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되지 않은 사회 Chapter 5 (part1~3)

공간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 말에 응답하고 있는가?

by 찬 용

앞의 이야기를 먼저 보고 오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설계되지 않은 사회 서론~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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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되지 않은 사회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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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제도가 건축의 발목을 잡는다. : 법과 제도는 건축의 가능성을 어떻게 억누르는가?

- 법은 누구를 보호하는가 : 기준은 안전을 보장하는가, 혹은 창의성을 가로막는가?

- 규정 속 창의성, 가능했을까 : 법과 창의성은 정말 공존할 수 없는가?

- 조항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가 : 현실의 문제를 담지 못하는 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 심의는 설계를 돕고 있는가 : 심의는 건축을 품형하는 제고인가, 가로막는 제도인가?

- 허가인가, 통과인가 : 왜 허가는 점검이 아니라 생략이 되어가고 있는가?

- 공공건축과 입찰의 역설 : 제도가 탈락시키는 건축은 어떤 건축인가?

- 건축가 없는 법, 법 없는 건축가 : 제도와 실무는 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 법은 공간을 설계할 수 있는가 : 우리는 어떤 법 위에서, 어떤 공간을 설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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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법은 누구를 보호하는가

: 기준은 안전을 보장하는가, 혹은 창의성을 가로막는가?


건축을 배우며 처음 접한 법은 ‘건축법’이었다. 마치 공식처럼 정리된 문장의 연속. 그것은 설계를 위한 안내서이자 금지 목록이었고, 동시에 내가 그리려는 선 하나, 기둥 하나, 창 하나에도 영향을 미치는 결정권자였다. 수직과 수평의 균형을 고민하며 만든 평면도 위에, “이건 안 돼”, “이건 허용되지 않아”, “기준보다 작아”라는 말은 내 설계를 무너뜨리는 선언처럼 다가왔다. 처음엔 그저 내가 잘 몰라서 거부당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더 많은 사례와 경험을 마주하게 될수록, 질문은 점점 바뀌었다.


“정말 이 기준이 필요했을까?”,
“법이 보호하려는 대상은 누구일까?”,
“법은 언제부터 창의성을 제한하기 시작한 걸까?”


건축법은 안전과 질서를 담보하기 위한 법이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안전’이 실제로 사용자에게 얼마만큼 작동하고 있는지, 그 ‘질서’가 창의적인 건축의 가능성을 얼마만큼 차단하고 있는지를 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법은 언제나 '보호'를 명분으로 하지만, 그 보호의 대상이 누구인지, 그 보호로 인해 누군가가 무엇을 잃는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많은 기준과 조항 속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공간과 마주하고 있다. 기준은 분명 필요하다. 기준 없는 건축은 무질서한 도시를 만든다. 그러나 기준이 경계로 변하고, 경계가 창의성을 단속할 때, 건축은 더 이상 공공의 안전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가능성을 억누르는 감시자가 된다. 우리는 지금 어떤 법 위에서, 어떤 건축을 그리고 있는가?


우리는 일상 속에서 수많은 '기준'을 경험한다. 자동차는 일정 기준 이상으로 충돌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고, 음식은 일정 기준 이상으로 위생을 유지해야 판매될 수 있다. 기준은 시스템이 만들어낸 신뢰의 척도이자, 가장 안전한 수준의 평균값이다. 건축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정 규모 이상의 계단에는 손잡이를 설치해야 하고, 높이 1.2m 이상의 단차에는 난간을 설치해야 하며, 2개 층 이상을 오가는 동선에는 비상구를 의무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문제는 이런 기준이 ‘왜 그렇게 정해졌는가’를 묻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예를 들어, ‘피난층의 창호 면적은 전체 바닥 면적의 1/20 이상이어야 한다’는 규정은 실제로 비상 시 인명 구조에 도움이 되는가? 혹은 그 면적이 1/25이 되었다고 해서, 건축물은 본질적으로 안전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기준은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절대 안전'의 최소 조건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기준이 ‘다양성’을 배제한다는 데 있다. 창호의 위치, 창의 개폐 방식, 실내 구조의 유기성 등은 모두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기준은 그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다. 창의적인 해석은 오히려 위반으로 취급된다.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의 ‘자유’란 실상 자유가 아니다. 창의적 사고는 기준의 틈새를 조심스럽게 피해 다니는 전략에 가깝다. 기준은 본래 안전과 공공성을 위한 장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기준은 '위반하지 않기 위해 따르는 의무'로 작동하기 시작했고, 결국 창의성은 ‘허용된 틀’ 안에 갇힌 선택지만 남기게 되었다.


