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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이 Dec 12. 2023

6화. 나의 230,500원이여

아프면 지출도 커지는구나.

오락가락하는 기온에 옷 입기가 애매했던 지난주. 골머리를 싸매고 생각할 일들이 있어서 무리를 했는지 몸이 좀 으슬으슬했다. 긴 외출 끝에 집에 돌아와 약통을 이리저리 뒤져 타이레놀 한 알을 삼키고 소파에서 쉬었다. 한숨 푹 자니 낫길래 다음날 아침 산책도 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보냈는데 저녁 무렵부터 오한이 심했다. 열이라도 제어 보려고 체온계를 꺼냈는데 몇 달 전에 고장 난 게 이제야 생각이 났다. 새로 사려고 하니 브라운 체온계 10만 원이 넘네.. 손가락 하나 내놓기도 힘들 만큼 추워서 이불을 싸매고 있었지만 응급실에 갈 정도는 아니라서 다음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렇게 오한이 들고 등이 쑤시는 건 처음이라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었다. 병원에 들어가니 환자들이 어찌나 많은지. 30분이 넘게 기다렸다가 진료를 받았다. 독감 검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면봉에 코를 맡기고.. A형 독감이라는 결과와 함께 바이러스 치료제 링거를 맞았다. 링거를 꽂고 30분 정도가 지나자 차츰 오한이 사라졌다. 나란히 누운 환자들이 전부 독감인지 나랑 똑같은 치료제를 맞는 것 같았다.



빈 속이라 링거를 빨리 맞으면 속이 울렁대서 천천히 맞았더니 병원 점심시간이랑 겹쳐서 결제를 미리 했다. 아직 바늘을 빼지 않은 상태라서 간호사가 약국까지 다녀와주신 덕분에 휴대폰에 찍히는 결제 금액만 확인하면 됐다. 병원비 168,900원 약국 6,600원!!!! 결제가 잘못됐나 싶어 진료비 상세내역을 보니 주사비가 비쌌다. 실비 청구를 하면 얼마 정도는 돌려받겠지만 실비 없는 사람은 독감 걸리면 제대로 치료도 못 받겠네 싶었다.









병원을 나서니 식은땀이 났다. 전날부터 죽 몇 숟가락 말고는 먹은 게 없어서 허기지기도 했고, 목도 아파서 죽을 포장해와야 되겠다 싶었다. 죽 집에 메뉴를 보니 먹고 싶은 게 많아서 두 가지를 포장했다.(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유기농 식빵이 먹고 싶어서 그동안 눈독만 들이던 천연발효빵집에 갔다. 어찌나 먹음직스럽게 생겼는지 얼른 하나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갔다. 계산대 앞에는 몇 가지 상품이 더 진열되어 있었는데 빵과 함께 먹으면 좋을 잼종류, 올리브오일, 발사믹 식초 같은 것들이었다. 유기농 발사믹 식초를 보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발사믹 식초도 하나 주세요!"


누가 대신 빵이나 죽을 사다 줄 상황은 못되고 되도록이면 외출을 자제해야 하니 이것저것 좀 사서 가야 되겠다 싶은 마음에 지갑이 열리고 말았다;;



유기농 발사믹 식초와 천연 곡물 식빵


 


 



식빵을 사고 나오는 길 맞은편에 과일 가게가 보였다. 이틀을 꼬박 열에 시달려서 그런지 멀리서도 보이는 귤을 지나칠 수가 없었다. 당장에 시원한 귤이 먹고 싶었다. 이미 발사믹 식초에서 에라 모르겠다였으니 귤 한 봉지 사는 게 뭐 어려울까. 당장에 길을 건너 과일 가게로 직진을 했다.



귤 한 봉지, 바나나 한 손.

이미 내 양손은 봉지들로 가득했다.



차에 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늘 쓴 돈이 대충 어림잡아도 20만 원은 넘겠다 싶었다. 10일 치 생활비가 30만 원인데. 아픈 것도 힘든데 생활비 생각을 하니 짜증이 났다. 많이 썼으니 가계부 상황을 빨리 보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었지만 집에 돌아와서 이것저것 사 온 것들을 먹기 바빴다.



죽 한 그릇을 비우고 발사믹 식초를 작은 그릇에 부었다. 정신이 없어서 이게 올리브 오일이랑 섞인 건 줄 알고 샀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이리저리 뒤져보니 집에 하나 있던 올리브 오일은 조리용으로나 맞는 제품이라 그런지 발사믹 식초랑은 어울리지 않았고, 결국 식빵은 집에 있던 잼을 발라 먹어야 했다.



약기운에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 지내다가 다음날 겨우 정신을 차리고 가계부를 열었다. 많이 쓴 걸 아니까 더 열어보기 싫었지만 10일이 지나면 다음 생활비 30만 원을 체크카드에 넣어야 하니 그전에 사태파악을 해야만 했다.



2023 양지 가계부(만년 가계부)



빵집에서 3만 원, 과일가게에서 8천 원, 죽 포장 1만 7천 원. 병원비까지 하니 하루에 쓴 돈이 230,500원이었다. 전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죽 사 먹고 아이에게 배달시켜 준 것들을 합치면 10일 치 생활비를 3일 만에 다 쓴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래서 예비비가 필요하구나.



이렇게 매달 예상치 못한 지출이 생기면 생활비를 조절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카드 사용을 자제하되 예상치 못한 지출 부분이 생기면 이때는 카드를 좀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계획한 카드 사용 금액조차도 넘어서버렸다.



'아픈 건 어쩔 수 없잖아....'  

그래도 나는 왜 이럴까 싶었다.



이왕 진출된 건 어쩔 수 없고, 실비 청구를 할 서류는 한쪽에 잘 챙겨두었다. 그리고 통장들을 싹 정리하고 가계부에 기록했다. 11일이 되어 0원으로 만든 체크카드에 다시 30만 원을 충전했다.


"다시 10일 동안 잘해보자!

12월이 아직 20일이나 남았는데 또 방심을 해버리면 내년 1월부터 너무 심란할 거야."



크리스마스도 있고 연말 모임들도 있을 테니 덜 쓰고 즐거울 방법을 찾아봐야 되겠다.












** 소비 단식 기록은 2주에 한번 업로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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