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면과 하서면 이어주는 다리
1990년의 겨울, 음력설이 지나면 서른 살이 되는 해였다. 내 인생의 항로는 평온한 순풍을 탄 듯했다. 선박 감독관으로서 전문직의 기틀을 닦았고, 어머니와 할머니의 간절한 염원이었던 '아홉수 전 결혼'도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스물아홉을 넘기면 마흔이 되어야 결혼하니, 절대로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할머니의 서슬 퍼런 신신당부는 어느덧 내 무의식 속에 거부할 수 없는 명제로 자리 잡고 있었다.
맞선에서 만난 '옥니 처자' 효주와의 데이트는 낯설면서도 평온했다. 부안 읍내의 좁은 길을 걷고, 투박한 커피잔을 사이에 둔 채 우리는 조금씩 서로의 간격을 좁혀갔다. 그녀의 하얀 살결과 수줍게 드러나는 옥니를 볼 때마다, 내 마음속엔 15년 전 해창다리에서 느꼈던 그 강렬한 떨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나는 끝내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오빠, 나 기억 안 나요?" 효주의 입에서 나올 그 한마디면 모든 의문이 풀리고, 나는 기꺼이 그녀를 평생의 동반자로 맞이할 확신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효주는 침묵했고, 나 역시 침묵했다. 그 고요한 침묵 사이에는 링링에 대한 부채감과, 새로운 인연이 가져올지 모를 막연한 두려움이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우리를 잇는 상징은 단연 해창다리였다. 이 다리는 내 고향 변산면 대항리 묵정부락과 효주가 사는 하서면 백련리 해창마을을 연결하는 거대한 경계선이었다. 내변산 깊은 골짜기에서 시작되어 직소폭포를 거쳐 내려오는 저 청정하고 맑은 강물은, 이 다리 아래에서 비로소 바다와 만날 준비를 한다. 나룻배가 간신히 들어올 수 있는 그 조그만 강물 위로 놓인 해창다리는, 어찌 보면 견우와 직녀를 잇는 오작교와도 같았다. 변산의 사내와 하서의 처녀를 잇는 운명의 길목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오작교 아래에는 핏빛 전설이 흐르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다리를 놓을 때 군막동에 살던 한 처자가 굳지 않은 콘크리트 속으로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 비용을 아끼기 위해 시신조차 수습하지 않고 그대로 묻어버렸다는 일본 놈들의 잔혹함은, 안개 낀 날이면 다리 밑에서 들려오는 '쿵, 쿵' 하는 여인의 원혼 섞인 울음소리로 변해 떠돌았다.
행복한 결말로 치닫던 우리의 혼사에 거대한 암초가 나타난 것은 순식간이었다. 결혼 날짜를 잡기 전, 어머니는 모장동의 용하다는 당골래미(무당)를 찾았다.
"용(64년생)하고 쥐(60년생)가 만났으니 사주팔자는 기가 막히게 맞는구나. 찰떡궁합이야!"
어머니의 기쁜 전갈에 나 역시 안도했다. 미신 따위 믿지 않는다고 자부했지만, 어른들이 저리 좋아하시니 다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며칠 뒤, 할머니를 따로 불러낸 당골래미의 한마디가 모든 것을 뒤흔들었다.
"사주가 맞으면 뭐 하나? 이 결혼은 깨질 운명이야. 해창다리의 저주가 씌었어!"
그 말은 비수처럼 내 가슴에 꽂혔다. 15년 전, 할머니의 금기를 깨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건져 올린 것이 세 명의 소녀가 아니라, 어쩌면 그 원한 서린 처녀의 영혼이었을까? 내가 효주를 살린 것이 아니라, 해창다리의 저주가 효주라는 얼굴을 하고 나를 찾아온 것일까?
할머니는 깊은 시름에 빠졌고, 어머니는 애써 부인했지만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양가 어른들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급격히 차가워졌다. 효주와 나 사이에도 형용할 수 없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이제 효주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녀의 고운 피부와 귀여운 옥니가, 이제는 수줍은 처녀의 모습이 아니라 차가운 콘크리트 속에 갇힌 여인의 원한 섞인 미소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 인생은 언제나 물가에서 소용돌이쳤다. 물가에서 태어나 잔뼈가 굵었고, 물가에서 링링을 잃었으며, 물가에서 선주 감독관이라는 천직을 얻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해창다리라는 물가에서 건져 올린 인연을 맞이하고 있다. 외할머니의 "물가를 조심하라"던 점괘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물가는 내게 삶을 주었지만, 동시에 죽음과 저주의 그림자를 함께 던졌다.
우리는 이 장벽을 넘을 수 있을까? 해창다리의 저주를 이겨내고 새로운 항로를 개척할 수 있을까? 짠 내 나는 바다 향기로 시작된 내 유년의 기억은, 이제 해창다리의 원한 서린 울음소리로 뒤덮이고 있었다. 내 운명의 항해는, 다시 한번 거대한 폭풍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