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되지 않은 사회 Chapter 5 Part4~8

공간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 말에 응답하고 있는가?

by 찬 용

앞의 이야기를 먼저 보고 오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설계되지 않은 사회 서론~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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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되지 않은 사회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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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되지 않은 사회 5장 part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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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제도가 건축의 발목을 잡는다. : 법과 제도는 건축의 가능성을 어떻게 억누르는가?


- 심의는 설계를 돕고 있는가 : 심의는 건축을 품형하는 제고인가, 가로막는 제도인가?

- 허가인가, 통과인가 : 왜 허가는 점검이 아니라 생략이 되어가고 있는가?

- 공공건축과 입찰의 역설 : 제도가 탈락시키는 건축은 어떤 건축인가?

- 건축가 없는 법, 법 없는 건축가 : 제도와 실무는 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 법은 공간을 설계할 수 있는가 : 우리는 어떤 법 위에서, 어떤 공간을 설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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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심의는 설계를 돕고 있는가

: 심의는 건축을 품형하는 제고인가, 가로막는 제도인가?


심의는 건축을 더 나은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건축사가 도면을 그리면, 그것이 안전한지, 주변 맥락에 적절한지, 미관에 해가 되지 않는지를 검토하는 장치. 제도의 의도는 옳았다. 하지만 지금의 심의는 설계를 ‘돕는’ 제도가 아니라, ‘제한하고 지시하는’ 구조가 되었다. 건축가는 도면을 그리기 전에, 먼저 심의위원이 좋아할 만한 입면을 예측한다. 색상은 무채색으로, 형태는 각을 줄이고, 재료는 튀지 않게. 창의성과 감정은 줄어들고, ‘반려되지 않을 것’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쯤 되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심의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설계를 위한 것인가?

행정을 위한 것인가?


심의제도의 출발은 건축이 사회와 도시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지구단위계획구역, 경관지구, 문화재 보호지역, 공공시설 예정지, 개발행위허가 대상지 등 도시와 환경에 민감한 구역에 들어가는 건축물에 대해 심의위원회의 검토를 거치도록 한 것은 설계자가 놓치기 쉬운 공공성이나 조화의 문제를 제도적으로 보완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과거의 난개발, 무분별한 고층화, 조악한 재료 사용 등으로 인한 도시의 미관 훼손을 막기 위해 경관심의, 공공건축심의, 건축위원회 심의 등의 제도가 등장했다. 그 출발점은 분명 필요했고 정당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제도화되고, 권한화되고, 자의적 해석이 가능해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처음엔 ‘안내자’였던 심의가, 어느 순간부터 ‘통제자’가 되었고, 이제는 심의가 허가권보다 더 무서운 결정권처럼 작동한다.


심의는 법이 아니다. 하지만 심의는 법보다 강한 힘을 가진다. 왜냐하면 ‘허가’는 법에 따라 처리되지만, ‘심의’는 사람이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판단에는 명확한 기준이 없다. 경관심의 가이드라인은 있지만, 그것은 조례나 법령과 달리 권고 수준이며, “주변 맥락과 조화될 것”, “과도한 돌출 형태는 지양”, “재료의 품질과 마감 상태 고려”와 같이 해석 여지가 넓은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모호한 기준 속에서, 심의 결과는 위원 개인의 취향, 경험, 태도, 기억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같은 재료로 같은 입면을 구성했음에도, A지역에서는 “현대적이고 간결하다”고 통과된 안이 B지역에서는 “냉랭하고 시민친화적이지 않다”며 반려된다. 심의위원 중 한 명이 말한다. “나는 돌출 창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날의 설계는 무산된다. 이쯤 되면 심의는 더 이상 ‘조율과 협의의 과정’이 아니라, ‘추측 게임’이자 ‘기준이 없는 줄서기’가 된다. 그래서 건축가는 심의를 준비할 때 ‘좋은 건축’을 고민하지 않고, ‘반려당하지 않을 건축’을 고민한다.


모든 심의가 부당한 건 아니다. 실제로 무리한 설계나 공공성 없는 형태, 재료의 하자 가능성 등이 잘 걸러지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걸러내야 할 것을 넘어서 ‘정형화된 경관’만을 강요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 예로, 한 건축가는 지구단위계획 구역 안에서 전면 도로 쪽에 노출 콘크리트 입면을 계획했다. 단순하고 절제된 감정을 담고자 했고, 조명과 음영을 활용한 디자인으로 설계했지만 심의에서는 “콘크리트는 도시 이미지에 부적절하다”는 의견으로 반려됐다. 문제는 해당 지구단위계획에는 콘크리트 사용 제한에 대한 명시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원들의 다수 의견에 따라 재료 변경이 요구되었고, 건축가는 결국 기존의 콘크리트 입면 대신 화강석 타일로 변경했다.


설계의 감정은 사라졌다. 또 다른 사례에서는, 1층 개방감을 살리기 위해 매스를 띄우고 필로티를 형성한 안이 “인근 상가의 통일감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반려되었다. 그 건축가는 주변을 분석해, 오히려 단절된 가로 환경을 해소하려는 의도로 설계했지만, 심의는 이를 “조화롭지 않다”는 모호한 이유로 막았다. 심의는 종종 '설계자의 의도'보다 '위원회의 관성'을 택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많이 사라지는 것은 창의성, 그리고 감정이다. 설계자는 자신의 언어를 지우고, 심의에 맞는 언어로 도면을 다시 그린다. 건축은 이 과정을 통해 점점 무색해진다.


