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되지 않은 사회 Chapter 4

공간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 말에 응답하고 있는가?

by 찬 용


앞의 이야기를 먼저 보고 오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설계되지 않은 사회 서론~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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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우리가 알고 있는 건축은 왜 무너지는가? :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구조인가?

- 무너지는 구조물, 반복되는 사고 : 우리는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 시공의 문제인가, 발주의 문제인가 : 공사는 잘못됐지만, 그 시작은 누구의 것이었는가?

- 기준의 잣대, 감정 없는 도면 : 법과 제도는 누구의 현실을 담고 있는가?

- 문제없는 도면, 문제투성이 현실 : 통과를 위한 설계는 왜 현장을 고려하지 않는가?

- 공공이라는 이름의 민간화 : 왜 공공 건축이 더 무책임해졌는가?

- 설계자의 의도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 왜 설계는 자율성을 잃고 말았는가?

- 구조적 무능이 어떻게 반복되는가? : 건축은 왜 시스템 자체를 바꾸지 못하는가?

- 무너진 신뢰, 설계되지 않은 구조 : 우리는 건축의 무엇을 다시 설계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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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무너지는 구조물, 반복되는 사고

우리는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어느 날, 아직 공사가 한창인 고층 건물의 외벽 일부가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잔해에 가려진 채 현장의 인부 몇 명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고, 구조 활동은 며칠간 이어졌다. 원인은 명확히 한 가지로 좁혀지지 않았다. 완전히 굳지 않은 콘크리트, 과도하게 재촉된 공정, 검토되지 않은 구조 변경, 반복되는 보고 생략. 사람들이 처음 놀랐던 건 무너졌다는 사실이었고, 다음으로 놀란 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이었다. 현장의 감리자는 처음엔 설계자에게, 설계자는 구조기술자에게, 시공사는 하도급업체에게 책임을 떠넘겼고, 그 과정에서 문제의 뿌리는 희미해졌다.


언론은 매일 헤드라인을 쏟아냈지만, 며칠이 지나자 새로운 뉴스에 묻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 건물은 그 사건이 되었고, 그 사건은 다시 단지 하나의 사고로 기억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지역에서도 건축물의 일부 구조가 내려앉았다. 다행히 큰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작지 않았다. 알고 보니 도면대로 시공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고, 설계와 감리, 구조 검토까지 여러 단계에서의 소통이 어긋난 것으로 알려졌다. 누군가는 그 구조물에 철근이 없었다고 했고, 다른 누군가는 설계 변경이 미처 반영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조사는 길어졌고, 수많은 관계자가 등장했지만, 아무도 ‘이건 내 책임’이라 말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 건물은 완공되기도 전에 철거가 결정되었고, 사람들은 또 한 번 "이럴 수가 있느냐"고 분노했다. 하지만 정작 더 놀라운 건,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몇몇 사람은 말한다. 건축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복잡한 현장이고,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얽혀 있으니 사고는 피할 수 없다고. 그러나 그런 논리가 반복될수록, 그저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실패가 또 하나 늘어나는 것뿐이다. 건축은 기술의 총합이라 불리지만, 실상은 ‘책임의 총합’이어야 한다.


구조적 시스템이 무너진 공간은 다시 세울 수 있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무너진 책임은, 다시 세우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과 신뢰를 필요로 한다. 건물이 무너진 자리에 다시 철근을 심을 수는 있지만, 그 건물을 믿고 들어설 사람들의 믿음까지 그렇게 손쉽게 복원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런 구조적 무능과 반복은, 단 한 사람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사회 전체가 건축을 다루는 방식, 즉 '설계의 방식'이 무너져 있음을 말해준다.


무너진 건물은 다시 세울 수 있다.

하지만 무너진 신뢰는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것이 다시 무너질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도 바꾸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도 아파트는 계속해서 지어졌다. 콘크리트는 쏟아졌고, 철근은 생략되었고, 감리는 침묵했고, 시민은 계약서에 서명했다. 우리는 무언가가 무너질 때마다 그 이유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진실은 복잡하지 않다. 건축은 실패한 적이 없다. 설계된 실패만 있었을 뿐이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구조다. 그리고 그 구조는 반복되고 있다. 반복된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알고도, 우리는 또 무너질 것이다.


무너짐은 사람의 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시스템의 반복이다. 우리는 사고가 터질 때마다 책임자를 찾는다. 하지만 이 책임자는 늘 ‘그때 거기 있었던 사람’일 뿐이다. 구조는 여전히 바뀌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건축 생산 과정은 다단계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발주자와 시공사, 감리자, 구조기술사, 설계자, 하청업체, 그리고 그 하청의 하청까지. 그 구조 속에서는 누구도 전체를 조망하지 않는다. 누구도 최종 책임을 지지 않는다. 결국, 부실은 개인의 실수가 아닌 시스템의 당연한 귀결이 된다. 시공 단계에서의 부실은 종종 뉴스로 보도되지만, 사실상 문제의 근원은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설계의 값어치'다.


대한민국에서 건축 설계는 최저가 입찰의 대상이 된다. 설계비를 아끼기 위해 구조계산은 간소화되고, 정밀 검토는 생략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구조 보강이 누락되거나, 법적 기준만을 만족하는 수준으로 축소된다. 설계자는 일정을 맞추기 위해 속도를 내고, 시공사는 설계도면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받아들이지만, 정작 그 설계가 무엇을 생략했는지는 아무도 검토하지 않는다. 감리는 그 다음 단계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감리는 감시자가 아니다. 현실적으로 감리는 시공사에게 고용된 '형식적 감시자'일 뿐이다. 권한은 없고 책임만 있는 구조. 시공사가 감리비를 지불하고, 감리는 그 시공사의 눈치를 보며 공정 확인서를 도장 찍는다. 공정이 지연되면 감리도 욕을 먹는다. 그래서 확인하지 않아도 도장을 찍는다. 아무도 멈추지 않는다.


그 결과, 구조적 결함은 계획부터 묻힌 채 현장으로 전달된다. 설계는 이미 생략했고, 시공은 그대로 따랐으며, 감리는 침묵했다. 그다음, 우리는 붕괴를 목격한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묻는다. 하지만 진짜 질문은 다른 곳에 있다. “왜 아무도 이 구조를 검토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알고 있었다. 단지 외면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외면은 매뉴얼화되었고, 반복되었고, 결국에는 새로운 붕괴를 만들어냈다. 건축의 실패는 다시 사람을 다치게 하고, 신뢰를 무너뜨리고, 구조를 무너뜨렸다.


사고가 일어난 후, 책임자는 어디에 있는가?


시공사는 감리를 탓하고, 감리는 설계를 탓하고, 설계자는 발주처의 일정 압박을 언급한다. 이 모든 주체들이 각자의 업무만을 했다고 말할 때, 정작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책임은 '분산'되지만, 결과는 '집중'된다. 구조는 붕괴하고, 사람은 죽는다. 대한민국의 건축 시스템은 책임을 피할 수 있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공공 건축조차 발주처는 책임을 외주화하고, 감리는 책임을 지지 않으며, 설계자는 원칙대로 했다고 말하고, 시공사는 지시대로 했다고 항변한다. 결국, 이 구조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건축'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왜 바뀌지 않는가? 그것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이 유지되는 것이 모두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빠른 공정, 낮은 비용, 많은 물량. 이익을 좇는 구조에서 '안전'은 번거로운 비용이다. 그래서 안전은 자주 생략된다. 그 생략이 누적될수록, 붕괴는 더 자주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는 '붕괴에 익숙한 사회'가 된다. 그것은 단순한 건축의 실패가 아니다. 사회적 감각의 실패다.