창의성은 불확실성을 동반한다. 새로운 시도는 전례가 없기 때문에 불편하고, 규정은 불확실성을 허용하지 않기에 창의성은 종종 '문제'로 지적된다. 실제 심의 과정에서 창의적인 해석을 적용한 건축안이 “기존 사례가 없다”거나 “유사 선례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반려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어느 젊은 건축가가 설계한 소규모 갤러리는, 일반적인 사각 평면 구조가 아닌 비정형 원형 구조로 계획되었다. 건축가는 중앙으로 들어오는 자연광의 흐름을 따라 전시 동선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허가 과정에서 구조기준, 채광기준, 피난 기준에 연달아 걸려 설계는 전면 수정되었고, 결국 처음 기획한 공간의 감성은 거의 사라졌다. 건축가는 말했다. “창의적인 공간은 기준의 언어를 먼저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 언어는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게 만든다.” 이렇듯 법은 창의적인 시도를 ‘기준의 위반’으로 간주하며, 설계를 안전한 방향이 아닌, 전례에 가까운 방향으로 수렴시키는 힘으로 작동한다. 마치 ‘모험을 하지 마라’는 무언의 명령처럼.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설계는 법적으로 가장 안전한 형식, 즉, 제일 익숙한 답안지를 선택하게 되고, 도시는 복제된 도면들로 채워진다.


법은 언제나 ‘안전을 위한 것’ 이라고 말한다. 설계에서 창의적인 시도를 제지할 때에도, 인허가를 반려하거나 수정 지시를 할 때에도, 건축사는 안전을 우선하자는 명분에 반박하기 어렵다. 그러나 질문해보자.


정말 법이 안전을 보장하고 있는가?

아니, 정말 지금의 법이 ‘현실적인’ 안전을 담보하고 있는가?


예컨대 2022년과 2023년, 국내에서 발생한 연이은 지하주차장 붕괴 사고는 현행 건축법, 구조기준, 시방서, 감리제도 아래에서 모두 정식으로 인허가되고 감리 받은 건축물에서 일어난 일이다. 즉, 법적으로는 ‘문제없다’고 판단받은 건물이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그렇다면 법은 과연 무엇을 막았고, 무엇을 허용했는가? 해당 사고에서는 무량판 구조에 대한 구조해석 미흡, 피크하중에 대한 고려 부족, 철근 간격 및 피복 문제, 부실 시공 등 복합적 원인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요소는 ‘법의 틀 안’에서 진행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실제 위험 요소를 막지 못했다. 반면, 같은 시기 어떤 건축가는 전통 목구조와 현대 구조재를 혼합해 독창적인 공간을 구현하려 했으나, 기준과 다르다는 이유로 구조검토 단계에서 전면 반려되었다.


결국 지금의 법은 실제 문제를 정확히 감지하고 있는가, 혹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시도해볼 만한 건축적 실험들을 오히려 사전에 제거하고 있는가 하는 회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법이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믿음은, 어쩌면 법이 만든 허상일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합리화하고 싶을 때 사람들은 ‘안전’을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이 반복될수록, 오히려 진짜 안전은 사각지대로 밀려난다. 건축에서 ‘안전’은 물리적 안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의 정신적 안전, 감정적 평안, 접근성의 공정성, 환경에 대한 배려 등도 모두 포함되어야 할 안전의 일부다. 하지만 이런 부분은 법의 기준에서 철저히 소외된다. 왜냐하면 법이 다룰 수 있는 안전은 정량화된 것, 수치화 가능한 것, 최소한의 조건으로 정의된 것이기 때문이다. 안전을 말하며, 정작 사람을 놓친다. 법이 진짜 보호해야 하는 것이 공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가능성이라면, 지금의 기준은 결코 충분하지 않다.