심의는 위원회의 이름으로 내려지지만, 실제로는 몇몇 위원의 개인적 판단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소규모 건축, 민간 건축의 경우, 위원 전원이 깊이 있는 논의를 하기보다 대표 위원이나 전담 위원의 발언에 따라 분위기가 정리되는 구조를 띠게 된다. 문제는 이 심의위원들이 항상 ‘설계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위원회는 행정, 구조, 토목, 조경, 도시계획, 법률 등 다양한 전문가들로 구성되며, 이 중 실제로 건축설계를 수행해 본 사람은 절반도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조차도 실무를 오래 떠난 교수거나, 기성세대의 관행에 익숙한 설계자일 수 있다.그 결과, 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띤다.


새로운 시도에 대한 방어적 태도

“선례 없음”을 이유로 반려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추상적 우려 제시

자신의 경험 안에서만 판단하려는 보수성


설계자는 심의위원의 취향을 모른다. 하지만 그 취향은 설계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이것이 지금 한국 건축 심의의 구조다. 심의는 아무리 형식적이라도 행정의 일부다. 그리고 행정은 ‘문제를 만들지 않는 것’을 1순위로 둔다. 그렇기에 심의는 “통과되었는데 문제가 생기는 경우”를 가장 두려워하고, 그 결과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는 건축”은 미리 반려하는 식의 판단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보신주의 심의의 본질이다. 이 구조 안에서 위원은 다음과 같이 행동한다:


“기준상 가능하긴 한데, 혹시 모르니 재검토해 보시죠.”

“주민 민원이 생길 수 있으니, 무난한 방식으로 바꾸시죠.”

“통과시키기엔 과하네요. 조금만 다듬어 오세요.”


이 말들은 모두 직접적인 거부가 아니라, 회피의 언어다. 누군가 책임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심의는 설계자의 손에 ‘수정’을 맡기고 뒤로 물러난다. 가장 치명적인 점은, 이러한 보신주의가 건축가의 상상력을 사전에 검열하는 구조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설계자는 그 검열을 예상하여 무난하고, 익숙하고, 반려되지 않을 안을 처음부터 만든다. 그러면서도 늘 “심의에 맞게 다시 다듬을 준비”를 한다. 이러한 관행은 결과적으로 모든 건축을 평균값으로 수렴시킨다. 그리고 도시는, 평균만 모인 장소가 되어간다.


설계자에게 있어 가장 무서운 것은 심의에서의 반려 통보가 아니다. 진짜 무서운 것은, 심의를 여러 번 경험한 뒤 처음부터 질문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다. “이건 통과가 안 될 거야.” “이렇게 했다간 괜히 시간만 낭비되겠지.” “위원회는 이런 걸 싫어하잖아.” 이런 생각이 머리에 먼저 떠오르는 순간, 건축가는 도면 위에서 스스로의 질문을 지운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심의에 맞는 ‘도식적인 설계’가 놓인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건축은 기준에는 완벽하지만, 감정이 없다. 창의적인 흐름도 없고, 공간이 품어야 할 맥락도 잘려나간다. 심의를 통과한 도면은 안전하지만, 사람을 품진 않는다.


심의가 반복될수록 설계자는 ‘최대한의 자유’가 아닌 ‘최소한의 허용’을 목표로 하게 된다. 어느 지자체에서든 무난하게 통과되는 입면, 색상은 흰색·회색·은색 중 택1, 타일이나 금속패널의 패턴은 대각선이나 유기적 곡선이 아닌 직선과 정방형. 이러한 패턴은 점차 하나의 관성이 되어 도시를 덮는다. 심의의 기준은 지역적 특성에 따라 달라야 하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한 가지 안전한 형태로 수렴된다. 그 결과, 도시는 닮아간다. 마치 한 회사가 납품한 도면을 바탕으로 찍어낸 것처럼. 이것은 설계의 실패가 아니라, 제도가 상상력을 억누른 결과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제도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우리는 심의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짜 의미 있는 심의, 좋은 건축을 위한 협의의 과정으로서의 심의는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의 방식은 설계를 평가하는 구조가 아니라, 수정 지시하는 구조다. 그리고 그 수정은 설계를 돕지 않는다. 바뀌기 위해선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


먼저, 심의의 책임성과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위원 개인의 취향에 따라 설계의 방향이 좌우되지 않도록, 위원회 명의의 공식적인 심의 사유가 구체적으로 작성되어야 하고, 결과와 판단의 근거가 기록으로 남아야 한다. 회의록은 실명으로 관리되거나, 최소한 녹취 또는 요약이 설계자에게 공유되어야 한다. 그래야 설계자는 심의 결과를 '해석'이 아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심의 기준은 보다 정비되어야 한다. 자의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이드라인은 해석의 폭을 좁히고, 추상적 가치보다 지역별, 도시별로 구체화된 기준이 제시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과도한 돌출은 지양"이라는 문장은 설계자의 시도를 차단할 뿐 아니라, 반려의 근거로 자의적으로 활용되기 쉽다. 경관은 지역성과 맥락을 담아야 하는데, 기준이 일률적이면 도시도, 건축도 복제된다.


