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택이가 부자가 되어가는 것도 방개가 바다라는 대자연에 빠져 들어가면서 고기 잡는 일을 너무 좋아하는 것도 두 사람에게는 서로가 운명적으로 통하는 일이었다. 방개는 살면서 바다가 이토록 좋은지를 생각을 못해봤었다. 여름에 일을 하다가 저수지나 계곡에 올라가 수영을 하면 그렇게 몸이 시원하고 기분이 좋았는데, 바다 수영은 그것과는 사뭇 달랐고, 온양이나 예산등 내륙에서 살 때와 서천이나 대천, 웅천 같은 바닷가에서 사는 것은 자신에게는 살아있다는 느낌이 달랐다.
그에게는 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면서 사는 재미와 그 노동의 즐거움은 논과 밭에서 일을 하는 것과는 또 달랐던 것이다.
"윤택이 날 이런 바다에서 일하게 해 줘서 고맙네 그려."
"방개 형님, 저두 형님이 바다를 좋아하시니께 참 좋구만유, 바다는 욕심이 없는 형님하구 똑 같아유."
"이 사람아, 내가 뭔 욕심이 없다구 그려, 나두 욕심도 많고 탐심두 많게 태어났겠지, 그런데 겨우 열댓살에 전쟁을 겪다보니 세상에 대한 욕심을 전쟁통에 다 잃어버린거지 뭐.
이 나라에 전쟁만 안 났어두 나두 배다른 형들마냥 많이 배워서 출세도 하구 돈도 많이 벌구 그리구 우리 아버지를 무지 힘들게두 했을껴. 날 첩의 자식 만들었다구. 어쩌면 아버지를 한번 패대기를 쳤을지두 물러. 내가 형들한티 워낙 얻어 맞구 살아서 분해서 분풀이를 아버지한티 했을지두 물러. 나 어릴적부터 배다른 이복 형들한티 무진장 많이 맞구, 첩의 자식이라구 눈치밥두 많이 먹구 살었거든. "
"아, 그러셨군요, 저는 형님이 집안 얘길 안하시니까 잘 물렀쥬, 형님도 참 아픈 세월을 사셨네유, 나두 우리 욕심 많은 형 때문에 이 고생이긴 하지만유, 그런디 요즘 우리 형이 많이 아프다구 군산에 다방이든 술집이든 다 끊고 들어와서 앓고 누워 있다니께 마음이 좀 안좋아유. 형님이 날 그동안 망해서 고향에 와서 산다구 하두 욕만 하구 핀잔을 하구 해서 한번두 형 집엘 가보지두 못했는디, 한번 가봐유 것슈. 저러다가 형이 죽으문 나두 후회가 막급할 거 같아서유."
"아, 그거야 당연하지 형제지간은 피를 나눈 사인디 아무리 재산가지구 형이 혼자서 꿀꺼덕 했다구 아프다는디 안가보문 쓰남, 가 봐야지 가봐야 혀. 나중에 후회 말구. 사람이 병들문 금방 죽을 수도 있으니께. 사람 가는건 순식간이더라구."
"네 방개형님, 저두 제 형 용서하고 살어볼려구 많이 애썼어유, 욕심 많은 우리 형이야 이 비인 바닷가에서 내놓으라는 부자 아녀유, 그런 형이 망한 저한테 논 한뙈기 안주고 그 많은 아버지 재산 다 차지하고 술이다 여자다 한평생 흥청망청 살았는데, 그래도 형이 아프다니께 용서를 해야지유,
저러다가 혹시나 죽으문 내가 마음이 좋컷슈,
형님, 바다가 오늘은 참 창창하니 좋아유, 오늘은 먼 바다에 가서 괴기좀 잡을까유, 배 위에서 노래도 한 곡씩 부르면서유. 하하하"
"그려, 그려 내가 방개 타령 불러줄까 아니문 찬송가 타령 한번 불러줄까 요즘 교회 가니께 이런 노랠 가르쳐주더만. 듣기도 좋고 부르기도 쉬워서 내가 금방 외웠네. 들어보게나. 방개 타령은 다음에 듣고. 히히히"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날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 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세 일하러가 삼천리 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
방개가 찬송가라고 가르쳐 주는 노래는 이상하게 힘이 나는 노래였다. 윤택이는 교회에는 가본 적이 없지만 왠지 그 찬송가는 애국가 비슷한 노래 같기도 해서 그도 박자를 맞추며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란 찬송가를 방개를 따라서 목청껏 불렀다.
