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게 뻑뻑하고 외롭던 때라 어린 시절의 추억이 그립기도 했지만, 아이들이 나오는 영화를 유독 좋아하는 내 취향이기도 했고, 제제라는 남자 주인공 아이의 표정도 너무 귀엽고, '뽀르뚜가' 아저씨의 수염이 덥수룩한 인상도 영화에서 참 보기 좋았던 것이다.
영화에서 '뽀르뚜가'아저씨가 제제에게 자기 차를 태워주면서 세계 최고의 차라고 하면서
어린 제제를 태우고 달리는 장면이 있다.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엎드려서 시골의 황톳길을 세계 최고의 차는
뽀얀 먼지 속에서 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엄청난 부자인 동네 아저씨 '뽀루뚜가'와 가난한 집 말썽꾸러기 어린아이 제제는 그날부터 진짜 친구가 된다.
어린이와 어른이지만 둘은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고 진심을 나누며 진정한 친구,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 필요한 사랑과 의지의 관계가 되어가는 것이다.
사랑한다면 나이 차이가 무슨 소용일까 싶다.
그것이 남녀사이가 아니라 인간대 인간의 관계라면 더 소중한 것일진대
우리가 사는 지금의 시대에는 '뽀루뚜가' 아저씨 같은 어른도 드물고, 제제처럼 순수한 아이들도 드물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
부자는 아니어도 '뽀르뚜가'아저씨 같은 어른들이 있어서 가난한 아이들, 외로운 아이들에게 친구가 되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린 시절 나에게도 '뽀루뚜가' 아저씨처럼 그렇게 좋은 차는 없었어도, 나를 한 달에 한번 꼭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아저씨가 있었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오늘은 그 아저씨가 생각이 났다.
나는 어린 시절에 추억중 초등학생 때 내가 꿩을 잡아서 학교에 가져간 일이 아주 잊히지 않는 추억 중에 하나다. 그때의 기억과 추억을 한 달 전쯤 브런치 스토리에 "내가 잡은 꿩은 어디로 갔을까"하는 단편소설로 만들어 작품을 올렸다.
내가 그 꿩을 잡았던 과수원의 주인이셨던 '서울집 아저씨'가 내 인생의 '뽀르뚜가' 아저씨중 한 분으로 나는 그 분을 잊을수가 없다.
서울집 아저씨네의 그 과수원은 우리 동네 저수지 입구에 있었던 과수원인데, 그 당시 동네에서 제일 큰 과수원 중에 하나였다.
다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주로 사과와 배를 많이 심었던 과수원으로 저수지 앞이라서 초등학교를 갈 때면
주로 그 과수원 울타리를 지나서 학교에 가고는 했는데, 그 과수원에는 봄이면 얼마나 사과꽃 배꽃, 복숭아꽃들이 형형색색으로 피어났는지 온통 동화 속 나라 같이 아름다웠다.
물론 우리 동네는 내가 어릴 적에는 거의 다 과일나무를 많이 심는 과수원들이 밭의 대부분을 차지해서 동네는 산자락 아래 저수지를 품고 무척이나 아름답고 서정적이었던 마을이었다.
그런데 시내와 거리가 멀었던 우리 동네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일 때쯤 전기가 들어왔던 것 같다.
세상에 그러니까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 같지만, 나는 초등학교 다닐 때 처음에는 등잔불 아래서 한글을 깨친 셈이다.
지금은 기억도 가물거리지만, 등잔불을 켜 놓고 숙제를 하다가 깜빡하고 잠이 들면 엄마 아버지가 놀라서 깨어나서 등잔불을 끄셨던 기억도 난다.
그런 우리 동네에 전기가 들어오자 동네는 갑자기 지옥에서 천국에라도 온 듯이 노란색 알전구가 집집마다 대문 앞에 까지 환하게 켜져 있고, 텔레비전이 들어오고 전축이 들어오고 냉장고, 세탁기가 들어왔다.
우리나라에서 60년대와 70년대 초의 전기불의 존재는 시골에서는 획기적인 생활의 변화를 일으키는 가장 큰 물질문명의 요소 중 하나였고, 어느 시골마을이나 중소도시에서든 전기불로 인한 생활의 변화와 발전은 엄청났었던 시대였다.
