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을 단순한 전화기가 아닌 손안에 든 우주로 볼 수도 있고, 현실과 이상이라는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이들 역시 행복이라는 동일한 본질을 추구하고 있기도 하다.
동일한 옷을 두고 개성 있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디자인이라 하고, 유행에 민감한 사람은 요즘 누가 저런 해괴망측한 옷을 입고 다니냐고도 한다. 글쓰기 방법론 역시 운동선수가 갈고닦는 방법만큼 다양하다.
복잡하고 풀리지 않던 글쓰기의 고민을 싹 해결해 줄 수 있는 만능해결사 같은 것을 찾던 시절, 글쓰기는 「무엇을·왜·어떻게」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답만 알게 되면 글쓰기 면허증을 딸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1. 멘탈이 일시 가출했던 질문
새로운 글쓰기 세상을 발견해보고 싶어 영혼이 배회하고 있을 때, 「무엇을 쓸 것인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아이디어 올림픽처럼 주렁주렁 열린 사연들이 떠올라 뭔가를 써보려고 하면 뭘 골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이야기에 초점을 맞출지 결정하는 것이 암초에 걸려 쉽지 않았다. 뭔가 어둠의 힘에 압도당한 채로 정신 놓고 아무거나 쓸 수만도 없는 것 아닌가. 두뇌 고장으로 출구를 찾지 못해 글의 방향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흐려지기도 하며, 의미가 모호해지는 경우가 반복되었다.
고장 난 두뇌 탓에 집 없이 떠돌거나 방향을 잃고 표류했던 근본적 원인은 안내 표지판 같은 존재인 주제문의 역할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데 있었다. 즉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서 중요한 내용을 뽑아내는 과정이 혼란스러웠던 것은, 글쓰기에서 주제문이라는 기둥 없이 집을 지으니 휘청휘청했기 때문이었다.
주제문이 없으면 글의 목적과 메시지가 흐려지고, 결국 무엇을 전달하려는 글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미궁과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나 역시 글을 쓰려면 무언가 핵심에 집중해야 한다는 미션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삽질만 반복하는 노가다였던 것이다.
이런 미로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체 그림의 핵심조각이라 할 수 있는 주제문을 중심으로 퍼즐을 맞춰가듯 글을 구성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주제문이 정해지면, 핵심 조각 중심으로 퍼즐을 맞추고 엉뚱한 조각은 추려내어 그에 맞는 내용만으로 글을 전개할 수 있다. 즉 주제문이라는 기둥 중심으로 집을 짓고 불필요한 자재는 정리할 수 있다.
글을 쓸 때 중요한 것은 온갖 이야기를 뒤죽박죽 섞어 정체불명의 것을 만들 일이 아니라, 주제와 관련된 핵심적인 내용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이제 나는 글을 쓸 때마다 신나게 따라 달릴 수 있는 핵심조각을 명확히 설정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글이라는 전체 그림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이렇게 글을 쓰면 레이저처럼 정확하게 주제를 조준할 수 있고,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더욱 강렬하고 선명하게 전달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 포기 직전까지 몰고 갔던 글 쓰는 목적
글을 쓰기 위해 주제문을 설정한 후, 나는 팝콘처럼 터져 나오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바로 심오한 글쓰기 작업 앞에서 「왜 이 글을 써야 하는가?」라는 숙명적이고도 철학적인 딜레마였다.
월급이나 자유를 주는 것도 아니기에 글을 쓰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면, 펜을 잡았지만 글쓰기가 의미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밤낮없이 글쓰기의 매력에 푹 빠져 있던 상황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면, 글을 써야 할 이유조차 없어져 버릴 것 같았다.
글쓰기라는 미로 속에 갇혀 방향감각을 잃고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이 무엇인지, 글을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족쇄처럼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이 문제의 원인은 글쓰기가 단순히 손가락 운동이나 키보드 두드리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나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처럼, 글쓰기에도 심오한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간과한 데 있었다.
글쓰기는 그 자체로 존재의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목적이 없다면 글을 쓰는 이유가 무의미하게 사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풀어도 답이 없는 수학 공식 같이 복잡하고 어려운 글쓰기 이론서들을 펼쳐보며 비밀을 밝혀내려는 열정으로 그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글쓰기에는 백과사전 같이 유용한 정보를 자세하고 오보 없이 따끈따끈하게 소식을 전달하거나, 억지 아닌 변호사 같은 주장으로 설득하고, 아름다운 영상처럼 눈물 흘릴 수 있는 이미지를 전달하며, 선생님 같은 삶의 지혜 등 다양한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즉, 글쓰기는 나침반 없는 항해처럼 목적 없이 방황할 것이 아니라, 튼튼한 건물을 짓기 위해 설계도를 그리는 것처럼 특정한 목표나 의도를 가지고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딱! 하고 명확히 알게 되었다.
