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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날은 언제나 멀다 (ep.21)

균열과 균형 사이 - #21. 억눌린 목소리, 가려진 진심

by lululala


#21. 억눌린 목소리, 가려진 진심


총무팀 사무실은 한창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행사 준비와 주요 계약 검토가 겹쳐 팀원들은 책상에 붙어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김동현 팀장은 사무실 한쪽에서 이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항상 팀워크를 강조하던 그였다. 특히나 일이 몰려 있는 요즘, 김동현은 예민해져 있었다.


정혜진 대리는 오전부터 핸드폰을 확인하며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린이집에서 온 메시지가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혜진 대리님, 무슨 일 있으세요?" 박수현 대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정혜진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어린이집에서 오늘 아이가 좀 예민하게 구는 것 같아서요. 그냥 퇴근 시간까지 잘 버텨줬으면 좋겠네요."


그러나 오후 4시가 지나자 어린이집 교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녀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로 향했다.

"정 대리님, 아이가 계속 울고 있어서 좀 불안한 상태입니다. 혹시 일찍 데리러 오실 수 있으세요?"


정혜진은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일이 가득 쌓여 있는 상황에서 퇴근 시간을 앞당길 수는 없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어 급히 친정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미안한데 오늘 부탁 좀 할게요. 어린이집에 가서 애 좀 데리고 와주실 수 있어요? 제가 지금 도저히 나갈 수가 없어서..."


전화기를 끊고 나서도 정혜진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엄마로서 아이를 직접 돌보지 못한다는 죄책감과 자신이 맡은 업무를 끝마쳐야 한다는 책임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밤 9시를 훌쩍 넘긴 사무실에는 무거운 피로감이 감돌고 있었다.

정혜진은 계약서의 세부 항목을 검토하며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옆자리의 박수현 대리도 피곤했는지 고개를 번쩍 들며 정혜진에게 말을 걸었다.

"혜진 대리님, 조금 쉬었다 하세요.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박수현이 힘없이 말했다.


정혜진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저도 이거만 마무리하면 될 것 같아요."


그녀는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지만, 글자가 점점 흐릿하게 보였다.

손가락은 키보드를 따라 움직였지만, 머릿속에는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렇게 늦게까지 일하는데, 애가 엄마를 찾지 않았을까?’

그녀의 생각은 김동현 팀장의 목소리에 끊겼다.


"정 대리, 계약 검토는 어느 정도 됐습니까? 오늘 밤까지 끝내야 내일 아침 보고서에 넣을 수 있습니다."

정혜진은 목이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만 더 하면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바로 전달드릴게요."



시계가 10시를 훌쩍 넘어갈 무렵, 박지영 차장은 커피잔을 들고 조용히 김동현 팀장 자리로 다가갔다.

사무실 한쪽에서 그는 여전히 자료를 보고 있었다.


"팀장님, 잠시 시간 괜찮으실까요?" 박지영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김동현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박 차장, 무슨 일이죠?" 김동현의 목소리도 지쳐 보였다.


박지영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요즘 팀원들이 많이 지쳤습니다. 행사가 중요하다는 걸 알지만, 조금 더 여유를 주시면 좋겠어요."


김동현은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압니다. 하지만 회사의 중요한 일정이고, 실수하지 말아야 해요. 특히 이렇게 업무가 몰릴 때는 모두가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박지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팀장님, 팀원들도 사람입니다. 너무 무리하면 오히려 능률이 떨어지고 불만이 쌓일 수 있어요. 특히 워킹맘인 혜진 씨 같은 경우는 개인적인 사정도 많잖아요."


김동현은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혜진 씨가 힘든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개인 사정이 팀보다 우선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다들 희생하면서 일하고 있는데, 그런 모습이 팀워크를 깨뜨릴 수 있어요."


박지영은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나서 차분히 말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팀워크를 유지하려면 팀장님께서도 조금 더 이해와 배려를 보여주셔야 할 것 같아요. 직원들이 팀장님을 존경하는 건 단지 성과 때문만이 아니잖아요."