물고기를 배안에 가득 싣고 오는 것만큼이나 그날은 둘이서 배 위에서 장단을 두드리며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노래를 부르다 보니 정말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이 삼천리 반도에 있는 금수강산에서 살게 해 주신 은혜가 크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는 데 있어 격이 없는 사이가 된 두 사람은 노래든 춤이든 언제나 바다에 가면 신나게 놀 줄도 알았던 것이다. 어쩌면 바다가 그들에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고 별다른 가진 것도 없는 자신들을 넓은 바다 한가운데서도 비바람을 맞고 고기를 잡아도,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날에 고기를 잡아도 대체로 그물에 고기를 가득히 부어주시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정말 언제나 가난한 그들을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서도 지켜주는 수호신 같기도 했다.
왜냐하면 바다는 그들에게 물고기를 주었고, 그 고기는 그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 돈과 힘과 능력을 주었던 것이었다. 물고기들이 그물망에서 파닥거리며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볼 때면 방개도 윤택도 햇빛에 반짝이는 그 물고기의 생명만큼 그들의 생명도 함께 파닥거리며 힘차게 뛰었던 것이다.
핏빛처럼 물든 석양을 등지고 바다에서 돌아와서 선착장에 배를 묶어두고 두 사람은 해변에서 가끔씩 물고기 잡은 것을 돌로 된 불판 위에 구워 먹으며 한산 소곡주를 마시기도 했다. 앉은뱅이 술이라는 한산소곡주를 마시다 보면 방개는 술을 이제 그만 먹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을 하곤 했다.
잔치집이나 새참으로 사람들이 술을 권해서 주면 그걸 마시곤 했는데, 위천공이 오고는 그 술을 딱 끊고 있었는데, 엉가엄마가 다녀가고 가끔씩 술을 한잔씩 마셔야 엉가엄마 생각을 지울 수가 있었다. 그녀에게 자신이 너무 매몰찼던 것은 아닌지 마음이 쓰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술만 마시고 나면 다음날이면 위장이 많이 아파서 한두 잔 외에는 마시질 않았는데, 그것도 끊어야겠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엉가엄마를 생각하면 괴로운 것이 방개 자신도 잘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방개의 그런 생각을 정리해서 누군가 말해줄 만한 사람도 없으니 방개는 윤택에게 자신의 감정을 술자리에서 털어놨다.
"내가 엉가엄마를 사랑해서 괴로운건가유?"
방개와 엉가엄마의 만남과 그동안의 사연을 들은 윤택은 그건 사랑은 아니라고 판단을 했다.
"방개 형님은 순자라는 그 귀먹은 여자를 사랑하시는거지유, 엉가엄마는 내가 볼때는 떠돌아 댕기면서 구걸해서 먹여 살릴 정도 였으니 형제나 부모같은 끈끈한 정도 들었고, 그여자가 미친여자 였다면서유, 딸애도 있었구, 그러니 얼마나 불쌍했것어유, 그러니 그런 여자랑 딸을 동냥까지 해서 먹여 살렸으니 서로가 얼마나 정이 깊겄슈, 그건 정이구먼유, 정 , 아주 진한 정이지유, 그거야 말로 사랑보다 진한거 아녀유."
"그러기 말여, 내가 같이 살고 싶지는 않지만, 그 여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퍼.
난 그 여자가 고독하다는디 해줄게 없었네 그려. 한번 안아 주지두 못했구먼.
옛날에 엉가엄마가 제 정신 돌아오기 전에 구걸 다닐때도 난 한번도 그여자를 안아볼 생각은 없었어.
그 여자는 그냥 내 여동생 같기두 하구, 우리 친엄마 같기두 하구 그랬지."
"그류, 형님이라문 그랬을거유, 형님은 여자두 안좋아하구, 술도 안좋아하구, 시셋말루 예수쟁이나 하문
딱이것는디, 교회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지유,"
"난 교회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다녀봤다네. 내가 어찌하다보니 이 바닷가로 떠돌아 들어왔는데, 병이 무진장 깊어져서 왔거든. 그때 날 처음으로 돌봐주신 분이 지금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셨거든. 그래서 의리상 다니기도 하고, 성도님들이 날 잘 보살펴주니께 그냥 저냥 다니는 거지. 난 아직두 설교시간에 졸때가 많어.
하나님이 나하고는 별로 친하고 싶지 않으신가봐. 내가 졸어두 때리지두 않구, 날 자게 놔둘때두 있으니께. 히히히"
밤이 이슥하도록 윤택과 술 한잔에 생선을 구워 먹고 해변에서 놀다가 돌아온 방개는 별채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별채 안에서 덕구가 벌러덩 누워서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반가움에 눈물이
왈칵하고 쏟아졌다. 덕구를 본 지가 4년이 다 되었던 것이었다.