법은 한 번 정해지면 쉽게 바뀌지 않는다. 법을 만드는 사람은 전문가가 아닌 경우가 많고, 설계자와 사용자, 시공자와 감리자 모두에게 동시에 적용 가능한 가장 최소의 공통분모로 법이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은 필연적으로 법을 ‘보수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보수적인 법은 창의적인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가 층고 제한이다. 국내 공동주택에서 층간소음을 줄이기 위해 바닥 슬래브 두께와 완충재 규정을 강화하는 대신, 전체 건축물 높이 제한은 그대로 두었다. 결과적으로 설계자는 천장을 낮추는 방식으로 층고를 조절해야 했고, 이는 곧 실내 거주의 질 하락으로 이어졌다.


법이 취했던 방식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책임 전가였다. 시공자는 기준만 맞추면 되고, 감리자는 도면대로 시공만 확인하면 된다. 하지만 그 결과를 몸으로 느끼는 사람은 실제로 거주하는 사용자이다. 법은 그들의 불편을 보지 못한다. 또 다른 예로는 접근성 기준이 있다. 건축물에 휠체어 접근이 가능하도록 출입구 높이 차를 없애거나 경사로를 설치해야 한다는 ‘무장애 설계’는 분명 중요한 기준이다. 그러나 이 기준이 모든 건축 유형과 설계 의도에 일률적으로 적용되었을 때, 설계자는 자연 지형이나 건축적 흐름을 활용한 입면 구성, 높낮이의 리듬을 설계할 수 없다. 모든 접근은 평면적이고 직선적이어야 하며, 계단은 반드시 수평과 직각으로 계산되어야 한다. 결국 모든 입면은 평탄한 정면, 평이한 구성, 예측 가능한 리듬으로 수렴된다. 이처럼 법이 설계자에게 남겨주는 선택지는 제한적이며, 그 결과 우리의 도시와 공간은 닮은꼴이 되어간다.



5-2. 규정 속 창의성, 가능했을까 :

법과 창의성은 정말 공존할 수 없는가?


건축은 단 한 번도 완전한 자유로 설계된 적이 없다.


기후와 재료, 경제성과 공정, 시간과 사용자, 시와 구의 조례, 그리고 국가법령.


건축가는 늘 수많은 조건 안에서 가능성을 좁히고, 그 좁혀진 가능성의 틈 사이에서 설계라는 해석을 시도한다. 그렇다면 그 해석의 가능성은 ‘법’이라는 틀 속에서 어디까지 갈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말한다.


“법 안에서도 충분히 창의적일 수 있어.”
“법은 최소한의 조건일 뿐, 그 안에서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잖아.”


이 말은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창의성은 규정을 회피하거나 피해 가는 방식으로만 존재하도록 허락되었다”는 말과도 같다.


설계자에게 주어진 법적 조건은 생각보다 많다. 단지법, 건축법, 구조기준, 조례, 각종 심의지침, 소방법, 교통영향평가, 경관심의, 문화재보호법까지. 그리고 각 기준은 절대적인 면적이나 수치로 설계에 개입한다. 예를 들어, 용적률 250% 이하, 높이 24m 이하, 일조권 사선 제한 1.5:1 적용, 대지경계선으로부터 이격거리 1.5m 이상, 조경면적 15% 이상, 인동간격 최소 1/2 확보, 주차대수 0.7대/호 이상,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기준, 주출입구 방향 조건 등. 이 모든 기준을 충족시킨 후, 그제야 ‘디자인’을 논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다시 말해, 설계의 창의성은 ‘기준을 다 맞춘 후 남는 여백에서만’ 시도할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그 여백조차 심의에서 “과도한 표현”이나 “주변과 조화되지 않음”이라는 이유로 반려될 수 있다. 이쯤 되면 우리는 묻게 된다.


정말 이 상태에서, 창의성은 가능했을까? 혹은, 가능하다고 말하는 그 창의성은 진짜 창의성일까?


