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개 아저씨. 2부.

16화. 새로운 여정 그 끝은

by 권길주


엉가가 유니라는 의상디자이너의 이름을 벗어던지고, 온양에 내려온 후로 엉가의 눈에는 눈물이 마르질 않았다. 조금만 뛰어도 숨이 차서 입술까지 파래지는 조앤에게 그녀는 세상이 가진 어떤 말로도 속죄할 수 없는 엄마였다. 방개 아저씨도 철희도 조앤이 엉가의 딸이었음을 이미 알고나 있었다는 듯이 그녀의 처연한 모습을 나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엉가는 속죄하는 양처럼 방개 아저씨의 품에서 처음으로 엉엉 눈물을 터트리며 지나온 삶의 여정을 털어놨다.

기대와 부푼 꿈을 안고 자기의 길을 계획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엉가는 이제는 미혼모요, 그것도 심장병을 앓고 있는 딸을 자기 자식도 아닌 듯이 방개 아저씨 집 앞에 몰래 버리고 복수의 길을 택했던 무어라 표현하기도 힘든 그런 무자비한 엄마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런 자신을 다시 두 팔로 안아주며 자신도 눈물을 텀벙텀벙 흘리시는 아버지, 그것은 바로 어린 시절 엉가에게 밥을 얻어 먹이느라 아침부터 종근락 하나를 들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았던 방개 아저씨의 넓은 품이였다.

세상에 단 한 사람의 혈연도 없이 이제는 엄마도 없이 엉가는 심장병을 앓는 딸을 살려야 했다. 그러나 그녀 옆에는 조승훈이란 남자보다는 훨씬 든든하고 커다란 울타리가 있다면, 그 울타리는 바로 방개 아저씨였다. 그리고 '방개 아저씨와 천사들의 집'에 사는 철희와 곽집사님 그리고 '에덴 농장'에서 함께 과수원을 일구는 방개 아저씨가 자식처럼 기른 방황하는 떠돌이 청년들이었다. 엉가는 방개 아저씨가 미국까지 가서 유학을 하고 온 자신보다 그리고 대기업의 사장직에 있는 조승훈이란 남자보다 더 크고 위대한 인물이란 생각이 든 것은 사실 '에덴 농장'에서 아저씨의 말을 잘 들으며 과수원 일을 신나게 하는 스무 명 정도의 청년들을 보았을 때였다. 철희 하나만으로도 힘드셨을 텐데 아저씨는 어떻게 이렇게 많은 청년들을 길러 내셨을까 정말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덴 농장'에서 일하는 청년들은 거의 대부분 '방개아저씨와 천사들의 집'에 드나들던 방황하는 청소년들이였는데, 그들은 소년원이나 경찰서를 드나드는 심각한 청소년들이었는데, 신기하게도 그들은 방개 아저씨와 곽집사님의 밥을 먹고 한 집에서 살면서 한 명씩 한 명씩 그렇게 순한 양처럼 변화되었고, 이제는 검정고시로 대학을 들어간 대학생도 있고, 제빵을 배우는 친구도 있고, 건축 기술을 배우는 친구도 있었지만, 그들은 시간이 나기만 하면 '에덴 농장'의 멋진 일꾼들이 되어 주었다.

그들이 그렇게 다 착하게 변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방개 아저씨의 착한 성품이 가장 우선이었을 것이라고 엉가는 방개 아저씨를 생각했다. 미친 여자였던 엄마와 그 딸을 아무도 돌봐주지 않을 때 그는 길에서 만난 그 모녀를 데리고 다니며 자신도 잘 곳도 없는 떠돌이 거지 주제에 그녀들을 위해 밥동냥을 해다 주었던 분이 아니었던가. 그런 방개 아저씨의 착한 성품은 어디 다른 데 가질 않고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에덴 농장'의 청년들에게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엉가의 새로운 인생 여정은 이제는 그동안 미국과 서울에서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길이였다. 엉가는 조용한 밤의 공기를 가르며 혼자서 '에덴 농장'의 과수원길을 걸었다. 엉가가 온양에 내려온 지도 일 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여름밤의 열기가 식어가는 대지에 망초꽃이 하얗게 피어있었고, 푸르게 매달린 사과들이 가지가 휘일 정도로 무르익어서 불그레 빛깔을 내기 시작했다. 사과향은 그녀의 코끗을 스치며 단 과육의 냄새가 드넓은 과수원안에는 향기를 퍼트리고 밤이슬은 살포시 풀잎에 내려앉고 있었다.

멀리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엉가는 딸 조앤이 아직은 죽지 않고 살아 있음에 그저 신께 무릎을 꿇고 감사 기도를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일 년 동안 조앤을 품에 안고 서울에 대학병원을 수도 없이 입원했다 퇴원하기를 반복했지만, 아이는 큰 차도가 없었고, 그다지 나빠지지도 좋아지지도 않은 상태로 살아만 있었다. 수술을 하기에는 위험하고 그냥 두고 보기는 힘든 상태가 딱 조앤의 상태였지만, 엉가는 딸이 살아있다는 것에만 감사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는 일 년 동안 방개 아저씨와 청년들이 살고 있는 '에덴 농장'의 입구에 조앤과 둘이서만 살 수 있는 작은 양옥집을 하나 지었다. 그 집은 오직 자신과 조앤만이 살 수 있는 집이었다. 일층에는 방 두개 거실 하나 그리고 이층에 서재를 하나 두고 빨간색 지붕을 올렸다. 그리고 마당에 조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잔디밭과 꽃밭을 두었다. 그래도 과수원을 들어가는 초입에 하얀 양옥집을 지어 놓고 보니 '에덴 농장'도 한층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집을 다 지은 날 방개 아저씨가 조앤에게 주라며 하얀 진돗개 강아지 한마리와 손수 지은 개집을 만들어 왔다. 조앤은 흰색 강아지인 진돗개를 보자 너무 좋아하며 그 강아지를 품에 안고 떼어 놓치를 못했다.

