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넌 여기 왜 왔는데?
그거 알아? 방안에만 있으면 진짜 많은 걸 잊고 사는데 그중 가장 완벽히 잊힌 게 있다면 그건 아마 ‘계절’ 일 거야. 에어컨과 보일러만 있으면 그 어떤 계절도 반팔 하나로 무난히 보낼 수 있거든. 내가 진짜 여기 와서 다른 건 다 적응하겠는데, 여름만큼은 적응 못 하겠더라. 씨발 에어컨. 에어컨이 없었거든. 에어컨 없는 실내에 있을 바엔 밖에 그늘 밑에 있는 게 더 시원해. 그니까 처음으로 안 보다 밖이 더 나은 그런 상황이 펼쳐진 거지. 전엔 밖에 나가는 건 상상도 못 했었는데. 참 그때는 매일매일을 외출 날만 기다렸던 거 같아. 사실 몰래 외출하긴 했어, 밤에.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그날, 그날은 유독 햇빛이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뜨거운 날이었어. 변태스럽게도 그걸 즐겼지. 은둔형 외톨이에겐 그 어떤 자극도 다 재미의 일종이거든. 고도의 도파민 중독자랄까. 아무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텅 빈 거리를 걷는데 새삼 너무 좋은 거야. 이 거리 전부가 내 것이 된 거 같아서. 그 기쁨도 잠시 저 앞, 편의점 앞에 누가 쭈그려 앉아있는 게 보이는 거야. 감히 내 외출 시간에. 이전의 나라면 마주치는 게 두려워 돌아갔을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난 아니었어. 그 시간, 그 거리는 정당하게 내 것이었으니까. 그의 앞으로 보란 듯이 휙 지나쳐 가서는 출입문 카드 기계에 카드를 인식했지. 딸깍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문을 당겨서 팍 여는데, 유리문에 비친 그의 옆얼굴이 너무 낯이 익은 거야. 머리는 단발에 덥수룩한 턱수염과 퀭한 얼굴. 그런 몰골. 이곳에서 내가 아는 그런 몰골을 한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지.
“한진 씨.”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초점 없는 눈으로 어딘가를 멍하니 보고 있었어. 정신이 완전히 나간듯했지.
“한진 씨.”
또 한 번 부르자, 고개가 아주 힘없이 천천히 내 쪽으로 돌아왔어. 나를 보던 그의 동공이 눈에 띌 정도로 아주 천천히 확장됐지. 마침내 놀란 토끼 눈이 되어서야 그는 소리를 악하고 지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어. 덩달아 같이 놀랐지만 태연한 척 물었지.
“여기서 뭐 해요?”
“네?”
“여기서 뭐 하냐고요.”
“아….”
한진이 당황한 듯 머리를 긁적이는데 갑자기 배에서 우르르 쾅쾅 천둥이 쳤어. 창피했는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라.
“얼마나 됐어요?”
내가 물었어. 한진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나를 봤지.
“굶은 지 얼마나 됐냐고요.”
딱히 스팸을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막상 프라이팬 위 지글지글 익어 가는 스팸을 보니 진짜 맛있겠더라. 구석에는 달걀도 몇 알 부쳤어. 한진은 젖은 머리칼로, 어깨에는 수건을 두른 채 멀끔한 모습으로 작은 좌식 식탁 앞에 앉아있었어.
“안 그래도 궁금했어요. 그날 이후로 어떻게 지내나. 핸드폰도 없으셔서 딱히 연락할 방법도 없고.”
“…네, 아무래도 제가 속세를….”
“벗어던진 자연인이라?”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어. 어느새 스팸이 다 익고 프라이팬을 들고 식탁으로 가는데 순간 한진의 눈빛이 다시 살아나는 듯 반짝거렸어. 뿌듯하더라. 대학교 때 빼고는 누구한테 요릴 해준 건 처음이었는데. 그의 앞에 프라이팬을 두면서 미리 일러뒀어. 즉석밥 데울 동안 먼저 먹고 있어도 된다고. 괜히 간식을 앞에 두고 ‘기다려’를 하는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할까 봐. 그새 다 데워진 즉석밥을 들고 다시 한진에게로 가는데 한 개도 안 먹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더라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시울이 붉어져서는.