몇 해 전 서울 종로의 한 대지는 건축가들에게 특별한 실험의 기회를 제공했다. 역사문화지구 내에 있으면서도 외부 공개공지를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이었고, 대지는 비정형의 삼각형 구조에 좁은 골목길과 맞닿아 있었다. 건축가는 이 공간을 ‘움푹 들어간 광장’처럼 만들기 위해 건축물의 일부를 비워 공공보행로로 제공하고, 그 상부에 부유하는 듯한 매스를 설계했다. 이 설계는 구조적으로도 도전적이었고, 골목길을 따라 형성되는 시퀀스를 공간적으로 풍성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 설계는 “건축선 후퇴 기준 위반”, “공개공지 면적 산정 기준 위반”, “건폐율 초과” 라는 이유로 심의에서 3차례 반려되었다. 건축가는 결국 원안을 철회하고, 기준을 정직하게 충족시키는 평면적 입면과 일자형 매스로 설계를 변경했다. 결과물은 법적으로 완벽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건물이 되었다.


창의적인 건축가들은 법의 ‘빈틈’을 찾아낸다. 그들은 법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법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꼼꼼히 해석한다. 왜냐하면 그 해석 속에 새로운 공간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지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용적률에 산정되지 않는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프로젝트들이 있다. 외부 계단, 필로티 하부 공간, 옥상 정원, 선큰가든 등은 법적으로 건축면적이나 용적률에서 제외되거나 일정 조건 하에 완화된다. 이를 전략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설계자는 건폐율은 낮게 유지하면서도 공간의 깊이와 기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 한 건축가는 이런 규정을 활용해 지하 선큰과 옥상 정원, 필로티 공간을 유기적으로 연결한 복합문화공간을 제안했다. 이 건물은 전면 도로에서 보면 3층 규모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6개의 다양한 층위가 존재하고, 그 안에 공연장, 카페, 북라운지, 소규모 워크숍 공간이 스며들어 있다. 이는 규정을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법이 의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공간을 입체적으로 활용한 사례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해당 건물은 경관심의에서 ‘외부 노출이 과도하다’, ‘선큰 가든이 안전하지 않다’, ‘건축물 규모에 비해 프로그램이 복잡해 주변과 이질적이다’는 이유로 심의 반려를 두 차례 겪었다. 심의는 법이 아니다. 그러나 그 어떤 조항보다도 강력한 설계 결정권을 쥐고 있다. 결국 이 프로젝트도 옥상정원은 녹화비율의 기준만 충족하는 수동적 정원으로 바뀌었고, 선큰은 절반 이상 메워졌다. 법은 허용했지만, 제도가 허용하지 않은 건축이었다.


건축에서 ‘법’은 보통 명문화된 규칙을 뜻하지만, 실제 실무에서 더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은 ‘심의’나 ‘관행’이다. 예를 들어, 법적으로는 허용되는 계획도 “지자체의 내부 해석”이나 “심의 위원의 판단”에 따라 전면 반려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많은 건축가들이 “법을 지켰지만 설계가 통과되지 않는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한 건축가는 작은 근린생활시설을 설계하며, 입면의 일부를 자연석과 유리로 구성해 마치 돌이 떠 있는 듯한 시각적 연출을 하려 했다. 구조적으로는 충분히 검토되었고, 안전에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도시디자인심의에서 ‘주변과의 조화’라는 이유로 “과도한 재료 사용”이라는 지적을 받고 원안을 철회했다. 또 다른 사례로, 건축사가 아닌 일반 시민이 낸 설계 아이디어 공모전에서 1등을 수상한 작품이 실제 설계 적용 단계에서 ‘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전면 무산된 일도 있었다. 아이디어는 훌륭했지만, 그 안에는 법의 제한을 전제로 하지 않은 자유로운 공간 구성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건축사의 손으로 도면화되려는 순간 '가능했던 상상'은 '불가능한 현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묻는다.


“법 안에서도 창의성이 가능하다”는 말은, 실제로 어디까지를 뜻하는가?


설계자는 점점 ‘할 수 있는 것’만 시도하게 되고, 도시는 그 반복 속에서 익숙한 형식을 반복하게 된다.