뉴스는 이틀을 넘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또 다른 사건으로 관심을 옮긴다. 그리고 건설사는 다음 분양 광고를 낸다.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도 오래 기억하지 않기 때문이다. 건축의 실패는 느리게 진행된다. 설계에서 시작된 오류가, 시공 현장에서 묻히고, 감리에서 생략되고, 결국 붕괴로 나타나기까지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린다. 하지만 붕괴 이후의 사회적 관심은 며칠이면 끝난다. 그 시간의 비대칭이 문제다. 붕괴를 막기 위한 개입은 너무 느리고, 붕괴의 잊힘은 너무 빠르다.


우리는 붕괴를 볼 때마다 '그럴 줄 몰랐다'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는 이미 이전에도 그 말을 했었다. 그리고 다시 같은 말을 하게 될 것이다. 반복은 우연이 아니다. 반복은 시스템이다. 사회의 무감각은 그 반복을 가능하게 만든다. 안전은 더 이상 공공의 감각이 아니다. 그것은 보험조항이 되었고, 서류의 문구가 되었으며, 심지어는 마케팅 문구가 되었다. '튼튼한 집', '안전한 구조', '믿을 수 있는 시공'. 우리는 이 말들 속에서 의심을 멈춘다. 그리고 다시 계약한다.


우리는 또 무너질 것이다. 왜냐하면, 구조는 바뀌지 않았고, 책임은 흐려졌으며, 사회는 잊었기 때문이다. 건축은 기술로 완성되지 않는다. 건축은 구조와 책임, 그리고 사회적 감각의 합작이다. 이 셋 중 하나라도 빠진다면, 건축은 무너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무너짐 속에서 비로소 뒤늦은 설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제는 물어야 한다. 이 구조는 누구의 것인가? 이 구조는 누구에게 책임을 묻는가? 그리고 이 구조는 누구를 보호하는가? 건축은 더 이상 물리적 시스템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사회의 조직이고, 제도의 실체이며, 인간의 선택이다. 설계되지 않은 구조는 반드시 무너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설계해야 한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더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


4-2. 시공의 문제인가, 발주의 문제인가

공사는 잘못됐지만, 그 시작은 누구의 것이었는가?


건축은 시공으로 완성되지만, 시공으로 시작되지는 않는다. 공사는 현장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그 공사의 방향과 기준, 속도와 목표는 이미 오래전, 책상 위에서 결정된다. 그래서 모든 붕괴는 시공의 결과일지언정, 발주의 기획에서 시작된 실패일 가능성이 높다. 많은 사람들은 구조물의 붕괴가 "현장의 부실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노동자의 실수, 감리자의 방임, 현장소장의 판단 미숙.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 모든 결정은 현장의 재량이라기보다는 시스템 안에서 정해진 '범위 내의 선택'이었다. 구조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공정은 이미 압박되어 있었으며, 예산은 이미 줄어든 상태였다. 선택지는 제한되어 있었고, 판단은 생존이었다.


이 구조의 시작점은 '발주'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건축을 시작할 것인가,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 어떤 속도로 끝낼 것인가를 정하는 사람들. 문제는 이 발주가 단순한 시작을 넘어서, 사실상 전 과정의 질을 결정짓는다는 데 있다. 설계자는 발주자의 요구사항을 따르고, 시공사는 그 설계를 실행한다. 그리고 감리는 그 경계 안에서만 관찰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기준이 왜곡되어 있었다면, 그 결과는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대한민국의 건축에서 발주자는 흔히 '돈을 내는 사람'으로만 인식된다. 하지만 발주자는 동시에 요구조건을 제시하는 주체이고, 사업 전체의 목표를 정하는 설계자이기도 하다. 더 싸게, 더 빨리, 더 크게. 발주의 조건이 이 세 단어로 압축된다면, 그 다음 단계들은 모두 이 구조를 감당하기 위해 생략하거나 타협해야만 한다.


실제로 많은 공공건축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한계는 이 발주의 구도에서 시작된다. 발주자는 형식적으로 설계공모를 열고, 최저가를 기준으로 설계사를 선정한다. 당선된 설계안은 이미 비용이 맞춰진 상태에서 시작되기에, 초기 아이디어의 절반 이상은 도면에 남지 못한다. 구조 안전성에 투자할 여유는 줄어들고, 감리는 그 설계의 충실성만을 따질 뿐 구조적 완결성에 개입하지 못한다. 시공사 역시 설계도면을 계약의 기준으로 삼기에, 그 도면 바깥에 존재하는 문제는 '책임 범위 밖'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공공 발주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LH나 SH와 같은 공공기관은 명목상 '국민을 위한 건축'을 발주하지만, 실제로는 행정 절차와 정치적 일정에 맞춰 사업을 진행한다. 예산은 회계연도에 맞춰야 하며, 공정은 정치적 이벤트와 보조를 맞춘다. 설계자는 현실과 법 사이에서 타협안을 도출하고, 감리는 제도의 틀 안에서만 움직인다. 민간 발주는 이와 또 다르다. 오로지 이윤과 수익률이 기준이다. 브랜드 가치, 분양 속도, 눈에 띄는 외형이 더 중요해진다. 그 구조 안에서는 비용보다 안전이 후순위가 되며, 설계자는 구조의 원리보다 마케팅의 메시지를 설계하게 된다. 민간 현장에서는 발주자가 건설사인 경우가 많고, 그 건설사는 또 다른 하청을 통해 시공을 맡긴다. 이 구조 안에서는 처음부터 '책임의 소재'가 희석된다. 현장의 문제는 현장만의 문제가 아니며, 시작부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이 설정되어 있었던 셈이다. 안전과 품질은 당장의 경제성 앞에서 늘 밀려난다. 시공사 역시 이익을 위해 원가절감 구조를 유지하고, 그 결과는 종종 설계와 감리, 심지어는 법적 기준조차도 무시하게 만든다. 결국, 현장은 설계와 예산의 틈바구니에서 '버틸 수 있는 것만' 선택한다. 안전을 위한 보강, 시간이 더 필요한 양생, 혹은 비용이 더 드는 자재는 선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것은 발주 조건에 포함되지 않았고,

누구도 그것을 강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계자의 입장에서 보면 발주는 절대적이다. 어느 설계사무소든 '심사 기준'에 맞추지 않으면 선정조차 될 수 없다. 설계안보다 제안서, 구조보다 심사표가 중요해진다. 제출 마감일은 협의할 수 없고, 실내외 마감재 하나하나까지도 예산 기준에 맞춰야 한다. 그 과정에서 공간의 깊이, 동선의 철학, 구조의 해석은 사라진다. 이것은 설계의 실패라기보다는 '설계를 설계하는 방식'의 실패에 가깝다. 감리 또한 마찬가지다. 발주 단계에서 감리비가 이미 책정되어 있고, 그 범위에서 수행 가능한 업무는 한정되어 있다. 감리가 아무리 문제를 인지해도, 실질적 조치를 요구할 권한은 제한적이다. 감리는 기록하고, 보고하지만, 멈출 수는 없다. 그 한계는 감리가 감시자가 아니라 행정절차의 일부로 기능하게 만든다.