“혹시 울어요?”
한진은 화들짝 놀라더니 재빨리 고개를 돌렸어. 그 사이 이미 눈물은 툭 한 방울 흘렀고 그걸 보고 말았지. 근데 거짓말을 하더라고,
“아니요! 안 울어요. 그냥…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훌쩍거리는 코를 닦으며 비 맞은 강아지처럼 시무룩한 얼굴로 바닥을 바라보는데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비장의 무기를 꺼내 식탁 위에 턱 하니 올려놓았지. 맥주캔 한 묶음.
배도 좀 부르고 술기운도 좀 오르니 둘 사이에 어색함도 좀 사그라들었어. 한진은 마지막 하나 남은 스팸을 젓가락으로 집어 들더니 내게 건넸어. 손사래 치며 괜찮다고 했지. 그는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얀 쌀밥 위에 스팸을 얹었어. 그리고는 그걸 한참을 바라보더니 이야기하더라고.
“옛날에 고시원 살았을 때는, 스팸이 스테이크보다 더 먹고 싶었거든요. 알죠? 스팸 한 통에 막 오천 원이나 하는 거.”
나도 모르게 한진을 동정심 어린 눈으로 봤나 봐.
“아…! 그때는 제가 고시생이었거든요. 그러니까… 그 고시생한테는 오천 원이면 거의 한 끼 식사비용이었거든요. … 뭐 워낙 가난하기도 했었고… 아니… 그 술 혹시 잘 마셔요?”
겨우 세 캔째였나? 한진은 새빨간 오뚝이가 된 채 몸을 앞뒤로 흔들거렸어. 그리곤 끊임없이 자기 이야기를 했지. 내가 턱을 괴고 거의 반쯤 감은 눈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하는데도.
“저는요, 중학교 2학년 때까진 엄마가 제발 그런 일만 안 하길 빌었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막… 몸 팔고 그런 일. 아무튼 그래서… 아! 제가 말했었나? 저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안 계셨다고. 말했나요, 말 안 했죠, 그렇죠?”
말을 한 거 같기도 안 한 거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더라. 사실 이미 한진에게서 묘하게 풍겨오는 분위기와 말투 하나하나가 그가 한 부모 가정 아래에서 자랐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했거든.
“아빠가 없어서, 엄마는 맨날 밤에 들어왔어요.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엄마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고.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내가 생각하는 게 아니길 바라서.”
그날은 마지막 기말고사를 치른 날이었어. 학교가 끝나자마자 우리는 PC방으로 달려갔지. 공부를 열심히 했던 얘였든 아니었든 시험이 끝났다는 것, 그 자체가 주는 해방감은 우리를 잔뜩 흥분시켰지. 15살 소년들이 게임을 하로 우르르 몰려드니까 아르바이트 누나가 우릴 보자마자 한숨을 푹 쉬더라고. 벌써 아는 거지, 얼마나 시끄럽게 소리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뱉어댈지. 우리가 게임을 하는 동안 아르바이트 누나는 세 번이나 와서 제발 조용히 좀 해달라고 부탁했어. 그래도 우리가 말을 안 듣자 건너편 문신 많은 형이 우리한테 욕을 하더라고.
“씨발 놈들아! 조용히 좀 해, 여기에 너네만 있냐!”