덕구는 방개에게 너무나 슬픈 소식을 가지고 왔다. 그것이 꿈이었으면 싶은 게 방개의 심정일 정도로 슬픈 소식이었다.
"자네가 모르면 더 좋겠다 싶어서 일년이 가까이를 망설이다가 왔네, 엉가 엄마가 여길 다녀갔다고 해서 내가 주소는 알고 있었지만 말일세,"
"뭔, 소식이간 그렇게 뜸을 들여유, 혹시 엉가 엄마가 무신 일 있어유."
"아녀, 엉가엄마는 요새 연애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건 나두 자세히 모르것구,
사실 자네가 좋아하는 순자씨가 지난 봄에 시집을 갔네."
"순자씨가 시집을유."
방개가 갑자기 술 마신 것이 확 하고 깼다.
"응, 서른이 넘었으니께 노처녀가 되었지만, 친정 어머니 돌아가시구 동생들하고 오손도손 살더니만 갑자기 순자가 시집을 갔다구 소문이 났길래 확인해봤더니 한동네 사는 늙은 홀애비한테 동생들이 시집을 보냈지 뭔가. "
방개는 순자 어머니가 혼인을 하자고 호떡을 사가지곤 간 날 자기를 간절히 붙잡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희미한 저녁 밥상에 병든 순자의 어머니가 안타까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다시 확연하게 떠오른 것이었다.
"홀애비두 어느 정도지 아무리 귀가 먹은 여자라구 세상에 해도 너무 했지 뭔가 . 홀애비 나이가 순자랑 스무살이나 차이가 난다니 말여, 순자가 서른 여덟이라는디 남자는 오십여덟이라나 , 나참 동생들이 싸가지가 없는거지, 지 누나 귀찮으니께 늙은 남자한티 떠 넘긴거지. 홀애비가 땅뎅이께나 있다는데 술주정꾼이랴."
"스물살 차이유. 가서 데려와야 것네유, 밤에 몰래 보쌈을 해서라두."
방개는 없는 말이 아니라 진심을 순식간에 말해버렸다.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순간 들었던 것이었다. 자기가 사랑하는 순자를 어떻게 스무 살이나 많은 술주정꾼 홀아비한테 준단 말인가. 방개의 가슴에서 써늘한 냉기가 돌면서 자신이 순자한테 뭔가를 잘 못한 것 같다는 후회의 감정이 밀려왔다. 그때는 자기가 혼자 엉가와 엉가엄마를 먹여 살리는 것도 너무 힘들었고, 덕구에게 신세 지는 것도 너무 미안한 데다가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떠돌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배다른 형들, 전쟁의 후유증으로 찾아온 환청등 방개는 정말 순자 어머니의 혼인을 거절할 수밖에 없던 그때 당시 자신의 처지와 상황이 다시금 물밀듯이 몰려왔다. 그렇다고 지금은 뭐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기환이가 주고 간 이 작은 바닷가 집 한 채가 생긴 것뿐이었다. 오히려 예전에 비해서 위천공이란 큰 병을 앓다 보니 몸이 언제 다시 아플지 그것도 알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순자가 그런 곳에 시집을 갔다니 당장이라도 가서 데려오고 싶은 안타까운 심정이 그의 가슴을 후려쳤다.
"덕구, 내가 아무래두 못난이 짓을 하고 살았나부네. 순자 엄마가 혼인하자고 하던 날 그냥 받어들이구
그 집에서 농사 짓구 살았을걸. 왜 그걸 뿌리치구 이래 떠돌다가 병두 얻구 순자를 저런 집에 보냈을까
아이구 내가 너무 미련한 놈일세."
"이제와서 후회를 한들 무신 소용이 있것나, 세월이 다 무심한거여, 나두 자네가 그렇게 엉가네를 금방 떠날 줄은 몰랐지, 자네만 내곁에 있었어두 나두 좀 순자라는 그 처녀에 대해서 더 알아보구 자네가 살만한 집이라도 마련해서 장가를 보냈어야 했었는디, 난 자네가 엉가네 집에 방도 큼직한거 하나 생기구 했으니께, 심심하문 온양장에서 장보따리나 날라주면서 용돈이라도 벌고, 나 농사짓는것두 좀 도와주구 그리 살줄 알었지 금새 옛날 마냥 떠돌아 다닐 줄은 몰랐네 그려."
