일쑤다. 그럴 때야말로 나의 대화의 기술이 빛을 발하는 순간인데 오랜 삶의 경험을 토대로 이럴 때는 대부분 침묵하는 것이 보통 정답이다. 괜히 누구편 들었다가 오히려 역풍을 맞기 일쑤이므로.. 기회가 될때 한쪽을 비난하지 않으면서 슬쩍슬쩍 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분위기를 밝게 환기시키려 노력한다. 아내는 감기든 장염이든 뭐에 걸린 것 같았다 하고..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하였으니, 결국 누우려 안방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럴 때 다시 첫째 딸의 감정을 매만져주고 대화를 종료하면 된다.
둘은 정말 너무나도 닮았는데, 아내가 말하기로는 그러하기에 더 딸을 포용하기 어렵다고 한다. 본인의 취약한 부분을 아이가 잘 알고 있는 것 같기에, 그리고 아이의 여러 행동들이, 본인의 모난 후회의 상처들을 벌리는 것 같다고 한다. 너무도 사랑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1순위임에도 그러한 고충은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둘과 살고 있는 게 삶의 행복이자 스릴이다.
PS. 장모님께서, 어렸을 때 내 아내이야기를 해주셨었는데, 별명이 앵무새였다고 한다. 집에 오면 하루 종일 조잘조잘 댔다고 한다. 나는 듣고 있는 게 힘드셨을 것 같다 생각했는데, 요새 아내는 장모님과 하루에 두 번씩 통화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한다. 기회가 되면 장모님의 어머님 이야기도 들어봐야겠다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