김동현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박 차장 말이 틀린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제 자리에서 보면 때로는 강경하게 나가는 것도 필요합니다."


박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죠, 팀장님. 그래서 저도 팀장님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우리 팀을 오래 끌고 가기 위해선 조금 더 유연해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저도 직원들과 이야기하며 균형을 맞춰보겠습니다."


박지영의 진지한 표정에 김동현은 표정을 풀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박 차장이 잘 조율해 주세요. 저도 너무 몰아붙이지 않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총무팀은 그렇게 힘든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총무팀의 무거운 분위기는 다음날도 이어졌다. 사무실은 하루종일 긴장된 분주함 속에 움직이고 있었다.

팀원들은 각자 맡은 서류를 검토하거나 자료를 정리하며 업무에 몰두하고 있었다.


시계가 오후 4시 55분을 가리키자, 정혜진 대리는 자리에서 서류를 정리하며 조용히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박지영 차장이 말했다.

"정 대리, 퇴근 준비하시네요."


정혜진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히 답했다.

"네, 차장님. 오늘은 스케줄 근무 때문에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요. 제가 맡은 자료는 다 정리해서 공유드렸습니다."


"알겠어요. 잘 들어가요." 박지영은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정혜진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동료들에게 인사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다들 고생하세요."


"예. 내일 봬요." 박수현 대리가 고개를 들어 인사했지만, 오늘도 여전히 바쁜 직원들은 모니터에 얼굴을 고정한 채 시선을 주지 않았다. 최영준 과장은 서류를 넘기며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정혜진이 사무실을 나가고 문이 닫히자, 잠시동안 조용하던 사무실에 최영준이 책상 위 펜을 내려놓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매번 저렇게 먼저 가니까, 참…."


옆자리의 이명훈 과장이 모니터를 응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뭐, 스케줄 근무가 정해진 거니까 어쩔 수 없긴 하죠."


"어쩔 수 없는 건 맞는데, 남아 있는 우리는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최영준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박지영 차장은 동료들의 대화를 들었지만,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서류를 넘기며 짧게 말을 던졌다.

"혜진 대리도 사정이 있으니까 그런 거겠죠. 다들 각자 할 일에 집중하자고요."


김동현 팀장은 아무 말 없이 자료를 검토하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팀원들의 고단한 표정을 흘깃 보았지만,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정혜진 대리가 먼저 퇴근하는 걸 두고 뭐라고 할 순 없지만, 이게 팀 분위기에 좋을 리 없지.'

팀장의 마음속에도 복잡한 생각이 오갔지만, 그는 이를 내색하지 않고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는 못마땅함이 묻어 나왔다.



오후 내내 팀원들은 행사 운영 시나리오와 계약서를 정리하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박지영 차장은 사무실 한쪽에서 파일을 검토하며 간간이 동료들에게 지시를 내렸고, 최영준 과장은 여러 차례 수정된 자료를 출력하고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박수현 대리도 박지영 차장과 행사 현장의 동선을 체크하며 누락된 부분이 없는지 체크하고 있었다. 사무실은 분주함 속에서도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시계가 오후 6시를 가리키자, 김승우 주임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그는 박지영 차장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차장님, 오늘은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맡은 일은 다 끝냈고, 공유드린 자료 확인 부탁드립니다."


박지영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들어 김승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요. 들어가요." 박지영의 말투는 평소와 달리 무미건조했다.


그러나 김승우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사무실 문을 나섰다.


최영준이 피식 웃으며 소곤거렸다.

"사실 김 주임, 팀장님이 주임이라 부담 안 주려고 일부러 큰일 안 시키는 거, 전혀 모르는 것 같죠? 자기 일만 끝나면 다인 줄 아는 게 참..."


박지영 차장은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김동현 팀장이 고개를 들어 김승우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굳어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팀장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바쁜 와중에 자기 할 일만 끝냈다고 먼저 나가는 게 말이 됩니까?"