제도와 창의성이 공존한 것처럼 보이는 일부 사례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 대부분은 특수한 조건이 우연히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했던 예외적인 경우였다. 설계자의 높은 이해도, 건축주의 양해, 공무원의 유연한 해석, 심의위원회의 협조, 그리고 충분한 시간과 예산. 이 모든 것이 겹쳐야만 법의 틈을 비집고 새로운 건축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조건은 현실의 대부분 프로젝트에서는 충족되기 어렵다. 대부분의 건축주는 빠른 인허가를 원하고, 설계자는 시간에 쫓기며, 시공자는 위험 부담을 회피하려 한다. 지자체는 전례를 우선시하며, 심의는 보수적으로 운영된다. 이런 상황에서 창의적인 설계를 한다는 것은, 거의 법적 한계에 맞서 설득하고 타협하며 전쟁을 치르는 일에 가깝다.


결국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이런 구조 안에서, 도대체 왜 창의적인 시도를 해야 하는가?
불가능이 거의 예정되어 있는 공간 실험에, 왜 건축가는 자꾸 도전하려는가?


건축은 사회를 설계하는 가장 구체적인 도구이자, 가장 일상적인 예술이다. 모두가 규정을 따르고, 가장 효율적인 정답만을 따라간다면, 도시에는 기능은 하되 감동은 없는 구조물들만 남게 된다. 창의적 설계는 기능을 거스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능을 넘어서는 사람의 경험을 설계하는 일이다. 지금 당장은 실패할 수 있다. 인허가에서 반려될 수도 있고, 구조에서 거부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실패의 과정 자체가 누군가에겐 이후의 전례가 될 수 있다. “이전에 이런 시도가 있었고, 일부는 통과되었다”는 기록이 생기는 순간, 그 다음 세대의 건축가들은 조금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


법은 스스로 진화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경계선을 밀어야 한다. 그리고 그 경계는, 수많은 건축가들이 반복적으로 밀어붙인 자국 위에서 조금씩 물러난다. 오늘 우리가 법을 향해 질문하고, 해석하고, 도전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건축은 지금보다 훨씬 더 경직되고 무력한 모습일지도 모른다.창의성을 시도한다는 것은 결과를 보장받지 않는 도전이다. 그러나 그 도전은, 결국 건축이라는 언어가 더 많은 감정과 삶의 가능성을 품을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다.


5-3. 조항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가

: 현실의 문제를 담지 못하는 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건축법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건축물의 안전과 기능을 확보하며, 미관을 향상시키고, 건전한 건축문화를 조성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법률이 가진 명분은 항상 바르다. 그 안에는 위험을 방지하려는 선의, 공공의 이익을 지키려는 정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합리성이 담겨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명분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 건축을 둘러싼 사회는 급변하고, 사용자들의 요구는 다양해지며, 기술과 재료는 매년 진화하는데, 법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 ‘갭’ 현실과 조항 사이의 간극은 점점 커지고 있다.


많은 법 조항은 현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현실을 추상화한 ‘모델’**을 전제로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공동주택의 세대당 주차대수는 0.7대 이상 확보해야 한다”는 조항은 ‘1가구 1차량’이라는 시대의 인식, 또는 ‘출퇴근을 차량으로 하는 평균적인 도시 구조’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서울 도심의 청년주택, 고령자 단지, 코하우징, 주거 공유 플랫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주거형태는 그 전제를 벗어난다. 청년 1인 가구가 80% 이상인 도시형 생활주택에서, 굳이 0.7대의 주차 공간을 확보해야 할까?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은 거주자들에게 그 공간은 쓸모 없는 ‘규정의 낭비’다. 반면, 다자녀 가구가 많은 외곽 신도시에서는 1.5대도 모자란 경우가 흔하다.


법은 ‘현실 전체’를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과거 평균값’의 인식을 고정해두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또 다른 예로, “거실과 주방은 각각 창을 통해 자연채광이 가능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이 기준은 자연광의 중요성을 반영한 좋은 취지의 기준이다. 그러나 협소한 부지에서 세대수를 늘리기 위해서는 ‘가구당 창 하나’ 이상의 구성이 필수인데, 이는 사선제한, 일조권, 이격거리 기준과 충돌해 사실상 채광기준을 맞추기 위해 전체 평면이 왜곡된다. 결국 그 결과는 비효율적인 실내구조, 비정상적인 서비스면적, 그리고 의미 없는 외부 발코니의 양산이다. 이처럼 법은 현실을 바꾸기보다는 현실을 왜곡하도록 유도한다. 건축가는 기준을 맞추기 위해 공간을 짜맞추고, 시공자는 최저기준만 충족한 재료를 사용하며, 사용자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살아간다.