건축가의 의도를 존중하는 구조도 마련되어야 한다. 설계자는 왜 그런 도면을 작성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심의는 그것을 듣고 판단해야 한다. 지금처럼 형식적 발표와 제한된 설명만으로 결정을 내리는 구조는 합의가 아닌 일방적 통보다. 더 나아가 사전 협의 구조가 활성화되어야 반복적인 수정과 반려를 줄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반려 이후 재심의를 받을 때는 '무엇이 개선되었는가'를 평가할 수 있는 피드백 시스템이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심의는 고통이 아닌, 개선의 과정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변화 없이, 심의는 앞으로도 설계자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구조로 남을 것이다. 도시의 감정은 심의의 판단 속에서 무뎌지고, 건축은 승인받기 위한 구조물이 되어갈 것이다. 심의가 설계를 품을 수 있으려면, 먼저 설계를 이해해야 하고, 건축의 언어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건축을, 또 하나의 감정을, 또 하나의 도시의 표정을 잃게 될 것이다.


5-5 허가인가, 통과인가

: 왜 허가는 점검이 아니라 생략이 되어가고 있는가?


건축을 처음 배울 때, 허가란 ‘공공의 기준을 통과했음을 입증하는 절차’라 배운다. 법적으로 정해진 형식과 기준에 따라 설계된 도면이 적절한지 검토받고, 도시는 그 건축물로 인해 해를 입지 않으며, 그 건축물이 도시라는 구조물 위에 합법적으로 놓일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과정.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실무를 경험할수록, 허가라는 단어는 더 이상 ‘검토’나 ‘승인’이라는 말과는 멀어지고, 단지 행정적으로 ‘서류가 완비되었는가’, ‘양식이 맞는가’를 확인하는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변해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건축 허가의 본질은 ‘검토’다. 설계도면이 건축법, 주차장법, 소방법, 장애인법 등 관련 법령을 모두 충족하고 있는지, 도시계획상 해당 대지에 적합한 건축인지, 그리고 구조, 환경, 공공성 측면에서 결함이나 위험 요소가 없는지를 사전에 검토해 승인하는 것이 원래의 목적이다. 그러나 지금의 건축 허가는 그 ‘검토’가 실제로 이루어지는지를 장담하기 어렵다. 기계적으로 분장된 검토 업무, 관할 공무원의 과중한 민원 부담, 검토자의 실질적 재량보다 서류상의 완결성과 형식적 정합성만을 요구하는 시스템. 결과적으로 허가란 ‘도면에 문제가 없음을 증명하는 절차’가 아니라, ‘문제가 있어도 법적으로 대응 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한 보호막’이 되어간다.


실제로 허가를 받기 위한 도면은 정해진 서류 형식과 기준에 따라 작성된다. 도면에는 적산된 연면적, 바닥면적, 건폐율, 용적률, 주차대수, 배치도, 구조계획서, 방화구획, 단열계획, 채광기준표 등이 포함되어 있다.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허가를 받은 건물에서, 층고가 부족한 실내, 비효율적인 배치, 불편한 피난동선, 과도하게 절약된 단열재, 정형화된 평면, 그리고 심지어 위험하거나 붕괴된 구조까지 마주친다. 허가가 검토를 통과한 결과라면, 그 건축물은 왜 그렇게 불편하고, 왜 그렇게 자주 사고가 나는가? 그 이유는 명확하다. 허가는 실제 공간의 적정성이나 안전성을 직접적으로 검토하지 않는다. 검토 대상은 ‘설계도면’일 뿐, 그것이 어떻게 지어질 것인지, 실제로 사용자가 어떤 경험을 하게 될 것인지, 혹은 그 공간이 도시 전체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는 전혀 다뤄지지 않거나, 다룰 권한이 없다.


축 허가가 서류상의 요건을 충족했는지만 확인하는 방식으로 굳어지면서, 정작 중요한 부분들이 검토 대상에서 제외되기 시작했다. 법적으로 요구되는 규격만 맞추면, 그것이 실제 공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검토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피난 계단의 너비가 법적 최소치인 90cm 이상이면 허용된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이 밀집된 상태에서 이동할 경우, 90cm는 턱없이 부족하다. 건축주는 이 폭을 더 넓히려 하지 않는다. 이유는 명확하다. 넓히면 면적이 줄고, 수익이 줄기 때문이다. 또한, 허가도면에는 창호의 면적, 단열재의 두께, 주차장 램프의 경사도까지 다 기재되어 있지만, 그 도면이 실현 가능한 방식으로 설계되었는지, 시공 과정에서 어떤 리스크가 예상되는지는 따로 검토되지 않는다.


도면만 맞으면 된다.
도면을 믿는 것이 아니라,

도면만 보는 것이다.