팀원들은 모두 일손을 멈추고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박지영 차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팀장님, 김 주임도 아침부터 열심히 일했고, 맡은 부분은 모두 처리했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알죠." 김동현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팀워크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다들 고생하는데, 저렇게 자기 일만 끝냈다고 퇴근하면 남은 사람들은 무슨 기분이겠어요? 이런 태도는 팀 사기를 떨어뜨립니다."


박지영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가 내일 김 주임과 얘기해 보겠습니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팀장님."


김동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요.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안 됩니다. 팀 전체가 같이 움직이는 게 중요하니까요."


사무실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고, 팀원들은 아무 말 없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정혜진에 이어 김승우마저 떠난 사무실의 빈자리는 쉽게 메워지지 않았다.



7시가 다 되어 김동현 팀장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사무실 안의 분위기가 조금 느슨해졌다.

남겨진 팀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박지영 차장이 가장 먼저 말을 꺼냈다.

"진짜, 팀장님 방식은 너무 답답하지 않아요? 시대가 바뀌었는데, 아직도 저렇게 전통적인 가치관에만 의존하다니."


이명훈 과장이 책상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그러니까요. 퇴근 시간이 돼도 분위기가 이런 식으로 경직된 건 팀장님 탓이 크죠. 워라밸이란 말은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아요. 퇴근 시간 지키는 게 무슨 죄인가요?"


박수현 대리도 말을 이어갔다.

"맞아요. 일 다 끝났으면 퇴근하는 게 당연한 건데, 꼭 무슨 '팀워크'라는 명분으로 잡아두잖아요. 요즘 회사들은 효율적으로 일하라고 하지, 야근 문화 강요 안 한다고요."


이명훈 과장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웃긴 건, 본인은 정작 급한 일 없으면 팀원들이 일하고 있어도 시간 잘 맞춰 나간다는 거잖아요. 그리고 라떼 얘기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솔직히 지겨워요."


박지영 차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러니까요. ‘내가 젊었을 땐 말이야’ 하면서 자기 때랑 비교하는데, 우리 세대는 일을 잘하고, 정시에 퇴근하는 게 능력이라는 걸 왜 몰라요?"


박수현 대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받았다.

"특히 김승우 주임한테는 너무 엄격해요. 꼼꼼하게 일 잘하는데, 워라밸 중시한다고 싫은 소리를 듣는 게 말이 돼요?"


"그런데 김 주임이 그렇게 매일 정시에 칼퇴하는 게 꼭 좋아 보이지는 않아요. 다들 일 많을 때는 야근도 하고 그러잖아요. 남아 있는 동료도 생각해야죠."

최영준 과장은 여전히 불만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러자 이명훈 과장이 팔짱을 끼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죠. 항상 그렇게 퇴근하는 사람 눈치 주면 누가 편하게 일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솔직히 이런 건 노조에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다들 불만 많으면서 왜 아무도 말 안 해요?"


순간, 사무실 안의 공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박수현 대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거 진짜예요. 계속 이렇게 참고만 있으면 아무것도 안 바뀌잖아요.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꼰대 문화가 왜 계속되는 건데요?"


"근데 누가 얘기하겠어요? 다들 불이익당할까 봐 조용히 있는 거죠." 이명훈이 말했다.


박수현은 고개를 저으며 푸념하듯 말했다.

"김 주임처럼 정시 퇴근하는 사람도 저렇게 팀장님한테 찍히는데, 우리가 나서면 뻔하지 않겠어요?"


박지영 차장이 자리에서 몸을 기대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다들 눈치 보면서 버티는 거죠. 하지만 솔직히 더 이상은 못 참겠어요. 이런 비효율적인 분위기, 이제 그만해야 하지 않나요?"


이명훈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언젠가는 얘기할 사람이 나올 거예요. 근데 그게 오늘은 아닐 것 같네요."

모두가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여전히 켜켜이 쌓인 불만과 변화에 대한 갈망이 묻어 있었다.

박지영 차장이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팀장님 돌아오시겠다. 다시 ‘팀워크 강의’ 들을 준비나 하죠."

사무실은 다시 평소처럼 바쁜 척하는 모습으로 돌아갔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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