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김치볶음과 계란프라이 도시락 2개

by 권길주


누군가를 떠나보낸 후 눈알이 빠질 정도로 울어본 기억이 있는가?

내게는 그런 기억이 있었다.

나와 그 여자애가 얼마를 같이 살았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언제쯤 헤어졌는지도 기억이 잘 나질 않는데, 아마도 십 년은 덜 된 것 같고,

7, 8년은 더 된 기억 같은데 일일이 손가락으로 세어보기는 싫다.


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그렇게 몸이 아프고, 때로는 가난하고 때로는 원하는 것을

하나도 들어주시지 않는것만 같은지.....

나는 하나님을 때때로 원망도 한 적도 있었고, 이해할 수도 없어서 주의 길을 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나 같은 사람하고는 맞지를 않는 것 같다고 생각을 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자매를 만났던 때도 그렇게 내게 많은 시험이 몰려와서 나는 빈쓰레기 봉지처럼 그렇게 아주

하찮은 존재로 살아가고 있을 때였다.

그때도 나는 겨우 방 두 칸의 좁디좁은 빌라에서 기독교소설을 써보겠다고 버티면서 목에 풀칠할 정도로만 살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내가 다니던 교회의 기도원에서 어느 날 낮에 교인들과 몇몇이 성전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성전 입구에 키가 좀 큰 여자애가 커다란 트렁크 가방 하나를 끌고 운동복을 입고 들어오고 있었다.


회색의 운동복을 입고 들어온 여자애는 대학생쯤 보였다.


여자애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편입시험을 봤는데, 떨어졌다고 했다.

의대에 편입하려고 하는데 이번 시험에 떨어졌고, 너무 힘들어서 자살 하고 싶었다고, 그러나

다시 공부하기 위해 자신의 사명을 위해 기도하려고 왔다고 했다.


사명?

네 저는 의료 선교사가 되고 싶어서요.......


나중에 나는 그 여자애와 사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나도 그 여자애를 주님이 써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주었다.


여자애는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었고, 집은 여러 가지로 갈등이 있는 집이었는데, 아무튼 여자애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그 여자애를 무척이나 힘들게 하는 문제였다.


여자애는 그 기도원에서 사명을 놓고 일주일 금식기도를 했다. 스물넷의 여자애가 온전한 금식을 일주일씩 한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애는 그 기도를 해냈다. 물만 먹는 금식 기도를 일주일이나 잘 해낸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애는 내 집에 들어와서 공부를 시작했다.

가족 중에 자기 공부를 도와줄 사람은 없다고 해서 나는 내 집에서 공부를 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때 내 집은 그 기도원에 기도하러 온 사람 중에서 오고 갈 데가 없거나 환란을 겪는 사람들이

잠시 쉬었다가는 통로였기 때문에 나는 남자가 아닌 여자들은 대다수 내 집에서 살기를 원하면

내 집의 현관문을 열어주고 그들을 맞이했다.


나도 돈은 하나도 없었고, 가구나 살림도 거의 없지만, 내 집에 사람이 들어오면 이상하게 교인들이 필요한 물건들을 날라다 주었고 먹을 것도 날라다 주었다.

그 여자애가 들어오니까 금세 사람들이 필요한 크기의 밥솥을 가져다주고, 새 냄비를 갖다 주고, 먹을 식재료를 날라다 주었다.

어디나 믿음이 좋은 교인들은 천사나 마찬가지로 사람을 살리고 환경을 살린다.


더구나 한 집사님은 그 여자애의 의대편입 교재비와 인터넷 강의비를 한 달에 40여만 원을 매달 대주었다.


"우리가 의료 선교사 한 명 만들려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고."


여기저기서 교인들이 그 여자애를 돕기 시작했고, 천사들이 날아다니는 것 같이 도움의 손길이 이곳저곳에서 모여들었다.

그런데 매일 밥을 해서 같이 먹고 도시락을 싸줘야 하는 일은 내 몫이었다.

더구나 빨래를 해야 하는 것 까지도 내 몫이었는데, 처음에는 내 집에는 세탁기도 없어서 손빨래까지 하면서

살아야 했었다.


그래도 나는 그 여자애에게 전심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나도 돈을 전혀 벌고 있지 않고 글만 쓰던 중이니 교인들이 소식을 듣고는 도와주긴 해도 늘 허덕이는 생활은

어쩔 수가 없었는데, 그래도 나는 그 여자애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은 그때까지 주변에서 보질 못했었던 터라 하루에 도시락을 2개씩 싸주며 응원을 해줬다.


매일 5시 기상해서 5시 30분 교회에 새벽기도 가기.

김치볶음과 계란 프라이 2개 해서 도시락 2개 싸기

6시 40분에 여자애는 시립도서관에 걸어서 가기.

여자애는 거기서 하루에 15시간 꼬박 앉아서 공부하고

저녁 10시에 집에 오기


그리고 나는 집에서 기도하면서 글쓰기.


우리는 단순 생활자처럼 살았다.

그 애는 공부하고 난 글 쓰고 기도하기.


가난한 우리는 어쩌다가 고기를 사 먹고, 어쩌다가 외식을 하고

그 여자애는 하루에 12시간 이상을 꼬박 공부에 시간을 투자했는데,

그런데 그해 그 여자애는 의대편입시험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 애가 시험에 떨어지자, 몇 달을 한 사람에게 몰입하고 나니 나도 기력이 떨어지고,

글도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에 힘이 빠졌다.


내 글이나 열심히 쓸걸, 또 허튼짓을 했나 싶고, 내가 하는 일은 왜 이리도 결과물이 별로 없나 싶었다.