허가 과정이 단지 ‘서류 점검’으로 변질되면서, 책임 구조도 분산되고 해체되었다. 검토자는 말한다. “우리는 도면만 본다. 현장은 감리 몫이다.” 감리자는 말한다. “우리는 시공만 본다. 설계가 잘못되었으면 설계자가 책임져야 한다.” 설계자는 말한다. “우리는 기준을 맞췄다. 기준을 정한 건 우리가 아니다.” 시공자는 말한다.
“우리는 도면대로 시공했을 뿐이다.” 이러한 책임의 분업화는 본질적인 검토를 무력화시킨다. 모든 사람이 ‘자기 역할’만 하면 되는 구조에서는 누구도 전체를 보지 않으며, 누구도 전면적으로 책임지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허가는 책임을 분산하는 수단이 되었고, 검토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장치’가 되었다.


서류가 빠짐없이 제출되었고, 형식이 맞고, 법적 기준을 넘기면 그 설계는 ‘허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 공간이 실제로 안전한지, 그 건물이 도시 맥락에서 조화를 이루는지,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불편하지 않게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건축은 점점 ‘허가를 위한 설계’가 되고, 허가는 점점 ‘심의를 위한 서류작업’이 되고, 결국 건축의 출발점이었던 질문은 사라진다.


“이 공간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건축은 도시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
“이 설계는 사람을 어떻게 배려하고 있는가?”


그 질문들은 더 이상 허가서류 안에는 없다.


건축 허가라는 말의 어원은 ‘허락한다’는 뜻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합당한 설계가 일정한 기준에 도달했음을 검증하고 확인하는 과정’이다. 즉, 도시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공적 승인 절차다. 허가는 사적 공간이 공적 환경과 맞닿는 접점에서, 그 설계가 사회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도시가 검토하고 동의하는 절차였다. 그런데 지금의 허가는 어떤가? 그 공간이 정말 사람을 배려하고 있는지, 그 설계가 사회적 갈등이나 환경적 부담을 야기하지는 않는지, 그것이 이 도시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본질적 질문 없이, 오직 ‘기준 충족 여부’만으로 그 과정을 대신하고 있다. 기준은 최소한이지, 충분함이 아니다. 기준을 지켰다고 해서 좋은 건축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준을 충족했기 때문에 허가가 나간다는 말은, 기준을 넘어서는 고민은 제도의 관심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법적 기준은 존재한다. 층수, 면적, 경사도, 이격거리, 주차대수, 내진설계 등 다양한 조항이 설계 도면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문제는 그 기준의 충족 여부만이 허가의 전부가 되어버린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공동주택의 발코니 면적이 기준을 넘지 않았다고 해서, 그 발코니가 실제로 햇빛이 잘 들고, 사용하기 편리하며, 프라이버시를 보호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보장은 없다. 주차장 진입 경사도가 1:8을 만족했다고 해서, 그 진입이 실제로 차량 충돌이나 안전사고의 위험이 없는지는 검토되지 않는다. 법은 형식을 보장할 뿐, 공간의 질이나 맥락은 판단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의 허가 제도는, 그 형식만을 보기로 타협한 상태다.


이제 우리는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의 건축 허가는 무엇을 통과시키고 있는가? 우리는 잘 짜인 평면이 아니라, 기준에 맞춘 평면을 통과시키고 있고, 사람을 위한 구조가 아니라, 숫자에 맞는 구조를 통과시키고 있으며, 도시의 리듬을 고려한 입면이 아니라, 심의를 통과한 표면을 승인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건축은 도시 안에 놓여진다. 마치 점검된 것처럼. 마치 검토가 끝난 것처럼. 하지만 정작 점검되지 않은 것은, 공간의 숨결, 사용자의 경험, 건축의 감정이다.


지금의 건축 허가는 점점 더 단순한 통과 절차로 기능하고 있다. 기준에 맞는지만 확인하면 된다. 그 이상은 묻지 않는다. 하지만 도시가 진짜 살아있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다시 허가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그 공간이 실제로 사람을 위한 것인지, 도시의 맥락을 존중하고 있는지, 공공성, 안전성, 감정적 배려가 담겨 있는지를 묻는 ‘실질적 검토’가 돌아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변화가 필요하다.


첫째, 허가 검토의 목적이 단순한 ‘형식의 확인’이 아니라 ‘설계의 맥락에 대한 이해와 판단’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법적 기준은 최소 조건일 뿐, 공간을 평가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검토자의 역할이 ‘서류 점검자’가 아니라 설계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는 동료 전문가로 전환되어야 한다. 건축은 기술과 감정, 맥락과 구조가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이다. 그것을 검토하려면, 단지 숫자를 확인하는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셋째, 설계자에게도 공간을 설명할 수 있는 구조적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설계의 의도는 문서로만 전달되지 않는다. 허가 과정에서 건축적 질문을 설명하고, 설계적 해석을 표현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검토는 공식적으로 기록되고, 이후에도 회고될 수 있는 투명한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지금처럼 ‘허가가 났으니 문제 없다’는 구조는, 문제 발생 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방패로만 작동할 뿐이다.


