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폭식 말고 폭독
-서점-
다시 서점으로 돌아온 하영과 알렘.
“와우. 진짜로 자타공인 파괴몬스터 알렘 맞네요.”
“그러게. 내 파워 장난 아닌데? 너 어디까지 상상한 거야?”
하하하하. 한바탕 신나게 웃는 두 사람.
“너도 알다시피 난 실제로도 멀쩡하던 화장실 손잡이며 냉장고 문짝 부수고, 작업하던 파일 다 날려 먹고,,, 하여튼 멤버들이 나만 보면 불안해서 어쩔줄 몰라해. 오죽하면 내가 요리만 하면 음식이 타는 게 아니라 프라이팬이 탄다라고 하겠냐?”
“저도 그래요! 사실. 손만 대면 막 부서지고, 떨어지고 깨지고..집에 있는 컵도 엄청 깨먹고..”
“난 부수기만 하는 게 아니고 덜렁대는 성격 때문에 아무데나 질질 흘리고 다니고 막 그래”
“저도 요즘 잘 잃어버려요. 엄마가 어릴 땐 뭐 하나 잃어버리는 게 없더니 점점 뭘 잃어버리고 까먹는다고 엄청 구박해요. 오빠 닮아가나봐요.”
“아무리 내 팬이어도 그런 건 안 닮아도 되는데”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나랑 이것저것 닮았다니 하영은 더 신이 난다.
“방도 엄청 지저분하고“
“나도 그래. 가는 걸음마다 한 꺼풀씩 뱀허물을 벗는다고 가족들이 구박해”
“동생이 엄청 까불어서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녜요”
“나이 차이 별로 안 나면 그럴 수 있더라고. 난 두 살 터울 여동생이 있는데 중학생 때까지는 여동생이랑 엄청 싸우고 너무 싫었는데 지금은 사이가 좋아. 너도 동생이랑 사이좋게 지내. 결국 가족이 최고야”
“그러고 싶은데 잘 안 돼요. 쪼끄만게 얼마나 까부는지,,확”
알렘이 마치 동생이기라도 한 듯 쥐어 박으려다 알렘과 눈 마주친 하영, 민망하다.
“으흐흐. 이제 해 볼게요. 동생이랑 사이좋게...”
하영, 억지 웃음을 지어 보인다.
기분좋게 화제를 바꾸는 알렘.
“어쨌든 우리 벌써 책 3권이나 읽었네?!”
“벌써요?”
하영은 읽은 책을 다시 떠올려본다.
머릿속에서 미술책, 대본집, 그리스로마신화의 책장이 후루룩 넘어간다.
“우리 앞으로 누가 더 많이 읽나 내기 할까?”
“제가 질 게 뻔한데요 뭘.”
“그건 모르지.”
“10권 읽으면 나랑 1시간 데이트, 20권 읽으면 2시간 데이트,, 어때? 200권 읽으면?? 24시간 함께 있어 줄게!”
“그건 너무 좋지만 어떻게 그 많은 걸 다 읽어요?”
하영은 갑자기 너무 우울해진다.
“난 많이 읽으라고 했지. 어떤 걸 읽으라고 하진 않았는데?”
“네?”
어리둥절하기만 한 하영.
‘도대체 이 오빠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책 한 권도 겨우겨우, 꾸역꾸역 며칠이 걸려 겨우 읽는 나에게 열 권, 스무 권? 심지어 200권이라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가만 보니 이 오빠가 우리 엄마보다 더 하다. 엄마는 하루에 한권만이라도 읽으라고 했다가 내가 하도 징징거리니까 일주일에 3권으로 줄여줬는데, 200권이라니 이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란 말인가. 윽..이 말은 취소.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걸 미끼로 나를 골려먹을 작정인거지. 그런 거지?
이게 혹시 새로 나온 가스라이팅 방법인가? 에효, 하여튼 몰라몰라몰라. 알렘 오빠와의 이 꿈같은 시간이 나락을 떨어지는 정말 똥 같은 상황이다.’
“넌 할 수 있어!”
“어떻게요? 어떻게 200권을 읽어요?”
“자 봐봐!”
알렘, 두꺼운 책 한 권을 들어 보인다.
“이건 책 한 권!”
한 숨을 푹 쉬는 하영.
“그렇..죠”
옆에 있는 얇은 책 한 권을 다시 들어 보이는 알렘
“자, 이것도 책 한 권! 맞지?”
!!!!! 좀 어이없어 피식 웃는 하영.
“그렇죠!”
“세상엔 두꺼운 책, 얇은 책 말고도 외국어로 쓴 책, 한국어로 쓴 책, 교과서, 잡지책, 만화책, 동화책, 그림책, 요리책 등등등 별의 별 책이 다 있어. 그러니까 넌 그 수많은 책들 중 어떤 것이라도 읽으면 돼. 우리의 약속은 그냥 그거야. 책을 읽는다! 어떤 책이든 상관없다!”
팔을 크게 펼쳐 보이는 알렘.
“물론 네가 읽고 싶으면 이~렇게 두껍거나 어려운 책을 읽어도 되지만, 내 생각엔 1권의 두꺼운 베스트셀러 보다는 얇은 10권의 동화책을 읽어보는 것도 좋은 거 같아. 만약 그것도 어렵다면 100권의 그림책을 읽어도 좋아. 자고로 뭐든 즐기는 게 중요해. 작은 보람 작은 성공. 작은 뿌듯함을 맛봐봐. 넌 즐기게 될 거야. 어때?“
“그래도 좀...”