우리는 시공을 탓하면서도 그 시공이 선택하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다. 무너진 벽을 바라보며 "왜 이렇게 시공했는가"를 묻기 전에, "왜 이렇게 시공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그 질문의 끝에는 항상 발주가 있다. 건축은 하나의 생태계다. 발주가 토양이라면, 설계는 뿌리이고, 시공은 줄기이며, 감리는 가지다. 열매가 썩는다고 해서 줄기만 자른다면, 다음 열매 역시 썩을 것이다. 우리가 자꾸만 시공만을 잘라내며 문제를 해결했다고 믿는 동안, 발주는 계속해서 같은 조건으로 새로운 건축을 자라게 한다. 그리고 그 건축은 언젠가 또 무너질 것이다.


그래서 이 장에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공사는 분명 잘못되었다. 그러나 그 시작은 누구의 것이었는가? 시공의 실패는 손에 잡히지만, 발주의 실패는 구조로 녹아든다. 그 구조는 곧 시스템이 되고, 시스템은 또 다른 붕괴를 예비한다. 문제는 눈앞에 있는 벽이 아니라, 그 벽을 짓게 만든 조건이다. 진짜 건축은 공사장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책상 위, 입찰 공고와 예산 조정의 과정에서 이미 그 미래는 결정된다. 문제는 시공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먼저 설계하느냐는 것이다.


4-3. 기준의 잣대, 감정 없는 도면

법과 제도는 누구의 현실을 담고 있는가?


건축은 물리적 대상이지만, 동시에 제도적 산물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든 건물은 단순히 콘크리트와 철근으로만 세워진 것이 아니라, 도면과 규정, 기준과 조항이라는 보이지 않는 문서들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문서들이 누구의 시선에서 쓰였는가는 곧 그 건축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를 결정짓는다. 대한민국의 건축 제도는 수많은 법률과 시행령, 지침서와 매뉴얼 위에 서 있다. 건축법, 주택법, 소방법, 장애인 편의 증진법, 경관 조례, 지구단위계획 지침 등. 그 하나하나가 합리적인 이유를 갖고 만들어졌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법이 현실을 담고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현실을 외면한 기준은 감정 없는 선으로 도면에 내려앉고, 결국 사람의 감각은 그 선에서 밀려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건폐율'과 '용적률'이다. 이 두 숫자는 땅 위에 어떤 건물을 세울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그러나 그 숫자는 그 장소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나 지역의 맥락을 반영하지 않는다. 법이 허용하는 최대치를 기준으로 건물은 설계되며, 그 결과는 반복된 박공지붕과 사각형 평면, 그리고 그 안에 복제된 일상이다. 다양성과 감성은 제도 앞에서 불편함으로 처리된다. 건축사들은 종종 법과 싸운다. 계단참 폭이 몇 밀리미터 부족하다는 이유로 설계를 갈아엎고, 일조권 사선 제한선 때문에 조망을 포기한다. 그것이 시민의 안전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면 당연히 수용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기준이 언제나 현실에 맞춰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법은 현실보다 느리고, 사회보다 보수적이며, 변화보다 폐쇄적이다. 특히 신도시나 대규모 개발지구에서 드러나는 법의 강제성은 도시를 일괄적으로 단순화시키고, 개인의 감정과 공동체의 기억을 잘라낸다.


공공건축의 현장에서도 이 문제는 고스란히 반복된다. 실제 이용자의 동선, 아이들의 손 높이, 노인의 보행 속도는 법에서 말하는 표준과 다르다. 그러나 설계자는 '표준'에 맞춰야 한다. 심의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허가를 받기 위해. 그래서 그 공간은 법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사람에게는 불친절해진다. 냉정하게 말하면, 우리는 인간을 위한 건축이 아니라 법을 위한 건축을 짓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단지 '불편함'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때로는 그 기준들이 건축의 본질을 해치고, 더 나아가 안전조차 위협한다. 일례로 방화구획이나 대피 경로 기준은 원칙상 안전을 위한 규정이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그 경계가 비현실적으로 설정되어 있어 동선이 오히려 왜곡된다. 그 결과, 위기 상황에서 사람들이 더 혼란을 겪기도 한다.


법이 명령하는 방식대로 만들어진 공간은 겉보기엔 안전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직관과 감각을 방해한다.


실제로 한 초등학교 공공건축 프로젝트에서, 어린이의 키에 맞춰 세면대를 설치하려던 설계안이 표준 높이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려된 사례가 있었다. 아이들의 손에 닿지 않는 위생시설은 법적으로는 문제없지만, 현실적으로는 기능하지 않는다. 결국 불편함은 사용자의 몫이 되고, 설계자는 기준에만 복종한 채 책임에서 벗어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기준은 신뢰를 잃고, 공간은 감정을 잃는다. 설계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상황은 딜레마다. 법을 지키지 않으면 허가를 받을 수 없고, 법만 따르자니 좋은 건축을 할 수 없다. 법과 현실 사이에서 설계자는 늘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 공간의 서사, 감정의 흐름, 사람의 기억 같은 것들이 기준 앞에서 삭제된다. 도면을 그리며 마음속에 그렸던 공간은, 심의 결과 앞에서 점차 표준화된 사각형으로 바뀌어 간다. 창의성은 기준을 침해할 수 없고, 사람에 대한 상상력은 통과 요건이 되지 않는다.


사용자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법에 맞춰 만들어진 계단이 너무 가팔라 오히려 노약자에게는 위험하고, 소방법에 따라 만들어진 비상구가 평상시에는 접근조차 어려운 곳에 위치해 있기도 하다. 기준이 사람을 보호하지 못하는 순간, 그 기준은 그저 의무를 위한 틀이 된다. 우리는 수많은 건축물에서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이 불편함을 감내하고 있다. 그러나 건축은 감내의 결과가 아니라, 응답의 결과여야 한다. 해외의 사례를 보면, 기준이 반드시 감정을 배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핀란드 헬싱키에서는 어린이 도서관을 설계할 때 아이들이 직접 의사결정에 참여하게 하여 공간의 높이와 동선을 조율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도시계획은 주거 밀도를 규정하면서도 블록마다 다양한 커뮤니티 공간이 자율적으로 구성되도록 유도한다. 제도는 틀이지만, 그 틀 안에 감정과 인간의 경험이 녹아들 수 있도록 유연성을 가진다. 한국의 제도 역시 그 유연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 문제는 교육 현장에서도 발생한다. 건축학교에서 학생들은 감정과 이야기, 인간의 경험을 중심으로 공간을 설계한다. 그러나 졸업 후 현실에 들어서면, 법적 기준과 도면 작성이라는 언어에 갇히기 시작한다. 우리가 가르친 건축은 감정을 담으라고 말했지만, 사회는 그 감정을 '기준 위반'이라 말한다. 그 괴리가 반복될수록, 젊은 건축가들은 기준에만 충실한 도면을 그리고, 결국 감정 없는 건축이 늘어난다. 이러한 제도는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그것은 '현실의 부재'에서 시작된다. 제도를 만드는 사람과 공간을 설계하는 사람, 그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 사이에 대화가 없기 때문이다. 공무원은 지침을 만든다. 설계자는 그것에 맞춘다. 시민은 그 결과를 감내한다. 누구도 처음부터 끝까지 이 과정을 통합적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류는 반복되고, 불합리는 고착된다. 우리는 제도를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위한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너무 자주 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는 계속된다. 도면은 늘 기준선 안에서 그려져야 하며, 표기되지 않은 감정은 그릴 수 없다. 그리고 이 감정 없는 도면은 허가를 받고, 심의를 통과하고, 예산을 확보하며, 결국 건물이 된다. 우리는 매일 그 건물들 속을 지나간다. 법적으로 완벽하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공간. 안전하다고 여겨지지만, 누구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는 공간. 그 속에서 건축은 점점 인간을 잃어간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이 기준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도면은 누구의 현실을 담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아직도 감정 없는 선을 현실이라 믿는가?


