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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하지만 흔하지 않은 밤

by 자유여행자


흔한 밤이다.

오늘도 나는 바깥에서서의 일정을 마치고

11시에서 12시 사이쯤 집에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아 바깥을 바라본다.


어제처럼 그제처럼

아니 처음 여기 들어왔을 때처럼

낯익은 풍경은 유리창을 통해 내 안으로 들어온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처음으로 여기서 맞이하는 낯선 밤을

나는 맞이하고 있다.



2년도 훨씬 더 전에

아직 학생이었던 시절

어느 늦여름에서 가을로 들어서던 시점에

나는 법조인으로서의 첫번째 경력을 골라야만 했다.


형사법에 흠뻑 빠져있었던 나는

검사임용을 준비하며 곁다리로 공부했던 재판실무 과목에서 좋은 성과를 얻어 재판연구원에 우선선발 된 상태였다.


검찰은 언제나처럼 인성검사 시점을 법원의 그 시간대와 동일하게 맞추었다.

그것도 두번이나 시간을 옮겨서 중복합격이 절대로 이뤄질 수 없도록


검사와 재판연구원을 준비하던 학생들은

적어도 그 날에는 결정해야만 했다.

사법연수원이 있는 일산으로 향할지

법무부가 있는 과천으로 향할지


그 날 그 시간대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자동으로 합격이 취소되어 버린다.


형사법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던 나는

당연히 검찰로 향하려 했으나

어느덧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우선선발 된 경우는 탈락된 케이스가 없으므로 법원을 택할 경우 합격이 거의 보장됨에 반해

검찰을 택할 경우 본시험 통과부터 장담할 수가 없었다.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과천으로 가야지 하다가도

자꾸만 떠오르는 맘고생 심하셨던 부모님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주저하고 주저하다 나는 결국 일산 마두역으로 향했다.


인성검사를 마치고 최종합격을 한 나는 그 해 부모님들의 웃는 얼굴 속에서 추석을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법원에 처음들어와 내가 배정받은 곳은 형사부였다.


판결문과 검토보고서를 쓰며 내 나름대로 고민하며 일을 해나갔으나, 형사법에 자신이 있던 내 수험생 때의 지식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듯 했고, 한참을 헤매이다 겨우 업무에 적응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 맞이한 법조인 선배님들인 우리 부장님 세분은 실력이나 인품이나 흠잡을데 없이 완벽하셨다.


처음 1년차 때의 나는 그분들의 위대함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한 채 생각없이 1년가량의 시간을 보내버렸고, 그렇게 2년차가 되던 해에 나는 고법 민사부로 올라가게 되었다.


처음 고법에 와서 느낀 감정은 차가움이었다.

다들 업무가 바쁘셔서 그런지 여유가 없어 보였고, 지법에 있을 때보다 따스함이 부족해 보였다.


형사부 업무만 해봤던 나는 민사부에, 그것도 고법에 오게되어 실수를 밥먹듯이 했고, 부장님들 기대에 충족하지 못한것 같아 자책감도 많이 들었다.


작성한 판결초고를 드리고

선고가 된 판결문과 비교하면서

나의 실수를 확인하는 과정은 꽤나 지루하고 괴로운 과정이었다.


그래도 그렇게나마 학습을 하여

최대한 실수를 줄이고 싶었기에 이를 멈추지 않았으나 실력이 향상되었는지 되묻는다면 여전히 자신이 없다.


나는 선천적으로 게으르고 나태하며

꼼꼼하지도 못하고 거기에다 고집도 세다.

남들과 비교했을 때 성격이 부드럽지도 않으며 항상 무언가를 완벽하게 해내는 경우가 드문 편이다.


살아오며 나를 되돌아보면

항상 무언가를 시작하든 어느정도는 곧잘 하여 노력을 많이 쏟아붓지 않았으며,

정점을 찍지 못했더라도 상위권까지 가는 것은 쉬웠기에 무언가를 온전하게 매달리지 않았다.


그런 내가 우수한 분들이 가득 모인 법원에 오게 되니 스스로의 한계와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


머리도 비상한데 집념을 가지고 밤을 지새우며 노력을 아끼지 않는 고법 부장님들을 보면 과연 나는 무엇을 하기 위해 여기 와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반성의 시간 속에서 늘어져있기도 하였으나

눈을 빛내며 몰두하던 시간들도 있었다.


지법에서의 일이다.

검사가 던진 하나의 의문에 꽂힌 나는

그 부분을 물리학적으로 파보고 싶어졌다.


내가 가진 물리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여러가지 경우의 수에 따라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나는 며칠밤을 지새웠고, 그 결과 서로 다른 결론의 판결문을 두개 작성하였다.


비록 내가 공을 들였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나머지 작성본 의견대로 결론이 정해졌으나

그 때의 나는 내가 가진 의문을 모두 해소할 수 있어 후련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고법에서의 일이다.

내부 비교법학회 회원이던 나는 발표를 맡게 되었고 스토킹처벌법을 주제로 삼아 논문을 작성하기로 마음 먹었다.


몇날 며칠을 지새며 독일, 일본의 법조문과 학계 의견을 파악했고, 그 시점까지 나온 스토킹을 주제로 한 관련 논문을 모조리 읽고 고민했다.


그렇게 독일, 일본의 법제도와 비교했을 때 우리 스토킹처벌법이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하여 나름대로 상세히 분석한 논문을 작성할 수 있었고, 재직중 논문을 남겼기에 연구원으로서의 본질에 충실한 것이라는 자부심도 가질 수 있었다.


이렇듯 법원에서 보낸 나의 2년은

자조와 자부심을 수없이 교차하며 느끼던 마치 파랑과도 같은 흐름이었다.



이제 퇴직을 하루 앞둔 오늘 밤

지난 2년의 시간들을 돌아본다.


저년차 법조인으로서 존경할만한 선배들의 많은 면모를 볼 수 있었으며, 스스로의 한계와 장점도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이런 휘몰아치는 시간들 사이사이에는 힘든 시간을 함께 버텨주던 연구원 동기들과 운동을 같이하던 친구들 등 수많은 조력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었던 나의 파도를 뒤에서 밀어 해안까지 도달하게끔 해준 바람과도 같았다.


그런 시간들을 거쳐 나는 첫번째 법조인으로서의 삶을 마치고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려 한다.



항상 끝은 아쉬운 법이다.

송별회를 해준다는 이유로 다들 모여 나의 퇴직을 축하해주던 동기들과의 술자리를 거쳐 돌아온 나의 방안은 오늘따라 특히나 공허하다.


2년간 내 인생의 조각들로 형성되어온

이곳의 많은 사람들을 두고

나는 어디로 가려 하는가.



이제 새로운 곳에 가서 내가 다른 시간을 보내게 된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과의 시간도 과거의 추억이 될 뿐이다.


그렇기에 오늘 내가 이 방안에서 맞이하는 밤이

늘 익숙했던 그것이지만

결코 익숙하게 보낼 수 없는 그것일 것이다.



그래서 바쁘다는 핑계로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내 삶의 이야기를 여기다 남겨두려 한다.


오늘의 이 감정을 잊고싶지 않으며

이 감정을 지닌 내가 2년 후에는 다른 곳에서 어떤 감정을 노래할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삶 속에서

항상 맞이하는 또 하나의 시작과 끝을

여기에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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