건축법을 공부하는 학생에게 한 교수가 말했다. “법은 위반하지 않기 위해 배우는 게 아니라, 어떻게 피해갈지를 알기 위해 배우는 거야.” 이 말은 냉소적으로 들리지만, 실무에서 그 말은 현실이었다. 현행 건축 제도는 종종 '지키는 법'이 아니라 '걸리지 않는 법'으로 작동한다. 예컨대, 건폐율과 용적률을 맞추기 위해 발코니를 불투명 유리로 감싸 ‘확장 불가’ 구조로 제출한 뒤, 실제로는 입주 후 모두 유리창으로 전환하는 방식은 법적으로는 위법이나, 행정적으로는 사후관리의 의지와 인력이 부족해 묵인된다.


또 다른 사례는 옥상 공간의 편법 활용이다. 옥상은 대피 공간, 기계실, 관리실 용도로 계획되었으나, 실제로는 불법 중축, 개인 창고, 간이 다락방, 텃밭, 미인가 숙소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다. 그 공간들은 종종 불법이라기보다, 법이 그 용도를 미처 상상하지 못했거나, 공식적으로 허용해줄 구조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법이 되는 경우다.


결국 우리는 현실이 법을 거스르는 게 아니라, 법이 현실을 외면한 결과로 불법이 양산되고 있는 것을 본다.
이 불일치는 누가 감당하고 있는가? 설계자와 시공자는 법의 범위 내에서 최소한의 형식만을 수행하고,
그로 인해 만들어진 애매한 공간은 사용자에게 전가된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실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작 법이 보호하지 못한 상태로 살아간다.


형식은 본래 본질을 담는 그릇이어야 한다. 그러나 법이 본질보다 형식을 우선하게 되면, 그 형식은 본질을 왜곡하는 도구가 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일조권 사선제한이다. 일조권은 햇볕을 확보하고, 인접 건물의 조망과 쾌적함을 보장하기 위한 기준이다. 그러나 이 기준은 단순히 ‘사선의 각도’로 정량화되어 적용된다. 문제는 그 각도가 모든 대지 조건, 지역 특성, 도시 맥락을 무시한 채 일률적으로 적용된다는 점이다. 결과는 명확하다. 디자인적으로는 아무런 의미 없는 사선 잘린 건물들, 옥상 공간의 활용도가 떨어지는 비효율적 구조, 건물 간 간격은 확보되었지만 그 틈이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는 죽은 공간으로 남는다. 이러한 건축적 형식은 도시를 기계처럼 잘라내고, 창의성과 감정, 사용자 중심의 공간 경험을 점점 지워버린다.


건축은 생명을 담는 그릇이어야 한다. 그 생명은 ‘지어지는 순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반응하고, 변화하고, 해석되어야 하는 감각이다. 그런데 지금의 제도는 ‘허가’라는 한순간만을 통과하면, 그 이후를 묻지 않는다. 법은 존재하지만, 책임지는 이는 없다.


지금의 법은 ‘형식적으로는 문제없지만, 본질적으로는 문제 많은 건축’을 허용한다. 반면 ‘본질적으로는 훌륭하지만, 형식적으로 기준을 벗어난 건축’은 쉽게 거부당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법에게 묻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기준은 실제로 지금의 도시와 사람들을 반영하고 있는가?

해당 조항은 언제 만들어졌고,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가?

이 기준은 누구의 안전을 보장하며, 누구의 가능성을 제한하는가?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의 감각과 경험은, 법의 어디에 반영되고 있는가?

법이 보호하려는 질서는, 지금 도시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있는가, 고착시키고 있는가?

