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 말에 응답하고 있는가?
앞의 이야기를 먼저 보고 오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설계되지 않은 사회 서론~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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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되지 않은 사회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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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되지 않은 사회 5장 part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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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도지 않은 사회 5장 part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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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만든 건축은 세계로 갔다 : 기술은 최고지만, 왜 국내에서는 묻히는가?
- 기념비적 건축은 가능했다 : 대단한 건축은 있었지만, 왜 일상은 지켜지지 않았는가?
- 가능성은 설계에서 시작되었지만 : 왜 같은 설계자가 반복해서 기회를 갖지 못하는가?
- 기술은 준비되어 있었다 : 시스템이 없었지,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 문제는 제도가 반복을 막는 구조다 : 왜 이미 검증된 건축도 반복되지 못하는가?
- 기억되지 않는 건축 : 우리는 왜 좋은 건축을 기억하고 지켜내지 못하는가?
- 반복을 가로막는 사회 : 좋은 건축을 지속하는 문화는 왜 없는가?
- 우리가 다시 지어야 할 것은 건축만이 아니다 : 우리는 무엇을 반복해야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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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건축은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모르거나, 애써 외면했을 뿐이다. 올림픽 주경기장과 같은 대형 국제행사 프로젝트부터, 해외의 박물관, 대학교, 리조트, 기념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건축가들이 설계한 공간은 세계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에는 유럽이나 일본, 미국 등지에서도 한국 건축의 세련된 공간 감각과 기술력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일부는 현지의 건축상이나 국제 공모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이 성과들은 단순히 '디자인이 멋졌다'는 평가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적 상황에서 끌어낸 창의적인 해석과 고밀도 도시 문맥 속에서의 문제 해결 능력이 돋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능력이 국내에서는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해외에서 환영받은 설계자들은 오히려 국내 공공 프로젝트에서 밀려났고, 세계적 경쟁력을 입증한 설계안은 국내 심사에서는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탈락하곤 했다.
마치 한국에서는
'검증된 가능성'이 아니라
'안전한 전례'가 선택되도록
제도가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외에서 극찬받은 건축가조차 국내에서는 '유명하지만 실현력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이중적인 평가 구조는 많은 젊은 건축가들에게 회의감을 심어준다.
이러한 단절의 핵심에는 제도의 경직성이 있다. 한국의 공공 발주 시스템은 입찰 자격, 설계비, 책임 구조, 심사 방식 등 거의 모든 과정이 법적 규제와 행정 절차에 의해 강하게 통제되고 있다. 표준화된 평가지표와 실적 중심의 입찰 자격 조건은 혁신보다 반복을 유도하고, 결국 참신한 건축가보다는 규정에 익숙한 업체가 선정되는 구조를 만든다. 그 결과, 세계적인 능력을 입증한 건축가도 국내에선 공공건축 설계에 참여하기 어려워지는 현실이 만들어진다.
이것은 단지 설계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좋은 건축이 반복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좋은 건축을 다시 불러낼 수 있는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프로젝트가 해외에서 호평을 받고 국내에서도 한 차례 성공적으로 완공되었더라도, 그것을 다른 맥락에서 재해석해 반복하는 구조는 없다. 오히려 같은 사람이 다시 참여하려 하면 '이미 기회가 주어진 사람'으로 분류되어 배제되거나, 해당 프로젝트는 '그때의 특별한 경우'로 치부된다. 이렇게 건축은 일회적인 성취에 머무르고, 구조적으로 축적되지 못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좋은 건축은 언제나 새롭게 '증명'되어야만 한다. 제도가 그것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누군가가 이미 입증한 설계도, 다시 낯선 안건처럼 다뤄지고, 기존에 검증된 해결책이 있음에도 또 다른 논리와 경쟁 속에서 무효화된다. 이 반복은 건축가들에게는 소모적인 일이 되고, 사회적으로는 자원의 낭비를 초래한다. 우리는 이미 해답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또 다시 '처음부터' 설득해야만 하는 구조 속에 살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국제 설계공모나 해외 수주에서 오히려 자유롭다. 공정성과 전문성에 기반한 익명 심사나 제안 중심의 경쟁 구조에서는, 그 설계가 어떤 과거 실적에 기반했는지보다는 당장의 해석과 제안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해외에서는 '가능성'에 베팅하는 구조가 작동한다. 반면, 국내는 '경험'과 '안전'을 앞세우며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을 밀어낸다. 이 차이는 단순한 행정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다. 좋은 건축을 반복할 수 있는 문화와 제도의 부재가 만든 구조적 문제다.
국내 건축가들은 종종 이중의 시선을 경험한다. 해외에서 인정받으면 ‘우리나라 사람도 할 수 있다’고 자랑스러워하면서, 정작 국내 프로젝트에는 같은 기회를 주지 않는다. 특정한 프로젝트에서 탁월한 해법을 내놓은 건축가조차도 다음 프로젝트로 이어지지 못한다. 마치 한 번의 성취는 ‘기적’으로 치부되고, 반복을 위한 시스템이나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복하려는 순간 ‘자기복제’라는 비판이 따르고, 이전의 성취는 다음 프로젝트에서 무의미하게 여겨진다.
건축이란 맥락 속에서 진화하는 작업이다. 같은 설계안이라도, 지역과 대상, 프로그램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 건축가의 디테일, 공간 구성, 물성의 조절 능력은 시간과 경험을 거쳐 발전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장려하기보다, 매번 ‘다시 처음부터’라는 태도로 설계자에게 무언의 리셋을 강요한다. 이로 인해 건축가는 자신의 성장을 사회 속에서 축적하지 못하고, 매 프로젝트마다 제로 베이스로 입증해야 하는 피로를 떠안는다.
반면, 일본이나 유럽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한 건축가가 특정 분야나 지역에서 좋은 건축을 해내면, 그다음에도 자연스럽게 연속적인 기회가 주어진다. 설계의 성과가 사회적으로 평가되고, 그것이 제도와 연결되어 다시 신뢰로 돌아온다. 이러한 신뢰 기반의 순환 구조는, 건축가의 실험이 단절되지 않도록 하고, 지역의 건축적 완성도를 점차 높이는 데 기여한다.
결국 문화도, 도시도, 이런 구조 위에서 발전해나간다.
한국은 왜 그런 구조를 갖추지 못했을까? 우리는 왜 이미 증명된 건축을 반복하지 않는가? 어쩌면 우리는 건축을 사회의 일부로 보지 않고, 프로젝트 단위의 소비재처럼 인식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건축이 사회적 자산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반복 가능하고, 발전 가능한 토양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설계를 '기획의 일부'로만 다루며, 사회적 맥락에서 건축의 누적 효과를 바라보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증명된 것’을 다시 반복하려는 의지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있는 구조를 만들지 못한 것이다. 세계로 나아간 건축, 국제무대에서 인정받은 한국 건축가들의 능력은 결코 일회적인 기적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충분히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제 사회가 그것을 반복하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찾기에 앞서, 이미 가진 것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 좋은 건축은 반복을 통해 더 나아질 수 있다. 기술도, 사람도 준비되어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과 문화뿐이다.
한국에는 대단한 건축이 있었다. 단지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 아니었을 뿐이다. 1990년대 이후, 세계적 행사와 국가적 상징을 담은 건축이 한국에도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차례 증명해왔다. 예컨대 1988년 서울올림픽 주경기장, 2000년대 월드컵 경기장, 아트선재센터, 예술의 전당, 국립현대미술관, 그리고 최근의 국립세종도서관이나 국립아시아문화전당까지. 이들은 단지 규모나 자본력 때문이 아니었다. 설계자에게 권한이 주어졌고, 사회가 건축에 집중했던 시기였다. 그 결과는 확실했다. 건축은 그 사회가 어느 수준까지 상상할 수 있는가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스스로의 작업으로 증명한 것이다.
그런 건축은 분명히 존재했다. 문제는 그것이 반복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대단한 건축은 있었지만, 그것이 우리 삶의 주변으로 흘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기념비적 건축'이라는 이름 아래 따로 분리되었고, 때때로는 ‘예외적인 사건’처럼 다뤄졌다. 사람들은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이런 공간은 '특별한 데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건축은 점점 일반의 일상에서 멀어졌다.
누구나 드나드는 동네 도서관이나 동사무소, 학교, 병원, 어린이집과는 전혀 다른 언어를 쓰는 특별한 구조물이 되어버렸다.