누나가 부탁할 때까지만 해도 ‘어쩌라고, 돈 내고 게임하는데 무슨 상관이야’라는 식의 태도였던 우리는 한참 나이 많은 형이, 그것도 문신도 많은 형이 말하니까 입을 다물게 되더라. 그냥 그 뒤로는 앉은자리가 가시방석 같았지. 게임하다 흥분해서 ‘아!’하고 작게 탄식만 내도 눈치가 보였으니까. 결국 우리는 얼마 못 버티고 그냥 나갔지. 그중에서 싸움 좀 잘했던 얘는 가게 문을 나오자마자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침을 퉤 하고 뱉으며 껄렁껄렁하게 앞장서 걸어 나가더라고. 그 순간 다 같이 그런 생각이 들었나 봐. ‘그래 가오가 있지’ 뭐 그런 생각. 우리는 그 아이를 따라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껄렁껄렁한 걸음걸이로 거리를 활보했어. 그 자세를 유지하느라 가방끈이 거의 어깨에서 흘러내리다 못해 팔에 걸쳐져 있었다니까. 중간중간엔 없는 가래를 끓어 모아 침을 퉤 하고 뱉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지. 그 침을 뱉는 타이밍도 애들과 다른 타이밍에 뱉으려 은근 눈치도 봤어. 한참 그럴 나이었으니까 강해지고 싶으면서도 한없이 예민한. 다른 친구가 침을 뱉고 혼자 속으로 십 초 정도 센 다음 가래를 끓어 모아 고개를 돌리고 퉤 하고 뱉으려는데, 침 대신 눈이 튀어나올 뻔했어. 가게 주방 뒤편에서 어떤 아줌마가 입에는 담배를 문 채 기름때가 잔뜩 낀 불판을 쭈그려 앉은 자세로 닦고 있는 거야. 벅벅. 문제는 그 아줌마가 우리 엄마랑 닮아도 너무 닮았다는 거였지.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춰졌어. 처음 보는 모습이었으니까. 담배를 태우는 거마저. 순간 눈을 마주쳤는데, 엄마의 눈이 분명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모른 척하더라. 그냥 아예 본 적 없다는 듯. 그 자리에서 서서 멍하니 불판을 닦는 엄마의 모습을 바라봤어. 그러니까 친구가 내게 묻더라고 누구냐고, 아는 사람이냐고. 그래서 내가 말했어. 모르는 사람이라고, 우리 이모랑 닮아서 잠시 착각했다고. 그건 나를 위한 거짓말이 아니었어. 엄마를 위한 거짓말이었어. 엄마가 자기를 창피해할까 봐. 나는 오히려 엄마가 자랑스러웠어. 아니 그보단 미안했지. 그때부터 알 수 없는 존경심과 죄책감이 옥죄여왔던 거 같아.
공부를 정말 잘하고 싶었어. 엄마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그게 유일한 탈출구일 거라고, 생각했나 봐. 근데 생각보다 성적이 애매하더라. 아니 반에서는 상위권에 들긴 하는데 전교에선 그렇지 않고 또 전국에서는 더 별 볼 일 없었지. 타고난 머리가 아니었던 거지. 능력주의 사회에서 능력이 없으면 어떡하겠어. 근데 그런 생각도 들더라 내가 돈이 좀 있는 집안이었다면 학원이라도 다녔다면, 고액 과외라도 받아봤다면 어땠을까. 그럼 좀 다르지 않았을까. 근데 그런 생각을 하면 뭐 해. 어차피 그것도 능력인데. 수능을 마치고 나오는 날, 수고했다며 허름한 차림새로 나를 기다리는 엄마 꼭 안아주며 생각했어. 대학 등록금 때문에 엄마를 고생시킬 바엔 그냥 안 가겠다고. 장학금으로 학교 다니지 못할 바엔 안 다니는 게 낫다고. 차라리 공무원이 되겠다고. 공무원 시험만 통과하면 대학 따윈 안 다녀도 되니까. 그럼 엄마가 맘 놓고 일을 안 해도 되니까. 더는 자기 자신을 창피해하지 않을 테니까.
