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과 균형 사이
지역개발사업팀 사무실은 어딘지 평소와 다르게 차분해 보였다. 며칠 전 인사팀에서 전달된 공지가 팀 내 분위기를 미묘하게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강도윤 과장이 문서를 읽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 다면평가, 기존에 하던 평가랑은 많이 다르네요. 그전에는 단순히 진단 목적으로만 쓰였는데, 이번엔 인사고과에 반영된다고 하네요."
나정원 주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래서 이번엔 부하 직원도 상사를 평가할 수 있다는 거죠? 그건 꽤 신선한데요."
강도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예전엔 상사만 우리를 평가했지만, 이제는 부하직원, 동료, 상사가 다 참여하는 거니까요. 이론적으로는 더 공정할 수 있겠죠."
이번에는 조민서 대리가 문서를 정리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 다면평가가 고과에 반영된다니 조금 신경 쓰이긴 하네요. 서로 견제하는 분위기가 생기진 않을까요?"
강도윤 과장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상사 중심의 평가보다는 낫겠죠. 여러 시선에서 평가받는 게 더 공정할 테니까요."
이준혁 과장이 끼어들었다. "맞아요. 그런데 저는 복직한 지 얼마 안 됐으니, 괜히 평가에서 불리하게 작용할까 걱정돼요. 괜한 걱정인가요?"
조민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요즘 육아휴직 다녀왔다고 평가에서 불이익 주는 분위기는 아니잖아요. 어쨌든 이번에는 부하 직원도 참여하니까, 그동안 못했던 피드백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좋은 변화 같아요. 서로 더 솔직하게 평가할 수 있다면요."
이준혁은 그래도 걱정이 되는지 조민서를 향해 다시 걱정을 쏟아냈다. "모두가 공평하게 평가받기를 바라지만, 감정이 개입되면 어쩔 수 없잖아요. 이번 평가가 정말 공정하게 진행될 수 있을지…"
이번에는 나정원이 조민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지만 이번에 부하 직원도 평가에 참여할 수 있는 건 좋은 변화라고 생각해요. 서로를 견제할 수도 있고, 그만큼 솔직한 피드백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직원들은 내심 다면평가를 기대하면서도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몰라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점심시간, 홍보팀의 김주연 대리와 박진수 주임이 나란히 앉아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김주연이 밥을 먹다 말고 입을 열었다.
"이번 다면평가, 좀 기대돼요. 그동안 우리 팀장님에 대해 말 못 했던 것들도 이제 제대로 전달할 수 있잖아요."
박진수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그렇죠. 하지만 너무 날카롭게 얘기했다가 괜히 찍히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익명성은 확실히 보장되는 건가요?"
김주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인사팀 얘기로는, 익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명의 평가가 합산되어서 나온 결과만 전달된다고 했어요. 누가 뭘 썼는지는 알 수 없게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박진수는 여전히 망설이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팀장님이 그동안 우리 의견에 무심했던 것도 사실이잖아요. 이번에 그런 부분을 개선할 기회가 될까요?"
김주연은 미소를 지으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저는 이번 평가가 좋은 변화를 가져올 거라고 생각해요. 팀장님들도 이제는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 될 거고, 우리도 좀 더 솔직하게 의견을 낼 수 있을 테니까요. "
박진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네요. 사실 우리 팀장님이 능력은 있지만 가끔 너무 업무 지시만 하셔서 불편했던 것도 있거든요. 이번에 이런 걸 전달하면 조금 더 협력적인 분위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죠."
김주연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맞아요. 사실 이런 피드백 시스템이 제대로 자리 잡으면 우리 팀도 더 나아질 거라고 봐요. 물론 초반에는 혼란이 있겠지만, 변화라는 게 원래 그런 거잖아요."
박진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죠. 이번엔 우리도 좀 더 자신 있게 의견을 내봅시다. 너무 겁먹지 말고요."
김주연과 박진수는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평가에 대한 얘기만 했다. 머릿속은 온통 평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 시각, 회사 옥상에서는 몇몇 팀장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 다면평가… 솔직히 부담스럽지 않아요?" 홍보팀 문성태 팀장이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우리 때는 상사가 평가하면 그걸로 끝이었잖아요. 솔직히 상사 지시에는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이제는 팀원들한테도 평가받는다니, 지시할 때도 눈치를 봐야 할 것 같아요."
기획예산팀 차경민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맞아요. 예전에는 상사가 절대적이었는데, 이젠 팀원들 사이에서 인기투표처럼 흘러갈까 봐 걱정입니다. 누가 더 잘 보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을 테니까요."