왜 그랬을까? 왜 우리는 좋은 건축이 ‘특별한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믿게 되었을까? 그 안에는 제도와 문화의 복합적인 작용이 있었다.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는 프로젝트에는 상대적으로 건축가의 권한이 넓게 보장되었다. 당선 이후에도 설계안이 크게 흔들리지 않았고, 심의와 행정 절차가 탄탄한 추진력을 전제로 설계의 창의성을 존중했다. 이와 달리, 일상 공간에서는 오히려 설계자의 권한은 현저히 축소되고, 기준과 행정이 우선시된다. 결과적으로, 기념비적 건축과 일상 건축 사이에는 실현 가능성, 절차, 그리고 권한의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단지 권한의 문제만은 아니다. 본질적인 차이는 ‘건축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우리는 여전히 건축을 기능의 틀 안에서만 바라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기념비적 건축에서는 도시의 상징성과 외형, 철학과 메시지를 고민하지만, 일상 건축에서는 철근량과 층수, 도면의 규격과 예산 항목이 논의의 중심이 된다. 왜 이 동사무소는 외장재가 이렇고, 왜 이 도서관에는 채광이 이 방향으로 들어오는지를 묻는 대신, 단가와 용적률이 설계의 가치를 결정짓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좋은 건축이 필요 없는 공간’이라는 말이 당연하게 들리기도 한다. 마을회관, 지구대, 어린이집, 경로당. 이 공간들이야말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장 자주 머무는 일상의 거점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가장 소홀히 다뤄지는 구조다. 공간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말하면서도, 왜 우리는 일상의 건축에 대해선 무감각한가? 건축의 감동이 예술의 영역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이중적 인식은 한국 사회가 건축을 단절적으로 다루는 주요 원인 중 하나다.
게다가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모범답안’에 집착한다. 행정의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이미 만들어본 도면을 재활용하고, 공사 과정에서의 갈등을 줄이기 위해 표준 설계를 선호한다. 이로 인해 건축은 설계의 대상이 아니라 조달의 대상이 되고, 창의성은 위험요소로 간주된다. 문제는 이 표준화된 건축이 한 번도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좋은 공간’이라는 평가를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은 여전히 그것을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반복은 기념비적 건축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 뿐이다. ‘좋은 건축은 가끔 존재한다’는 신화는 오히려 일상 속 좋은 건축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사람들은 “그런 건축은 국가 프로젝트니까 가능했지”라고 말하고, 행정은 “예산과 시간이 부족해서 저 정도는 안 돼”라고 말한다. 그렇게 기념비적 건축은 사회적으로 격리되고, 우리는 일상과 감동 사이에 깊은 골을 만든다.
그렇다면 이 간극은 어디서부터 좁혀야 하는가? 첫 번째는, ‘좋은 건축’의 개념을 사회 전체가 다시 정의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좋은 건축이란, 상을 받은 건축, 시선을 끄는 외관, 언론에 소개된 랜드마크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그것은 전체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진정한 좋은 건축은
‘기억에 남는 공간’이며,
‘삶을 바꾸는 구조’이며,
‘반복될 수 있는 원칙’이어야 한다.
그것은 장엄한 박물관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잘 설계된 마을회관이나 도서관, 지하철 역사나 초등학교일 수도 있다.
두 번째는, 기념비적 건축이 보여준 가능성을 ‘체계화’하는 일이다. 특정 건축가의 예술적 성취나 국가사업의 우연한 기획에만 의존하지 않고, 그것이 왜 작동했는지를 분석하고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는 설계 프로세스에 대한 기록, 시공과 유지관리의 문제, 지역주민과의 상호작용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이 자료들이 축적되고 공론화될 때, 우리는 ‘좋은 건축의 반복’을 향한 출발선에 설 수 있다.
셋째로는, 공공건축의 발주 방식이 변화해야 한다. 지금의 시스템은 기념비적 건축을 위한 특례를 만들고, 나머지는 일률적 기준을 따르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반대다. ‘특별한 건축’을 위한 예외가 아니라, ‘일상의 건축’에도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기념비적 건축의 가치가 ‘유일한 사례’가 아니라 ‘참고 가능한 표준’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사회 전체가 건축을 말할 수 있는 언어를 가져야 한다. 기념비적 건축은 대개 전문성과 예산, 정치적 상징성을 통해만 소비된다. 그러나 그것이 삶과 공간, 감각과 연관된 언어로 번역될 때, 비로소 시민들이 좋은 건축을 요구하고, 평가하고, 지켜내는 주체가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건축가의 언어, 행정의 언어로만 건축을 말해왔다. 이제는 사용자와 주민의 언어로 건축을 다시 말할 때다.
이 모든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방향은 분명해야 한다. 기념비적 건축을 만든 힘은 국가의 의지였고, 설계자의 통찰이었으며, 무엇보다 ‘가능하다고 믿었던 사회의 합의’였다. 그 믿음이 일상으로 스며들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기념비적 건축에만 감동하지 않을 것이다. 동네의 도서관에서도, 어린이 놀이터에서도, 도시의 벤치 하나에도 감정을 담고 기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건축의 힘이며,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기념비는 상징이다. 그것이 드러낸 것은 건축의 가능성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한순간이라도 건축을 통해 꿈꾸었던 미래였다. 이제 그 꿈을 일상의 구조로 만들어야 한다. 대단한 건축은 이미 증명되었다. 이제는 그 증명을 삶 속에서 반복할 차례다. 기념비적 건축의 감동을 일상의 풍경으로 확장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건축이 도시를 바꾸고, 공간이 사람을 바꾸며, 사회가 스스로를 설계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건축이 불가능한 나라’가 아니라, ‘좋은 건축이 반복되는 사회’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우리가 가진 가능성을 잊지 않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건축의 모든 가능성은 결국 ‘설계’에서 출발한다. 수많은 규제와 제약, 한정된 예산 속에서도 더 나은 공간을 상상하고, 불가능해 보이던 상황을 해석하고, 마침내 사람과 도시가 숨쉴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일이야말로 설계자의 몫이다. 많은 사람들이 ‘설계는 그림’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건축이 현실화되기 전의 전략이자, 사회와 소통하는 언어이며, 공간을 통해 미래를 증명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설계’의 가능성은 놀랍도록 저평가되어 있다. 특히 공공 건축과 같은 제도권 안의 프로젝트에서는 더욱 그렇다. 설계자는 매번 경쟁을 통해 선발되고, 치열한 심사를 거쳐 한 번의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그 기회가 다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심지어 탁월한 성과를 낸 설계자조차 ‘다음 기회’와는 무관해진다. 우리는 왜 좋은 설계를 해낸 사람에게 다음 설계의 기회를 주지 못하는가?
이 구조는 개인의 실력이나 평가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 자체가 ‘설계의 축적’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더욱 문제다. 한국의 공공 설계 시스템은 공모전, 입찰, PQ심사 등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최근 5년간의 실적’과 ‘회사 규모’, ‘엔지니어링 참여 여부’ 같은 기술적·행정적 요소다. 반면 실제 공간에서의 사용자 만족도나, 해당 건축이 지역사회에 미친 긍정적 파장, 혹은 설계자의 의도를 끝까지 밀어붙인 설계 완성도는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그 결과, 설계를 잘 해낸 사람이 다음 기회를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 실적과 자본을 축적한 사업체가 연속적으로 선정되는 아이러니한 현실이 펼쳐진다.
이로 인해 많은 젊은 건축가들은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 있는 공공 프로젝트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도전한다. 그리고 실제로 감동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이후 다른 공모전에서 ‘실적이 부족한 신인’으로 다시 분류되고, 그들의 건축은 반복되지 않는다. 마치 하나의 기회는 예외적으로 주어진 ‘쇼케이스’였던 것처럼, 제도는 그들에게 다음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렇게 한 사람의 가능성은 반복되지 않고, 사회 전체는 그 가능성의 축적을 잃는다.
이는 매우 비효율적인 구조다. 왜냐하면 건축은 한 사람의 설계자가 계속해서 같은 맥락과 조건 속에서 작업을 이어갈 때, 더 깊고 풍부한 결과물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지역의 특성과 생활권이 두 번째에는 더 깊이 이해되고, 첫 번째 시도에서 발생한 시행착오와 실현상의 한계를 두 번째 설계에서는 보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편파적’이라 여긴다.
한 번 한 사람이 또 하면 ‘기회 독점’이라 느껴지고,
‘공정성’의 이름으로 새로운 사람을 들여야 한다고 여긴다.
물론 새로운 참여자에게도 기회는 중요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같은 사람에게 반복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반복을 허용하지 않는 구조’다. 이는 곧 건축의 축적을 막고, 설계자의 성장도 막는다. 우리는 건축가가 ‘한 방’에 모든 것을 증명하길 바란다. 그러나 정말 좋은 건축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좋은 건축가는 ‘반복’을 통해 만들어진다. 같은 지역에서, 같은 공공 건축 프로그램에서, 비슷한 예산과 맥락 속에서 조금씩 다른 시도를 반복하며 자기만의 디테일과 전략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축적된 노하우와 감각은 결국 도시 전체의 질을 높이는 자산이 된다.
하지만 한국의 제도는 반복을 허용하지 않는다. 특정인이 반복적으로 선정되면 부정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따르고,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기 십상이다. 마치 건축가는 한 번 이름을 알린 순간부터 ‘재기회 금지 대상’이 되는 것처럼, 제도는 그들의 두 번째 도전을 막는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매번 ‘새로운 건축’을 기대하면서도 그것이 가능해질 조건을 스스로 지우고 있는 셈이다.
