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L124. 여행, 기꺼이 이방인

Stranger than Paradise (Jim Jarmusch, 19

by Mira

짐 자무쉬의 영화 한 장면.

흑백 화면 속, 황량한 도시에 세 명의 인물이 서 있다.

서로 대화를 나누지만, 통하는 것도 없고

풍경은 낯설고, 표정은 공허하다.


그 장면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여행이란 게 꼭 그렇다는 생각을 했다.

익숙한 곳을 떠나면 누구나 이방인이 된다.

기꺼이 낯섦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비로소 여행이 시작된다.


나는 언제나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동경했다.

대학에 진학한 이유도 사실은 마음껏 여행을 하고 싶어서였다.


익숙한 생활환경을 벗어나

낯선 도시에서 이방인이 되는 기분.

나는 그게 좋았다.


외국에서 문 손잡이나 변기 레버, 열쇠 같은

사소한 것들 앞에서 순간 당황해 본 적 있는가?

일상이라면 무의식적으로 할 행동이,

낯선 곳에서는 버퍼링이 걸린다.

나는 바로 그런 순간 때문에 여행을 사랑한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도

여행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다시는 만날 일 없는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대하는가?

그 순간을 보면

내 인격의 바닥이 드러난다.


정말 부끄러운 기억을 고백하자면,

나도 나에게 놀란 순간이 있었다.


열아홉 살에 혼자 떠난 유럽 배낭여행.

무려 1991년의 일이다.


여행의 설렘보다 고달픔이 더 크게 다가왔던 중간 일정. 나는 로마 근처의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웅장한 대도시만 보고 나니,

외곽의 작은 도시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작은 도시의 호텔은 이미 예약이 다 찼고,

유스호스텔조차 없는 곳이었다.

깊어가는 가을, 유럽의 밤공기는 차가웠다.

길에서 노숙이라도 하면

곧장 기침감기에 몸살은 불 보듯 뻔했다.


숙소를 찾다 지쳐

나는 어느 건물 계단에 주저앉아 멍하니 있었다. 알고 보니 음악축제가 있는 늦가을이 여기서는 핫시즌이었다.


그때 동네 꼬마들이 몰려와

동양인인 내가 신기했는지

작은 손가락으로 자기 눈을 찢으며 나를 놀렸다.


유럽에서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려니 했다.

화낼 기운도, 말릴 힘도 없었다.


그런데 그 건물로 들어가던

금발머리 소녀가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는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너, 무슨 문제 있니?”


나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잘 곳이 없다고 사정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흔쾌히 자기 집 소파를 내어주겠다고 했다.

그녀의 집은 요즘 말로 하자면 셰어하우스였다.

독일에서 유학 온 그녀와, 이탈리아·영국에서 온 남녀 룸메이트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당시 감각으로는 많이 당황스러운 구성이었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나에게 중요한 건 단 하나,

샤워를 하고 푹신한 침대에서 따뜻하게 잘 수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룸메이트들과 인사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던 순간, 테이블 위에 체리가 가득한 바구니를 보았다.


“두 알쯤은 괜찮겠지…”

그런데 먹다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체리 꼭지가

어느새 테이블 위에 한가득 쌓였다.


그때의 내 모습을 떠올리면,

무려 30년이 지났어도 얼굴이 빨개진다.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에게

그녀는 친절을 베풀었는데,

나는 허락도 없이 그녀의 체리를 다 먹어버렸다.


떠날 때, 한국에서 챙겨간 작은 복주머니 선물을 두고 왔다. 나는 그것을 ‘포춘 파우치’라고 소개했다.

정말 그녀의 인생에 복이 넘쳐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런 작은 선물은

여행 중 누군가의 호의나 도움을 받으면 드리려고

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

한 열 개쯤 챙겨 갔는데,

여행 중반이 되기도 전에 거의 다 썼다.


그만큼 나는 누군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소심쟁이였던 내가

망설임 없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일이

참 많았다.


그땐 여행 앱도, 구글 지도도 없는

아날로그 시절이었다.


길을 잃으면

무조건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야 했다.

그때 배운 요령이 있다.


누군가에게 말을 걸거나 도움을 요청할 때는

한껏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가야 한다는 것.

그래야 상대방이 놀라거나 방어적이지 않게 된다.


그 첫 배낭여행을 통해

나에게 남은 단어는 하나였다.

Open Mind.


내가 세상에 마음을 열고 다가가면

꼭 누군가가 나를 도와준다는 걸 배웠다.


기차 안에서 감기몸살로 끙끙 앓고 있을 때도 그랬다.

한 이탈리아 아줌마가 나를 눕게 해 주고,

다른 승객들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내 자리를 지켜주었다.

그때 들리던 그녀의 목소리와

강한 악센트가 아직도 귀에 선하다.


그런 경험이 내 삶에 하나의 매뉴얼을 더했다.

낯선 이에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언제나 친절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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