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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날은 언제나 멀다 (ep.22)

균열과 균형 사이

by lululala


#22. 새로운 시선, 변화의 시작


총무팀 사무실. 계속된 야근에도 업무는 줄어들 줄 몰랐고, 팀원들은 여전히 바쁘기만 했다.

각자 자리에서 서류를 검토하거나,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혹은 전화로 협력업체와 일정을 조율하는 등 해야 할 일이 계속 늘어만 가는 듯했다.

이런 광경은 김동현 팀장에게 익숙했고, 직장인이라면 으레 그러기 마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전 10시를 조금 넘긴 시각, 김동현은 한상민 실장에게 호출을 받았다. 별다른 설명 없이 호출받은 상황에 약간의 불안함을 느끼며, 김동현은 실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서자, 한상민 실장이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 팀장, 앉으세요.” 한상민 실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없이 커피를 한 잔 타기 시작했다.


커피가 내려지는 짧은 시간 동안, 김동현은 이상하게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묘한 긴장감이 실장실에 감돌았다.


“요즘 팀이 많이 바쁜 것 같네요. 행사 준비도 있고, 계약 검토도 겹쳐서 쉽지 않죠?”

한상민 실장이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김동현은 한상민 실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실장님. 팀원들도 각자 맡은 일을 잘 해내려고 노력 중입니다.”


한상민 실장은 그의 말을 듣고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총무팀 직원들이 모두 열심히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김 팀장이 앞장서서 노력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다만, 최근 팀에서 잦은 야근과 관련해 직원들이 힘들어하고 불만이 쌓인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순간 김동현의 얼굴에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이 섞인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불만이요?”


그는 의아한 듯 되물었다. “저희 팀원들은 항상 맡은 일을 책임감 있게 처리해 왔습니다. 혹시 정확히 어떤 불만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별건 아니에요.” 한상민 실장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팀원들이 지치거나 불만을 품으면 팀 운영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김 팀장은 책임감이 강한 리더예요. 그런데 가끔은 너무 많은 걸 짊어지고 있지 않나 걱정되기도 합니다.”


김동현은 속으로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한상민 실장의 말은 분명 선의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팀 내 불화에 대한 이야기가 실장에게까지 전해진 사실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말씀 감사합니다, 실장님. 앞으로 팀 분위기를 더 세심하게 신경 쓰겠습니다.”


실장실을 나오는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사무실로 돌아와서도 그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팀원들은 그런 팀장의 변화를 감지했지만, 누구도 먼저 말을 걸지 못했다.


김동현은 이따금씩 한숨을 쉬며 책상을 두드렸다. 실장의 말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책임감이 강한 리더로 평가받고 있는 건 알겠지만, 내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건가?’


그는 그간 팀원들에게 무리하게 일을 분배했는지, 혹은 자신의 완벽주의가 팀의 분위기를 해친 것은 아닌지 자문하기 시작했다.



오후 3시가 넘어가자, 김동현은 박지영 차장을 불렀다.

박 차장은 팀 내에서 팀원들과의 소통이 가장 원활한 사람으로, 항상 적절한 균형감을 유지하며 팀장과 팀원들 사이를 조율하는 역할을 맡아왔다.


“박 차장, 잠깐 얘기 좀 할까요?” 김동현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박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나왔다. 두 사람은 사무실을 나와 휴게실로 향했다.


김동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차장님, 요즘 팀 분위기가 어떤 것 같아요?”


박지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팀원들 사이에서 피로감이 쌓이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야근이 계속되고, 업무도 많아졌어요. 다들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지만, 가끔은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아요.”


김동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오늘 실장님께서도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실장님한테까지 이런 얘기가 들어갔는지 모르겠네요.”


박지영은 조심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마 팀원들 중 누군가가 다른 부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겠죠.”


박지영은 바로 말을 이어갔다.

“팀장님, 제가 예전에 비슷한 상황을 겪었어요. 예전에 있던 팀에서 팀장님과 팀원들 사이에 갈등이 심해져서 결국 문제가 된 적이 있었거든요.”