건축의 반복은 단순한 ‘복사’가 아니다. 반복은 진화다. 첫 번째에서의 성취는 두 번째에서는 더 정교해지고, 세 번째에서는 더 깊이 있는 공간 해석으로 이어진다. 반복을 통해 한 도시 안에서 특정한 설계 언어가 정착하고, 사람들도 공간에 익숙해지고, 그 감각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반복을 제도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그것은 도시의 일관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해치는 일이다. 설계자의 언어가 도시 속에 뿌리내릴 기회가 없는 도시에서는, 건축이 늘 겉돌 수밖에 없다.
한국의 도시가 그렇게 제각각이고 파편화되어 보이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각기 다른 설계자, 각기 다른 시행자, 각기 다른 공공기관이 제각각 움직이면서, 일관된 도시적 전략 없이 개별 건축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심지어 한 기관 내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들조차 설계자를 달리하려는 의도 때문에 조형성과 건축 언어가 단절되기도 한다. 이것은 공정성을 가장한 ‘비효율의 반복’이다. 특정한 설계자에게 기회가 반복되는 것이 ‘권력’이 되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우리는 애써 가능한 연속성과 통합성을 외면해왔다.
그 결과, 도시에는 ‘한 번의 훌륭한 건축’은 존재하지만,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건축’은 드물다. 시민들도 기억하는 건축이 없다. 우리가 반복을 통해 키웠어야 할 건축가는 하나의 성공을 뒤로한 채 다시 경쟁의 바닥으로 돌아가고, 그 경쟁에서 밀리면 또 한동안 기회를 얻지 못한다. 결국 좋은 설계가 다음 좋은 설계를 만들어내는 선순환은 끊기고, 늘 새로운 출발선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악순환만이 남는다.
여기에는 건축을 바라보는 인식의 문제도 자리한다. 우리는 아직도 건축가를 ‘예술가’로 보기도 애매하고, ‘기술자’로 보기도 모호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건축가의 지속적인 성장이나 누적을 인정하기보다는, ‘그때그때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공정하다’는 식의 접근이 강하게 작동한다. 물론 다양한 설계자의 시각이 도시를 풍부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누가 하든 괜찮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속성과 실험이 함께 보장될 수 있는 구조’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반복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제도 설계가 달라져야 한다. 반복 참여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과거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도전으로 인정하는 평가 시스템이 필요하다. 예컨대, 동일한 지역이나 동일한 유형의 건축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낸 건축가에게는 ‘조건부 재참여 자격’을 부여하거나, 일정 기간 동일 프로그램에 대한 시리즈 설계를 권장하는 방식도 고려해볼 수 있다. 물론 이를 악용하는 이들이 없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가능성 자체를 봉쇄하는 현재의 방식보다는 훨씬 더 생산적인 접근이다.
반복은 곧 책임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 번 해본 사람이 다음에 더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은 곧, 그 사람에게 다음 번의 결과에 대한 더 높은 책임을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나야 사회 전체의 설계 품질이 올라간다. 반대로,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에게만 기회를 주는 구조에서는 책임도 분산된다. 프로젝트는 늘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버리고, 실패는 반복되고, 성공은 기억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좋은 설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경쟁을 공정하게 운영하자’는 문제가 아니라, ‘좋은 설계가 사회에 남고 확장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그 중심에는 반복이 있다. 그리고 그 반복은 설계자의 자질, 사회의 제도, 행정의 판단, 그리고 시민의 수용성까지 모두 함께 작동해야 가능한 일이다.
이제 건축이 일회적인 작업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인식해야 한다. 설계는 과거로부터의 학습이고, 미래로의 약속이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도시의 얼굴을 만들고, 사람들의 일상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좋은 설계를 했던 사람에게 또다시 기회를 주는 것은 특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이익이다. 우리는 더 이상 그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외면해서는 안 된다. 좋은 설계자에게는 다음 설계를 맡겨야 하고, 그것이 가능한 구조를 사회가 만들어야 한다. 그 축적이 반복될 때, 비로소 우리는 설계를 통해 도시를 바꿔낼 수 있다.
건축은 결국 삶을 담는 그릇이다. 그리고 그 삶은 단지 오늘 하루의 것이 아니라, 과거의 축적과 미래의 기대가 중첩된 시간의 지층 위에 놓여 있다. 그런 점에서 건축의 설계도, 단발적인 기획이 아니라 도시와 사회가 함께 나아가는 길을 계획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제도는 그 과정을 단절시키고 있다. 매번 새로운 설계를 요구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반복 가능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채, 좋은 건축이 이어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가로막고 있다.
우리는 좋은 설계를 반복할 수 있다. 이미 여러 차례 증명되었고, 누군가는 그것을 이어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의지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제도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설계자는 사회적 자산이다. 그들의 축적된 감각과 경험은 특정한 프로젝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런 설계자에게 ‘다음’을 맡길 수 있어야 한다.
이제는 다른 질문을 해야 한다. ‘왜 같은 설계자에게 또 맡기느냐’가 아니라, ‘왜 이전에 좋은 결과를 낸 사람에게 다음도 맡기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반복이 권력이 되지 않도록 감시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그 감시는 가능성의 배제라는 방식으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 건축은 설계자 개인의 작품이면서 동시에 사회가 함께 만드는 결과물이다. 따라서 좋은 건축을 반복하는 것은 곧 사회가 좋은 결과를 반복해나가는 선택이며, 그것은 결국 우리의 삶의 질과 직결된다.
가능성은 이미 증명되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을 다시 설계의 자리로 불러올 수 있는 용기와 제도다. 그 가능성 위에서만, 우리는 다음 도시를 설계할 수 있다.
국은 기술의 나라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기술을 너무 일찍부터, 너무 빠르게 발전시켜 온 나라였다. 전쟁 이후의 산업화, 그리고 그보다 더 거대한 도시화 물결 속에서 한국은 전 세계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건설 속도를 자랑했고, 그 과정에서 발전된 시공 기술, 구조 해석, 자재 가공 능력은 이미 세계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인정받았다. 실제로 한국의 건설 기술은 중동과 동남아, 아프리카, 심지어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도 대규모 플랜트나 인프라 건설을 통해 무수히 증명되어 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기술이 발휘되어야 할 무대. 즉, 한국의 일상 공간과 도시에서는 정작 제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한 채, 기능적 제한과 제도적 벽에 부딪혀 있었다. 우리는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기술을 작동시킬 구조가 없어서 무너진 것이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우리는 아직 부족하다’고 말한다. “해외는 다르다, 우리는 아직 멀었다”는 말을 마치 자조처럼 반복하면서, 마치 지금의 실패가 실력 부족 때문인 것처럼 치부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정말 우리가 해보지 않아서 못하는 걸까? 아니면 해볼 기회조차 없어서, 혹은 그 기회를 지속시킬 시스템이 없어서 멈춰 선 걸까?
한 건축가가 “우리는 오히려 기술이 너무 빨리 발전해버렸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과학기술의 진보, 건축 자재의 고도화, 디지털 설계 툴의 확산은 이미 한국의 설계자와 시공자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드론, 레이저 스캐닝, BIM(Building Information Modeling), 3D 프린팅, 초고강도 콘크리트와 고성능 단열재까지, 이 모든 것들은 한국 시장 안에서도 실제로 쓰이고 있고, 그 효율과 성과도 꾸준히 축적되고 있다.
문제는 그 기술이 제도와 만나면 이상하게 축소되거나 왜곡된다는 것이다. 어떤 공공 프로젝트에서는 BIM을 ‘의무화’한다고 선언하지만, 정작 그것이 어떻게 설계 프로세스에 반영되는지는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다. 실질적인 데이터를 쌓을 수 있는 구조도 없고, 그 결과를 다음 프로젝트로 이어갈 수 있는 연계 체계도 없다.
많은 공공 발주처는 여전히 평면도와 단면도, 일람표 중심의 ‘2D 설계’를 기준으로 도면을 검토한다. BIM으로 설계한 결과물을 제출하더라도, 최종 검토는 결국 PDF 도면 몇 장으로 환원되며, 디지털 설계의 장점은 대부분 무력화된다. 그렇게 기술은 ‘있지만 없는 것’처럼 취급당한다. 기술이 사용될 준비는 되어 있지만, 그걸 받아들일 시스템이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기술은 사용되지 못한다.
기술은 단지 기계나 툴이 아니라, 그것을 운용하고, 그 결과를 평가하며, 다시 사회 속에 반영할 수 있는 구조와 만나야만 제 기능을 한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 사회는 그 연결고리를 만드는 데 실패하고 있다. 가령, 3D 프린팅 기술로 소형 구조물을 제작할 수 있음에도, 관련 법규나 인증 절차가 따르지 않으면 실제 현장 적용은 불가능하다. 초고강도 콘크리트를 써서 슬림한 구조물을 만들 수 있음에도, 구조기준이 기존 단면과 일치하지 않으면 인허가 단계에서 제동이 걸린다.
이러한 현상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을 사용하는 규칙의 문제’다. 그리고 이 규칙은 오랫동안 ‘관성’과 ‘위험 회피’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왔다.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검토를 요구하고, 새로운 검토는 새로운 책임 구조를 필요로 한다. 그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은 누군가는 결국 ‘기존의 방식이 더 안전하다’는 식으로 제안을 거부한다. 그렇게 우리는 기술을 가졌지만, 그것을 사용할 수 없는 사회를 만든다. 그리고 이로 인해 손해를 보는 것은 결국 시민들이다.