법과 제도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건축의 최소 조건이지,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기준은 틀을 만들지만, 그 틀 안에 무엇을 담을지는 건축가와 사회가 함께 결정해야 한다. 인간의 감각이 지워진 건축은 결국 인간을 배제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도시를 만든다. 건축이 다시 사람을 중심에 둘 수 있으려면, 도면 위의 선도 감정을 가져야 한다. 제도 또한 삶을 감각하고 반응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또다시 기준이라는 이름의 낡은 벽 안에서 미래를 설계하게 될 것이다.


4-4. 문제없는 도면, 문제투성이 현실

통과를 위한 설계는 왜 현장을 고려하지 않는가?


건축에서 ‘설계’라는 말은 모순을 품고 있다. 설계는 본래 사유의 결과이며,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공간을 구상하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설계’는 점점 더 행정적인 결과물이 되고 있다. 특히 공공건축이나 대형 개발 프로젝트에서 설계는 단지 통과를 위한 문서, 심의를 위한 도면, 허가를 받기 위한 형식으로 축소되고 있다. 문제는 그런 도면이 아무 문제 없이 통과되었음에도, 완공된 건물에서는 수많은 문제가 터져 나온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설계를 하고 있는가?


심의는 통과되었고, 법은 만족시켰으며, 문서는 정합성이 있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서는 사람들이 움직이기 어렵고, 구조는 비효율적이며, 시공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 간극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바로 ‘설계의 목적이 현장이 아니라 통과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설계는 사람이 움직이는 현장을 상상하기보다, 사람들이 앉아 있는 책상 위의 기준에 맞춰져 간다. 검토자는 도면만 본다. 보고서만 본다. 그 안에 ‘사람’은 없다. 이러한 현상은 실제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A도시의 청소년 수련시설은 설계 당시 동선 분리가 중요하다는 이유로 층별 진입을 분리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각 프로그램의 이용자가 유동적이었고, 내부 계단이 없는 구조는 기능적으로 단절된 공간을 만들었다. 도면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현장에서는 매일 불편을 초래했다. 결국 리모델링이 필요했고, 원 설계자는 책임에서 자유로웠다. 도면이 책임을 피하는 구조가 되어버린 것이다.


또 다른 예로, 한 작은 도서관 신축 프로젝트에서는 남향 채광을 위해 전면부에 창을 배치했지만, 실제로는 인접 건물과의 간섭으로 일조가 거의 없었다. 도면상 일조 조건은 충족했지만, 현실에선 어둡고 불쾌한 열감만 남았다. 설계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고, 검토자는 “문제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이 모든 불일치는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불편으로 이어졌다. 많은 설계자들은 말한다. "우리가 그렇게 설계한 것이 아니다. 시간이 없었다, 예산이 없었다, 조건이 까다로웠다." 그리고 그 말은 틀리지 않다. 설계는 점점 더 많은 문서와 더 적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도면을 잘 그리는 것보다 도면을 빨리 제출하는 것이 중요해졌고, 현실을 고려하는 것보다 검토자에게 읽히기 쉬운 구성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이 환경에서 ‘문제없는 도면’은 곧 ‘현장을 고려하지 않은 설계’가 되었다.


통과 중심의 설계는 구조적으로 네 가지 문제를 초래한다.

첫째, 시공성과 무관한 디테일이다. 현장에서 구현할 수 없는 디테일은 공정 중 변형되거나 생략된다.

둘째, 현실적 동선이 무시된다. 설계자는 사람의 흐름을 상상하기보다 도면상 연결선만을 고려한다.

셋째, 기계설비나 구조 검토가 설계 이후에 이루어진다. 전체 통합이 아니라 나눠진 파트별 문서 조합으로 이뤄진다.

넷째, 피드백 구조가 없다. 건물이 완공된 뒤에도 도면은 수정되지 않고, 이후 설계에도 반영되지 않는다.


건축은 계속되고 있지만, 설계는 멈춰 있는 셈이다. 게다가 완공 후 사용자 피드백이 설계자에게 전달되지 않는 구조 역시 문제다. 운영자가 기능상 불편함을 제기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민원으로만 남고 다시는 설계 구조에 반영되지 않는다. 피드백이 순환하지 않기 때문에 같은 실수는 반복되고, 다음 설계에서도 동일한 오류가 재현된다. 건축은 하나의 사건처럼 소비되고, 축적되지 않는다. 디지털 설계 도구의 발달도 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BIM이나 3D 모델링은 기술적으로 완성도 높은 공간을 구현할 수 있는 도구지만, 정작 그것이 2D 도면으로 변환되는 과정에서는 많은 정보가 누락된다. 구조, 설비, 사용자 동선, 시뮬레이션 데이터가 도면의 선으로 요약되면, 다시 '읽기 쉬운 도면'이 되지만 '현실을 담지 않은 도면'이 된다. 고도화된 기술도 제도의 구조 안에 들어가면 결국 현실을 단절시킨다.


문제는 이 모든 일이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설계자 혼자 잘못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다. 발주자는 촉박한 일정을 제시하고, 심의기관은 기준 중심의 평가를 고수하며, 시공사는 도면을 계약 기준으로 삼고, 감리는 기준 위반 여부만을 확인한다. 이 구조 안에서는 누구도 설계의 본질을 요구하지 않는다. 본질보다 형식이 우선이고, 형식은 현장을 외면한다. 해외에서는 이 구조를 피하기 위해 '현장 기반 설계 회의'를 의무화하는 사례도 있다. 일본 일부 지역은 시공사와 설계자, 감리가 함께 모여 설계 초기 단계부터 시공 가능성과 현실 조건을 함께 검토한다. 독일의 건축 프로젝트에서는 도면과 별도로 ‘현장 감각 보고서’를 작성하여 사용자 경험과 시공 적합성을 정성적으로 분석한다. 이런 시스템이 가능하려면 시간과 비용이 더 들지만, 결과적으로는 불필요한 리모델링과 운영 불만을 줄여 비용을 절감한다.


한국도 변화가 필요하다. 도면이라는 형식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내용을 중심에 두는 구조로. 통과가 아니라 실행을 중심으로 설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실제 사용자가 어떻게 움직일지, 어떤 감각으로 공간을 느낄지를 상상하지 않는 설계는, 아무리 깔끔해 보여도 결국 무너진다. 눈에 보이는 하자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불편이 쌓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설계는 누구를 위한 문서인가?