"어, 내가 몸도 좀 않좋쿠 해서 엉가엄마 눈치 챌 까봐서 그 집을 얼른 나왔지 뭐, 자네도 조카들하구 무지 힘들게 사는디 거기 끼여서 몸땡이 아픈 사람이 뭐 도움이 되것서."
덕구는 방개가 아팠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지금은 몸이 상당히 좋아보여서 그 말을 들으면서도 그가 얼마나 아픈 사람이였는지는 실감을 못했다. 그러나 방개가 아팠다는 사실만으로도 덕구는 미안함과 함께 몸뚱이 하나로 사는 방개가 아팠을때 얼마나 천지에 고아같은 심정으로 외롭고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니 한없이 그에게 미안해졌다. 덕구는 방개의 손을 잡고 그의 손등만 주물주물 문질렀다. 한동안 그렇게 있다보니 덕구의 미안한 마음도 조금은 덜어졌고, 방개도 덕구를 위해 저녁을 차려줘야 겠다고 퍼득 생각이 미치자 얼른 안채 부엌에 가서 해물탕을 끓이기 시작했다.
방개는 해물탕에 방어를 넣으면서 아무래도 덕구를 따라 가야 옳을지 여기서 윤택이와 계속 고기를 잡을지를 고민했다. 순자에게 자기가 가서 해줄게 지금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하니 아무런 대책이 서실 않았다. 술주정꾼 홀아비에게 보쌈을 해서라도 데리고 나와서 서천에 숨겨 놓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건 자기가 아무리 순자를 사랑한다 해도 사람의 도리가 아니였다. 방개는 아궁이에 불이 타들어가도 그 불이 자기 발등을 휘릭 휘릭 불길로 덮어버려도 뜨거운 것도 모르고 해물탕이 끓는 솥단지 앞에서 가슴을 치면서 엉엉 울고 서 있었다.
별채 마루에서 방개의 그런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는 덕구의 가슴도 미어질 듯이 쓰려왔다. 사랑을 알지만 사랑을 지키고만 싶었던 한 떠돌이 사내의 뒤늦은 후회와 고통이 그의 가슴에도 물밀듯이 스민 것이였다. 덕구는 자기가 방개와 엉가엄마네를 살릴려고 그들을 자기 집에 들였을때 덕구 아내가 신혼초에 친정으로 가버렸던 그때가 떠올라서 더 가슴이 아팠다.
없는 것들은 없는 것들끼리 어떻게든 살아보려 해도 그게 이리도 힘들단 말인가, 없으면 가정을 지키기도 힘들고 사랑을 지키기도 힘들다는 것이 세상의 이치였다.
덕구가 방개를 위해서 며칠을 서천에 머물렀다. 방개의 마음이 진정이 되고 그가 무엇을 결정하든 함께 있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그는 방개가 배를 탄다는 소리에 윤택의 배를 같이 타보기로 했다. 바다라고는 태어나서 몇 번 본적이 업는 덕구로써는 바다에 나가 투망이나 그물을 던지며 온갖 물고기를 잡아보는 일은 그에게 이상한 해방감을 주었다. 상상 이상으로 그 일은 덕구가 어릴 적에 부모를 잃고 면장집에서 십수 년을 머슴을 살면서 억눌렸던 남의 집 살이의 억눌림이 한꺼번에 풀어지는 희한한 해방감이었다.
머슴살이는 자유가 별로 없었다. 주인이 수시로 해야 할 일을 지시하고 나가면 해가 지도록 그 주인집에 논과 밭에서 그 일을 해야만 했다. 봄이면 논에서 소를 끌고 다니며 쓰레질을 해서 논에 벼를 심도록 잘 갈무리를 해야 했고, 허리가 꾸부러지도록 모를 심으려면 거머리 떼가 발목까지 피가 나도록 물어뜯었다. 그리고 한 여름이면 밭에서 온갖 야채를 심기도 하고 거두기도 하다 보면 얼굴은 연탄재처럼 까매지고, 낡은 모시옷이 항상 땀에 절어서 누렇고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일을 해야 했다.
덕구는 그럴 때마다 가난을 물려받은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럽기만 했었다. 자식에게 물려줄 게 없어서 가난을 물려주고 죽는단 말인가. 덕구는 머슴을 살면서 그런 자신의 처지을 생각하고는 이를 깨물면서 머슴을 살았다. 그리고 그가 머슴을 살면서부터 번 돈으로 땅을 사고 또 사고, 결혼해서 어느 정도 안정에 들어갈 무렵에 느닷없이 형과 형수가 하루에 아침에 홍수에 떠내려가는 바람에 형이 짓던 농사를 지는 바람에 농사처는 늘었지만 조카 다섯을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짐을 졌다.