더 효율적이고,
더 쾌적하고,
더 지속가능한 건축물이 가능함에도......
그러나 기술은 고립된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이해와 판단, 그리고 사회적 수용을 통해 비로소 문화가 된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기술의 발전과 그 실행 사이의 간극을 방치해왔다는 데 있다. 우리는 수많은 첨단 기술을 갖고 있음에도, 그것을 실행할 ‘사람의 권한’과 ‘시스템의 구조’가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 익숙해져 버렸다.
예컨대, 이미 10년 전부터 고성능 단열재를 통해 제로에너지 건축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를 실제 건축에 도입하려 하면, 설계비가 과다하다는 이유로, 혹은 인허가 절차가 복잡하다는 이유로 배제되기 일쑤다. 그러면 건축가는 다시 원래의 기준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두 번이 아니라 수십 번 이런 일이 반복되면, 결국 ‘기술적 가능성’은 설계에서 제외된다. 건축가는 그렇게 타협을 내면화하고, 시스템은 그런 사람만 살아남게 만든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왜 혁신이 없느냐고 되묻는다.
더 큰 문제는 이 불일치가 제도에 고정되면서, 기술을 끌어안으려는 사람들조차 점점 사라진다는 점이다. 열정을 갖고 새로운 시도를 했던 젊은 건축가들이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말을 반복 듣다 보면, 어느새 자신도 익숙한 설계 방식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것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구조의 한계다. 한국은 뛰어난 기술자와 설계자들이 있음에도, 그들이 지속적으로 도전하고 실패할 수 있는 구조를 제공하지 않는다. 마치 한번의 실수나 지연이 곧바로 계약 해지로 이어지는 구조 속에서, 누가 모험을 감행하겠는가?
그렇다고 한국의 설계자와 기술자들이 도전을 멈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도 다수의 사무소들은 사비를 들여 기술 실험을 진행하거나, 법령에 없는 방식으로 시공자와 협의하여 우회적인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도면 외적인 수정을 현장에서 조율하고, 법 규정을 피해가지 않으면서도 창의적인 해법을 설계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것은 편법이 아니라, 구조에 갇힌 가능성을 꺼내기 위한 노력이다. 한국 건축의 기술은 이미 그 단계에 도달해 있다. 문제는 그 노력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문화적으로 축적하려는 시스템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묻지 않으면 안 되는 질문이 있다. ‘우리는 왜 기술을 믿지 않는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왜 기술을 다룰 사람을 믿지 않는가?’라는 질문이다. 지금 한국 건축계에는 수많은 유능한 설계자와 시공자, 기술자들이 있다. 하지만 제도는 그들에게 권한을 부여하기보다 감시와 제한을 우선한다. 책임의 전가는 있지만, 권한의 분배는 없다. 그렇게 우리는 가능성을 억제하는 사회를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번 “기술이 부족했다”고 말한다.
이는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기술을 운용할 수 있는 신뢰가 없어서 생긴 실패’다. 이 신뢰는 단순한 인간관계나 도의적인 차원이 아니다. 제도 설계의 문제다. 시도하고 실패할 수 있는 권한, 그리고 그 실패를 보호하는 절차, 실험을 견디는 시간과 예산—이 모든 것이 기술보다 먼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기술도 실제가 되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는 기술을 너무 물건처럼 생각해왔는지도 모른다. 개발되었으면 바로 쓸 수 있는 도구, 사서 설치하면 끝나는 장비처럼 여겨왔다는 뜻이다. 하지만 건축에서의 기술은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공간과 관계를 맺고, 사람과 시스템이 연결된 상태에서 작동한다. 즉, 기술은 언제나 사람과 함께 설계되어야 하고, 공간에 맞춰 구현되어야 한다.
예컨대 ‘패시브 디자인’은 단순히 단열재를 두껍게 하거나 창을 작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해를 받아들이고 차단하며, 자연 환기와 지형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는 설계적 감각이다. 그러기 위해선 처음부터 설계자와 기획자가 함께 논의해야 하고, 시공자 역시 이를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감리자는 시공 과정에서 왜 이 기술이 필요한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시스템은 이런 협업적 구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전히 기획-설계-시공-감리-운영이 모두 분절되어 있고, 각 단계는 책임 회피를 위한 보고서와 체크리스트만 남긴 채 다음 단계로 넘긴다. 아무리 좋은 기술도 이 구조 속에서는 온전히 작동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사람’ 자체를 소모품처럼 다룬다는 점이다. 기술은 사람을 통해 작동한다. 한 설계자가 어느 지역에서 고효율의 설계 시스템을 완성했다면, 그것은 그 설계자의 해석과 시행착오의 결과이기도 하다. 시공자와 감리자, 기획자가 함께 만들어낸 합의의 결과다. 그런데 우리는 다음 프로젝트에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과 팀을 꾸린다. 누적은 없고, 기록도 없다. 설계의 지혜는 현장에서 흩어지고, 다음 프로젝트는 다시 처음부터 고생해야 한다. 이렇게 하나의 완성된 기술적 해법은 사회적 자산으로 축적되지 못하고, 사람의 교체와 함께 사라져버린다.
사람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제도가 그 사람을 잊고, 팀을 흩뜨리고, 경험을 버린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실패의 해석 방식이다. 건축에서 기술이 실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새로운 공법이나 생소한 장비를 시도하다 생긴 작은 하자조차 ‘무능’으로 치부되고, 언론은 ‘부실’이라는 단어로 포장한다. 이 구조에서는 아무도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려 하지 않는다. 모든 시도는 성공만을 강요받고, 실패는 곧 책임 추궁으로 이어진다. 시범사업도, 테스트베드도, 샘플도 없는 상태에서 완벽을 요구하는 사회는 결국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문화를 낳는다.
해외에서는 다르다. 유럽의 도시들은 지역 단위로 기술 시범구역을 설정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시험하고 그 결과를 공유한다. 일본은 공공 발주에서도 기술적 실험을 장려하며, 일정한 실패를 고려한 예산과 일정을 구조적으로 포함시킨다. 미국은 실리콘밸리의 ‘Fail Fast’ 문화를 도시 기술에도 적용하며, 건축 기술에 대한 테스트랩을 운영한다. 중요한 것은 ‘기술의 실패’를 가능하게 만든 시스템이며, 그 실패를 통해 다시 다음 단계를 설계할 수 있도록 한 순환 구조다.
그에 반해 한국은 실험이 일어난 공간을 부정한다. 실패는 곧 누군가의 무능이 되어버리고, 그 공간은 다시는 같은 실험의 기회를 갖지 못한다. 기술은 사라지고, 사람은 기억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왜 좋은 건축이 반복되지 않느냐’고 자문한다.
문제는 분명하다. 우리는 기술을 누적시키는 시스템이 없고, 사람의 경험을 기억하는 구조가 없으며, 실패를 다음 단계로 연결시키는 문화가 없다. 기술은 준비되어 있었지만, 시스템이 없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누군가의 철학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구조로 설계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건축을 꿈꾸기 전에, 그 건축이 반복될 수 있는 사회를 먼저 설계해야 한다. 기술은 이미 수많은 건축가들이 보여주었다. 우리가 반복하지 않은 것이지, 그들이 준비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종종 질문한다. 왜 그렇게 좋았던 건축은 단 한 번으로 끝나는가? 왜 같은 사람, 같은 팀, 같은 방식으로 다시는 이어지지 않는가? 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만든 제도가 그 반복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반복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건축은 실험이자 경험의 예술이다. 그것은 한 번의 완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행착오를 겪으며 점차 다듬어지고, 개선되며, 발전하는 행위다. 마치 장인이 수십 년에 걸쳐 하나의 기법을 완성하듯, 건축도 시간이 쌓이고, 사람이 이어지며, 사례가 중첩되어야 깊이를 갖는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건축 행정 구조는 ‘경험의 반복’을 오히려 경계하고 금기시한다. 오히려 새로움과 형식적 공정성을 강조하는 방식이 건축의 연속성과 누적을 차단한다.
대표적인 예가 공공건축 설계공모다. 동일 건축가의 연속 수주를 막는 제도, 일정한 실적 이상의 건축가에게만 자격을 부여하는 조항, 표준화된 평가표를 통한 공정성의 확보. 모두 그 자체로는 논리적이고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이 제도들이 결합되면, 다음과 같은 이상한 상황이 발생한다. 바로 “이미 증명된 해법은 다음에 쓸 수 없다”는 구조다.
한 건축가가 어떤 복합문화시설을 설계하며 지역의 맥락, 사람들의 흐름, 주변의 풍경까지 고려한 훌륭한 공간을 완성했다고 하자. 그 건축은 기능적으로도, 미적으로도, 주민 만족도 면에서도 모두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그 건축가가 다음 지역의 유사한 프로젝트에 지원하면, 오히려 “이전 당선 이력이 있기 때문에 배제”되거나, “비슷한 형태를 반복할 수 있다”는 이유로 낮은 평가를 받는다. 이 얼마나 기이한 구조인가?