심의는 누구의 현실을 확인하고 있는가?

도면은 왜 완공된 건물 속에서 다시 쓰이지 않는가?


건축은 현실 위에 지어진다. 그렇다면 설계도 현실에서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문제없는 도면이 문제투성이 현실을 만든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우리는 매일 감당하지 않아도 될 불편함을 견디며 살아간다. 이제는, 통과보다 현장을 중심에 두는 설계가 필요하다. 그래야 건축은 다시 사람을 위한 공간이 될 수 있다.


4-5. 공공이라는 이름의 민간화

왜 공공 건축이 더 무책임해졌는가?


공공건축은 공익을 위한 공간이어야 한다. 더 많은 사람을 배려하고, 모두를 위한 기준을 고민하며, 도시의 질서를 구성하는 책임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공공건축은 그 이름과는 다르게, 오히려 민간 프로젝트보다 더 무책임하고 불합리하게 운영되고 있다. 외면적으로는 공공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수많은 단계에서 책임이 분산되고, 의사결정은 분절되고, 결과에 대해 아무도 답하지 않는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공공 발주의 민간화’다. 과거 공공건축은 행정 내부의 기술직 공무원과 계획팀이 중심이 되어 발주부터 설계, 시공, 유지관리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일관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공공건축은 계획수립부터 외부 용역에 맡겨지고, 설계공모 또한 형식적인 경쟁을 통해 최저가로 낙찰된다. 설계를 맡은 민간 사무소는 수많은 조건과 제약 안에서 일정을 맞춰야 하고, 그 뒤를 잇는 감리도 또 다른 외주사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서로 다른 주체 간의 책임 떠넘기기 속에서 사라진다.


공공건축은 ‘공공’이란 단어를 소유했지만, 그 운영은 민간보다 더 불투명하다. 예산은 투명하게 공개되지만, 실제 의사결정과정은 권한이 나뉘고 업무는 분절된다. 발주처, PM, 설계자, 감리자, 시공자, 사용자, 유지관리 주체가 모두 다르며, 이들은 하나의 건축을 두고도 서로를 알지 못한 채 각자의 책임만을 지려 한다. 그 결과, 공공건축은 애초에 통합된 의지를 가질 수 없게 된다. 설계자는 사용자와 대면하지 못하고, 사용자는 공간에 대한 의견을 낼 기회를 갖지 못한다. 공공 프로젝트의 가장 큰 병폐 중 하나는 '절차는 철저하지만 본질은 사라지는 구조'다. 심의 절차는 정교하게 구성되고, 검토위원은 다양하게 참여하며, 보고서와 회의록은 빠짐없이 작성된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오히려 실질적 대화를 가로막는다. 보고서가 사람을 대신하고, 회의록이 의도를 왜곡하며, 정해진 양식이 설계자의 상상력을 제약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은 '문제없음'이라는 판정을 받을 수 있지만, 사람들의 삶을 품을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이 무책임의 구조가 법적으로 문제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발주는 적법했고, 설계공모도 진행되었고, 감리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책임을 진 사람은 없다. 예를 들어, B시의 도서관 신축사업에서는 외부 용역 PM과 설계자 간의 소통 단절로 인해 주요 회의가 누락되었고, 그 결과 내부 구조가 기능적으로 전혀 작동하지 않는 채 완공되었다. 사용자는 공간의 비효율을 매일 체감하지만, 아무도 그 문제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발주처는 이미 공사가 끝났다고 말하고, 설계자는 계약 범위를 다 수행했다고 주장하며, 감리는 도면대로 시공되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예로, 수도권의 한 문화센터는 100억 원 가까운 예산이 투입되었지만, 건물 완공 후에도 냉난방 효율 문제로 가동률이 30%를 넘지 못했다. 설계자는 에너지 시뮬레이션을 했다고 말하고, 시공사는 계약대로 장비를 설치했다고 말했으며, 감리는 운영 이후 문제는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했다. 공공건축의 현실은, 완공 후 불편의 책임을 어느 누구도 지지 않는 상태다.


이와 같은 사례는 단지 하나의 실패가 아니라, 구조화된 실패다.


책임이 나뉘는 순간, 책임은 사라진다. 이름은 공공이지만, 실질은 민간보다 더 폐쇄적이다. 민간 건축주는 최소한 자기 이익을 위해 건축의 품질을 보려 하지만, 공공 프로젝트에서는 이해관계자가 너무 많아 품질에 집중할 동기가 사라진다. 시민은 그 결과물에 적응할 뿐, 개입할 권한을 갖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공공건축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공간,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건축이 된다. 또한 공공건축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방향이 뒤틀리기 쉽다. 선거 일정에 맞춰 급하게 착공되거나, 단체장의 치적 사업으로 포장된 프로젝트는 기능보다 외관에 집중하게 된다. 외형적 상징성과 설계의 조형미는 강조되지만, 운영자나 사용자의 실제 동선은 뒷전이 된다. 공간의 쓰임은 정치적 홍보의 수단이 되고, 그렇게 완공된 건축물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점 폐허처럼 방치된다.


해외 사례를 보면, 공공건축이 진정한 공공성을 가지기 위해 어떤 구조가 필요한지 알 수 있다. 핀란드는 공공건축에서 시민 참여를 의무화하고, 주요 설계 변경 시 시민 설명회를 의무로 둔다. 일본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공공건축 PM을 내부에 고용된 기술공무원으로 유지하여 민간 위탁의 단절 문제를 줄이고 있다. 독일은 공공 설계공모에 '실현성 보고서'를 반드시 첨부하게 하여, 심의의 중심을 외형이 아닌 운영성과로 옮긴다. 공공은 외부로 분산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중심을 잡아야 실질적인 책임을 질 수 있다. 디자인비와 유지관리비의 불균형도 공공건축을 왜곡시킨다. 설계에 수억 원이 들어가도 유지관리에 연간 수백만 원조차 확보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능을 갖춘 멋진 공간은 생겼지만, 1년 만에 장비가 고장 나고, 2년 만에 내부 벽체는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설계자의 잘못이라 비난하지만, 사실 이 문제는 '예산의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진짜 공공은 '처음의 설계'만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운영'까지를 포함해야 한다.


한국의 공공건축이 다시 공공성을 회복하려면, 구조부터 바뀌어야 한다. 이름만 공공인 프로젝트가 아니라, 절차와 의사결정, 피드백과 사후관리까지 모두 시민과 연결되어야 한다. 참여자들이 책임을 나누는 구조가 아니라, 함께 책임지는 구조가 필요하다. 또한 설계자와 사용자의 간극을 줄이고, 중간의 용역기관들이 오히려 의사소통을 막는 구조를 재검토해야 한다. 실질적 대화가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진 공간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결과가 되어버린다.


공공건축은 누구의 것인가?

행정의 것인가, 시민의 것인가?


지금의 공공건축은 시민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그저 서류로만 존재하고, 결과물만 남긴다. 이제는 다시 묻고 다시 설계해야 한다. 진짜 공공은, 공감할 수 있어야 하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하며, 함께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공공이 시민의 이름으로 존재하려면, 공공건축은 시민의 삶과 다시 연결되어야 한다.