"이 진돗개가 조앤에게는 좋은 친구가 되어 줄거여, 같이 산책도 다니고 혀."

"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강아지 흰색이라서 저 너무 이뻐요."

정말 방개 아저씨가 데려온 진돗개는 조앤의 말을 너무 잘 들어주고 둘은 하루 종일 붙어 다녔다. 조앤은 진돗개의 이름을 '몽구'라고 불렀다.

엉가는 방개 아저씨의 과수원 일을 도와주고 싶어도 조앤의 병간호를 위해서는 자신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되었고, 방개 아저씨도 조앤을 치료하는 일이라면 땅끝에 가서라도 무슨 약이라도 구해올 심정이었기에 그녀가 조앤을 잘 돌보기만 간절히 바랐다.


조승훈은 엉가를 만나기 위해 몇 차례 그녀가 사는 '에덴 농장'을 찾아왔다. 그리고 조앤을 데리고 온양에 있는 호텔에 가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사주며 놀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엉가에게 그런 시간들이 점점 마음에 큰

걸림돌이 되어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다. 조앤에게 아버지란 존재를 가르쳐주긴 했지만, 조앤이 점점 자라면서 느껴야 할 아버지에 대한 정체성이 너무나 걱정이 되기도 하고, 이제는 대기업의 사장직에 있는 조승훈이 아무리 조심을 한다고 해도 이건 언젠가 세상에 밝혀질 일이 아닌가 싶어서 더는 조앤과 조승훈이 부녀지간으로 만날 수 있는 인연의 끈도 끊어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는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에 더 견딜 수가 없었다. 어젯밤 조승훈은 엉가에게 자신의 모든 감정을 다 털어놓았던 것이다.

" 더 이상 우리가 이렇게 만날 수는 없잖소. 내가 아내에게 우리의 과거를 밝히고 이혼을 하겠소. 그리고 조앤을 위해 미국에 있는 병원에 가봅시다. 나도 내가 내 양심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소. 나도 인간이 되고 싶소.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 보고 싶단 말이요."

"당신은 그렇게 살지 못해요. 내가 임신했을 때도 어머니 말을 따라갔었고, 지금도 당신 옆에는 당신이 책임져야 할 회사가 있잖아요. 그리고 당신의 가족들이 있고요. 그러니 이제 조앤의 아버지 역할도 이만큼 했으면 됐으니 저와 조앤을 보러 오지 마세요. 만약에 조앤이 어떻게 된다고 해도 조앤이 당신의 딸이었다는 것은 방개 아저씨 말고는 이 세상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 제가 그 어떤 상황이 닥쳐도 당신은 이제는 찾을 일이 없을 거고, 조앤의 생명이 꺼져간다고 해도 그건 제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입니다. 저의 죄의 짐일 뿐입니다. "

"안 돼, 그건 절대 있을 수없는 일이요, 난 지금 내 아내와의 사이에 자식이 한 명도 없는데 왜 이혼이 힘들겠소. 물론 내가 이혼하면 우리 가문에 계열사는 반토막이 나는 거지만, 나는 더 이상 당신에게 조앤에게 죄인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나도 사람답게 내 뜻대로 내 마음이 가는 데로 살아갈 자유가 있는 사람이요. 철없던 이십 대 아무것도 모르고 당신을 놓치고 방황하던 시간들을 되찾고 싶소. 난 어쩌면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나를 희생해야 하는 그런 대장부 같은 남자가 아닌 한 여자의 사랑에 만족하는 그런 졸장부 같은 남자인데 우리 어머니는 내 역량을 나 이상으로 키워놓았을 뿐이요. 난 제발 이 거추장스러운 옷, 내게 맞지 않는 옷을 벗어 버리고 당신과 조앤과 셋이서 다시 미국에 가서 조앤을 미국의 최고 심장전문의에게 맡겨보고 싶고, 그곳에서 우리 셋이 새 출발 하고 싶소."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랑이라 해도 그 끈이 한번 끊어졌는데, 무슨 수로 다시 잇는단 말인가. 엉가는 숙명이란 말 그리고 운명이란 말을 생각하지 않아도 자신과 이 남자가 다시 이어질 수는 없다고 단정을 지었다. 설령 조앤이 장성할 때까지 살아 준다고 해도 그들은 여기서 끝을 내야만 했다. 조승훈이 조앤을 위해 아버지란 이름으로 지어준 이 작은 집에서 딸과 세상 끝까지 산다면 그녀로서는 그 남자에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야 한다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만이 자신이 한순간 그 남자를 사랑한 대가라면 그것만으로 자신의 젊은 날 한 때 인생의 여정은 여기서 끝을 내야만 하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여름밤의 별들이 엉가의 눈가에 맺힌 눈물를 스치며 반짝이는 빛을 냈다. 그 빛은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사랑보다 더한 모정과 연약한 인간이 겪어내야 할 죄의 대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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