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첫 해고

by JJ

00년 0월 0일

다시 면접을 보러 다닌다. 면접을 본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다시 자필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다.

이력서에 쓸 내용이 없다. 이력사항이 없다.

이제 면접 노하우가 생겨서 면접을 보는 동시에 내가 붙을 것인지 떨어질 것인지 감이 온다.


00년 0월 0일

입사했다.


00년 0월 0일

고래밥이라는 과자를 먹었다. 과자 모양이 오징어, 붕어, 게, 불가사리, 이렇게 생겼다. 고래는 이런 것을 먹고사나 보다. 야근도 오래 하니 지친다. 주말 없이 23일째 야근이다.


00년 0월 0일

돈이 관련된 일들은 대부분이 복잡하다. 샐러리맨도 그렇고 비즈니스맨도 그렇고 장사꾼도 그렇다. 이익이 개입되는 곳은 모두 그렇다. 돈의 특성대로 내가 만들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기분 나쁜 감정들이 싫다. 어떤 것이 이기는 것일까? 맞짱을 뜨는 것일까? 이해를 하는 것일까?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지만 당하고 싶지도 않다. 조용히 싸워서 이기는 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 환경은 때론 나를 참 악하게 만든다. 명함 값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똥개에게는 똥이 약이다.


00년 0월 0일

IMF

이게 무슨 난리 인지 모르겠다. 명퇴자, 실직자, 자살자....

국가가 부도라.... 카드값 마이너스 나는 것도 아니고.


00년 0월 0일

숫자를 하나 잘못 표기하는 바람에 수천 만원의 손실이 생겼다. 1차적 책임은 나에게 있다. 내가 좀 더 신경을 썼으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집중해서 일해야 한다.


00년 0월 0일

상사와 쌓여왔던 좋지 않은 감정들이 풀어지지 않는다. 산다는 건 때론 치사한 일이다. 관계의 치사함이 있다.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손을 내밀어야 하는데 그가 내밀지 않으면 내가 내밀어야 한다. 꼭 하나님이나 부처님을 믿어서가 아니라 종교는 필요한 것 같다. 절제와 평온과 안식을 위해서. 나이가 들어도 계속 꿈은 필요한 것 같다. 꿈을 갖고 사는 사람처럼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없는 것 같다.


00년 0월 0일

건강, 이성, 돈. 무엇이건 절실할 때 우리는 성숙해진다. 간절함이 우리를 성숙하게 한다.


00년 0월 0일

K양은 대단한 직원이다.

일을 저질러 놓고도 미안한 기색도 없는 뻔뻔함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복통, 소화불량, 설사가 계속된다. 몇 주째 정상적이지 못한 컨디션에 많이 예민해져 있다. 컴퓨터 모니터에는 원인 모를 에러 메시지가 뿌려져 있다. 시험공부하듯 책을 뒤지며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간신히 시스템을 정상적으로 돌려놓았지만 이미 작업 시간을 다섯 시간이나 까먹었다. 무심한 컴퓨터, 바쁠 때는 말썽 좀 부리지 말지.


00년 0월 0일

불필요한 자기애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기회를 놓치기도 하고, 일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지혜로웠으면 좋겠다. 강한 것은 요란하지 않다. 나의 경쟁상대는 나. 나를 이겨야 한다.


00년 0월 0일

띵~ 하는 매킨토시 시동음과 함께 전원이 켜지고, 사무실에 불도 하나둘씩 켜진다.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서류와 원고들, Fax, 슬라이드 필름, 여기저기 붙어 있는 포스트잇, 벽면 모퉁이에 걸려 있는 화이트보드에는 오늘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K양은 또 사고를 쳤다.


00년 0월 0일

오후 5시가 되면 어김없이 회사 앞을 지나가는 백발의 할머니가 있다. 자신의 체격보다 더 큰 핸들카를 끌며 오늘도 파지를 주워 모은다.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곤 하루도 빠짐없이 나와 종이를 주워 담는다. 이 할머니는 우리 회사 옆에 있는 4층짜리 건물의 주인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이렇게 무거운 종 이를 날마다 힘들게 주워 모으냐는 질문에 할머니 대답은 의외로 간결했다.

“놀면 뭐 해”


근면한 할머니를 보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파지를 주워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쉬셔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00년 0월 0일

차장이 회의실로 나를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XXX 씨는 우리 회사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함께 일하기에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나도 특별한 코멘트 없이 쿨하게 알겠다고 했다.




첫 번째 직장을 미련 없이 그만두고 주위의 권유로 출판업계에 첫 발을 딛게 되었다. 두 번째 직장에서 2개월 만에 해고를 당했다. 이유는 상사의 부당함에 이의를 제기했는데 그게 못마땅했는가 보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역시 반론하고 반박했겠지만 좀 더 세련되고 지능적으로 대응 했을 것 같다. 계속 다니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과감하고 과격했는지도 모르겠다. 후회는 없다. 생각해 보니 직장 생활과 결혼 생활은 공통점이 몇 가지 있는 것 같다.


첫째, 알고 시작하면 수월하고 모르고 시작하면 고생한다.

둘째, 가능하면 오랫동안 버틴다.

셋째, 아무리 오랫동안 함께 해도 안 맞는 것은 안 맞는 것이다.

넷째, 돈이 다가 아니다.

다섯째, 눈치만 있어도 살아남는다.

매거진의 이전글내 생에 첫 직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