고등학교를 졸업도 하기 전에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 동시에 고시원 공부도 준비했지. 더는 ‘아들’이라는 이유로 엄마의 돈을 갈취하고 싶지 않았거든. 3월이 되고 ‘학생’ 이름푤 땠을 땐 고시원으로 들어갔어. 엄마라는 이유로 당연시되는 집안일이라는 ‘노동’을 더는 시키고 싶지 않았거든. 대신 아르바이트 시간을 늘려야 했지. 아주 단순한 삶을 살았어. 10시부터 6시까진 공부를 하고 저녁 8시부터 아침 8시까진 일을 하고. 달에 이백만 원 가까이 정도 벌었는데 그중 반은 엄마에게 줬던 거 같아. 그리고 거기서 또 반은 월세를 내고, 거기서 반은 인터넷 강의 비용으로 썼지. 아마 내가 쓴 돈은 한 달에 삼십도 안 됐을 거야.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은 진짜 안 괜찮더라. 그래도 어떡해, 괜찮다고 생각해야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는데. 그렇게 1년이 지났고, 아직도 시험에 붙지 못했고, 엄마는 여전히 불판을 닦았어. 그러다 가을쯤 엄마의 손목이 나가버렸지. 돈이 더 필요해졌고 그래서 일을 더 늘려야 했어. 그래서 공사판 막일을 시작했지. 그렇게 공부는 점점 뒷전이 됐던 거 같아. 모든 일을 다 접고 공부만 해도 붙을까 말까 하는 시험인데도 말이야. 그렇게 또 1년이 지났나. 내 키보다 높게 쌓은, 진짜 존나 무거운 벽돌을 옮기는데 자꾸 전화가 오는 거야. 무시해도 쉬지 않고 오더라고. 결국 지게를 내려놓고 한껏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았어.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서울대학병원 간호사 김은정입니다. 류은임 님 보호자 분 맞으시죠?”
“네 그런데요?”
“아… 오늘 류은임 님께서….”
나도 몰랐는데 엄마가 심장 쪽이 계속 안 좋았나 봐. 아마, 나 때문에 말을 못 했겠지. 예상은 했었어야 하는데, 자꾸만 조금 더 돈을 보내줄 수 없냐 힘없이 말할 때 그때 눈치챘어야 하는데 말이야. 눈치가 없는 바람에 그렇게 엄마를 보내버렸네. 근데 그보다 더 한심한, 아니 역겨운 게 뭔지 알아?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는 그 순간 가장 먼저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게 ‘생활비’였어. 이번 달 내가 엄마한테 주기로 했던 생활비, 그럼 그거 안 줘도 되나.
꼭 들어야 하는 이야기 같은데, 너무 취해버려서 자꾸만 잠이 와서, 내 의도완 상관없이 그냥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로 한진의 이야기가 흘러가 버렸어. 자기가 너무 역겹다고 한 거 같은데. 그래서 여기 왔다고 한 거 같긴 한데. 도저히 집중을 하려야 할 수가 없더라고. 끔뻑끔뻑 반쯤 감긴 눈을 억지로 막 뜨고 있는데 한진이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쳐다보더니 턱을 괴고 있던 내 손을 뺐어. 순간 고개가 툭 떨어지면서 잠이 깼지.
“그래서 넌 여기 왜 왔냐고.”
내가 거기에 왜 갔더라? 순간 머릿속이 멍해져서 아무 생각이 안 났어. 그러다 떠올랐지 앞에 두고 있는 사람을 두고.
“사람이 없어서.”
“왜 사람이 없는 곳으로 왔는데.”
왜 당연한 걸 묻는 거지. 알면서 묻는 건가. 자기도 어차피 결국은 사람을 피해 이곳에 온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게 자연이든 버려진 도시든.
“사람이 싫어서.”
“그니까 왜 싫냐고.”
그러니까 걔는 정확한 이유를 알고 싶은 거야. 자기처럼 내 사정을 털어놓길 바랐던 거지. 근데 난 정확한 이유가 기억이 안 났어. 근데 그놈 괘씸하게도 아주 집요하게 물어대더라고 그래서 뭐 대략적인 사정을 말했지. 내가 어디 다닌다고 말하기도 아주 뭐 한 회사에서 무시를 당했고 그래서 그곳에서 창피하게도 해고를 당했으며 나를 찾아주는 기업도 친구도 없었고, 가족조차 나를 한심하게 여겨서… 그러니까 그 모든 게 나를 밖에서 안으로 몰아넣었다고.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꾹 참으면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는데 걔가 뭐라 한 줄 알아?
