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경열 Dec 20. 2023

8화 간첩신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1970년경 국민학교 다닐 때다. 대항리에서 학교가 있는 면소제지까지는 5km다. 등하굣길이 10리가 넘는 길이였다. 자동차가 다니는 신장로는 덜컹거리는 비포장 도로이다. 완행버스도 듬성듬성 하루에 4번 다녔다.

 기성회비도 내지 못하는 형편에 버스를 타고 통학하는 것은 사치였다. 어쩌다 소달구지라도 만나 태워주면 큰 행운이고 비가 오는 날 마음씨 좋은 운전기사를 만나면 공짜 버스를 탈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코 흘리는 어린애가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 좁은 길은 위험하고 험난했지만 초등 6년 동안 개근상을 받은 학생들은 자랑거리가  안되었다.


우리의 등하굣길은 계절과 날씨를 감안 그때마다 편리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꼬불꼬불 산길은 1km 정도 더 길지만 계절에 상관없이 인기가 좋았다. 이 길은 산골짜기 마을을 4개를 지나야 한다. 마웅개, 자미동, 옹기골, 지동리를 지나야 학교가 있는 지서리에 도착한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듯했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비탈길 옆 밭에는 노랑 유채꽃이 피기 시작하였다. 꽃이 피기 전 연한 줄기를 벗겨 먹으면 달짝지근하여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 진달래가 피면 입에 물고 맛을 본다. 노랗게 익은 보리를 따다 바위 밑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살짝 구워서 양 손바닥으로 문지르면 껍질이 벗겨지고 파란 알맹이만 나온다. 이것도 우리에게는 별미였다. 손바닥이 검게 변하고 주둥이도 검은 고양이가 되었다. 여름에는 잘 익은 개구리참외를 주인 몰래 서리해서 먹을 수 있었다. 참외 밭에 숨겨진 잘 익은 참외는 먼저 보는 게 임자였다. 그만큼 시골 인심이 후했다. 주인은 누구 애들인지 다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들끼리 농번기 때 품앗이를 해 줬기 때문에 애교로 봐줬다. 

 가을에는 산비탈에 오르면 산딸기. 꾸지뽕, 머루, 달래 등 눈만 크게 뜨면 지천에 먹을 것이 널려 있었다. 모두 보약이었다. 지금은 당뇨에 좋고 고혈압에 좋다고 뿌리째 뽑아 멸종 위기에 놓여있다. 겨울 산길을 걷다 보면 귀도 꽁꽁 손도 꽁꽁 얼어있었다. 털장갑과 따듯한 털옷한벌 입는 게 소원이었다. 추위를 피해 산기슭에서 모닥풀을 피워놓고 얼었던 손과 발을 녹이다가 예상 못하는 겨울 회오리바람에 산불은 내어 파출소에도 갔었다. 소년원에 갈뻔했다. 


며칠 후 파출소를 또 갔다. 이번에는 착한 일이다. 간첩신고를 하였다. 학교에서는 수상한 사람을 보면 신고하라고 귀에 따갑도록 교육을 받았다. "반공방첩"이라고 대기업 광고 간판처럼 마을에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현수막을 설치해 놨다. 반공방첩은 마을 수호신이 되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외치면서 무장공비에게 살해당한 이승복 군이 우리의 우상이 되어 학교마다 동상이 세워졌다. 도덕(바른생활) 교과서에도 자세히 실렸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죽은 안중근의사와 유관순열사와 동급으로 영웅이 되었다. 현재 60~70 나이대를 6.25 전쟁이 막 끝날 때 태어 난 베이비부머라고 부른다. 폐허가 된 대한민국에서 어렵게 자랐다.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지만 전쟁보다 더 심한 조국에 대한 애국자 교육을 받았다. 한글을 띠기 전에 국민교육헌장을 무속인이 주술 외우듯 줄줄 외웠다. "우리는 민족중흥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50년이 지났어도 다른 것은 못 외우더라도 국민교육헌장, 애국가 4절, 새마을노래만큼은 머릿속에 주술처럼 지금까지 남아있다. 공부를 잘하던 못하던 머리가 좋던 나쁘던 상관없이 전교생이 줄줄 외웠다. 어떻게 암기 교육을 시켰는지 지금도 신기할 따름이다.