질문은 건축가만의 몫이 아니다.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 조례를 만드는 위원회, 심의를 하는 위원, 그리고 공간을 살아가는 사용자 모두가 질문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조항은 누군가의 삶을 규정하는 선이고, 누군가의 가능성을 막는 벽이며, 누군가의 선택지를 지워버리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에게 동일한 법'이 공정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건축에서 진짜 공정함은, 모두에게 똑같은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상황과 맥락에 맞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법은 ‘기준’을 제공해야 하지, ‘정답’을 강요해선 안 된다. 해석 가능한 기준은 다양한 삶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설계자에게 질문의 여지를 제공하며, 사용자에게는 자신의 삶을 반영한 공간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살아 있는 법’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변화하는 사회와 기술, 도시, 환경, 삶의 방식에 맞춰 지속적으로 갱신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지나치게 정지된 조항과, 지나치게 유연하지 못한 해석 앞에 서 있다.


건축은 늘 질문으로 시작된다.


“이 공간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곳에 어떤 감정이 머물 수 있을까?”
“사람은 여기에서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의 제도는 그 질문을 끝내기 전에, 기준을 들이민다. 질문을 묻기도 전에 답안을 요구한다.
그리고 모든 가능성을 형식에 맞춰 재단한다. 우리가 설계해야 하는 것은 공간만이 아니다. 이제는 질문을 받아들일 수 있는 법,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조항, 변화를 감당할 수 있는 기준을 함께 설계해야 한다. 그것이 현실을 반영하는 법이다. 그것이 사람을 위한 건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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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남은 이야기....


5장. 제도가 건축의 발목을 잡는다. : 법과 제도는 건축의 가능성을 어떻게 억누르는가?

- 심의는 설계를 돕고 있는가 : 심의는 건축을 품형하는 제고인가, 가로막는 제도인가?

- 허가인가, 통과인가 : 왜 허가는 점검이 아니라 생략이 되어가고 있는가?

- 공공건축과 입찰의 역설 : 제도가 탈락시키는 건축은 어떤 건축인가?

- 건축가 없는 법, 법 없는 건축가 : 제도와 실무는 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 법은 공간을 설계할 수 있는가 : 우리는 어떤 법 위에서, 어떤 공간을 설계하고 있는가?


6장. 한국 건축은 이미 증명해왔다. : 우리는 왜 좋은 건축을 반복하지 못하는가?

- 우리가 만든 건축은 세계로 갔다 : 기술은 최고지만, 왜 국내에서는 묻히는가?

- 기념비적 건축은 가능했다 : 대단한 건축은 있었지만, 왜 일상은 지켜지지 않았는가?

- 가능성은 설계에서 시작되었지만 : 왜 같은 설계자가 반복해서 기회를 갖지 못하는가?

- 기술은 준비되어 있었다 : 시스템이 없었지,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 문제는 제도가 반복을 막는 구조다 : 왜 이미 검증된 건축도 반복되지 못하는가?

- 기억되지 않는 건축 : 우리는 왜 좋은 건축을 기억하고 지켜내지 못하는가?

- 반복을 가로막는 사회 : 좋은 건축을 지속하는 문화는 왜 없는가?

- 우리가 다시 지어야 할 것은 건축만이 아니다 : 우리는 무엇을 반복해야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7장. 이제는 가능성을 설계할 차례다. : 우리는 무엇을 다시 설계하고, 무엇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가?

- 우리가 설계하지 못한 것들 : 공간은 바뀌었지만, 삶은 왜 그대로인가?

- 반복된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 우리는 어떤 구조부터 다시 짜야 하는가?

- 건축은 정치보다 먼저 사람을 설계한다 : 관계, 감정, 공감은 어떻게 설계되는가?

- 도시를 바꾸는 건 법이 아니라 감각이다 : 공감은 제도보다 앞서야 하지 않을까?

- 삶을 위한 건축, 권리를 위한 설계 : 공간은 어떻게 삶의 조건이 되는가?

- 예술로서의 건축은 왜 필요했는가 : 우리는 왜 여전히 건축을 아름답게 지으려 하는가?

- 감정을 설계하는 사회를 향해 : 어떤 공간이 사람을 바꾸고,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

- 가능성을 짓는 건축가 : 나는 무엇을 설계하고 싶은가, 우리는 무엇을 상상할 수 있는가?


에필로그. 감정을 품은 공간, 사람을 담은 도시 : 건축으로 우리는 어떤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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