그래도 주변의 교인들이 내게도 그 여자애에게도 희망을 주고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한잠을 울기도 하고 실망도 하던 그 여자애가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이 긴 싸움을 과연 내가 견딜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힘이 빠진 터라 사람을 도와주고 그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하는 일에는 어디든 달려가리라 하던 사역자의 삶에 이미 지쳐가고 있었기에

다시 공부하고 싶다는 그 여자애를 두고 난 많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시 기회를 잡고 싶다는 여자애의 모든 상황을 내가 아는지라 난 그 여자애가 다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교인들과 힘을 합쳐주었다.

도시락 2개를 싸고, 엄마 아닌 엄마가 되어서 객지에서 공부하는 낯선 여자애의 보호자역할까지 나는 해주어야 했다.

더구나 그 여자애는 이제 우리 교회의 청년부에 등록을 한 청년이 되었으니 난 최선을 다할 수밖에.


그렇게 몇 달이 가고, 어느 날 갑자기 그 여자애는 나를 떠났다.

갑자기 고시텔을 얻어서 혼자서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내 집을 나간다고 했다.


그때 나는 갑자기 너무 오랜만에 사람이 정들면 헤어지기 힘들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반년이 훨씬 넘도록 거의 일 년 가까이 살았던 것 같은데, 왜 갑자기 공부 중간에 내 집에서 나간다는 것인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중에 가장 큰 이유는 내게 물질적인 부담을 주는 것이 미안하고 교인들에게 신세를 지는 것이 싫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만큼의 돈이 할아버지와 시골에서 다니던 교회에서 장학금으로 왔다고도 했다.

나는 내가 돈을 다 대주지는 못했지만, 그 여자애의 편입공부를 위한 학비 지원을 우리 교인이 해주고 있어서

그것도 내가 직접 주는 돈이 아닌 것이 미안은 했었는데, 그래도 밥과 잠자리는 내가 제공해 줄 수 있었던 터라 갑자기 나 자신이 초라해지고, 배신감도 느껴지고, 속도 상하고, 한순간 그저 가슴이 쩌릿 거리며 아프기 시작하더니 그 여자애가 짐을 싸가지고 고시텔로 간 날에는 기어이 교회에 가서 꺼이꺼이 울기 시작한 울음이 그칠 줄을 몰랐다.


환자들을 몇 명씩 데리고도 살아봤고, 오갈 데 없는 환란 당한 자들을 열흘 길면 한 달도 데리고 살았는데,

이 여자애는 내가 딸이라고 생각을 했나? 싶을 정도로 정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가슴이 벌떼에게 쏘인 것 같이 따갑고 아프고 무언인지 모르게 절절하게 아쉽고 서글펐다.


죽은 것도 아니고, 의대 편입하면 다시 우리 교회에 올 거라고는 했는데,

그 여자애도 돈 때문에 마음이 상한 일이 많았고, 사는 게 너무 힘이 들었는지,

아니면 의대 편입 시험에 떨어진 것이 너무 괴로웠는지,

그냥 막 울기만 하다가 짐을 들고 나보고 울지 말라고 하고는 결국 집을 나서고 말았다.


"그래, 꼭 의사 되어서 의료 선교사 되면 같이 사역 가자."

하고 어깨를 두드려주고 안아주고 보내기는 했지만,

그 약속이 지켜질지 알 수가 없었고,

사람을 너무 좋아하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고 싶었던 나는 나 자신에게도 실망이

너무 컸고, 그 여자애에게는 능력 없는 내가 한심스러웠고, 또 시험이 붙을지 떨어질지 모를 그 상황이 걱정도 무지 되었던 거였다.


그날 교회에서 어찌나 울었던지 나중에는 눈알이 다 아플 지경이 되었다.

그런데 강단에 서신 목사님의 한 마디 설교가 내 눈물을 그치게 했던 것이 난 아직도 기억이 난다.


"여러분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선을 행했다면 그것으로 기뻐하시고,

그 상대방이 나를 실망시키든 어렵게 하든, 그 선을 행한 것으로 끝을 내시고,

낙심하시면 안 됩니다."


타인에게 나는 선을 베푼 일인가?

그 여자애는 그때 아픈 엄마에게 갈 수도 없었고, 아버지도 공부를 반대했었다.

그런데 그 여자애는 분명 우리 교인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너무 행복해했고, 감사해했다.

그리고 나는 그 여자애의 공부를 지원하는 수고로 하루에 도시락 2개를 매일 싸주며 나 역시 너무나 행복한 순간들이 많았었다.


그런데 나는 그 여자애가 멀리에 있는 고시텔로 공부를 하러 가자 너무 많이 아쉬운 마음에 실망도 하고 배신감도 느끼고 섭섭해하기도 한 것이었다.


"에쿠쿵, 정신을 다시 차려야지."


나는 그날부로 다시 눈물을 거두고 내일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어느 날 나는 다시 사역의 길에 접어들면서

다른 교회로 사역을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여자애는 그 해 서울의 어느 대학의 의대에 편입 시험에 합격을 했다고 연락을 받게 되었다.


세월이 십 년 가까이 흐른 지금.

나는 아직도 그 여자애의 근황은 모른다.

이제는 훌륭한 의사가 되었을 것이고, 결혼을 해서 사랑받는 아내, 좋은 엄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그때 내가 싸주던 김치볶음과 계란프라이 2개가 잊히질 않는다.

그리고 가끔은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그 여자애가 언젠가는 저 아프리카의 어느 낮은 곳에서

의료선교사로 복음을 전하는 전달자로 살아가길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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