건축은 도시 위에 놓이는 모든 질문의 집합이다. 그 질문을 어떻게 시작했고, 어떤 맥락에서 구상했으며, 누구를 위해 만들었고, 어떤 감정을 품게 하고자 했는지를 허가는 마땅히 묻고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저 제출된 양식에 숫자를 채우고, 사인과 도장을 찍는 일에 익숙해졌다. 설계자는 허가만 나면 된다고 생각하고, 도시는 그 허가된 건축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된다. 그 사이에서 사라지는 것은 건축의 책임, 도시의 감정, 사람의 경험이다. 허가는 절차가 아니라 판단이어야 한다. 허가는 행정이 아니라 설계의 일부여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허가는 '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되어야 하는가'를 묻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 질문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결국 ‘허가된 실패’를 도시 곳곳에 남기게 될 것이다.


5-6 공공건축과 입찰의 역설

: 제도가 탈락시키는 건축은 어떤 건축인가?


공공건축이란 말은 듣기만 해도 뭔가 따뜻해야 할 것 같다. 공공, 즉 모두를 위한 공간이라는 말이니까. 누구나 사용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그래서 사회적 약자를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을 배려한 공간이 되어야 할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상하다. 현실의 공공건축은 대체로 그렇지 않다. 너무 복잡하거나 너무 심심하고, 어디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단순함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표준화로 가득하다. 마치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게 만드는 것'이 공공성을 담보하는 길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것은 건축가의 무능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공공건축에 참여하는 건축가는 대개 신중하고, 진심 어린 고민을 거쳐 설계한다. 문제는 그들의 진심이 발현되기도 전에 좌절된다는 데 있다. 바로, 입찰이라는 제도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공공건축 설계를 수주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가격 입찰이다. 설계비를 기준으로 최저가를 제출한 업체가 선정되거나, 기술과 가격을 합산 평가해 결정한다. 이 구조는 단순히 공정한 경쟁을 유도하는 장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건축 설계의 질을 결정짓는 요소를 애초에 배제하는 제도다. 왜냐하면, 건축 설계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땅에 어떤 건물을 지을지, 그 건물이 어떻게 사람의 동선을 이끌고, 어떻게 도시와 관계 맺고, 어떻게 사회적 약자를 배려할지를 결정하는 설계는 본질적으로 정성적인 작업이다. 그런 설계를 숫자로 경쟁하게 만든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순이다. 입찰에서 이기기 위해 건축가들은 견적을 낮춰야 한다. 그 낮은 비용에 맞추기 위해 설계 기간을 줄이고, 인력을 줄이고, 재료의 질을 조정해야 한다. 그 결과, 감정과 맥락을 고려할 여유는 사라진다. 비슷한 도면, 비슷한 계획, 비슷한 건축물이 복사 붙여넣기 되듯 반복된다.


공공건축은

더 싸고,

더 단순하고,

더 익숙한 방향으로 수렴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공공은, 더 이상 모두의 것이 아니라 '아무도 관심 없는 것'이 되어간다.


입찰 외에도 또 하나 공공건축의 현실을 왜곡시키는 요소는 실적 중심의 평가 방식이다. 과거 공공 프로젝트를 얼마나 수행했는지, 수주 규모는 어땠는지, 대기업 참여 이력은 있는지. 이런 지표들이 새로운 프로젝트의 평가 기준이 된다. 이 구조 안에서는 젊고 실험적인 건축가, 혁신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작은 사무소가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다. 물론 실적은 일정 부분 신뢰의 지표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참고자료일 뿐이지, 창의성과 감정, 도시를 새롭게 읽어내는 능력을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적은 평가표에서 가장 많은 배점을 차지한다. 누가 '더 많은 일을 했는가'가 아니라, '누가 더 나은 설계를 제안하는가'를 물어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언제부터 실적이 곧 실력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 걸까? 공공건축의 목표는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필요한 공간을 제공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담아내며,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있다. 그런데 그 공간이 만들어지는 방식은 경쟁과 효율, 실적과 가격이라는 경제 논리로만 굴러간다. 공공의 이름 아래 만들어진 공간에서 정작 공공성이 실종되고 있는 것이다.


입찰 방식의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설계공모다. 동일한 과제에 대해 다양한 건축가들이 아이디어를 제출하고, 그중 가장 우수한 계획안을 선정해 설계권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이론상으로는 좋은 건축을 발굴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구조다. 그러나 이 제도 역시 현실에서는 많은 문제점을 드러낸다. 첫째, 실현 가능성보다 '심사자에게 눈에 띄는 안'이 선정되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 공모 당선이 되더라도, 이후 계약 과정에서 설계비가 감액되거나, 계획안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본래의 취지가 사라지는 일이 많다. 게다가 공모 자체가 기획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주되는 경우, 건축가는 어떤 도시적 맥락도 공유받지 못한 채 '예쁘고 특별한 도면'을 제출해야만 한다. 심사는 주관적이고, 평가기준은 불명확하다. 결국 다시 한 번, 누가 더 잘 보이는지를 겨루는 형식으로 퇴행하는 것이다.


이런 구조에서 탈락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건축의 감정이다.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고, 기억에 남으며, 공동체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건축은 구조적으로 선정되기 어렵다. 비용이 많이 들고, 시간이 걸리고, 때로는 낯설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건축은 원래 그렇다. 설명이 필요하고, 맥락을 읽어야 하고, 설계자의 의도를 이해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의 제도는 빠르게 평가하고, 간단히 판단하며, 바로 통과시킬 수 있는 안만을 원한다. 그래서 탈락한다.