이는 마치 어떤 의사가 수술을 잘했다고 해서 그 의사에게 다음 환자의 수술 기회를 주지 않고, 매번 새로운 의사에게 맡기는 것과 같다. 신뢰를 기반으로 쌓여야 할 구조가 매번 리셋되고, 심사위원들은 늘 새로운 창의성만을 요구한다. 창의성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 창의성은 기존의 경험과 해법 위에서 진화하는 것이지, 무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즉, 반복은 창의성의 적이 아니라, 오히려 창의성의 자양분이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형식적 공정성’과 ‘실질적 축적’ 사이의 균형 부재다. 한국의 공공건축은 형식적 공정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를 주고, 심사는 블라인드로 이루어지며, 기회는 일정하게 순환되어야 한다는 원칙. 물론 이것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가치다. 특정 건축가에게 기회가 집중되거나, 사적인 인맥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는 구조는 반드시 막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검증된 건축조차 다시 쓰지 못하는 구조’로 이어질 때, 오히려 사회 전체의 공간 자산은 축적되지 못하게 된다.
건축은 반복되어야 한다. 단순한 복사-붙여넣기식의 반복이 아니라, 같은 철학, 같은 사람,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이 축적된 결과를 바탕으로 또 한 번의 공간을 시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해야만 도시는 더 깊어지고, 공간은 더 정교해진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건축 제도는 그 반복을 '형평성의 위협'으로 간주한다. 이는 건축을 '기회'의 관점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누가 얼마나 많은 기회를 가져갔는가, 누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 자리를 점유했는가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그 결과, 좋은 건축을 지속하고 싶다는 의지보다, 모두가 한 번씩 해보는 데에 더 큰 가치를 둔다.
이러한 방식은 결국 사회 전체의 손실을 초래한다. 공공건축은 단순히 ‘누가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철학으로, 어떤 맥락에서, 어떤 축적된 기술로 진행되느냐가 핵심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그 축적 자체를 제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부정의 대가는, 반복될 수 있었던 좋은 건축의 단절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건축가가 도시형 커뮤니티 센터에서 빛의 흐름을 유도해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구조를 설계했다고 치자. 그 건축은 실제로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시민들로부터도 호응을 얻었다. 그런데 2년 뒤, 인근 지역에서 유사한 커뮤니티 센터 공모가 열린다. 이 건축가는 해당 프로젝트에 지원하지 못하거나, 지원하더라도 동일한 설계 접근법을 사용하면 ‘자기복제’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 결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전보다 낫지도 못한 공간이 새로 지어지고, 시민들은 그저 또 하나의 ‘비슷하지만 낯선 공간’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전의 성공이 다음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 그야말로 제도의 구조적 단절이 만들어낸 결과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반복 차단이 건축가에게 지속적인 동기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왜 그 건축가는 한 번 뜨고 나서 사라졌을까?”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사라진 걸까? 아니면 우리가 그들을 불러내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일까? 이미 성과를 입증한 설계자에게 두 번째, 세 번째 기회를 주는 것이 왜 구조적으로 어려운지에 대한 성찰은 거의 없다. 오히려 '또 그 사람인가?'라는 피로감이 먼저 작동한다. 그리고 새로운 얼굴이 등장하면 잠시 환호하지만, 그마저도 구조적으로 반복되지 못한다.
이런 구조는 결국 공공건축의 기억 상실증을 낳는다. 우리는 늘 새로운 것을 원하면서도, 과거의 좋은 건축을 잊고, 계승하지 못하며, 설계자와 프로젝트가 분절된 채 떠돌게 만든다. 그래서 하나의 건축이 하나의 기억으로 끝나고, 이어지지 않으며, 어떤 도시적 흐름도 형성되지 못한다. 건축가에게는 성장이 어렵고, 도시는 무정형한 공간의 파편들만을 쌓아가게 된다.
결국 이 모든 문제는 ‘설계자의 반복’을 두려워하는 제도에서 시작된다. 이 두려움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하나는 불신이다. 특정 건축가에게 권한이 집중될 때 생기는 불투명한 행정과 이해관계에 대한 우려. 또 하나는 오해다. 같은 사람이 비슷한 건축을 하면, 창의성이 떨어진다는 편견. 그리고 마지막은 무지다.
건축의 깊이는 반복에서 나온다는 것을 모르는 행정 시스템의 한계.
그러나 그 ‘두려움’은 사실상 제도가 가진 자기모순의 표출이다. 제도는 공공성과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틀이어야 하지만, 오히려 공정함이라는 이름 아래 전문성과 지속성을 외면하는 역설에 빠져 있다. 건축의 반복은 단지 동일한 결과물의 복제가 아니다. 반복은 정제된 경험과 성찰을 통해 사회와 도시, 건축가가 함께 성장하는 기회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그것을 ‘기득권의 재생산’으로 오해하고, 반복의 필요성과 효과를 철저히 외면한다.
물론 우려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공공의 자원을 동원하는 프로젝트에서 특혜나 비리의 여지를 차단하는 것은 당연한 전제다. 그러나 그 우려를 이유로 ‘모두에게 한 번씩’을 이상화하는 순간, 제도는 의도하지 않게 역차별을 만들어낸다. 실력과 가능성을 입증한 건축가조차, 더 나은 설계로 발전할 기회를 구조적으로 차단당한다. 평등이라는 이름 아래, 질적 성장을 방해하는 구조가 작동하는 것이다.
실제로도 이 같은 문제는 공공건축 심사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 설계자는 이미 큰 공모를 수주했다”, “이번에는 새로운 사람에게 기회를 주자”는 식의 논의가, 건축의 완성도나 사회적 파급력보다 우선시되곤 한다. 이는 심사과정이 전문가의 판단이 아니라 행정의 형평성 기조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제도적 편향이 건축 생태계 전체를 왜곡시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설계사무소들은 이제 자신들의 진정한 역량보다, 제도에 맞춰 '얼마나 잘 보이는지'를 먼저 고민하게 된다. 과거의 성공을 자산으로 삼기보다는, 새로운 프로젝트마다 완전히 새로운 접근을 시도해야 하고, 실험이 아니라 눈치 보기와 정치적 언어가 더 중요해진다. 이 모든 것들이 ‘지속 가능한 건축 생태계’의 성장 가능성을 스스로 꺾고 있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잃어버리는 것은 단순히 건축의 퀄리티만이 아니다. 도시의 맥락, 지역의 정체성, 사용자의 경험, 그리고 사회가 기억할 수 있는 건축적 내러티브다. 건축이 사회와 대화하는 언어라면, 우리는 매번 말을 바꾸고 있는 셈이다. 말의 논리도, 어휘도, 문맥도 매번 새롭게 쓰고 지우다 보니, 어느 도시에도 일관된 톤이 남지 않는다. 도시가 품어야 할 이야기들은 흩어지고, 설계자의 축적된 경험도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이 모든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제 ‘반복’을 재정의해야 한다. 반복은 불공정이 아니라, 성장의 필연적인 과정이다. 반복은 자기복제가 아니라, 맥락을 이해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이다. 반복은 기득권이 아니라, 축적된 신뢰의 결과다. 건축은 예술인 동시에 기술이며, 공공성과 상업성을 함께 품어야 하는 복합적 작업이다. 이런 건축이 한 사람의 인생에 단 한 번의 기회만으로 완성되기를 바라는 것은, 건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의 기대일 뿐이다.
건축가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기회가 아니라, 연결된 기회다. 이전의 작업이 새로운 작업으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건축가가 도시와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이 점차 세밀해지고 정교해지는 것. 그것이 바로 건축이 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방식이다. 좋은 건축이 반복될 수 있어야, 좋은 도시도 반복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명확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좋은 건축이 반복되지 못하는 사회는, 결국 좋은 사회를 지속하지 못한다. 그것은 건축가만의 책임도 아니고, 행정의 문제만도 아니다. 제도를 바라보는 시민의 인식, 경쟁을 설계하는 시스템의 철학, 그리고 건축을 이해하려는 사회의 태도 모두가 함께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또다시 잊을 것이다. 누군가 해냈던 좋은 건축을, 누군가 만들었던 감동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다시 가능하다는 희망마저도.
건축은 원래 기억을 담는 구조다. 사람의 손과 시간, 사연과 사용이 오랜 시간 축적되어야 비로소 그것은 공간을 넘어 ‘장소’가 되고, 그 장소는 한 사회의 감각과 사고방식, 욕망과 제약, 시대정신을 드러내는 기록이 된다. 그렇기에 좋은 건축은 단순히 잘 지어진 건축이 아니다. 좋은 건축이란, 기억에 남을 수 있는 건축이고, 반복될 수 있는 건축이며, 다음 세대가 다시 찾아올 수 있는 건축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건축을, 너무 쉽게 잊는다. 아니, 기억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수많은 좋은 건축은 '그때 잠깐 좋았던 공간'으로만 남고, 사회와 도시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 채 또 다른 신축의 논리에 밀려 철거되거나 외면된다. 잊힌 건축은 오래가지 못한다. 오래가지 못한 건축은 문화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문화가 되지 못한 건축은, 다시 시작될 수 없다.
