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개아저씨 2부.

15화. 만날 사람은 결국 만난다.

by 권길주




엉가는 온양에서 조앤의 심장병 소식을 듣고 온 다음날, 저녁 6시에 조승훈의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대기업의 사장실에 있는 비서가 누구냐고 묻고는 전화를 조승훈에게 돌려주었다. 엉가는 자신은 디자인실에 유니라는 디자이너라고만 했고, 꼭 드릴 말씀이 있노라며 사장실 방문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 조승훈이 엉가의 목소리를 듣자 순간, 망치로 얻어맞은 사람처럼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는 설마 유니라는 디자이너가 엉가일리는 만무하다며 숨을 내쉬고는 무슨 일인지 몰라도 비서실로 올라오라고 했다. 엉가는 짙게 화장한 얼굴을 화장실에 가서 싹 다 지웠다. 그동안 화장술로 변장하듯이 하고 다녔던 자신의 모습을 지워낸 것이었다. 거울 속에는 디자이너 유니의 얼굴은 사라지고 5년 전 미국에서 마지막으로 조승훈과 헤어질 때의 사랑의 기쁨과 감정에 몰입해 있던 순수한 한 여자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러나 그 얼굴은 어느새 이제는 빛바랜 사진처럼 약간은 퇴색한 그림자가 보이는 한 여자의 얼굴로 다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워내며 서른이 넘은 엉가의 얼굴엔 고통과 눈물이 고랑처럼 파인 얼굴로 어둡게 변해 있었다.


엉가가 사장실에 문을 열었을 때 조승훈은 어디에선가 커다란 바람이 자신을 송두리째 들고 흔들며 소용돌이치는 회오리바람이 덮치는 것을 느꼈다.

"엉가"

조승훈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얼굴에는 숨이 막힐 것 같은 그리움과 놀람이 뒤엉켜 있었다. 그때 비서가 찻잔을 들고 사장실로 들어왔다. 엉가는 순간 분위기를 되찾기 위해서 비서에게 찻잔을 자신의 손으로 받아서 테이블 위에 놓았다. 비서가 나가자 조승훈은 사장이란 명패가 올려진 책상의 앞에서 조금씩 그녀 앞의 소파 테이블로 걸어 나왔다.

엉가도 그의 앞으로 한 발을 다가갔다. 두 사람 앞에 갑자기 어느 날 뉴욕의 밤거리에서 별무리가 쏟아질 듯한 찬란하던 그 시간의 기억들이 별빛처럼 쏟아져 내리며 둘은 현기증을 일으켰다. 조승훈이 와락 하고는 엉가를 끌어안았다. 그것은 어떤 약속도 기대도 말도 필요가 없는 인간의 몸짓이었다. 최소한 조승훈에게는 그랬다. 엉가의 감정과는 상관이 없이 그는 그 긴 세월을 핥고 지나가는 그리움이 불길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에게 숨겨진 그 타오르다만 사랑의 뜨거운 불길은 타다만 재처럼 사그라져 있었을 뿐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엉가 역시 자신의 가슴에 숨겨진 조승훈에 대한 감정이 단지 복수나 아픔만은 아니었다는 것이 그 순간 그의 품 안에서 얼음 조각이 겨울 햇빛에 서서히 녹아내리듯이 차디찬 마음이 조금은 녹아내렸다.


둘은 서로의 품 안에서 지나간 시간 동안 서로를 향했던 그리움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를 확인한 듯이 괴로움이 몰려왔다. 엉가는 그러나 먼저 감정보다 빨리 정신을 수습하려고 그의 손을 풀고 그의 품 안에서 빠져나왔다. 동그란 엉가의 두 눈에 눈물이 고여왔다. 하지만 그려는 얼른 손으로 눈물을 닦고는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그녀는 소파에 앉지도 않은 채 말을 해버렸다.


"미안해요. 제가 당신의 딸을 낳았어요.

이름은 조앤이고 지금 다섯 살이 되었어요.

지금 온양에서 방개 아저씨가 키우고 있는데, 아이가 심장판막증으로 많이 아파요.

조앤이 얼마를 살지는 저는 잘 몰라요.

하지만, 저는 너무 두려워요. 그 아이가 엄마도 모른 채 자랐는데, 아빠의 얼굴도 모르고 죽는다면

제가 너무 큰 벌을 받을 것 같아요. 저는 당신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이 회사에 디자인실에 들어왔지만

오늘로 저는 사표를 냅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제는 제 딸 조앤을 돌봐주고 간병하러 가야 해요. 그 아이에게는 이제는 엄마가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하고 제 손으로 돌보고 제 품에 안아주고 싶어요. 그리고 그 아이게게 너에게는 아버지란 존재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여기 아이가 살고 있는 방개 아저씨 온양집 주소가 적혀 있어요. 저는 오늘 회사에 사표를 내고 바로 온양으로 내려갈 거예요. 언제든 조앤을 보러 한 번만이라도 오셨으면 좋겠어요. 저 그럼 이만. "


엉가는 솟구치는 눈물 때문에 사장실을 뛰쳐나왔다. 그녀의 달려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조승훈은 비서실문을 열고 나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한 순간 회오리가 하늘 어딘가로 솟구치듯 사라진 것 같았다. 뉴욕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이십 대와 엉가와의 첫사랑 그리고 그녀의 임신으로 헤어지게 된 시간들이 조승훈의 인생의 시간에서 다시 불꽃같이 일어나는 시간들이 되었다. 어떤 큰 불덩이가 그의 가슴에서 터질 듯이 용솟음쳤다.

"엉가가 내 딸을 낳았다고. 그 딸 이름이 조앤이라고. 지금 온양에 있다고. 심장판막증을 앓고 있다고. 그럼, 그럼 어떻게 된다는 건가. 산다는 건가. 혹시 죽을 수도 있다는 건가"

조승훈은 결혼은 했지만, 아직 자식은 낳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에게 자신의 자식이 있다는 것은 새삼 소름이 돋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어떤 전율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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