숨 쉬는 것보다 글 쓰는 게 당연히 힘은 들었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글을 쓰는 이유를 분명히 설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파수에 맞춰 잡음이 섞이지 않도록 내가 글을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정의하고, 패션에 따라 옷을 바꿔 입듯이 그 목적에 맞춰 글을 쓰는 것이 중요했다.
예를 들어, 정보 전달이 목표라면 교과서 같이 정확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전달하고, 설득이 목표라면 광고처럼 강력한 메시지로 역효과 나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닥치는 대로 휘갈기지 않고 이제 나는 계획형 인간처럼 글을 쓸 때마다 목적의식을 갖고, 그에 맞춰 착착 전개하는 방식으로 글쓰기를 한다.
이렇게 하면 글발이 쫙쫙 나오게 되어 글쓰기 고수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바뀌게 되고, 읽는 사람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단계로 등극하는 길이다.
3. 밤새 고민하고 좌절했던 질문, 어떻게!
그래, 이제 주제도 정했고, 왜 써야 하는지도 알았으니 이제 한번 신명 나게 써볼까?라고 외치려는 찰나, 어라? 근데 이걸 어떻게 쓰지? 머릿속은 텅 비어있고, 키보드만 딸깍딸깍 울리는 상황에 봉착하고 말았다.
자, 이제 글의 목적과 주제는 내 손안에 있소이다! 상태가 되었지만, 다음 단계는 어떻게 하면 이 녀석을 맛깔나게 요리할까?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된 것이다. 갓 잡은 싱싱한 식재료를 앞에 두고 어떤 음식을 만들지 고민하는 행복한 고민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말 잘하는 사람들의 언변은 100만 볼트 전기 같고 칼날처럼 날카로워서 상대방의 급소를 정확히 찌르기도 하고, 듣는 사람들을 심쿵하게 만들지만, 나는 앵무새보다 못한 것 같아 괴로웠고, 그 답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물론 나름 빠삭한 이론을 가졌지만 실제 글은 발로 쓰는 수준이라서 아직 가야 할 길은 구만리였던 것이다.
나는 글쓰기 공식 대신 글쓰기 오답노트만 잔뜩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글쓰기 공식은 어디에 있는 거야! 글쓰기라는 녀석... 도대체 정답이나 공식이라는 게 있기는 하는 걸까?라는 것이 문제의 원인이었다.
말이나 글을 잘 쓰는 것은 타고난 재능과 같아서, 노력만으로는 절대 따라갈 수 없는 미스터리 같았다. 글쓰기 방법을 알기 위해 대형서점이나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의 글쓰기 전문가들이 써놓은 책을 찾아 나섰으며, 드디어 글쓰기 보물 조각들을 발견했다.
글쓰기의 완벽한 공식을 찾기 위해 밤새도록 읽고 글쓰기 이론들을 짬뽕해 가며 연구했지만 결국 멘탈만 탈탈 털렸고 결론 없이 실패함으로써 어떻게 조화롭게 엮어낼지 막막한 느낌과 어려움을 겪었다.
글쓰기 순서를 지키지 않고 막무가내로 쓰면 엉망진창의 결과물뿐이고, 글이 폭발해 버릴지도 모르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글쓰기가 일정한 순서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글쓰기 이론들을 너무 뒤죽박죽 섞어서, 정체불명의 글을 만들어낼 것이 아니라, 글쓰기 퍼즐 조각들을 시간, 공간, 논리라는 세 가지 기준에 맞춰 착착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쓰기는 기차 여행과 같아서, 출발역부터 도착역까지 논리라는 기찻길을 따라 각 단락이라는 정거장에 차례대로 정차하면서 독자들을 태우고 가야 한다. 만약 기찻길을 벗어나거나 정거장을 건너뛰면 독자들은 길 잃은 여행객 신세가 되는 것이기에, 글을 쓸 때,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적인 흐름을 따라가며, 각 단락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구성해야 한다.
이와 같은 접근을 통해 글쓰기라는 미로에서 탈출한 기분이랄까? 어쨌든 이제 글쓰기가 옛날처럼 두렵지 않고, 손에 잡히는 느낌이자 운전면허를 딴 기분이며, 주제문에 부합하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