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과 균형 사이
새해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에는 갑작스러운 소식이 돌았다. 연초 정부의 경상비 절감 정책에 따라 모든 부서의 경상비 예산을 5%씩 삭감해야 한다는 공문이 내려온 것이다. 기획예산팀은 이 정책을 회사 내에서 주도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회사의 머리와 같은 위치로, 임원들로부터 많은 신뢰를 받고 있었던 기획예산팀은 이번에도 중요한 조정 역할을 맡게 되었지만, 다른 부서와의 갈등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기획예산팀의 차경민 팀장은 회사 내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는 S대 출신으로 민간기업에서 회계결산 업무를 맡으며 경력을 쌓았고, 이 회사로 이직한 후 예산 실무를 담당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의 정확한 판단력과 실행력은 임원들 사이에서도 높은 신뢰를 얻었고, 이는 그가 팀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그는 본인이 추진하는 업무에 대해 반론이 제기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고, 항상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기획예산팀의 사무실, 차경민 팀장은 사무실 중앙에 서서 보고서를 펼쳤다. 그는 항상 자신감 넘치는 자세와 냉철한 표정으로 직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전 부서에 5% 절감 방안을 마련해서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보세요.” 차경민은 손가락으로 문서를 두드렸다. “이건 단순히 숫자를 줄이는 문제가 아니에요. 각 부서에서 삭감안을 내놓더라도 실제로 타당한지 검토해야 하고, 부족하면 우리가 직접 조정해야 합니다. 특히, 예외를 요구하는 부서가 나오면?”
박성우 차장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예외를 요구하는 부서가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지역개발사업팀 같은 곳이겠죠. 그쪽은 최근 인력을 보강했으니 경상비 삭감이 더 어렵다고 주장할 겁니다.”
차경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죠. 하지만 원칙은 원칙입니다. 모든 부서가 동일하게 5%를 삭감해야 합니다. 설령 인력이 보강되었다고 해도 특별 대우를 할 순 없어요.”
박성우는 서류를 넘기며 덧붙였다. “그들이 이런 사정을 이유로 삭감을 회피하려 한다면, 구체적인 근거와 대안을 가지고 와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논의조차 어렵겠죠.” 이럴 때면 차경민과 박성우의 호흡이 유독 잘 맞았다.
한편 지역개발사업팀은 어수선했다. 이번 경상비 삭감안은 특히나 이 팀에 부담이 컸다. 최근 몇 개월 동안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인력을 늘린 상황에서 예산 삭감은 곧 업무의 차질을 의미했다. 정기훈 팀장은 책상에 팔꿈치를 올리고 손을 이마에 짚은 채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걸 어떻게 줄이라는 건지…” 정기훈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민원 처리도 많고, 프로젝트 일정도 이미 빡빡한데, 5%를 줄이려면 결국 어디선가 희생해야 한다는 거잖아.”
강도윤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더구나 이번 삭감안은 단순히 돈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력 운영에도 영향을 줄 겁니다.”
이준혁 과장은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기획예산팀 출신인 그는 누구보다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젠 지역개발사업팀 소속으로서, 팀의 입장을 지켜야 했다.
“제가 한번 기획예산팀에 가보겠습니다.” 이준혁이 말을 꺼내자 팀원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이 과장, 괜찮겠어요? 기획예산팀이 얼마나 깐깐한지 알잖아요.” 정기훈 팀장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거기 출신이니까, 오히려 협의할 여지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고 조금 후에 기획예산팀을 찾아갈게요.” 이준혁은 새로운 팀에서 뭐라도 빨리 해야 하다는 마음의 부담을 갖고 있던 차에 자신이 나서서 뭔가 보여주고 싶었다.
이준혁은 그렇게 한참을 예산서를 찾아보더니 자료를 챙겨서 기획예산팀을 찾아갔다. 복직과 동시에 차경민 팀장을 찾아가 잘 부탁드린다며 으레 인사를 드렸던 이준혁은 팀장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곧바로 박성우 차장에게로 갔다. 차경민은 이준혁이 왜 찾아왔는지 금세 알아채고 눈인사만 하더니 더 이상 시선을 주지 않았다.
