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에 닭서리

변산반도 7080세대

by 최경열

❄️ 변산반도 눈꽃 속에 묻힌 '그 겨울의 닭서리'

우리 고향 변산반도는 유난히 눈이 사납게 내리는 곳이다. 산과 바다가 맞닿은 지형 탓인지, 겨울이면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하얀 솜덩이들이 쏟아지곤 했다. 이맘때면 코끝 찡한 바닷바람과 함께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지금이야 '절도죄'로 쇠고랑을 찰 일이지만, 그 시절엔 배고픈 청춘들의 통과의례 같았던 '닭서리'의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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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당 모의: 대나무 숲속의 비밀 본부

때는 45년 전, 무서울 것 없던 열아홉 살 무렵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우리 '5인조 행동대(나, 원호, 병화, 기곤, 상식)'는 기곤이네 공부방에 모여 머리를 맞댔다.

그 방은 안채와 떨어진 외딴 흙집이었는데, 사방이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눈보라를 막아주는 천혜의 요새였다. 커다란 무쇠솥에선 소여물이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끓고 있었고, 윗목엔 겨울철 주식인 고구마가 수숫대 칸막이 너머로 가득했다. 외양간의 새끼 밴 암소만이 되새김질을 하며 우리의 은밀한 모의를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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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보전: 십 리 밖 '타겟'을 설정하라

닭서리에도 엄연한 '상도의'와 '전략'이 있었다.

제1원칙: 우리 동네 대항리에서 최소 5km(십 리)는 벗어날 것. 가까운 곳은 죄다 일가친척이라 들통나기 십상이다.

제2원칙: 개가 많은 집과 가난한 집은 피할 것. 제3원칙: 달이 뜨지 않고 눈보라가 치는 칠흑 같은 밤을 택할 것. 우리는 지남리, 고사포, 띠빠똥 등 후보지를 물색하다가 옹고골의 어느 외진 초가집을 낙점했다. 낮에 미리 답사까지 마친 치밀한 작전이었다.


결전의 밤: 개장사 잠바와 신의 손

밤 10시, 우리는 귀신이 나온다는 으스스한 마웅개 산길을 넘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루 밑엔 영리하기로 소문난 똥개 한 마리가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비밀 병기' 원호가 있었다.

원호는 미리 빌려온 '개장사 점바'를 걸치고 위풍당당하게 나섰다. 개장사 특유의 노린내(?) 때문이었을까. 컹컹 짖어대던 똥개는 원호를 보자마자 꼬리를 내리고 오줌을 지리며 마루 밑으로 숨어버렸다.

그 틈을 타 '닭 잡는 선수' 병화가 닭장으로 침투했다. 뜨끈한 손으로 날갯죽지를 잡아 급소를 제압하는 병화의 기술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중간에 수탉 한 마리가 "꼬꼬댁!"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주인집 아저씨가 담배를 피우러 나오는 위기도 있었지만, 우리는 탱자나무 밑에서 숨을 죽이며 기어코 마대 자루에 큼지막한 토종닭 세 마리를 담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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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처리: 완전 범죄와 암소의 눈등

돌아오는 발걸음은 솜털처럼 가벼웠다. 상식이가 미리 끓여놓은 가마솥 물에 닭을 삶았다. 증거를 없애기 위해 털과 내장, 뼈다귀는 아궁이 불속으로 던져 태워버렸다.

뽀얗게 우러난 국물에 소금과 마늘을 넣고 삶은 토종닭, 그리고 지서리 양조장에서 받아온 막걸리 한 사발! 그 맛은 세상 어느 산해진미와도 바꿀 수 없었다.

하지만 복병은 따로 있었다. 바로 외양간의 암소였다. 초식동물인 소는 가마솥에 기름기만 돌아도 여물을 먹지 않는다. 소가 밥을 굶으면 기곤이 아버님의 의심을 피할 수 없는 법. 우리는 소 콧구멍에 깨소금을 섞은 쌀겨를 쑤셔 박아 냄새를 마비시키는 '신기술'까지 동원하며 완전 범죄를 자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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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응보: 도둑맞은 도둑놈

며칠 뒤, 새벽부터 우리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셨다. "허 참, 어떤 놈들이 우리 집 닭 두 마리랑 토끼를 홀랑 채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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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나, 닭서리 전문가인 우리 집이 털린 것이다. 반경 5km 밖 지남리나 띠빠똥 녀석들의 소행임이 틀림없었다.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누굴 탓하랴. 인과응보요, 사필귀정이었다.

후기: "근데 영배야,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우리 집 닭 서리해 간 놈... 너 아니냐? 공소시효는 지났으니 이제라도 자수하고 술 한 잔 사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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