진짜 좋은 건축이,

진짜 건축을 하고 싶은 건축가가,

그리고 결국엔 도시가.


공공건축은 단순한 기능의 건물이 아니라, 도시가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어야 한다. '우리는 이 지역에 어떤 감정을 공유하길 원하는가?', '이 공간은 누구의 기억을 품고자 하는가?', '건축은 사회의 어떤 목소리를 담고 있는가?' 입찰이라는 제도는 이러한 질문을 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것은 가격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구조이며, 감정이나 맥락을 평가하기 위한 구조가 아니다. 그저 평가표, 점수, 실적, 서류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감정은 사치고, 창의성은 불안요소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도시를 바꾸는 건 숫자가 아니라 이야기가 있다는 걸. 삶을 바꾸는 건 매뉴얼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걸.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건축가의 열정이 아니라 제도의 전환이다. 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공공건축은 언제나 가장 감정 없는 건축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감정 없는 도시다. 공공건축이 진짜 공공의 것이 되기 위해선, 입찰은 다시 질문을 품어야 한다. 그 질문이 '얼마에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왜 그렇게 설계했는가?'가 되어야 한다. 평가표가 아니라 설계의 맥락을, 실적이 아니라 건축가의 의도를 읽는 제도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제도가 탈락시키던 건축을 다시 되살릴 수 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도시가 감정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5-7 건축가 없는 법, 법 없는 건축가

: 제도와 실무는 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대한민국에서 건축은 분명히 제도 위에서 작동한다. 건축법, 주차장법, 소방법, 장애인편의법, 에너지절약설계기준, 개발행위허가 기준, 그리고 각 지자체의 조례와 지침들까지. 설계자는 수십 개의 규정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고, 이 규정들은 단지 설계의 조건이 아니라 설계의 방향을 결정하는 힘을 가진다. 그러나 정작 그 법과 기준을 만든 사람 중에는 실제로 설계를 해 본 이가 드물고, 설계 현장의 논리와 구조를 아는 이는 거의 없다. 반대로, 실무를 하는 건축가들 중에서도 법의 전체 구조를 이해하고, 그것의 입법 목적과 해석 범위를 숙지한 이들은 많지 않다. 제도는 실무를 오해하고, 실무는 제도를 낯설어한다.


현장의 건축가들은 흔히 말한다. "이 규정은 현실을 모르고 만든 것 같다"고. 실제로 많은 기준은 관념적인 정의나 과거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져와 현재의 도시와 공간을 재단한다. 예를 들어, 일부 조례에서는 여전히 도로와의 이격 거리나 건축물의 형태를 경직된 기준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 기준들이 만들어진 배경은 주로 경관 보호나 안전 확보를 위한 것이었지만, 기술과 도시의 밀도,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바뀐 지금, 오히려 그 기준이 창의적인 설계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는 경우가 많다. 건축가는 대안을 제시하고 싶어도, 법은 그 대안이 '전례 없음'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창의적인 건축은 제도에 의해 사라지고, 남는 것은 무난하고 표준화된 설계다. 마치 제도의 목적이 도시를 다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도시를 동일하게 만드는 것인 양.

법은 명확성과 형평성을 위해 존재하지만,

그 법이 현실을 반영하지 않거나 새로운 가능성을 차단할 때,


그것은 사회적 퇴행이다.


하지만 이 모든 책임을 제도에만 돌릴 수는 없다. 현장의 건축가들도 법을 도식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이건 안 돼요", "이건 이렇게 해야 해요" 같은 말은 종종 관행과 요령에 기반한 것일 뿐, 실제 법령의 조문이나 해석에 기반한 판단이 아닌 경우도 많다. 어떤 경우에는, 설계자가 오히려 법보다 더 보수적으로 스스로를 제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건폐율, 용적률, 높이 제한 등이 적용되는 방식은 해석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계적으로 '이건 불가'라고 판단함으로써 실제 가능했던 설계 대안을 스스로 포기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또한 실무자들이 법령의 해석이나 변경 가능성에 대해 거의 접근하지 않기 때문에, 제도와의 간극은 계속해서 벌어진다. 법령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것이며, 그 변화의 출발점은 실무자의 문제제기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를 제기하는 대신, 대부분은 "원래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태도에 머무른다. 이것은 제도와 실무의 대화 단절을 고착시키는 가장 큰 원인이다.


제도를 만드는 입법자와 해석하는 공무원, 그리고 그것을 적용하는 설계자 사이에는 '공감'이 없다. 서로의 언어를 모르고, 서로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며, 무엇보다도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다. 공무원은 설계자의 말을 믿지 않고, 설계자는 공무원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법령은 가이드라인이 아니라 벽이 되고, 규정은 창의성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이 단절은 종종 시간과 비용의 문제로 직결된다. 설계가 끝난 뒤 착공 전 심의나 인허가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설계는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거나 대폭 수정된다. 이때 실무자는 제도를 탓하고, 제도는 실무자의 무지를 탓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근본적인 구조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결국 남는 것은 지친 건축가, 관성적인 심의, 그리고 변화 없는 도시다.