한국의 도시들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아니, ‘철거’와 ‘신축’이라는 이분법으로 계속해서 리셋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공간에 대한 기억의 연결고리다. 어떤 건축이 있었는지, 그곳에서 어떤 삶이 오갔는지, 그리고 그 건축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인식은 기록되거나 계승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순간 이렇게 말하게 된다. “예전에 거기 뭐 있었지?”
이러한 건축의 망각은 단순히 물리적 변화의 문제만이 아니다. 사회 전반에 걸친 기억의 부재이며, 건축에 대한 존중이 구조적으로 결여된 결과다. 잘 지어진 건축이 있다는 사실조차 공유되지 못한 채, 좋은 건축은 오히려 예외적 사례로 분리되고, 흩어지고, 잊혀진다. 누군가 기억해야 할 책임이 있지만, 정작 그 누구도 자신이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공공건축 분야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어떤 건축이 상을 받았고, 사용자가 만족했으며, 심지어 외국에서 주목받았더라도, 해당 지자체나 공공기관은 그것을 반복하거나 계승하려 하지 않는다. 설계자를 다시 부르지도 않고, 유사한 철학을 다시 고려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번에는 다르게 해보자”, “이번에는 새로운 곳과 해보자”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마치 과거의 건축이 ‘기록’이 아니라, 단지 ‘소비’되었을 뿐인 것처럼.
건축을 문화로 받아들이지 못한 사회는, 건축을 관리의 대상으로만 여긴다. 어떤 공간이 시민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관심 밖이다. 유지 관리에 얼마가 드는지,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행정적으로 문제가 없었는지만이 판단 기준이 된다. 그렇게 되면, 건축은 공공재가 아니라 소모품이 된다. 기억되지 못한 건축은, 결국 기억할 이유조차 없는 구조 속에 갇힌다.
기억되지 않는 건축은 결국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건축이다. 우리가 시간 속에서 공간을 경험하고, 그 공간에 감정을 쌓고, 그 감정이 추억으로 전환되며 ‘기억의 장소’가 되는 과정을 건축은 가장 오랜 시간 함께 해왔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의 건축은 그 시간을 무시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만 유효한 건축, 지금의 공모만 통과하면 되는 설계, 지금의 수치만 충족하면 되는 도면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누구도 다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 건축이 10년 뒤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을까?’, ‘이 공간을 다시 찾게 될까?’, ‘이 철학을 계승할 누군가가 존재할까?’ 이런 질문은 없다. 아니, 질문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 구조다. 건축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고민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결과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사회적 망각 속으로 미끄러진다.
이는 설계자만의 책임이 아니다. 오히려, 설계를 발주하고 관리하는 행정과 제도의 책임이 크다.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공공건축이 준공과 동시에 잊혀지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왜 수상 이력과 언론 보도 이후 그 공간에 대한 논의가 사라지는지를 살펴야 한다. 왜 그 설계를 이어가야 할 철학과 기록이 없고, 유지할 의지도 없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매번 새로운 건축을 만들지만, 단 한 개의 건축도 ‘우리의 것’으로 만들지 못할 것이다.
건축가들은 늘 다음을 바라본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다 하지 못한 시도를 다음에 해보려 한다. 하나의 작품이 또 다른 작품의 기반이 되기를 바란다. 건축가는 자신의 생각을 다듬고, 감각을 훈련하고, 반복을 통해 더 나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일한다. 그러나 한국의 제도는 그 ‘반복’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결과, 건축가는 ‘매번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하는’ 구조 속에 갇힌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우리는 왜 어떤 건축은 잊지 못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어떤 건축은 너무도 쉽게 잊는가?
이 두 질문의 차이는 ‘기억 장치’의 유무에서 갈린다. 기억되기 위해선, 누군가가 그것을 이야기하고, 남기고, 공유하고, 계승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건축을 ‘계획’만 하고, ‘시공’만 하고, ‘준공’만 하지, 그 다음 단계를 고민하지 않는다. 즉, 기억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사회에서 건축은 항상 현재형으로만 존재하고, 과거형이 될 수 없다.
이것은 도시의 연속성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왜 어떤 도시는 걷는 것만으로도 역사와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는데, 어떤 도시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기억에 남지 않을까? 그것은 단지 디자인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의 축적 방식, 기록의 구조, 유지 관리의 철학, 그리고 사회가 공간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다.
한국 건축이 좋은 건축을 반복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기억의 문화가 개인에게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건축을 보고 감탄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구조적으로 기억하는 장치를 갖추지 못했다. 설계자의 철학은 설계도면 안에만 남고, 사용자의 경험은 후기 몇 줄로 소비되며, 공간의 정체성은 담당자의 이임과 함께 사라진다. 어떤 건축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문제를 해결했는지는 다음 프로젝트에서 거의 활용되지 않는다.
공공건축의 경우 특히 심각하다. 많은 건축이 단발성의 ‘성과’로만 작동하며, 전시되고, 평가받고, 사라진다. 반복되지 않으니 축적되지 않고, 축적되지 않으니 발전도 없다. 건축가도, 행정도, 사회도 ‘축적된 건축’을 경험할 기회를 잃는다. 이런 사회에서는 결국 건축이 기억을 생산하지 못할 뿐 아니라, 기억을 기반으로 성장할 수 없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억을 구조화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첫째, 성공적이었던 공공건축에 대한 기록과 리서치, 그리고 후속 평가가 필요하다. 준공 이후의 운영 데이터, 사용자 반응, 도시 맥락에서의 효과 등을 축적하고 다음 설계자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설계자의 설계철학이 아카이빙되고, 필요 시 해당 건축가와의 후속 작업이 용이한 제도적 유연성이 마련되어야 한다. 셋째, 시민이 기억하는 건축을 어떻게 문화적으로 담아낼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담론과 실천이 병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좋은 건축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왔다. 문제는 그 증명이 사회의 기억이 되지 못한 것이다. 결국 기억되지 않는 건축은 반복되지 않고, 반복되지 않은 건축은 문화로 자리 잡지 못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움을 향한 맹목적인 욕망이 아니라, 좋았던 것들을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다. 건축이 사회의 집합적 기억이 되기 위해서는, 제도도, 시민도, 설계자도 각자의 자리에서 기억의 책임을 져야 한다. 좋은 건축은 단지 한 순간의 설계가 아니라, 기억되고 공유되고 계승되는 시간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좋은 건축이 반복되지 못하는 것은 단지 제도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건축을 바라보는 방식, 더 나아가 좋은 건축을 소비하고 기억하는 문화 자체가 그 반복을 가로막고 있다. 즉, 건축은 기술과 제도 사이에서만 좌초된 것이 아니라, 사회의 무관심과 왜곡된 시선 아래에서 지속의 동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건축은 ‘한 번 보고 지나치는 것’으로 여겨진다. 도시는 늘 새로운 건물들로 교체되고, 공공시설은 '예산 집행의 결과물'일 뿐, 그 공간의 경험과 철학은 중요하지 않다. 사용자에게 건축은 ‘필요한 기능’의 실현이자 ‘눈에 띄는 외관’ 정도에 머무른다. 그 안에 담긴 설계자의 고민, 공간의 내적 질서, 경험의 시퀀스는 설명되지 않고, 설명하려는 노력도 드물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건축이 지어져도, 사회 전체가 그것을 '반복하고 싶은 건축'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러한 문화는 결국 건축의 수명을 ‘준공일’로 한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는 건축의 완성 시점에서 감탄하거나 비판하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를 지켜보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좋은 건축은 금방 낡고, 기억되지 않으며, 설계자의 철학과 기술도 재사용되지 못한다. 심지어 다음 건축은 이전보다 더 나빠지기도 한다. ‘누가 했는가’는 기억되지 않고, ‘무엇이 좋았는가’도 공유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새로움’에 대한 집착이 있다. 한국 사회는 늘 새롭고 독창적인 것을 갈망한다. 같은 건축가가 비슷한 언어로 건축을 해도, 곧 ‘식상하다’는 평가가 따라온다. 전통을 계승하거나 맥락을 존중하는 건축은 ‘보수적’이라 폄하되고, 그 결과 설계자들은 ‘다르게 보이기 위해 억지로 변형하는’ 무리수를 두게 된다. 이는 창의성의 왜곡이자, 건축 본연의 목적을 희생하는 구조다.
또 하나는, 건축에 대한 비평과 대화의 부재다. 문학에는 평론이 있고, 영화에는 리뷰가 있고, 음악에는 팬덤이 있다. 하지만 건축은 어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축에 대해 평가하거나 논의할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 왜 이 공간이 좋았는지, 왜 이 동선이 불편했는지, 어떤 건축이 감동을 주었는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예쁘다'거나 '비싸 보인다'는 수준의 단어로 소비될 뿐이다.