그러나 이제 덕구는 동네에서 꽤 큰 부자가 되었다. 땅을 누가 내놓기만 하면 덕구는 자기 집에 불어난 곡식들을 내다 판 돈으로 그 땅들을 사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덕구의 가슴속에 늘 남의 집 살이를 하던 머슴의 속성을 벗지 못하고 남에게 속박되어 있는 것과 같은 매임이 있었는데, 그 매임이 이상하게 방개와 윤택의 배에 올라서 며칠 동안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면서 놀다 보니 그것이 바닷가에 미역줄기처럼 풀어져서 바다로 떠내려 가버렸다.
순자때문에 속이 상한 방개는 며칠 동안 못 마시는 술만 마시다가 잠을 자곤 했다. 그러나 순자에게 다시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을 방개도 알고 덕구도 알았기에 둘은 밤이면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술잔만 기울이다가 잠이 들었다. 방개는 생각했다. 술도 이제 확 끊어 버리고 새 삶을 다시 살아야 한다고.
자신도 이제는 기환이 말대로 책을 더 읽고 일기도 매일 쓰고, 공부도 더 해야겠다고 결단을 내렸다. 방개는 자기가 중학교 때 좋아하던 영어공부를 무엇보다 열심히 하기로 했다. 그때 생각난 것은 교회 목사님이 보신다는 영어로 된 성경책이 생각이 났다.
'아, 나도 영어로 성경책을 읽어봐야겠구먼. 기환이 보구 그 영어 성경책 좀 한 권 사다 달라구 해야것어.
그냥 내가 좋아하는 공부나 열심히 하문서 순자씨를 잊어야지. 저 책장에 있는 소설책두 안읽은게 많은디
그거나 읽으면서 마음을 달래야 쓰것어. 그리구 저 한쪽 구튕이에 있는 시집도 읽어봐야겠구먼. 시 읽는게
소설 읽는거 보다 내게는 맞는거 같기두 하구, 난 시가 아주 좋아. 시는 나도 좀 쓸 수 있을거 같기는 한디.'
덕구는 영어책을 조금이라도 읽을 줄 아는 방개를 무척이나 부러워했고, 방개네 집에 책이 많은 것을 보고는 처음에는 입을 다물줄을 몰랐었다.
"아니, 난 자네가 대채로 참 알 수 없는 사람 모양이여. 이런 책을 다 자네가 읽는단 말이여. 저기 난 말여, 겨우 한글만 띠고, 이제 천자문을 혼자서 떼고 있는디, 나야 뭐 국민학교도 다니다 말었으니 뭐, 한문도 서당에 몇년을 다니긴 했는디 , 머슴 살문서 다 까먹었더라구, 그래서 요새는 내가 혼자서 천자문 공부는 하고 있지. 면이나 어딜 가문 한문을 물러서 답답하구, 동네서두 이제는 신문을 배달해서 읽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니께 나두 신문을 배달시켰거든. 그랬더니 죄다 한문이라서 도통 읽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나두 천자문부터 다시 공부혀. 무식하다구 자식들이나 조카새끼들이 뭐라고 할까봐. 그런디 방개 자네는 영어도 씨부렁댈줄 아니 월마나 유식한 사람인감, 다들 자네가 떠돌아 다니니께 헛본겨, 알고 보문 자네 만큼 우리나이에 중학교도 가보고 한 사람이 면내에 그리 만치두 않여. 물론 우리 동네두 내 나이에두 일본에 대학에 까지 갖다 온 인물도 있긴 하지만서두."
덕구도 시대가 바뀌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기에 시골에서 농사만 짓고 살아도 한글은 기본으로 알아야 하고, 한문이나 영어 정도는 조금은 알고 살아야 면사무소나 얘들이 다니는 학교에 가도 망신을 안 당하고 온양이나 서울이라도 갈 일이 있으면 어디서 뭘 살려고만 해도 간판이라고 쓰인 것에 한문도 많고, 영어도 가끔씩 쓰여 있어서 그런 공부를 안 하고는 앞으로 살아갈 일이 답답할 거라는 것을 알고 스스로 공부를 조금이라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덕구로써는 알파벳도 모르는 영어라는 것은 감히 공부해볼 엄두도 나질 않는 높은 공부의 문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