박성우 차장은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이준혁 과장, 오랜만이군요. 복직했다고 들었습니다.” 차경민의 말에는 한겨울의 시린 건조함마저 느껴졌다.
“네, 차장님.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준혁은 자연스러운 미소로 대답하려 애썼다.
그러나 이내 박성우가 입을 열었다. “지역개발사업팀에서 온 걸 보면, 예산 삭감에 관해 할 말이 있다는 거겠죠?”
이준혁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역시 빠르시네요. 맞습니다. 현 상황에서 5% 삭감은 팀 운영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저는 이번 조정안에서 조금 더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성우가 손을 들어 그를 멈춰 세웠다. “유연한 접근이라… 말은 좋습니다. 하지만 이는 다른 부서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선택일 뿐입니다. 공정성은 어디로 갑니까?”
이준혁은 차분히 답했다. “공정성의 문제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모든 부서가 동일한 비율로 삭감할 경우,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팀이 더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회사 전체의 성과를 고려하면, 일부 팀에 예외를 두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성우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런 논리라면, 모든 부서가 예외를 요구할 겁니다. 결국 예외를 만들수록 회사의 예산 통제는 악화됩니다. 과장님, 기획예산팀에서 일했던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게 놀랍군요.” 박성우에게 예산은 통제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준혁의 손이 서류를 움켜쥐며 약간 떨렸다. “박 차장님, 저도 기획예산팀의 원칙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회사의 전체적인 성과를 위해 조금 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유연한 사고요? 대안이 있나요?” 박성우는 이준혁을 응시했다. “말뿐이라면 설득하기 어렵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보세요.”
이준혁은 기다렸다는 듯 차분히 서류를 펼쳤다. “물론입니다. 제가 준비한 조정안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이번 조정안은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사업 부서에서 추진 중인 주요 업무를 선별하고, 작년의 부서별 경상비 집행률을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
자료를 가져왔다는 말에 박성우의 눈에는 경계의 눈빛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한참을 박성우의 자리 앞에 서 있던 이준혁은 이제야 회의 테이블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이준혁은 각 부서의 예산 사용 내역과 그 중요성을 비교한 자료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예를 들어, 사업비 보다 일반 경비의 비중이 높은 부서에서 조금 더 삭감을 하고, 주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부서에서 사업 추진과 관련이 높은 경상비의 삭감 비율을 줄이면, 전체 효율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회사 전체 성과를 유지하는 동시에 예산 목표를 충족할 수 있습니다.”
박성우는 서류를 주의 깊게 살펴보며 가끔씩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 팀에서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얘기해 봤나요?”
이준혁은 대답했다. “아직 얘기하진 못했습니다. 기획예산팀에서도 동의해 주셔야 저희도 얘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산팀에서 이 자료를 검토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예상보다 길어졌고, 박성우의 얼굴에는 점차 관심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이 자료를 팀장님께 공유하고 내부적으로 논의해 보겠습니다. 결과는 이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이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부디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지역개발사업팀 사무실을 나간 지 2시간이 지나서야 이준혁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미 퇴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팀원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땠어요, 이 과장님? 설득할 수 있었나요?” 나정원이 물었다.
이준혁은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쉽지 않았습니다. 대화가 길어졌지만, 일단 박 차장님이 자료를 검토하겠다고 하셨어요. 이제 결과를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정기훈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생 많았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거죠. 역시 이준혁 과장이 기획예산팀 출신이라 말이 통하나 보네요. 우리 팀에 와서 다행이에요.”
강도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결국 다른 부서가 이를 받아들일지가 문제겠죠.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겁니다.”
사무실 안은 무거운 분위기에도 기대감을 보였다. 이준혁은 새로운 팀에 와서 자기 역할을 했다는 생각에 마음의 위안을 삼았다. 한편으로 박성우 차장과 또 어떻게 협의해야 할지 고민하며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무실에는 저녁을 향해 달려가는 태양의 붉은빛이 깊게 내려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