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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열 Sep 26. 2023

그때 그시절7

7편 변산면 대항리(2)

사람이 물에 빠져 죽으면 제일 먼저 달라들어 물어뜯어 먹는 게 상어와 갈치다. 그리고 마지막이 해삼이라고 한다 


대항리는 수심이 낮아 상어와 갈치는 없다. 수심이 낮은 바위틈에서 심심찮게 해삼과 소라가 있고 낙지도 있었다.


낙지, 굴, 바지락은 부안 장에 팔아 생계에 도움이 되었다.


우리 동네는 언덕에 천수답 몇 평만 논이지 전부 비탈에 있는 밭으로 이루어진 가난한 동네였다.


어촌도 농촌도 관광지도 아닌 어중충한 동네였다.


해수욕장이 폐장하는 9월이 지나면 수많은 사람이 남기고 간 쓰레기와 발자국만 있다. 텅 빈 해수욕장은 폐광촌처럼 을씨년스러운 찬바람만 분다


꺼문바우(송장바위)와 할매바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물귀신 나온다는 꺼문바우에서 우리 동네 이장이 해삼을 한 리어카를 잡아 곰소 어촌시장에 팔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무도 가지 않는 송장바위에서 시가 몇백만 원을 건져 올린 것이었다.


해발 200m쯤 봉화산이 있었고 정상에는 봉화대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전국적으로 위치 좋은 곳에 통신용으로 사용했다.


주위에는 밤과 머루, 어름이 많아 할아버지께서 꼭 나를 데리고 봉화산에 오르신다.


변산 앞 모든 섬을 볼 수 있고 만경 평야까지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내가 중학생쯤 되었을 때 봉우리에서 멀리 썰물로 드러난 드넓은 뻘밭과 쌍둥이 섬, 가덕도를 가리키면서 저곳이 전부 육지가 될 거라 하셨다


내 생애에는 보지 못하지만 나 죽고 나면 육지가 된다고 벌써 몇십 년 전 예언을 하셨다.


적중했다. 두 개의 섬 중 바위가 많은 섬은 새만금방조제 공사로 사용했고 하나는 새만금 휴게소가 들어섰다. 할아버지가 지적한 곳 전부 육지가 되었다.


내 고향 유례는 분명히 큰 항구는 아니었지만, 그보다 앞선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릴 적 내가 뛰놀던 바닷가 언덕에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와 그릇 깨진 새금팔이 함께 있는 것은 당연한 거로 생각했다.


우리도 조개껍데기는 쓸모 없어 거기에 버렸다.


그런데 서울대 고고학자가 대항리 바닷가 조개 쓰레기 속에서 새금팔과 돌로 만든 석기를 우연히 발견하여 연구해 보니 신석기시대 빗살무늬 토기라고 발표했다.


변산 마실길 관광지도에도 대항리 패총이라 이정표가 있다. 군산대 해양연구소 바로 앞이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 몇만 년 전에도 똑같이 마을이 있어 나랑 비슷하게 조개를 캐 먹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고고학자도 믿지 못하는지 그 뒤로 발굴도 연구도 사라졌다.


변산에서 제일 높은 산이 의상봉(해발 508m)이지만 알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북한에 있는 조그만 비행기도 다 감시할 수 있는 대형 레이다가 설치되어있는 미군 군사 비밀 지역 때문에 지도에도 표기가 되지 않았고 등산로도 없어 그 주위는 얼씬도 못했다. 하서면 비득지에서 올라가는 길은 있지만 우리는 한 번도 가보질 못했다. 월명암에서는 레이다를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는 경관이 수려한 산봉우리다.


거기서 거주하는 미군 직원들의 여름 피서 지역이 변산해수욕장이나 채석강이 아니다.


미국사람을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데 실지로 볼 기회가 없어서 그런지 동물 구경하듯 몰려오니 미군들도 사람이 많은 그런 곳은 피한다. 거의 사람 왕래가 없는 대항리 쪽 바위 밑에 그들만이 텐트를 치고 피서를 즐긴다.


거기에는 바위 사이로 졸졸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개울이기보다 더 적은 또랑이다. 물이 흐르는 중간에 남생이(거북이 일종)이가 살고 있다 하여 남생이 둠벙이라 했다.


바닷가 모래사장과 얼마 안 떨어진 외진 곳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1급수에서만 서식하는 참게와 민물 가재가 살고 있었다 


남생이 둠벙에 가면 미군들이 시원하게 마시려고 음료수 캔을 띄어 놓는다.


상식이와 내가 그걸 그냥 놔둘 일이 없다. 미군 몰래 쎄비와 바위밑에서 마셨다. 하나는 씁쓸하고 밋밋한 맛 무슨 맛인지도 모르는 음료수다. 한 모금 마시고 피마터 버렸다. 또다시 빨강 깡통을 따서 마셔봤더니 시원하고 상쾌한 맛이다. 세상에서 이렇게 시원한 음료는 처음인 것 같았다. 그 짜릿한 맛을 느끼는 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미군한테 들켜 버렸다. 뭐라 쏼라쏼라해 한마디도 못 들었지만, 빨강 깡통 하나 던져 주며 “게라리어~ 게라리어” 그런다. 내일 또 오라는 말인가? 다음날 또 갔다. 그날도 우리가 원했던 빨강 깡통 하나와 길죽한 아이스케키처럼 생긴 것을 주었다. 얼음은 아니었다. 그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고기 맛이 나면서 고소한 맛. 세상에 이런 맛이 있을까? 입에서 살살 녹았다. 내가 태어나 처음 맛보는 것이었다. 주말만 되면 미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나타나면 여지없이 텐트 주위를 얼쩡거린다. 그러면 깡통 하나 던져 주면서 또 “게라리어” 한다. 만나서 반갑다는 말인가?


중학교나 고등학교 다니는 형들한테 물어 봤다. 영어로 “게라리어” 가 무슨 말이냐고 그러나 그런 단어가 없단다 분명 미국사람한테 몇 수십 번 들은 단어인데


그 단어를 알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욕이다 “Get out of here”, 원어민 발음은 “게라리어”, 알다시피 “꺼저”다.


12살 먹은 어린애가 얼마나 불쌍하고 귀찮았으면~~~ 우리의 초라한 어린 시절이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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