4-6. 설계자의 의도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왜 설계는 자울성을 잃고 말았는가?


설계는 건축가의 사유다. 사유는 질문에서 출발하고, 의도에서 방향을 얻으며, 공간을 통해 응답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건축 설계 현장에서는 이러한 기본적인 구조가 작동하지 않는다. 설계는 점점 더 '대응'과 '충족'의 기술로 전락하고 있으며, 설계자의 의도는 도면 사이의 행간에 갇히고, 심의와 발주, 시공의 과정 속에서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다. 건축가가 가진 고유한 판단, 감각, 세계관은 이제 설계에서 요구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위험 요소'로 취급된다. 도면의 언어는 객관적이다. 선과 숫자, 기호와 법규로 구성된 이 언어는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 속에는 '검토하기 쉬운 방식'이라는 강한 편향이 들어 있다. 설계자의 사고는 점점 그 언어에 길들여진다. 수치로 환산되지 않는 의도는 배제되고, 해석을 요구하는 개념은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탈락된다. 의도는 '기준 위반의 가능성'으로 오해되고, 새로운 시도는 '심의 리스크'로 간주된다. 그리하여 설계는 사유에서 전략으로, 창작에서 관리로 변한다.


특히 공공건축과 대형 민간 프로젝트에서는 이 현상이 두드러진다. 제안요청서(RFP)는 점점 더 세밀해지고, 요구 조건은 점점 더 고정된다. 창의적인 해석은 '기준 미달'로 읽히고, 심의위원은 '유사 사례'를 요구한다. 새로운 시도는 '실현성 부족'으로 낙인찍히고, 낯선 동선은 '검토불가'로 분류된다. 설계자는 자신이 고민한 공간의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그것이 기준을 충족했는지를 반복해서 증명해야 한다. 결국 의도는 스스로 지워지거나, 생략된다. 실제로 많은 건축가들이 설계공모나 심의 과정에서 "일단 통과한 뒤, 시공단계에서 조정하자"는 전략을 선택한다. 이는 설계의 자율성이 사라졌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현실이다. 심의는 설계의 고도화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설계의 생략을 유도하고 있다. 디자인은 점점 더 납작해지고, 설명 가능한 것만 남으며, 결과적으로 공간은 평이해진다. 우리는 공모전을 통해 선정된 수많은 건축이 '비슷한 언어, 비슷한 구도, 비슷한 외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 구조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설계의 자율성은 단순히 '자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설계자가 설계의 결과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권한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 구조는 설계자의 자율성과 책임을 동시에 박탈한다. 설계자는 모든 결정을 발주자와 공유해야 하며, 시공사와 감리에 의해 수차례 수정되고, 구조기술사와 설비팀의 자문으로 조정된다. 감리단계에 이르면 처음 의도한 설계는 흔적만 남고, 결과물은 누가 설계했는지도 모를 만큼 변형되어 있다. 그 와중에도 문제가 생기면 설계자에게 책임이 돌아간다. 더욱 심각한 것은 '자율성의 실종'이 세대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진 건축가들은 시스템을 익히는 데에 집중하며, 창의성보다는 기준 충족과 PT 스킬을 먼저 배운다. 경력 있는 건축가들도 설계자의 역할이 점점 '계약에 명시된 업무만'으로 축소되는 현실을 체감한다. 교육기관은 여전히 건축을 예술로 가르치지만, 실무에서는 건축이 기술이자 행정이 된다. 그 간극은 설계자의 정체성마저 불투명하게 만든다.


왜 설계자는 더 이상 공간의 주도자가 아닌가? 왜 의도는 번역되지 못하고, 계획은 '계획서'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가? 이는 단지 설계 환경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회가 건축을 소비하는 방식, 발주자가 건축을 해석하는 방식, 제도가 건축을 규정하는 방식 모두가 설계의 자율성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공간에 대한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설계는 단지 승인받기 위한 도면에 머물고 말 것이다. 해외에서는 설계자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한 구조를 제도화한 사례도 있다. 네덜란드는 일정 규모 이상의 공공건축에서 설계자에게 '디자인 결정권'을 법적으로 부여하고, 실현 과정에서 변경되는 사항에 대해서는 설계자의 동의 없이는 조정이 불가능하도록 한다. 독일은 설계와 시공이 명확히 분리되어 있어, 시공사의 요구로 설계를 변경하려면 정식 협의가 필요하다. 이러한 구조는 설계자의 책임과 자율성을 동시에 보장하는 장치다.


한국에서도 설계의 자율성을 회복하기 위한 제도적 논의는 있었지만, 여전히 현장에서는 '책임 없는 간섭'이 만연하다. 설계자는 자신이 만든 공간에 대해 변호해야 하고, 때로는 그것이 조정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해달라'고 설명해야 한다. 건축가는 저자이면서 동시에 관리자, 중재자, 전달자 역할까지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역할이 하나의 권한 아래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 설계는 언제든 왜곡될 수 있다. 설계가 다시 설계자의 것이 되려면, 우리는 먼저 설계가 무엇인지 다시 정의해야 한다. 설계는 기준을 만족시키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공간에 대한 질문이자, 인간의 삶에 대한 응답이다. 제도가 그것을 방해해서는 안 되며, 심의가 그것을 왜곡해서도 안 된다. 건축이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설계자는 그 사람을 대표하는 감각을 가진 존재여야 한다. 그리고 그 감각이 의도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하며, 그 의도가 공간으로 실현될 수 있어야 한다.


설계자의 자율성은 단지 건축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시를 더 낫게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다.


의도가 사라진 건축은 기억되지 않고, 감동도 주지 못한다. 다시 의도를 복원하고, 다시 자율성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무너진 도시 속에서 우리가 설계를 다시 시작하는 방식이다.


4-7. 구조적 무능이 어떻게 반복되는가?

건축은 왜 시스템 자체를 바꾸지 못하는가?


붕괴는 반복되고, 문제는 익숙해진다. 누군가 실수를 했고, 누군가 책임을 지지 않았으며, 누군가는 다시 같은 설계를 반복했다. 이 모든 흐름은 너무나 익숙하고, 너무나 일상적이다. 대한민국에서 건축의 실패는 ‘사건’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그리고 우리는 매번 그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붕괴의 결과를 보며 놀라지만, 정작 그 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일에는 아무도 착수하지 않는다. 왜 우리는 반복되는 문제를 알고도, 그 구조를 바꾸지 못하는가? 문제의 핵심은 ‘책임의 사슬’이다. 현재의 건축 시스템은 발주자, 설계자, 감리자, 시공자, 운영자, 사용자로 이어지는 다단계 구조를 가진다. 이 구조는 협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책임의 분산’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모든 참여자는 자신의 범위 내에서만 업무를 수행하고, 결과가 잘못되었을 경우 “내 일은 아니었다”는 말로 빠져나간다. 이 구조 속에서는 아무리 심각한 실패가 발생해도 책임의 끝은 모호하다. 결국 누구도 구조를 다시 설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전체 구조에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시스템은 사람을 가르친다. 구조는 문화를 만든다. 건축에서 ‘시스템의 무능’이 반복된다는 것은 단순히 행정이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문화적 훈련이다. 모든 주체는 시스템의 조건에 따라 움직이며, 그 조건은 실패를 예방하기보다 실패에 익숙해지게 만든다. 설계자는 의도를 포기하는 법을 배우고, 시공자는 현실을 외면하는 법을 익히며, 사용자는 문제를 감내하는 법을 내면화한다. 구조가 만든 무능은 사람의 태도로 전이된다. 이러한 구조적 무능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답은 명확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 기원을 짐작할 수 있다. 급속한 도시화와 산업화 속에서 한국의 건축은 양적 공급을 최우선 가치로 삼았고, 절차보다는 속도가, 철학보다는 효율이 강조되었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제도는 대규모 건설을 위한 시스템이었으며, 그 시스템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문제는 그 시스템이 이제는 시대와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속도의 시스템은 여전히 품질보다 우선이고, 효율의 구조는 여전히 감정을 배제한다.