간첩신고 포상금은 500만 원이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로또 1등 당첨금액이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수상한 사람을 신고해서 포상금을 받아 가난한 집 아들에서 부잣집 아들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학교 가는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누렇게 익어 가는 보리밭에서 종달새가 울고 있었다. 알을 품고 있던 암꿩 한 마리가 푸다닥하면서 하늘로 날아간다. 옹기골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는 시냇물 소리가 들려왔다. 책보를 어깨에 메고 팔을 돌리면서 노래를 불렀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내 꿈은 부자가 되는 것이다. 로또와 같은 수상한 사람이 산타 할아버지처럼 나타나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면 꿈은 이루어진다. 산길을 걷다가 정말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내 눈을 의심하였다. 나무가 우거진 숲 속에서 이상한 복장을 한 사람이 수상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간첩일지 몰라 가까이가지 못했다. 긴장감이 돌았다. 나에게도 이런 행운이 올 줄 몰랐다.  자세히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다행히 서로 눈은 마주치지 안 했다. 그래도 안심할 수 없었다. 다른 곳으로 도망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제발 거기에 그대로 있길 바라면서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학교는 뒷전이고 파출소에 헐레벌떡 도착하여 옹기골에 수상한 사람이 있다고 신고를 하였다. 옹기골은 빨치산이 기거하기 좋은 장소이며 6.25 전쟁 때 수많은 변산반도 주민이 끌려가 살해당했던 곳이었다. 해골바위 밑에는 유골이 발견되어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아 정글처럼 숲이 우거진 곳이다. 


변산반도는 바다와 산이 어울려 섬보다 더 섬 같은 아름다운 국립공원이다. 수려한 경치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있다. 6.25 전쟁 후 마지막 빨치산이 저항했던 곳이며, 지도에서 보듯 튀어나온 반도는 무장공비가 상륙하기 적합한 장소였다. 격포 채석강에는 60~70년대에 간첩들이 수시로 침투했던 곳이었다. 무장공비 소탕작전 때 쏘아 올린 대낮같이 밝은 조명탄을 수시로 경험했었다. 전쟁 때는 철주부대를 지휘하는 차일혁 경감이 가마골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변산반도는 전국에서도 경치가 뛰어났어도 빨치산과 간첩 때문에 각광을 받지 못하다가 빨치산 토벌에 성공하면서 이름이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다.


간첩 신고를 받은 경찰은 바로 예비군과 전투경찰과 연합하여 비상경계태세로 전환하여 무장공비 소탕작전에 돌입하였다. M1소총과 칼빈소총에 실탄을 장비하고 총구는 숲 속을 향하고 있었다. 철모를 쓴 병력은 옹기골 골짜기를 사방으로 포위하여 좁혀 나갔다. 숲 속의 긴장은 고조되어가고 있었다. 집게손가락은 방아쇠를 잡고 있어 당기면 16발의 실탄이 자동으로 발사된다. 일촉즉발이다. 멧돼지라도 출몰하면 방아쇠는 당겨진다.  긴장의 시간은 짧게 자나 갔다. 한 발의 총탄 발사 없이 무장공비를 생포하였다. 숲 속에서 손을 든 사람은 나무꾼이었다. 우리 동네 외삼촌이었다. 사람들이 꺼리는 해골바위 주위에 숲이 울창하여 나무채취하기가 수월했다. 외삼촌은 쉬운 길을 선택했다가 졸지에 간첩으로 몰리게 되었다. 

다음날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나는 영웅이 되었다. 간첩이 아니라 로또는 날아갔지만 반공정신이 투철하다고 부안경찰서장에게 상장을 수여받았다. 상품으로 노트 한 묶음과 연필 한 타스를 탔다. 상장은 가족사진과 함께 안방에 걸어 놨다. 애국열사 이승복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때 그 시절 9화에 계속>

사진캡처: 순천 드라마 세트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