건축을 반복하려면, 먼저 그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할 수 없으면 기록되지 않고, 기록되지 않으면 잊히며, 잊힌 건축은 다시 시도되지 않는다. 결국 이 반복의 단절은, 말 없는 사회, 말 잃은 건축이 만들어낸 필연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건축을 기억하는 방식’ 자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어떤 건축이 좋았는지, 왜 좋았는지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없다면, 반복은 불가능하다. 건축은 결국 땅 위에 놓이는 실체지만, 그 실체를 살아 있게 하는 건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이다. 그런데 우리는 건축을 단지 '볼거리'로만 소비한다. SNS에 찍힌 한 장의 사진, 기사에 실린 조감도 이미지, 혹은 오픈 첫날의 체험으로 건축의 전부를 판단한다. 그리고 그 판단은 쉽게 잊힌다. 시간이 쌓일수록 건축은 빛나야 하는데,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관리비가 많이 나오는 건물’, ‘리모델링이 필요한 건물’, 혹은 ‘유지보수가 불편한 공간’으로 치환해버린다.
이와 같은 문화는 건축의 생애 주기를 단축시키고, 결국 그 안에 담긴 철학이나 설계적 실험들이 뿌리 내릴 기회를 없앤다. 공공건축의 경우에도 예외는 없다. 심지어 한 도시에서 극찬을 받았던 건축조차도, 몇 년 뒤면 “어디였지?”라고 묻게 되는 현실. 이는 곧 도시가 건축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뜻이며, 도시의 문화도 축적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렇게까지 반복에 인색할까? 그것은 경쟁 중심의 사회구조, 성과 지향적인 행정, 그리고 ‘같은 것이 반복되면 부패의 씨앗이 된다’는 인식 때문이다. 물론 반복은 감시되어야 한다. 동일한 건축가가 계속해서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데에는 투명성과 책임이 보장돼야 한다. 하지만 ‘지속’과 ‘독점’은 다른 개념이다. 우리는 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반복 자체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 결과, ‘좋았던 건축을 이어가는 방식’ 대신, ‘새로운 사람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방식’을 택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도는 때로 훌륭하지만, 더 자주 평범하거나, 퇴보하거나, 실패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말로 새로운 것만이 도시를 발전시킬까?
아니면, 축적된 좋은 건축이 반복되어야 도시가 성장하는 것일까?
아마도 정답은 후자일 것이다. 프랑스의 파리는 19세기에 만들어진 거리 풍경을 지금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그 거리의 카페, 아파트, 광장은 처음에 성공적인 건축이었고, 이후 수많은 건축가들이 그것을 반복하고 계승하며 지금의 도시를 만들었다. 반복은 창의성의 적이 아니라, 창의성의 토양이다. 그것이 없다면 건축가는 늘 백지에서 시작해야 하며, 그 백지는 언제나 실험의 위험을 수반한다. 한국 사회가 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축적된 건축의 반복, 그리고 그 반복을 가능케 하는 문화다.
우리가 정말 좋은 건축을 만들고 싶다면,
먼저 좋은 건축을 기억하고, 말하고, 계속해서 시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제 반복은 선택이 아니라, 우리가 도시에 남길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방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좋은 건축의 반복이 아니라, 반복되는 실망에 더 익숙해져 있다. 도시의 어느 구역이 새로 개발된다는 소식이 들리면, 우리는 기대보다 걱정을 먼저 떠올린다. “또 그런 식으로 짓겠지.” “별다른 건 없을 거야.” 이 말은 하나의 도시가 하나의 패턴으로 반복된다는 말이 아니라, 실패가 반복되고 있다는 절망의 표현이다.
이제는 반복을 멈추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제대로 된 반복을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야 할 때다. 반복이란 결국 축적의 다른 말이다. 같은 사람이 또 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쌓아온 것을 통해 더 나은 시도가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창의성의 고갈이 아니라, 창의성의 흐름이 된다. 음악에서 같은 멜로디를 변주하듯, 건축에서도 하나의 철학과 방식이 시간이 흐르며 도시와 함께 진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제도와 사회 모두가 ‘반복’을 실패의 부정이 아니라, 성공의 확장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새로운 것만을 신성시한다. 언론은 '신진'이라는 수식어에 열광하고, 행정은 '다양성'을 기계적으로 해석하며 건축가를 바꾸는 것을 공정이라 말한다. 그러나 정말 공정한 것은, ‘누구에게도 불이익이 없게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 계속 이어질 수 있게 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반복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제도보다도 사회 전체의 문화적 문해력 때문일지도 모른다. 좋은 건축을 알아보는 안목,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감각, 그리고 그것을 다시 누리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가 부족하다. 우리는 설계자의 이름은 몰라도, 커피 맛집은 기억하고, 인테리어 사진은 스크랩하지만, 우리 동네 주민센터가 왜 그렇게 지어졌는지는 묻지 않는다. 기억하지 않는 사회에서 반복은 일어나지 않는다.
반복은 ‘익숙함’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지, ‘잊힘’ 속에서 자라날 수 없다. 좋은 건축을 지속시키는 반복은 단순히 설계자에게 기회를 주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곧 도시와 사람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어떤 공간이 좋았다는 기억이 다음 공간에도 반영되고, 그것을 만든 이가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작동할 때, 비로소 우리는 공간을 통해 시간을 이어갈 수 있다. 건축이 한 시대의 문화이자 정서라면, 반복은 그 문화를 다음 세대로 전송하는 언어다.
반복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늘 ‘첫 번째 실패’만 반복하는 사회가 된다. 우리는 이제 그런 사회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진짜 좋은 건축이 반복될 수 있는 사회를 상상해보자. 그것은 새로운 도시가 아니라, 기억을 가진 도시, 계승을 아는 사람들, 그리고 시간을 설계하는 사회일 것이다.
우리는 지난 시간 동안 수많은 건축을 만들어 왔다. 어떤 건축은 칭송을 받았고, 어떤 건축은 조용히 사라졌다. 때로는 무너졌고, 때로는 남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마주한 질문은 단순히 “무엇을 더 잘 지을 것인가”가 아니다. “무엇을 다시 지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 “무엇을 반복해야 하고, 무엇은 버려야 하는가”에 있다.
건축은 물리적 구조물 이전에 기억의 그릇이다. 개인의 기억일 수도 있고, 공동체의 기억일 수도 있으며, 어떤 시대의 정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기억은 그 자체로 영원하지 않다. 설계되지 않은 사회는 좋은 건축이 태어나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축적되지 못한 감정, 이어지지 않는 기술, 기록되지 않은 맥락 속에서 좋은 건축은 그저 '좋았던 한때'로만 남는다. 그것이 반복되지 못하는 사회는 결국, 다시 같은 실패를 반복하게 된다. 우리는 반복이 필요한 것과 반복하면 안 되는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문제를 반복해서는 안 되지만, 좋은 해법은 반복되어야 한다.
시행착오는 줄여야 하지만, 검증된 가능성은 확산되어야 한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이 단순한 원리를 제도적으로, 문화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그래서 건축은 기술은 축적되는데도, 기억은 축적되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을 반복해야 할까? 하나, 이미 입증된 건축적 해법들이다. 빛을 다루는 방식, 동선을 유도하는 공간의 리듬, 커뮤니티를 연결하는 구조와 프로그램, 그리고 특정 지역성과 공공성을 결합하는 설계 철학. 이런 요소들은 단지 특정 프로젝트의 '디자인 아이디어'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재현 가능한 경험 기반의 자산이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자산이 아닌 '과거의 개별 성과'로만 간주한다. 반복하려는 순간 ‘자기복제’라는 프레임이 씌워지고, 설계자는 다시 처음부터 ‘창의성’이라는 단어 앞에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버려야 할까? 첫째, 불신을 기반으로 한 심사와 평가 체계다. 좋은 건축을 반복할 수 없는 구조의 출발점에는 늘 ‘혹시 특정인에게 특혜가 주어지는 건 아닐까?’라는 불신이 존재한다. 이 불신은 익명성과 공정성을 내세우는 심사제도를 경직되게 만들고, 결국 반복보다는 '일회성 기회'를 중요시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공정하다는 명분 속에 축적은 지워지고, 기억은 분리된다. 우리는 기억되지 않는 도시, 반복되지 않는 건축 속에 산다.