시스템은 살아남았고,

건축가는 훈련되었으며,

시민은 길들여졌다.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실패의 원인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구조에서는 실패를 분석하는 기능조차도 제도화되어 있지 않다. 사고가 발생하면 언론은 시공사를 향하고, 국가는 조사위원회를 꾸리지만, 그 과정은 표면적인 진단에 그친다. 법을 어겼는지, 절차를 위반했는지만 확인하고, 그 시스템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분석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과에만 주목하고, 구조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실제로 수많은 건축사고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문제는 공통적이다. 무리한 공정 압박, 과도한 예산 절감, 협의 없는 설계 변경, 검토 생략, 책임 회피. 이 모든 것들이 명백하게 반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도는 변하지 않는다. 변화를 가로막는 것은 법도 아니고, 기술도 아니다. 그것은 시스템의 내부자들, 즉 그 구조 안에서 생존하는 방식에 익숙해진 전문가 집단이다. 구조를 바꾸는 일은 곧 자신들의 관행을 흔드는 일이기에, 아무도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또한 구조는 위계를 만든다. 발주자가 제일 위에 있고, 시공사는 계약의 논리로, 감리는 법의 논리로, 설계자는 현실의 논리로 작동한다. 이 위계 안에서는 상향식 제안이 불가능하다. 하위 주체는 자신의 위에 있는 구조에 불만을 품지만, 시스템을 바꿀 수단은 없다. 설계자는 시공사의 간섭에 불만을 느끼지만, 그 시스템을 설계할 권한은 없다. 감리는 제도의 부조리를 인식하지만, 검토 방식은 이미 고정되어 있다. 위계적 구조 속에서는 누구도 위를 바꾸지 못하고, 모두는 아래만 책임진다. 이러한 구조를 유지하는 또 다른 힘은 ‘형식적 합법성’이다. 모든 것은 법과 기준에 따라 진행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 법과 기준이 ‘실질적인 안전’이나 ‘공간의 질’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예산이 부족해도 법적 최소 기준만 충족하면 통과되고, 동선이 비효율적이어도 문서상 문제없다면 시공된다. 법은 최소한을 정의하지만, 우리는 그 최소한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문제를 만들어도,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법적이기 때문에, 누구도 잘못이 아니다. 이것이 구조의 무능이 반복되는 진짜 이유다.


하지만 이런 구조는 바뀔 수 없다기보다,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인 것이다. 시스템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고, 사람에 의해 유지되며, 결국 사람에 의해만 바뀔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면서도 왜 반복하는가? 누구도 구조를 바꾸지 않는 사회에서, 누가 먼저 구조를 흔들어야 하는가? 변화는 가장 작은 구조의 수정에서 시작된다.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첫걸음은, 실패를 만든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다. 해외에서는 시스템 개편을 위한 시도들이 제도화되고 있다. 프랑스는 공공건축 사고가 발생할 경우 단순한 책임자 색출이 아니라, 전체 시스템의 피드백 과정을 의무화하고 있다. 독일은 건축 설계와 기술 감리의 역할을 법적으로 구분하고, 각각의 단계마다 적정 인력을 투입해야 한다는 기준을 설정해두었다. 일본은 고베 대지진 이후 건축 시스템 전반을 재정비하며, '감리자 독립권'을 보장하고 설계 단계에서의 오류도 감리단계에서 반드시 보고하도록 법제화했다. 그들은 한 번의 실패를 구조적으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구조 자체를 흔드는 방식으로 반응했다.


한국 사회도 이제는 결과가 아니라 시스템을 이야기해야 한다. 누가 잘못했는지를 묻기보다, 왜 그런 잘못이 가능했는지를 물어야 한다. 한 명의 실수는 다시 고칠 수 있지만, 구조적 실패는 계속해서 사람을 위험에 빠뜨린다. 건축은 단지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결정이고, 제도의 정체이며, 문화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건축이 실패했다면, 우리는 시스템을 재설계해야 한다. 이제는 반문해야 할 때다. 왜 우리는 또다시 같은 질문을 하는가? 왜 여전히 똑같은 결론을 반복하고 있는가? 그리고 지금의 시스템은 누구를 위해 작동하고 있는가? 건축은 가장 정직한 거울이다. 그 거울 속에 비친 사회가 구조적 무능을 반복한다면,


그 책임은 구조가 아닌 우리 모두에게 있다.


변화는 결코 거창한 제도개혁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매번의 설계에서, 매번의 회의에서, 매번의 시공 현장에서 시작된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는 구조를 설계하고, 구조를 흔들고, 구조를 되묻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4-8. 무너진 신뢰, 설계되지 않은 구조

우리는 건축의 무엇을 다시 설계해야 하는가?


우리는 무너진 구조를 보며 깜짝 놀란다. 그러나 그 놀라움은 길지 않다. 며칠 후면 다른 뉴스가 그것을 덮고, 한 달이 지나면 그 건물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사람은 금방 잊는다. 하지만 구조는 기억한다. 그 안에서 쌓인 균열, 무시된 디테일, 생략된 검토, 지나친 일정, 침묵한 감리, 포기한 설계. 모든 것이 구조 안에 남는다. 그리고 그 구조는 다시 반복된다. 우리는 자꾸만 새로운 실패를 겪는 것이 아니라, 설계되지 않은 구조 속에서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고 있다. 신뢰는 건축의 시작이다. 공간은 믿음 위에 세워진다. 내가 이 건물 안에 있어도 괜찮다는 믿음, 이 공간이 나의 동선을 고려하고 있다는 믿음, 이 도시가 나의 삶을 해치지 않는다는 믿음. 그러나 오늘날의 건축은 그 믿음을 지속적으로 저버리고 있다. 무너진 벽과 붕괴된 슬래브, 닫히지 않는 문과 불 꺼진 로비. 사람들은 그 속에서 점점 더 건축을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의심은 사회에 대한 신뢰로 번진다. 왜냐하면 건축은 단지 콘크리트와 철근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스템의 문제이고, 사회의 결정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의 반영이다.