“너 되게 복에 겨운 줄 모른다.”
“뭐라고?”
“부모님 멀쩡하게 잘 살아 계시고, 두 분 이혼도 안 하셨고, 그렇다고 뭐 맞고 자란 것도 아닌 거 같고, 학창 시절에 왕따를 당했거나 그런 외부적 요인은 하나도 없는 거 같은데….”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라. 한진의 입에서 나온 말이 모두 사실이라.
“너… 그냥 네가 한심한 거 인정하기 싫어서 그런 거 아냐?”
너무 화가 나는데 진짜 씨발 죽여버리고 싶은데 말이 안 나왔어. 몸도 안 움직여졌어.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는데 전혀 아니었더라. 걔도 똑같더라.
“너 진짜 해 보지도 않고 너 자신이 한심하다는 걸 더 인정하는 꼴이 될까 봐 무서워서 그래서 그냥 안 한 거잖아. 근데 네가 뭐가 불행해.”
불행하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그냥 사람이 싫다고 말했을 뿐인데. 그렇다고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자기가 뭔데 내가 불행한지 아닌지를 판단하지.
“너 같이 온실 속 화초에서 자란 애들이 더 해. 정말 가난해 봐야 아는데, 진짜 가난해져 봐야 한다고. 그러면 지금 너처럼 여기 있지도 못해. 서울역을 배회하거나 나처럼 자연인이 되겠지. 너… 여기도 부모님이 구해주신 거지? 지금 네가 사준 이 스팸도 부모님 돈이지?”
선을 넘어도 너무 넘더라.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불쌍하고 불행한 줄 알더라. 가난해야지만 꼭 불행하다고 생각하더라. 누가 보면 내가 재벌 집 딸이라도 되는 듯 말하더라. 난 엄마 아빠 돌아가시면 말 그대로 그냥 좆밖에 안 되는데, 먹고 살길이란 하나도 없는데. 나같이 할 줄 아는 거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은 어차피 이 사회에서 못 살아남는데. 지도 다를 거 없으면서 공무원 시험도 떨어지고 결국 못 버틴 건 똑같으면서 왜 내가 자기보다 더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어차피 한심한 건 다 똑같은데,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까지. 근데 확실히 내가 걔보다 더 한심한 건 맞아. 이런 말 한마디도 못 했으니까.
“… 그만 갔으면 좋겠어.”
“뭐?”
“그만 나가달라고.”
도저히 치울 수 없더라. 그 자리를 건드리면 그때의 상황이 또 떠오를까 봐. 그냥 한진이 떠난 후, 그 자리는 그대로 두었어. 그렇다고 전혀 생각이 안 든 건 아닌데, 그때랑 좀 달랐지. 그때는 위로가 필요했어. 그 자리는 내게 초라함을 주었으니까. 그래서 컴퓨터 앞에 앉았지. 남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키보드를 손끝으로 짓누르면서, 억눌렀던 분노와 슬픔을 텍스트 속에 풀어놓았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만난 친구, ‘별로’에게
별 로 웃기는 놈이네. 신경 쓰지 마. 그런 식으로 열폭하는 거. 말 그대로 열등감 폭발해서 그런 거
야. 그게 걔가 더 못났다는 증거고.
Tlqkf 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 그렇네. 열등감이었네. 이젠 그냥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별 로 그러니까. 그냥 신경 쓰지 마.
Tlqkf 근데 사실 나도 걔 무시했었어. 그래서 더 자존심이 상했던 거지.
별 로 … 너도 널 지키기 위해서 그런 거겠지. 나도 그랬었고, 걔도 그랬고.
Tlqkf 맞아, 그래도 그랬으면 안 됐어. 그래도 그걸 입 밖으로 꺼냈으면 안 됐어.