둘째, 균질성과 형식의 집착이다. 한국 사회는 도시를 구성하는 방식에서 지나치게 동일한 구조를 반복해왔다. 택지개발지구의 평면, 주거단지의 배치, 상가의 유형, 공공시설의 계획 방식 모두가 ‘이전의 틀’을 계승하고 반복하는 구조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좋은 건축의 반복’이 아니라, 틀의 반복이라는 점이다. 틀은 익숙함을 주지만, 생동감을 주지 못한다. 그 틀에 얽매인 순간, 건축은 감정의 도구가 아니라 단가의 연산이 되고 만다. 우리가 반복해야 하는 것은, 틀이 아니라 맥락에 대한 해석과 감각이다. 어떤 도시에서, 어떤 시간대에, 어떤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기대를 품고 있는가. 그런 맥락에 대한 민감한 반응이 축적될 때, 비로소 도시도 건축도 살아난다. 하지만 지금의 제도는 건축가에게 이 맥락의 해석을 요구하기보다는, 양식을 요구한다. 양식은 빠르지만, 단명하고, 정답처럼 보이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셋째, 기획되지 않은 유지와 관리 시스템이다. 좋은 건축은 짓는 순간이 아니라, 사용되는 시간 동안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한다. 그런데 우리는 늘 설계 이전의 논의와 착공 이전의 심의에만 집착한 나머지, 건축이 지어진 이후의 사용과 유지, 그리고 기억의 과정에는 매우 무심하다. 심지어 어떤 공공건축은 ‘완공일’을 마감일로 간주하고, 이후의 관리 계획조차 없이 사업을 종료한다. 이 구조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건축이라도 한 번만 반짝이고 사라질 운명을 피할 수 없다. 반복이 가능한 건축은 유지될 수 있어야 하며, 유지될 수 있는 건축은 사회 전체의 시스템 속에서 관리되어야 한다. ‘공공건축 이후’의 설계는 바로 시스템의 문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스템을 반복하거나 계승하는 데에 너무나 인색하다. 오히려, 같은 문제가 반복되지 않도록 이전 사례를 지우고, 다시 새로운 시작을 반복하는 악순환을 만든다. 같은 오류의 되풀이, 기억되지 않는 사례, 학습되지 않는 실패가 반복되는 사회에서는 좋은 건축도, 나쁜 건축도, 똑같은 무게로 취급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무엇을 지을 것인가?”에서
“무엇을 다시 지을 것인가?”로.
이 질문은 단지 공간의 재건축이나 리모델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식, 제도, 사회적 태도까지도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반복이 허용되는 사회, 기억이 연결되는 도시, 성공을 계승하는 건축문화.
우리는 그 구조를 다시 지어야 한다.
넷째,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 문화다. 건축은 본질적으로 ‘시도’의 연속이다. 땅의 조건과 사회적 요구, 예산과 기술의 한계 속에서 ‘최선’을 찾아가는 과정이 곧 설계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여전히 건축을 ‘완벽한 결과물’로만 평가한다. 그 결과, 하나의 실패는 하나의 인격이 되고, 한 번의 지적은 재기의 기회를 박탈하는 잣대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왜 실패한 건축이 다시 기회를 얻는 것을 꺼리는가? 왜 한 번의 비판을 받은 건축가가 다른 영역에서 다시 실험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지 못했는가? 이는 결국 사회 전반의 ‘성과 중심주의’와도 닿아 있다. ‘좋은 것’만을 선호하고, ‘새롭고 화려한 것’만을 갈망하며, 과정을 존중하지 않는 분위기. 이 문화 속에서 건축은 점점 더 ‘안전한 선택’만을 하게 되고, 그 결과 도시는 더더욱 무감각해진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실패가 아니라, 실패의 반복이 없다는데 있다.
우리가 지켜봐야 할 것은 그 실패에서 무엇을 배웠는가이고, 그 실패 이후 무엇이 바뀌었는가이다. 실패를 단절로 받아들이는 사회는 성장하지 못한다. 오히려 실패를 설계에 다시 반영할 수 있게 하는 구조, 두 번째 기회가 자연스럽게 열리는 생태계, 공공영역에서의 용기 있는 반복이 필요하다. 건축가에게 반복의 기회를 보장하지 않는 사회는, 사회가 결국 자기 손으로 축적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지속 가능한 건축’에 대해 말하면서도, 지속 가능한 건축가의 삶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설계자는 결과물의 저작자이자 동시에 살아 있는 기록자다. 그 기록이 반복되고, 진화될 때 비로소 사회는 누적되는 공간을 가진다.
다섯째, 건축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회다. 많은 이들이 건축을 좋아하고, 여행 중 멋진 건물을 보면 사진을 찍고 감탄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경험’으로 소비될 뿐, 그 건축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무엇을 상징하는지, 어떤 문맥 속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건축은 더더욱 그렇다. 아파트는 입지와 평수의 문제로만 이야기되고, 학교는 편의와 동선의 문제로, 도서관은 조용함의 공간으로 축소된다. 건축에 대한 사회적 이해는 공간을 지속시키는 핵심이다. 이해 없는 공간은 기억되지 않고, 기억되지 않는 공간은 곧 무너진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는 건축을 설명받는 훈련도, 이해할 기회도 부족하다. 매체는 건축을 ‘디자인’ 혹은 ‘스타 건축가’의 이미지로만 소비하고, 제도는 주민 참여라는 명목 아래 건축의 내용을 설명하지 않은 채 표만을 요구한다. 이것은 설계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가 ‘좋은 건축이 무엇인지’를 공감하지 못하는 한, 그 어떤 반복도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이해가 없는 반복은 모방이고, 피로감을 낳는다. 하지만 이해 위의 반복은 전통이 된다. 그리고 그 전통은 단단한 사회적 기반이 된다.
여섯째, 우리는 반복할 줄 모르는 사회다. 이 말은 곧, 우리는 ‘의미 있는 반복’을 할 수 있는 구조도, 문화도, 의지도 부족하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는 ‘반복’을 창의성의 반대말로 여겨왔다. 그 결과, 건축뿐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반복은 지루함이나 답습, 혹은 무능력의 증표처럼 취급된다. 그러나 반복이란 ‘그대로 되풀이하는 행위’가 아니라, ‘축적된 것을 개선하며 다시 해보는 과정’이다. 좋은 건축을 반복하는 사회란, 그 과정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줄 아는 사회다. 가령 일본의 경우를 보자. 안도 다다오가 지은 교회나 미술관은 여러 해를 거쳐 다른 형태로, 다른 기능으로 반복되어 왔다. 재료는 달라졌고, 규모도 달라졌지만, 공간의 감정은 연속되었다. 그는 단순히 콘크리트와 빛의 대비를 반복한 것이 아니라, 그 구조 안에서 사회와 자연, 인간의 위치를 끊임없이 새롭게 배치했다. 그리고 그 모든 실험을 ‘축적’으로 인정하는 사회적 구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반면 우리는, 설계자의 반복이 곧 ‘이미 본 것’이라는 식상함으로 치환되고, 반복은 ‘기회 독점’이라는 비난으로 변질된다. 이는 창작자에게도 사회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건축은 실험이자 연습이고, 반복은 그 실험을 지속하게 만드는 도구다. 단 한 번의 작품으로 건축가를 판단하는 사회는 결국, 한 번의 실수로 건축가를 낙인찍기도 쉬운 사회다.
일곱째, 무엇을 반복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없다. 건축이 사회적 예술이라는 말은, 결국 그 공간이 누구의 삶과 어떤 가치에 봉사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철학이 없다. 제도는 지켜야 할 기준을 명확히 하지 못하고, 사회는 무엇이 나쁜 건축인지조차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는 쓰레기처럼 쌓인 도시의 파편을 보면서도,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다.
첫째, 모든 것을 공정이라는 이름 아래 균등하게 분배하려는 강박.
둘째, 한 번의 실패나 문제를 영원한 낙인으로 남기는 문화.
셋째, 반복을 기계적 복제와 혼동하는 인식.
넷째, 건축을 이해하지 않고 소비하는 태도.
다섯째, 제도적 단절을 당연시하는 행정의 관성.
그리고 우리가 '반복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축적된 성공의 경험.
둘째, 설계자와 사회 간의 신뢰.
셋째, 실패를 반영하는 실험의 용기.
넷째, 공간을 통해 사람의 삶을 바꾸려는 철학.
다섯째, 좋은 건축을 다시 시도하려는 제도의 유연함.
우리는 이제 건축만을 다시 지어야 할 때가 아니다. 우리가 다시 짓고, 설계해야 하는 것은 이 사회의 문화, 제도, 태도이며, 공간을 대하는 철학 그 자체다. 건축은 그것을 드러내는 가장 단단한 거울이다. 그 거울 속에 우리는 어떤 얼굴로 비춰지고 있는가? 반복할 가치가 있는가? 지켜야 할 전통이 있는가? 아니면 처음부터 다시 설계해야 하는가? 이제는 답을 내릴 시간이다.
공간은 사람을 담는다. 사람은 다시 공간을 설계한다.
그 순환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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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남은 이야기....
7장. 이제는 가능성을 설계할 차례다. : 우리는 무엇을 다시 설계하고, 무엇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가?
- 우리가 설계하지 못한 것들 : 공간은 바뀌었지만, 삶은 왜 그대로인가?
- 반복된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 우리는 어떤 구조부터 다시 짜야 하는가?
- 건축은 정치보다 먼저 사람을 설계한다 : 관계, 감정, 공감은 어떻게 설계되는가?
- 도시를 바꾸는 건 법이 아니라 감각이다 : 공감은 제도보다 앞서야 하지 않을까?
- 삶을 위한 건축, 권리를 위한 설계 : 공간은 어떻게 삶의 조건이 되는가?
- 예술로서의 건축은 왜 필요했는가 : 우리는 왜 여전히 건축을 아름답게 지으려 하는가?
- 감정을 설계하는 사회를 향해 : 어떤 공간이 사람을 바꾸고,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
- 가능성을 짓는 건축가 : 나는 무엇을 설계하고 싶은가, 우리는 무엇을 상상할 수 있는가?
에필로그. 감정을 품은 공간, 사람을 담은 도시 : 건축으로 우리는 어떤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