우리는 도면 위에 선을 긋는다. 그리고 그 선이 기준을 넘지 않도록, 법을 어기지 않도록, 심의를 통과하도록 조정한다. 도면은 점점 완벽해지지만, 정작 그 안에 담긴 사람은 사라진다. 아이들의 손 높이도, 노인의 속도도, 장애인의 시선도 그 안에 없다. 있는 것은 면적, 용적률, 마감재, 수치화된 계획뿐이다. 그리고 그 수치는 아무 문제 없이 통과된다. 하지만 완공된 건물에서 사람들은 길을 잃고, 불편을 감내하고, 기능하지 않는 공간을 견딘다. 문제는 설계자의 무능이 아니다. 그것은 애초에 사람을 담지 않은 구조, 관계를 설계하지 않은 도면의 결과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서울의 밤은 환하지만, 골목은 어둡다. 간판은 화려하지만, 표지판은 어딘가를 가리키지 않는다. 광장은 넓지만, 사람들이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이 도시에는 ‘공간’은 있지만 ‘장소’는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도시를 ‘설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발했을 뿐이다. 이익을 기준으로, 분양을 목표로, 효율을 최우선으로 공간을 쪼개고, 배치하고, 완성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누가 이곳에 살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은 사라졌다. 질문 없는 설계는 방향을 잃고, 방향 없는 건축은 신뢰를 잃는다.


이제는 되묻고 싶다. 우리는 건축의 무엇을 다시 설계해야 하는가?


우선, ‘책임의 구조’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 현재의 건축 시스템은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구조화되어 있다. 발주자는 지시만 하고 책임지지 않으며, 설계자는 예산과 일정 사이에서 타협하고, 시공사는 계약대로만 시공한다. 문제는 누구의 것도 아니고, 책임은 사라진다. 우리는 이 구조를 바꿔야 한다. 각 주체가 자신의 역할만이 아니라, 그 결정이 미치는 파급까지 감당할 수 있는 구조. 문제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다시 무너질 것이다.


둘째, ‘의도의 복원’을 설계해야 한다. 설계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누군가 왜 이 공간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어떤 감각으로 이 방향을 선택했는지, 어떤 경험을 상상했는지. 이 모든 것이 기록되고, 공유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건축은 설계자의 의도를 잊는다. 시공과정에서 사라지고, 감리단계에서 변형되며, 완공 이후에는 전혀 다른 공간이 된다. 우리는 다시 설계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 감각의 흐름을 회복하고, 공간의 이유를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설계의 시작이다.


셋째, ‘사람을 중심에 두는 설계’를 회복해야 한다. 건축이 공간만을 이야기할 때, 사람은 기능적 요소가 된다. 그러나 건축이 사람을 이야기할 때, 공간은 기억이 된다. 우리는 지금 다시 사람을 바라봐야 한다. 아이가 손을 뻗는 높이, 휠체어가 회전할 수 있는 반경, 노인이 앉았다 일어설 수 있는 거리, 그 모든 것을 도면 안에 그려야 한다. 공간은 배려의 총합이어야 하고, 그 배려는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야 한다. 사람 없는 도면은 결국 무의미한 구조다.


넷째, ‘공공성의 기준’을 재설계해야 한다. 지금의 공공건축은 시민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민을 피하고, 시민의 참여를 회피하며, 형식만을 따진다. 설계자는 시민을 만나지 못하고, 시민은 그 공간을 낯설어 한다. 우리는 다시 공공이 무엇인지 질문해야 한다. 진짜 공공이란, 모두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기억에 남고, 경험이 공유되며, 스스로 그 공간을 소개할 수 있는 장소. 그것이 바로 공공성이다. 이제는 그 공공성을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질문하는 건축’을 다시 세워야 한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답을 위한 건축을 해왔다. 얼마나 싸게, 얼마나 빨리, 얼마나 효율적으로. 그러나 이제는 물어야 한다. 왜 이곳에? 왜 이런 방식으로? 왜 지금 이 시기에? 질문은 건축을 느리게 만들지만, 깊게 만든다. 그리고 깊이 있는 건축만이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 관계를 맺는 건축만이 도시를 변화시킬 수 있다. 이제는 다시 건축이 질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질문이 바로 설계되지 않은 사회를 설계할 수 있는 첫걸음이다. 우리는 무너진 건축을 다시 세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고, 사라진 의도를 다시 그리며, 잃어버린 사람을 다시 공간 속에 놓아야 한다. 건축은 그 모든 것을 회복하는 기술이자 예술이며, 정치이며 사회다. 이제 우리는 진짜로 설계해야 한다.


구조가 아니라, 관계를.

공간이 아니라, 사람을.


그것이 우리가 건축의 이름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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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남은 이야기....


5장. 제도가 건축의 발목을 잡는다. : 법과 제도는 건축의 가능성을 어떻게 억누르는가?

- 법은 누구를 보호하는가 : 기준은 안전을 보장하는가, 혹은 창의성을 가로막는가?

- 규정 속 창의성, 가능했을까 : 법과 창의성은 정말 공존할 수 없는가?

- 조항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가 : 현실의 문제를 담지 못하는 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 심의는 설계를 돕고 있는가 : 심의는 건축을 품형하는 제고인가, 가로막는 제도인가?

- 허가인가, 통과인가 : 왜 허가는 점검이 아니라 생략이 되어가고 있는가?

- 공공건축과 입찰의 역설 : 제도가 탈락시키는 건축은 어떤 건축인가?

- 건축가 없는 법, 법 없는 건축가 : 제도와 실무는 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 법은 공간을 설계할 수 있는가 : 우리는 어떤 법 위에서, 어떤 공간을 설계하고 있는가?


6장. 한국 건축은 이미 증명해왔다. : 우리는 왜 좋은 건축을 반복하지 못하는가?

- 우리가 만든 건축은 세계로 갔다 : 기술은 최고지만, 왜 국내에서는 묻히는가?

- 기념비적 건축은 가능했다 : 대단한 건축은 있었지만, 왜 일상은 지켜지지 않았는가?

- 가능성은 설계에서 시작되었지만 : 왜 같은 설계자가 반복해서 기회를 갖지 못하는가?

- 기술은 준비되어 있었다 : 시스템이 없었지,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 문제는 제도가 반복을 막는 구조다 : 왜 이미 검증된 건축도 반복되지 못하는가?

- 기억되지 않는 건축 : 우리는 왜 좋은 건축을 기억하고 지켜내지 못하는가?

- 반복을 가로막는 사회 : 좋은 건축을 지속하는 문화는 왜 없는가?

- 우리가 다시 지어야 할 것은 건축만이 아니다 : 우리는 무엇을 반복해야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7장. 이제는 가능성을 설계할 차례다. : 우리는 무엇을 다시 설계하고, 무엇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가?

- 우리가 설계하지 못한 것들 : 공간은 바뀌었지만, 삶은 왜 그대로인가?

- 반복된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 우리는 어떤 구조부터 다시 짜야 하는가?

- 건축은 정치보다 먼저 사람을 설계한다 : 관계, 감정, 공감은 어떻게 설계되는가?

- 도시를 바꾸는 건 법이 아니라 감각이다 : 공감은 제도보다 앞서야 하지 않을까?

- 삶을 위한 건축, 권리를 위한 설계 : 공간은 어떻게 삶의 조건이 되는가?

- 예술로서의 건축은 왜 필요했는가 : 우리는 왜 여전히 건축을 아름답게 지으려 하는가?

- 감정을 설계하는 사회를 향해 : 어떤 공간이 사람을 바꾸고,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

- 가능성을 짓는 건축가 : 나는 무엇을 설계하고 싶은가, 우리는 무엇을 상상할 수 있는가?


에필로그. 감정을 품은 공간, 사람을 담은 도시 : 건축으로 우리는 어떤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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