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개 아저씨. 2부.

18화. 엉가의 인생 변곡점

by 권길주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철희는 엉가에게 줄 이젤과 캠퍼스 그리고 물감을 가득 안고 왔다. '에덴 농장'의 입구에 있는 엉가의 집에는 조앤과 엉가 그리고 방개 아저씨가 거실에서 창밖에 눈송이를 바라보며 방개 아저씨가 아궁이 불에 구워온 군고구마와 커피를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철희가 너한테 줄려고 어제 그림 도구를 사러 화방에 가더니만 기어이 팔다리가 부러지게 들고 오는구나. 하하."

"아저씨 저는 아직 그림 그릴 생각은 별로 없는데 쟤가 왜 저러죠. 심심하면 조앤한테나 그림을 좀 가르쳐 주면 되는데."

"아니다, 나도 생각해 보면 서천에서 혼자 그렇게 다 죽어가던 시절에 기환이가 자살하려고 그곳에 왔다가 나랑 곽집사한테 바닷가에서 시체이다 싶은 걸 살려 놨더니, 기환이가 어느 날 날 준다고 군산에 가서 책을 사 오고 하는 바람에 나도 책을 다시 읽게 되었고, 그러다가 기환이가 소설을 쓰니까 나도 옆에서 서당개 삼 년에 풍월을 옮는다고, 끄적끄적 하다 보니 어느 날 시인이 되어 버렸듯이 너도 의상 디자이너는 이제 꿈을 접었으니 그림을 그려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 사람이 마음이 아프고 힘들 때는 어딘가 혼자서 외로움과 슬픔을 달랠 대상도 필요한겨. 그리고 요즘은 네가 교회도 가니까, 아버지도 마음이 편하고 좋아. 널 교회 여자 목사님께서 무척 신경 쓰시더구나."

방개는 얼마 전부터 엉가를 데리고 교회를 다녔다. '에덴 농장' 뒷산 너머로에 여자 목사님이 개척한 시골 교회였는데, 방개가 그곳에 교회를 다닌 지는 이제는 몇 년이 되었고, 조앤의 엄마로 나타난 엉가에 대한 충격과 조앤의 병증으로 방개도 하나님을 의지했었다. 그런데 방개의 전도로 몇 달 전부터 엉가도 교회를 나오니 방개는 신에 의지하는 마음을 가진 엉가를 다행스럽게 여긴 것이다. 만약에 조앤이 잘못된다 해도 엉가는 그 마음을 어떻게든지 무엇으로라도 풀어내야 하고 인간의 삶에 행복과 불행을 다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기에 그것은 인간이 도울 수 있는 차원도 있지만, 신의 개입이 더 중요하다고 방개는 늘 생각해 왔었기에 엉가에게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권유했었던 것이다.

방개는 자신도 사랑하던 여자 순자가 어느 날 불행한 결혼 생활의 끝을 자살로 마무리한 것이 얼마나 가슴이 아팠고, 그리고 그 가슴 찢어지는 고통과 상실과 후회를 시를 쓰고 교회를 다니면서 회복했던 기억이 있기에 그는 엉가에게도 그런 인생의 대비를 미리 해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간에 행복과 불행에 대한 어떤 방패와 같은 걸 수도 있었다. 독이 든 화살이 날아와 내 가슴을 쏜다 해도 그 독을 풀어낼 어떤 해독제는 자신 스스로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게 사람이 살아가는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방개는 시와 하나님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기환에게는 소설과 영화였고, 철희에게는 그림이었고, 산속에서 만난 젊은 전도사에게는 공동묘지에서 하는 기도였고, 곽집사에게는 남다른 봉사였고, 엉가 엄마 윤희에게는 옷을 만드는 일이었다면 엉가에게는 그림이든 기도든 그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방개는 했다.


그날, 엉가는 조앤이 잠든 시간 처음으로 이층 서재에서 그림을 그려보았다. 디자인 공부를 하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하루에 수십 장씩 그림을 그렸지만, 그것은 디자인에 필요한 그림을 이였기에 자신의 틀을 깨는 그림을 다시 시작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엉가는 무슨 생각을 깊이 할 것도 없이 그저 붓이 가는 데로 아크릴 물감을 캔버스에 붓질을 해댔다.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엉가는 '에덴 농장'의 눈이 내린 과수원 풍경을 그려냈다.

며칠후, 엉가의 첫 작품을 본 철희의 눈은 예리하고 날카롭게 빛이 났다. 그것은 엉가의 재능 속에 숨겨진 어떤 유전 같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엉가야, 너 나보다 유명한 화가가 될 것 같다."

"뭐야, 내가 어떻게 너보다 유명해지니, 초보 주제에, 넌 이미 중견들하고 전시회도 하잖아."

"아니야, 네가 한 삼 년만 그리면 나보다 유명해질 거야, 두고 봐. 내 말 맞을 거야. 넌 의상디자인 공부하러 미국가지 말고 그림 그리러 프랑스에 갈걸 그랬다. 유학을 잘 못 간 거 같네 이제 보니."

"네 말은 맞지, 내가 유학을 잘못 간 건 맞지. 미국만 안 갔어도 내 인생 이렇게 꼬이지는 않았겠지. 그리고 내가 너무 자신만 믿고 살았던 건 맞지. 어찌 보면 방종하게 산 죄 때문이지."

"그렇게 말하면 어릴 때부터 남의 것 훔치는데 도사였던 나는 뭐 이 세상에 쓰레기로 영원히 남아야 하잖아. 그런데도 방개 아저씨 만나서 이렇게 근사하게 사는 거 봐봐. 우리 너무 자조하는 인생은 살지 말자. 아무튼 네 첫 작품은 훌륭해. 너무너무..... 굿이야. 기대한다 엉가야 앞으로 네 그림."



엉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조앤의 차도 없는 병간호도 견딜 수가 있었다. 가끔씩 철희가 와서 엉가의 그림을 조언해 주는 정도였지, 엉가는 달리 그림을 배울 필요는 느끼질 않았다. 조앤이 아팠지만, 살아만 있어 주는 걸로 엉가는 매일 밤 가슴을 쓸어내며 눈물로 아이의 병이 완치되길 기도하는 자신을 달래주는 어떤 유일한 끈은 그림 그리기와 정원의 꽃을 가꾸는 일이었기에 그녀는 그 두 가지 일에 집중을 많이 했었다. 그러나 이젠 초등학교에 들어간 조앤이 자주 얼굴이 파리한 모습으로 운동장을 나서는 모습을 볼 때면 엉가는 조앤을 기다리는 차 안에서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엄마 오늘도 친구들 운동장에서 체육할 때 나만 혼자 교실에서 친구들 노는거 구경했어."

엉가는 조앤의 찰랑거리는 생머리를 묶어서 뒷통수가 톡 튀어 나온 부분을 만져주며 대꾸를 했다.

"그랬구나. 우리 착한 조앤도 이제 조금만 더 크면 친구들과 체육시간에 달리기도 할 수 있을 거야.

힘내고 집에 가서 엄마가 복숭아 따다 놓은 거 많이 먹자."

엉가는 조앤이 어쩌면 초등학교를 다 다니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서서히 몰려오는 것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연재
이전 17화방개 아저씨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