김동현은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박지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

“그때 가장 큰 문제는 팀장님이 모든 걸 직접 책임지려 했다는 점이었어요. 팀원들에게 맡길 수 있는 일도 스스로 다 확인하고 처리하려다 보니, 팀원들은 신뢰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죠. 그러다 보니 사기가 떨어지고, 결과적으로 성과도 나빠졌어요.”


김동현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도 팀원들에게 신뢰를 주고 싶지만, 솔직히 모든 걸 맡기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결국 일이 잘못되면 그 책임은 내가 져야 하잖아요.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팀원들에게도 좋지 않고, 내 평가가 나빠지면 팀원들에게까지 영향이 갈 수밖에 없어요. 팀장이라면 팀원들의 업무를 모두 확인할 책임이 있는 게 아닐까요?”


박지영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팀장님, 팀원들에게 일을 맡긴다는 건 단순히 책임을 전가하는 게 아니에요. 신뢰를 주는 거죠. 팀장님께서 팀원들을 믿고 맡겨주시면, 그들은 그 신뢰에 부응하려고 더 열심히 노력할 겁니다. 물론 처음에는 실수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거예요. 조금 시간을 갖고 팀원들이 성장할 기회를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김동현은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박지영의 말과 한상민 실장의 조언이 교차했다. 그는 과거 자신이 팀원들에게 보여준 리더십 방식을 되짚어보며 생각했다.


‘모든 걸 내가 책임지려 했던 게 오히려 팀원들에게 부담을 주고, 내가 그들을 믿지 못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던 걸까?’



김동현은 그날 저녁 사무실에서 혼자 남아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감정과 생각이 얽혀 있었다. 그는 책상 위에 펼쳐진 서류를 멍하니 바라보며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을 떠올렸다.


‘나는 왜 모든 걸 내 손으로 해결하려 했을까? 팀원들에게 신뢰를 준다는 게 정말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그는 한상민 실장과 박지영 차장의 말을 곱씹으며 자신이 그동안 쌓아온 리더십에 대해 자문했다.

책임감이 강한 팀장이 되는 것이 그의 목표였고, 그는 그것이 자신과 팀 모두에게 최선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지금 그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김동현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는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팀원들이 없는 사무실에는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문득 팀원들이 야근하며 피로에 지친 얼굴로 퇴근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니었을까? 과연 팀을 위해 내가 내린 선택들이 올바른 방향이었을까?’


그는 처음 총무팀에 발령을 받아 왔을 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팀원들은 열정적이고 자신감이 넘쳤다. 사무실에는 유쾌한 대화가 오갔고, 여느 팀도 부럽지 않을 만큼 분위기도 좋았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눈빛에는 피로와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리더십 때문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복잡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걸쳤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사무실. 컴퓨터와 형광등이 모두 꺼진 공간은 차가운 공기로 가득했다. 김동현은 문을 닫으며 복도를 걸어 나갔다.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팀원들의 모습이 맴돌았다.


피곤에 지친 얼굴로 야근을 하던 박수현 대리, 한숨을 쉬며 서류를 검토하던 최영준 과장, 그리고 가족을 위해 일찍 퇴근을 요청하던 정혜진 대리가 차례로 떠올랐다.


‘나는 그들에게 리더로서 무엇을 해주었던 걸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1층을 눌렀다. 문이 닫히는 짧은 순간, 마치 그의 마음도 닫히는 듯 답답함이 밀려왔다.


김동현은 스스로에게 다시 묻고 있었다. '팀원들은 그에게 신뢰를 보내고 있었지만, 내가 그걸 모르고 있었던 걸까?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짊어지겠다고 생각한 것이 오히려 팀원들에게 부담을 준 것은 아니었을까?'


로비를 빠져나와 어둠이 짙게 깔린 밤거리를 걷자, 차가운 바람이 그의 옷깃으로 스며들었다. 김동현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고개를 들었다. 길게 이어진 가로등 불빛이 줄지어 늘어선 도로는 마치 끝없이 이어지는 그의 고민처럼 느껴졌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내 방식이 틀린 건 아니었겠지. 하지만, 이제는 바꿔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 혼란이 남아 있었지만, 그 혼란 속에서 작고 희미한 결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변화는 두렵지만, 그것이 지금 팀과 자신이 필요한 방향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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