좀 내키지 않지만 오빠 부탁이니까 한 번 들어줘볼까?
“알겠어요. 근데 자신은 없어요.”
“다녀왔습니다.”
어디선가 호영이 목소리 들린다.
“가족들이 돌아왔나보다. 그럼 약속하는 거다! 다시 만나.”
치지지직 연결 끊기는 영상통화처럼 사라지는 알렘.
아쉬워하는 하영도 사라진다.
-하영의 집-
“하영아”
하영 부르면 집 안으로 들어오는 엄마 아빠와 호영.
호영, 호다닥 장난감 있는 곳으로 간다.
“다녀오셨어요?”
방에서 문 열고 나오는 하영.
“뭐 했어? 책상은 치웠니? 책도 안 읽었지?”
말만 던져놓고 쳐다보지도 않고 물건 정리하느라 바쁜 엄마.
“무슨 소리야. 책 읽었거든!”
“많아야 한 두장?”
“세 권이나 읽었거든?”
“세권? 말도 안 돼. 니가 무슨 세 권을 읽어? 진짜아?”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고개를 가로젓는 엄마.
“엄마, 내가 물어보까? 무슨 내용인지?”
끼어들며 히죽대는 호영.
“어휴,,이..”
한 대 쥐어박으려다가 알렘과의 약속이 떠올라 손을 거두는 하영, 화를 꼭꼭 누르며 말한다.
“너 까불지마라. 진짜 다 읽었거든.”
“그래, 호영아. 누나 다 읽었다잖아. 멋져. 김하영!”
역시 내 편 들어주는 건 아빠뿐인가. 아빠 최고.
아빠가 편을 들어줘서 그런지 진짜 책을 내 스스로 읽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왠지 뿌듯한 하영이다.
다음 날, 산을 이루고 쌓여있는 책들 위로 마지막 읽던 책을 올려놓으며 기지개를 펴는 하영.
“와~ 진짜 200권 달성!!! 예스예스예스. 김하영 진짜 대단해!”
하영이 크게 소리치자 우르르 달려오는 가족들.
“왜왜왜? 무슨 일이야?”
아빠는 혹시 무슨 일이 났나싶어 깜짝 놀란 표정이다.
“아빠, 나 책 200권 읽었다!! 10권도 신기했는데 200권을 읽다니 이건 정말 신기방기왕방기 어메~이징 퐌타스틱한 일이야.”
“정말? 와~ 대단한데 우리 딸”
“그치그치. 내가 봐도 내가 대단해. 하긴 이게 다 알렘오빠 덕분이지 뭐.”
쌓여진 책들 보며 비꼬는 엄마.
“알~렘? (쌓인 책들을 들추며) 야, 200권 같은 소리하고 있네. 무슨 바람이 불어 책을 읽겠다고 하나 했더니 이거 뭐 죄다 애기들이나 읽는 그림책, 동화책 아냐? 이런 거 읽고선 무슨 200권 타령이야?”
하영, 오히려 엄마가 한심하다는 듯 당당하다.
“엄마, 그림책은 책 아냐? 동화책은 책 아니냐고? 그거 엄마가 사준 거잖아. 열심히 보라고.”
엄마, 만화 한국사 들고 있다가 하영의 당당함에 더 어이없다.
“야, 그건 하도 책을 돌같이 보니까 만화로라도 역사를 좀 알라고 사준거지. 이렇게 제대로 카운트 할 책은 아니지.”
하영, 이젠 아예 엄마를 가르치듯 아는 척이다.
“엄마아, 자고로 책은 즐기는 거라고 그랬어. 작든 크든, 동화든 만화든. 보람의 씨앗을 키우는 게 중요하단 말야. 즐기는 자를 이길 수는 없는 거야.”
말 끼어드는 호영.
“누나 자고로가 뭐야?”
“자고로? 그게 말야. 자고의 길이 있다는 뜻이야”
어이없는 엄마, 아빠 서로를 쳐다보고 벙찐 표정.
“자고 해라. 이제 그만.”
“아닌가? 자고 길을 가란 건가?”
하영의 말에 한숨짓는 엄마.
“멀~었다. 책 몇 권 읽는다고 어휘력이 일취월장할 순 없는 거다.”
아빠도 좀 난감하지만 딸의 기를 좀 살려주고 싶다.
“그래 생각도 좀 해 보고 찾아보고 해야 늘지. 그래도 아빤 하영이 니가 대단해. 뭐가 됐든 시작했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그치?!”
“그럼. 200권 아무나 못하는 거야. 파이팅”
“응. 아빠!”
하영, 문 닫고 나가는 아빠에게 시원스럽게 대답한다.
아빠에게 칭찬까지 받아 기분이 업된 하영,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눈도 커지고 입이 찢어진다. 하지만 소리 지르면 또 가족들이 달려 올까봐 입을 막고 좋아 어쩔 줄 모른다.
소리 없는 기쁨의 아우성을 치는 하영, 책상으로 달려가 포토북을 꺼낸다.
알렘의 포토카드를 보며 한 번 더 입을 틀어막는 하영, 눈을 질끈 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