그런데 그 전기요금이 얼마나 비쌌는지 현금이 별로 없던 그 당시 시골 사람들은 전기요금을 엄청이나 아껴서 쓰고는 했던 기억이 난다. 더구나 가난한 집에서 매달 전기요금을 내는 일은 쉽지도 않았던 시절이었다.
등잔불 밑에서 숙제를 하다가 전기가 들어오고 텔레비전이 집에 들어오자, 우리 형제들도 매일 TV 앞에서 만화와 서부영화를 보고 전설의 고향 같은 연속극을 보느라 밤에 잠을 안 잤던 시절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자세히는 몰라도 마을에서 먼 집에 몇몇 가구의 전기세를 아버지가 걷어서 전기요금을 총 관할하는 한전아저씨에게 넘겨주게 되었었다.
그런데 매달 그 일을 해주는 것은 아버지에게도 부담이 되었던 일이었는지 그 심부름을 어느 때는 초등생이었던 내가 다니며 했었다.
그것도 어둑한 저녁에 갑자기 심부름을 가야 할 경우도 있었는데, 나는 그 '서울집 과수원'의 긴 통로를 지나서 아저씨네 집 앞에 서면 내가 꼭 TV에 나오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나 캔디 같다는 생각도 했었다.
왜냐하면 그 '서울집 아저씨'네 집만 그 당시 우리 인근의 마을에서 빨간 지붕에 양옥으로 지은 커다란 양옥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과수원 집에 들어가려면 우선 과수원의 초입에 커다란 철 대문이 있었는데, 그 대문 옆에 초인종을 누르면 자동으로 철 대문이 열렸고, 한참을 과수원 안을 걸어 들어가면 빨간 양옥집이 나왔는데,
그 양옥집의 현관 옆에 또 작은 벨모양의 초인종이 또 있었다.
그래서 그 벨모양의 초인종을 누르면 얼굴이 갸름하고 선하게 생기신 '서울집 아저씨'가 현관문을 열고 활짝 웃으며 나오셨다.
현관에서 어린 꼬마인 나를 보고 그렇게 반갑게 맞아 주신 아저씨는 꼭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전기세를 동전까지 잘 세서 내 주머니에 넣어주거나 내가 가지고 간 돈주머니에 새지 않게 꽁꽁 싸서 묶어주기도 하셨다.
그 당시 집에 식탁이 있었고, 방에는 침대도 있는 아주 부자였던 그 과수원집 아저씨의 집은 내가 정말 TV에서나 보던 모든 물건들이 다 있을 정도로 굉장한 부자였다.
그리고 아줌마는 서울에 귀부인처럼 아주 우아하고 깨끗한 드레스를 입고 계시다가 어찌나 화사한 웃음을 지으시며 날 반기시는지 나는 어느 때는 집에 돌아가기가 싫고 그 집에서 양딸로도 살아보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가난하지는 않아도 꽤 잘 살던 우리 집에는 그 당시 연탄불도 때지를 않았던 때라 나는 학교 갔다 오면 동생들은 밖에서 놀아도 때를 따라 엄마의 심부름으로 아궁이에 불도 때야 하고, 마당가에서 물도 길어야 하고,
집안 청소도 해야 하는 맏딸이었던 터라 나는 언니 오빠가 있는 친구를 무척이나 부러워했는데,
그 '서울집 과수원 아저씨'네는 어르신만 두 분이서 살고 있었고, 집에 일하는 사람도 두세 사람 정도 두고 살던 터이니 그 집은 정말 도회지의 큰 부잣집 이상 생활을 하는 분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집에 아저씨는 나를 보면 항상 "심부름 잘하는 착한 아이"라고 말하며 내 손에 온갖 먹을 거를 싸주거나 책이나 인형 같은 걸 사두었다가 주고는 하셨다.
나는 그런 선물을 거의 받아본 적이 없어서 참 놀라운 선물이었다.
처음 먹어보는 초콜릿과 과자, 그리고 사탕들, 때로는 빵들.