할 말이 없는 건지, 내가 뭘 실수라도 한 건지 갑자기 답장이 안 오는 거야. 한 1분 정도이긴 했는데 그래도 진짜 바로바로 서로 답장을 주고받았거든. 갑자기 불안해진 마음에 내가 한 말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봤어. 딱히 잘못한 건 없는데 너무 칭얼거린 건 아닐까, 그래서 나한테 질려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더라고. 근데 그때 답장이 왔어.
별 로 우리 만날래?
맥주를 마시다 그대로 뿜어버렸어. 너무 예상치 못한 말이라. 그래도 되는 걸까. 원래 커뮤니티 규칙상 서로 만나자고 제의를 하거나 아는 척하는 건 안 되는 건데. 근데 그게 진짜 문제는 아니었을 거야. 날 만나고 별로가 실망할까 그게 더 걱정이었겠지.
Tlqkf 그래도 되는 거야?
별 로 되지 왜 안 돼.
별 로 왜, 만나기 싫어?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고 분명 시계는 없는데 어디선가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무슨 제안 시간이라도 있는 것처럼, 긴장되고 마음이 급해졌어. 만나고는 싶은데 만나고 싶지 않고 하지만 만나고 싶고. 이대로 답장 시간이 자꾸만 길어지면 별로는 내가 자신을 안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면 별로와 멀어지겠지. 그건 싫은데, 나는 별로가 필요한데.
Tlqkf 아니, 만나고 싶어.
별 로 그럼 만나자.
Tlqkf 근데 궁금한 게 있어.
별 로 뭔데?
Tlqkf 갑자기 왜 만나자고 이야기한 거야?
별 로 만나고 싶으니까. 말했잖아. 넌 나랑 비슷하다고.
간판 떨어진 미용실 앞 공원, 우리는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어. 멍하니 정자에 앉아 미끄럼틀을 바라보는데 글쎄, 잡초 같은 풀이 미끄럼틀보다 더 높게 자랐더라고. 저 미끄럼틀을 탔던 아이는 지금 저만큼 키가 자랐을까 뭐 그런 상상을 하고 있는데 어디서 밝고 카랑카랑한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라고.
“안녕?”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는데 정돈된 단발머리의 여자가 나를 보고 환히 웃고 있었어. 예쁘더라 생각보다 훨씬.
“혹시… 별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생각했던 그대로네.’하고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았어. 난 그게 뭐 놀랄 일이라고 엉덩이가 움찔했지. 근데 뭐가 그대로라는 걸까. 생각했던 내 모습이 어떤 모습이지, 지금 내 모습이 어떻지, 약간 멍청하고 소심한 뭐 그런 모습인 걸까? 그 생각이 무성하게 퍼져 가는 동안, 우리는 내내 말없이 앉아 있었어. 채팅에서는 쉴 새 없이 서로 떠들어댔는데 말이야. 막상 현실에서 마주하니 아무 말도 안 나오더라고. 별로도 딱히 말을 꺼내지 않고.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별로도 불편한가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닌 거 같았어. 별로의 다리가 어린아이처럼 가볍게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거든. 확실히 나와 달리 여유로워 보였어. 그래서 내가 너무 찐따 같이 느껴지는 거야. 애써 부정하려고 먼저 없는 용기를 쥐어짜 입을 뗐어.
“저기 있잖아….”
귀엽게 ‘응’하면서 나를 쳐다봤어.
“뭐가 그대로라는 거야?”
내가 너무 앞뒤 없이 말하는 바람에 잠시 당황한 듯했어. 그런데 묻질 않더라고 자신을 알 수 있을 거란 어떤 자신감이었을까? 별로는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며 혼자 골똘히 생각하더니 말했어.
“음… 불편하면서도 기대하는 너의 모습이?”
“어?”
“나 만나는 거, 솔직히 조금 불편하지만 그래도 기대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네가 딱 그래 보였어.”
“그래?”