지역개발사업팀 정기훈 팀장은 침묵을 지키며 담배를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요즘은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잖아요. 팀원들이 불만 있으면 바로 평가로 드러날 테니, 업무 지시도 더 조심해야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또 업무 효율이 떨어질까 걱정도 되고요."
문성태는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그렇죠. 예전에는 상사가 다 책임지고 알아서 했지만, 지금은 서로 견제하는 분위기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요. 상호평가가 제대로 자리 잡으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리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갈등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죠."
차경민은 고개를 돌려 정기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우리가 적응해야 하겠죠. 하지만 솔직히 이번 변화가 정말 긍정적일지 확신은 안 서요. 평가가 공정하게 이뤄질 수 있을까요? 개인 감정이 들어가면 더 큰 문제 아닐까요?"
정기훈은 그의 말을 곱씹으며 담배를 입에 물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솔직히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 잘못하면 팀워크가 무너질 수도 있겠죠. 서로의 단점을 들추는 데만 집중한다면, 협업은커녕 불신만 쌓일 겁니다."
문성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실질적으로 팀 전체 분위기를 해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입니다. 이런 걸로 불필요한 경쟁만 생기면 결국 손해는 우리 팀 전체가 보겠죠."
정기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보면 회사가 책임을 회피하려는 수단 같기도 합니다. 부담을 나눠 갖게 해서 관리하기 편하게 만들려는 거겠죠. 하지만 그 부담을 떠안는 건 결국 일선 부서가 아닐까요."
정기훈은 답답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문성태와 차경민도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정기훈의 마음과 같았는지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담배를 물고 있었다.
인사팀에서 다면평가를 도입한다는 문서가 전 부서에 시행된 이후 회사 분위기는 조금 달라진 듯했다.
지역개발사업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기훈 팀장은 평소와 같이 책상에 앉아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었지만, 말수가 확연히 줄어들었고, 이는 팀원들도 같았다. 급한 일이 아니면 팀장에게 보고하기를 꺼려했다.
점심시간이 되어도 사무실 분위기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나정원 주임과 조민서 대리는 나란히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메뉴에 대해 웃으며 얘기하거나,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겠지만, 오늘은 둘 다 말을 아꼈다. 쟁반을 들고 자리에 앉은 후에야 나정원이 겨우 입을 열었다.
"아까 팀장님이 보고서 검토하면서 뭔가 말을 하려다 말더라고요. 뭐 잘못된 게 있었던 걸까요?"
조민서는 숟가락을 들던 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 듯 대답했다. "글쎄요… 요즘 다들 말 한마디에도 신경 쓰는 것 같아요. 그냥 다면평가 때문이겠죠."
나정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맞아요. 근데, 너무 조심스러우니까 더 불편한 것 같아요. 예전처럼 그냥 편하게 일하면 좋을 텐데."
오후 회의실에서도 미묘한 분위기는 계속됐다. 강도윤 과장이 팀 현안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정기훈 팀장은 자료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발표가 끝난 뒤 정기훈이 조용히 말했다.
"잘 정리했네요. 다만, 여기 5페이지… 수치가 지난주랑 조금 다른 것 같아요. 확인 한 번 부탁할게요."
강도윤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정기훈은 잠시 강도윤의 표정을 살피다, 별다른 반응 없이 다음 자료로 넘어갔다. 회의실에 앉아 있던 나머지 팀원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자료에 시선을 고정했다. 회의가 끝난 후, 모두가 조용히 나가려는 가운데 정기훈이 말을 덧붙였다.
"수고 많았어요. 다들 신경 쓰느라 고생 많죠. 그래도, 평소처럼 하면 됩니다. 너무 의식하지 말고요."
그 말은 분명 위로였지만, 오히려 자신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복도에서 오상우 실장이 지나가며 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수고했어요. 오늘 많이 바빴죠?" 그는 평소보다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팀원들은 잠시 멈칫하더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실장님도 조심이 들어가세요."라며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오상우가 떠난 뒤, 조민서가 나정원에게 조용히 말했다. "실장님, 오늘 왜 이렇게 친절한 거죠? 평소 같지 않아요."
나정원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실장님도 평가받으시나 봐요."
둘은 작게 웃었지만, 금세 대화를 멈췄다. 복도 맞은편에서 몇몇 직원들이 대화하다가 둘을 보고는 갑작스레 입을 다무는 모습이 보였다.
누구도 다면평가라는 말을 직접 하진 않았지만, 팀장과 실장, 팀원들 모두 말과 행동을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 분명히 느껴졌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한 일상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긴장감은 회사의 분위기를 바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