그리고 아주 이쁜 손수건도 주신 적이 있고,
어느 날은 동화책을 주시기도 하고,
어느 날은 처음 보는 인형도 주셨다.
주로 서울에서 공수한 물건들이셨던 것 같은데, 새것도 있었고, 쓰던 것도 있었는데,
나로서는 너무 값진 선물이었다.
그 '서울집 과수원 아저씨'는 나에게 늘 "공부 잘해야 해. 그래서 훌륭한 사람 되어야 해."라는 말씀을 자주 해주셨는데, 그 당시 나는 집에서 나에게 아버지가 공부 잘해야 한다 말보다는 시집 잘 가야 한다는 말을 주로 듣던 터라 어린 내 마음에도 이 분은 우리 아버지와는 다르신 분이구나 하고 생각을 주로 했었다.
서울에서 엄청 부자로 살았고, 높은 지위에 직장에 계시다가 시골에 과수원이 하고 싶어서 내려오신 분들이셨는데, 영화를 보면서 오늘 따라 내 어린 시절의 ' 뽀르뚜가' 아저씨는 바로 그분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 아이인 내게 시집 잘 가야 한다는 말보다는 공부 잘해야 한다는 말로 나의 꿈에 발치를 들게 해 준
아저씨.
그리고 내 손에 늘 새로운 것을 들려 주어서 한 달에 한번 그 집에 심부름을 갈 때마다
아버지의 심부름을 신나게 하게 해 주던 아저씨.
그 아저씨가 언젠가 시골에 과수원을 다 팔고 서울로 이사를 가셨다고 해서 객지에서 있던 내가 참 섭섭한
마음이 들었었던 기억이 나는 아저씨 아줌마 내외분이시다.
외교관으로 유럽을 돌던 아버지의 친척 동생도 나에게는 초등학교와 청소년기에 내 인생의 '뽀르뚜가'아저씨였지만, 외교관 아저씨는 어릴 때는 주로 편지로만 서신 왕래를 했기에 실제로는 큰 영향을 받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서울집 과수원 아저씨'네 집은 내 어린 시절 차원이 다른 문화생활의 척도가 보이는 집이었고,
가난한 시골사람들과는 다른 생활습관과 언어습관으로 내 어린 시절을 풍요롭게 해 준 분들이었다.
언제나 신문과 책을 읽으시며 차를 드시던 그 서울집 과수원 아저씨와 아줌마는 내가 그리는 전원생활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논밭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일하시던 내 부모님이나 동네의 어른들은 나에게는 피하고 싶은 자화상과 같은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고생하고 힘들고 가난하거나 무식한 시골 어른들.
그중에서 대학을 나온 집안에 어른들 있었고, 선생님들도 우리 집안에는 많았지만,
그래도 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시골은 대다수의 어른들이나 아이들이 고생을 하고 살아야 하는
환경이라서 그다지 좋아하지를 않는 편이다.
그때도 마을에서 매일 신문을 보는 집은 몇 집이 안 되었는데, 그중에서 우리 아버지도 신문을 보지 않는 편에 속에서 나는 우리 집은 신문을 보는 집과는 격이 다르다고 생각도 했었는데,
그 서울집 과수원에 아저씨는 신문과 책을 손에 놓지 않고 사는 분이라고 소문이 자자했었다.
그 집에 자녀 중에 그래서 판사도 나오고 유명한 대학 교수도 있다고 했는데,
그것보다는 나는 어린 나에게 꼭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심부름하는 나를 칭찬해 주고
온갖 선물을 주시던 그분들이 내 어린 시절에는 너무나 좋은 '뽀르뚜가'아저씨 인것이다.
초등학교 3, 4학년쯤 된 나의 머리를 쓰담쓰담 해주시던 그 서울집 과수원의 아저씨 아줌마는 이제는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지만, 난 아직도 그 분이 주신 초콜릿 맛과 사탕 맛, 그리고 처음 먹어 본 과자맛 들을 잊을 수가 없다.
나도 어떤 어린아이에게 이렇게 달콤한 기억을 선물해 줄 수 있을까??
영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 제제는 커서 그 '뽀르뚜가'아저씨의 무덤에 자신이 쓴 책을 들고 찾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