“응. 나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별로는 이런 만남이 처음이 아니었나 봐. 그래서 ‘나 말고도 다른 친구가 있겠구나’ 하는 묘한 질투가 들었어. 원래 자존감이 낮아서 그런지, 동갑인데도 나보다 더 어른 같아 보이는 별로의 모습에 괜히 작아지더라. 눈치 빠른 별로는 금세 내 얼굴이 어두워진 걸 알아차리고는 물어봤어.
“혹시 나 때문에 기분 상한 건 아니지?”
찔린 듯 화들짝 놀라서는 온갖 과한 제스처를 취하며 아니라고 했어. 뻔히 그런 게 맞으면서. 좀생이처럼 보일까 봐 아닌 척했어. 근데 별로는 참 센스가 있어.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더라고.
“다행이다. 난 또 나 때문에 기분 상한 줄 알았어. 나쁜 뜻으로 생각하고 그대로라고 말한 건 아니었어…. 기분 나쁠 수 있겠지만, 나와 비슷한 모습이 뭐랄까? 반가웠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더라. 그제야 왜 별로가 나와 비슷하다고 말하는지 알 것 같았어. 자신이 한 말을 곱씹으며, 무조건 자기가 뭔가 실수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습. 그러다 보니 소심해지고, 목소리는 작아지고,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들어선 먼저 사과부터 하는 거. 참 당당해 보였는데 알고 보니 진짜 나랑 비슷하더라. 그렇게 웃기지도 않은데 웃어대니까 별로는 당황했어. 당황한 별로의 얼굴을 보니, 방금 전까지의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 것 같아서 신기하고, 어딘가 모르게 웃겨서 더 웃어댔어. 내가 너무 웃으니까 별로는 표정이 굳어지더라.
“왜? 왜 웃어?”
“어? 아, 아니 네가 나랑 똑같다고 말한 게 이제야 이해가 돼서.”
내 말을 믿는 거 같긴 하지만, 별로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게 그렇게 웃긴가…’ 하면서 혼잣말을 했어. 그러다가 마치 내가 옆에 없는 것처럼 혼자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보이더니, 갑자기 ‘동갑이어서 그런가?’ 하고 중얼대더라고.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그 말이 또 웃겨서 배꼽을 잡고 웃어댔지. 이번엔 자기도 자기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웃겼는지 나를 보며 해맑게 웃었어. 예쁘게 웃는 그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웃는 게 얼마 만인지. 당연히 기억도 안 났지. 그래서 그 짧은 시간이 감격스러우면서 두렵고 부담스럽기까지 했어. 서서히 내려가는 나의 입꼬리를 따라 별로의 웃음소리도 점점 작아졌어. 그렇게 다시 정적으로 이어졌지.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다 갑자기 별로가 ‘아!’ 하면서 무언가 생각난 듯, 파란색 천 가방에서 편지 봉투 같은 걸 꺼내 건네더라.
“자, 여기. 사실 이거 직접 전해 주고 싶어서 만나자고 한 거였어.”
“… 편지야?”
“아니, 초대장!”
“어?”
편지만으로도 당황스러울 거 같은데 그보다 더한 초대장이라니. 나만 초대하는데 직접 초대장까지 만들어서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거 아냐. 그래서 물었지.
“혹시 다른 사람들도 오는 거야?”
“응.”
아주 어이가 없을 만큼 태연하게 ‘응’이라고 대답하며 해맑게 고개를 끄덕이더라고. 순간 미친 건가 싶기도 했어. 은둔형 외톨이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초대하다니 말이야.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해. 근데 난 네가 꼭 와줬으면 좋겠어.”
그러곤 그냥 가버렸어. 남은 건 네 선택이라는 듯. 잘 가라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별로가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다, 그래도 무어라 썼는지는 보자 하는 마음에 조심스레 봉투를 열었어.
당신을 소멸 캠프에 초대합니다.
필요한 준비물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혹은 좋아했던 물건이면 충분합니다.
나머지 필요한 물품들은 모두 캠프장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금요일 오전 10시 간판 떨어진 미용실 앞 공원에서 뵙겠습니다.
부디 용기 내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