제도와 실무는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까? 첫째, 제도를 만드는 과정에 현장 실무자의 목소리가 반드시 반영되어야 한다. 각종 위원회나 법령 개정 과정에서 실무자 출신의 전문가, 특히 실제 설계를 수행해 본 경험이 있는 건축가가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만 법은 현실을 담을 수 있다. 둘째, 실무자들은 법령 해석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단순히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필요한 경우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건축 교육 과정에서 법과 제도의 구조에 대한 이해를 체계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설계는 더 이상 단지 '도면을 그리는 일'이 아니라, 제도와 현실 사이의 조율 능력을 포함해야 한다. 셋째, 행정은 해석의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법령은 해석의 여지가 있으며, 그 여지를 도시와 시민을 위한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용기와 판단력이 필요하다. 법을 지키되, 도시를 죽이지 않는 방식으로 말이다.


법은 사람이 만들고, 건축도 사람이 만든다. 그렇다면 결국 도시를 만드는 것은 제도도 아니고 실무도 아닌, 사람이다. 우리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제도는 건축을 가로막는 장벽이 아니라, 건축을 가능하게 하는 뼈대가 될 수 있다. 건축가 없는 법, 법 없는 건축가. 이 단절을 해소할 때, 우리는 비로소 도시를 다시 설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도시는 사람을 위한, 감정을 담은, 더 나은 공간이 될 것이다.


5-8 공간을 설계할 수 있는가

: 우리는 어떤 법 위에서, 어떤 공간을 설계하고 있는가?


법은 공간을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하지만 법은 분명히 공간을 설계한다. 건축법은 대지 안에 들어설 수 있는 건축물의 높이와 면적, 위치와 용도를 규정한다. 주차장법은 건물의 지하에 몇 대의 차량을 수용해야 하는지를 정하고, 소방법은 출입구의 너비와 피난계단의 위치를 정한다. 장애인편의법은 경사로의 각도를 명시하고, 에너지절약설계기준은 창문의 면적과 단열 성능을 제어한다. 이 모든 것들이 모이면, 결국 한 건축물의 배치와 형태, 공간의 흐름은 이미 법에 의해 윤곽이 잡혀 있는 셈이다. 설계자는 백지를 들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수많은 선이 그어져 있는 종이 위에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법 위에서 건축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법령 조항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이 가지고 있는 철학과 전제를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지금의 법은 어떤 공간을 전제하고 있으며, 어떤 도시를 지향하고 있을까? 더 나아가, 이 법은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과 가치를 담아내고 있는가?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다시 고민해야 한다.


법은 정말 공간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가?


현재 한국의 건축 관련 법령은 대체로 기능적이고 안전 중심의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재해 예방, 교통의 원활함, 도시 미관, 에너지 효율, 장애인의 이동권 확보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한 것은 분명 긍정적이다. 하지만 이 법들이 설계하는 공간은 철저히 기능의 언어로만 기술되어 있다. 다시 말해, 법이 상정하는 공간은


'사용 가능해야 하고',

'문제가 없어야 하며',

'누구에게도 해가 되어서는 안 되는'


공간이다.


그렇다 보니 정작 중요한 질문, 즉 '이 공간은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가?', '사람들은 이 공간에서 어떤 기억을 만들게 될까?', '이 장소가 도시에 어떤 서사를 더할 수 있을까?'와 같은 문제는 법의 고려 대상에서 빠져 있다. 예를 들어, 복도는 1.2미터 이상 확보되어야 한다는 조항은 있지만, 그 복도가 사람을 따뜻하게 맞이하는가, 혹은 너무 길어 불안감을 주는가는 법의 관심 밖이다. 창문은 일정 이상의 면적을 가져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그 창이 보여주는 풍경이 삶에 어떤 울림을 주는지는 고려되지 않는다.


법은 공간을 '가능한 구조'로 만들지만, 그 공간이 '좋은 장소'가 되도록 만들지는 않는다. 법은 '안전한 건물'을 보장할 수는 있어도, '감동적인 건축'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결국 설계자는 법의 틀 안에서 감정과 기억을 설계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으며, 때로는 그 틀이 감정을 담기에는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많은 건축 규정은 과거의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예를 들어, 건폐율과 용적률은 과도한 밀집을 방지하고, 조망권이나 일조권은 과거의 고밀 아파트 단지들에서 벌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법들이 만들어진 배경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법은 여전히 현재의 도시를 지배한다. 마치 도시가 변하지 않았다는 듯이, 혹은 변해서는 안 된다는 듯이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건축은 과거의 도시를 반복하게 된다. 신도시가 만들어져도, 도시재생이 진행되어도, 공간의 구성은 유사하다. 법에 따라 정해진 대지 경계선, 주차장 면수, 공지 거리, 조경 면적은 창의성을 허용하지 않고, 결국 모든 도시가 닮은꼴이 되어간다. 미래의 공간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이미 법이라는 이름의 규범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도시를 상상할 수 있을까? 제도 안에서의 설계는 늘 허용된 가능성만을 탐색하게 되며, 법이 허용하지 않는 감정이나 상황은 설계의 테이블에 오르기도 전에 배제된다. 우리가 법을 통해 지키고자 했던 도시의 질서와 안전은 이제 창의성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건축가들은 법의 틀 안에서 가능한 경계를 확장해왔다. 어떤 이는 조례의 해석 범위를 넓혀 도시와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했고, 어떤 이는 최소 기준 이상의 편의시설을 제안하여 더 나은 보편성을 시도했다. 특히 일부 공공건축에서는 이른바 '선도형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제도 안에서 실험적인 시도를 이어갔다. 예컨대 한 시청사는 건폐율의 특례를 활용하여 커뮤니티 마당을 만들었고, 한 작은 도서관은 도로 이격거리의 완화 조항을 근거로 마을광장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열린 구조를 실현했다. 이들은 모두 제도 안에서 가능성을 찾아낸 사례들이며, 제도가 허용하는 최대치를 실험하는 과정이었다. 이처럼 법의 틀 안에서도 건축가는 새로운 공간적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운이 좋았을 때', 혹은 '담대한 시도를 했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 시도는 반려되거나 '전례 없음'이라는 말로 거절당한다.


이러한 예외적 성공은 오히려 현재 법제도의 경직성과 모순을 반증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좋은 설계가 언제나 법적 유연성과 해석 가능성에 기댈 수밖에 없는 구조라면, 그것은 법의 역할이 아니라 개인의 모험에 의해 건축이 좌우되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위험하다.


법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결국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법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안전과 공공성, 형평성과 투명성. 이 모든 가치는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그 가치는 건축이라는 고유의 작업, 즉 삶을 담는 공간을 설계하는 행위와 어떻게 연결되어야 할까? 법이 공간을 규정한다면, 그 규정은 단지 통제의 수단이 아니라 가능성을 여는 방식이어야 한다. 일률적 규제가 아니라 상황에 따른 해석이 가능해야 하며, 틀을 강요하기보다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법이 감정까지 설계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감정을 담을 수 있는 여지를 열어주는 것은 가능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법은 '멈추게 하는 법'이 아니라, '시작할 수 있게 하는 법'이다.


이를 위해서는 법령의 목적 자체가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 법이 규정하고 있는 수치 하나하나가 과연 지금도 유효한가? 그 기준이 생겨난 맥락과 현재 도시의 조건이 맞는가? 그 조항이 설계를 돕고 있는가, 아니면 가로막고 있는가?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법의 발전이자 도시의 진화다.


법과 건축, 그리고 시민 궁극적으로 법과 건축은 모두 시민을 위한 것이다. 법은 시민의 안전을, 건축은 시민의 삶을 책임진다. 하지만 둘 사이의 소통이 끊어지면, 시민은 더 나은 도시를 가질 수 없다. 건축가와 입안자, 행정과 실무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연결되는 순간, 법은 도시를 위한 도구가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을 설계하는 법이 아니라, 감정을 설계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법이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법 위에서, 어떤 공간을 설계하고 있는지를 다시 물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은 공간을 위해, 우리는 어떤 법을 다시 설계해야 하는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멈춰 선 도시를 다시 움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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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남은 이야기....


6장. 한국 건축은 이미 증명해왔다. : 우리는 왜 좋은 건축을 반복하지 못하는가?

- 우리가 만든 건축은 세계로 갔다 : 기술은 최고지만, 왜 국내에서는 묻히는가?

- 기념비적 건축은 가능했다 : 대단한 건축은 있었지만, 왜 일상은 지켜지지 않았는가?

- 가능성은 설계에서 시작되었지만 : 왜 같은 설계자가 반복해서 기회를 갖지 못하는가?

- 기술은 준비되어 있었다 : 시스템이 없었지,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 문제는 제도가 반복을 막는 구조다 : 왜 이미 검증된 건축도 반복되지 못하는가?

- 기억되지 않는 건축 : 우리는 왜 좋은 건축을 기억하고 지켜내지 못하는가?

- 반복을 가로막는 사회 : 좋은 건축을 지속하는 문화는 왜 없는가?

- 우리가 다시 지어야 할 것은 건축만이 아니다 : 우리는 무엇을 반복해야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7장. 이제는 가능성을 설계할 차례다. : 우리는 무엇을 다시 설계하고, 무엇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가?

- 우리가 설계하지 못한 것들 : 공간은 바뀌었지만, 삶은 왜 그대로인가?

- 반복된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 우리는 어떤 구조부터 다시 짜야 하는가?

- 건축은 정치보다 먼저 사람을 설계한다 : 관계, 감정, 공감은 어떻게 설계되는가?

- 도시를 바꾸는 건 법이 아니라 감각이다 : 공감은 제도보다 앞서야 하지 않을까?

- 삶을 위한 건축, 권리를 위한 설계 : 공간은 어떻게 삶의 조건이 되는가?

- 예술로서의 건축은 왜 필요했는가 : 우리는 왜 여전히 건축을 아름답게 지으려 하는가?

- 감정을 설계하는 사회를 향해 : 어떤 공간이 사람을 바꾸고,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

- 가능성을 짓는 건축가 : 나는 무엇을 설계하고 싶은가, 우리는 무엇을 상상할 수 있는가?


에필로그. 감정을 품은 공간, 사람을 담은 도시 : 건축으로 우리는 어떤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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